모두를 파괴할 힘
이경희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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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읽었던 [테세우스의 배]를 쓴 이경희 작가의 소설이다. 혹시 그 작품과 연결되는 것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읽다보니 익숙한 이름이 하나 나왔다. 바로 ‘트라이 플래닛‘ 이라는 대기업. 저 작품의 주인공이었던 석진환이 회장 자리에 앉아있는 군수산업으로 성장한 엄청난 대기업이었다. 이 소설에서도 그 영향력이 막강한 것 같은 느낌이다. 다만 몇차례 이름이 언급될 뿐, 핵심 이야기에 얽혀있지는 않았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맨 뒤쪽 작가의 말 바로 앞에 있는 짧은 부록 ‘데비안트 능력에 대해‘ 부분을 잘 숙지해야 한다. 그리고 맨 앞에 나와있는 등장인물 페이지도. 책을 읽을 때마다 오랜 습관 때문에 앞, 뒤 양 표지와 책 날개 그리고 판권 면을 가장 먼저 읽은 후, 맨 뒤쪽 작가의 말 혹은 옮긴이 후기, 추천사나 해설 등을 먼저 읽는 편이다. 이번 작가의 말에는 그 맨 앞에 굵은 글씨로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경고가 있었다. ˝세상에는 책을 펼치자마자 맨뒤로 달려와 후기부터 읽어대는 폭주족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경고. 이 경고에서 멈추고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 책을 다 읽고 이 후기로 돌아오라는 얘기다. 나와 같은 사람들을 폭주족 같은 부류라고 지칭한 것이 흥미롭다. 이렇게 후기를 먼저 읽는 것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스포일러 경고와 같은 효과일 것이다. 나는 스포일러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소설도 영화도. 그래서 언젠가부터 맨 앞에 스포일러 경고를 적는 것이 유행하는 상황이 좀 우스웠다. 원래 어떤 이야기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내용을 다룰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게 소설이던 영화던 그걸 쓰는 건 당연히 내용 중 일부를 드러내는 행위다. 당연한 걸 굳이 빨간 글씨로 그리고 굵은 글씨로 경고까지 해야하나?

다시 강조하지만,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꼭 사전에 복잡하기만 한 ‘데비안트‘ 라는 존재와 그들의 기이한 능력들을 꼭 제대로 숙지해야 한다. 점퍼, 텔레파스, 키넨시스, 보이안트 라는 네 가지 초능력을 지닌 데비안트의 유형과 그 각각의 유형이 주로 사용하는 능력을 간단히 소개한 내용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제대로 따라가기 어렵다.

일단 데비안트 라는 용어부터 낯설고 입에 붙지 않아서 책을 읽는 내내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의 뮤턴트와 비슷한 느낌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설명에도 뮤턴트 혹은 코리안 프릭 등 멸칭 대신 사용하는 공식명칭이라고 나와있다. 주로 2020년대 한국을 중심으로 많이 발현되었다고 했다. 이런 설정은 이 소설보다 더 이후에 출간한 [SF 보다 vol.2 벽]에 실린 첫 단편 소설 [아레나]의 설정과 거의 비슷하다. 듀나의 아레나에서도 주로 한국에서만 초능력자들이 나타난다는 설정이었다. 이경희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듀나의 소설 두 개를 언급하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 둘을 읽어보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런 설정도 영향을 받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엑스맨 1편을 보았을 때 소수자를 억압하는 사회를 잘 드러낸 영화라고 생각했었다. 영화에도 나오는 나치 독일의 유태인에 대한 억압, 일본 제국이 저지른 조선인에 대한 억압 등. 이 이야기에서도 데비안트 능력이 발현되는 청소년들은 수용소 같은 곳에 갇혀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나는 소록도를 떠올렸다. 일제가 한센인들을 격리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지옥. 최근 거의 모든 이슈를 삼켜버렸던 하영이라는 여배우가 자랑스럽게 언급했던 그 소록도. 그리고 예전에 소록도에서 읽었던 당시 학생들의 시집들과 일기들을 통해 느꼈던 그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 소설의 초반에 주인공 화경이가 갇혀 지냈던 그 수용소 같은 학교 생활을 읽으며 소록도의 희생자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엑스맨도 그렇고 이 소설도 평범한 인간과 다른 어떤 특별한 존재가 나타난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차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다양한 소수자 차별의 문제까지 연결한다. 성별, 인종, 성 정체성, 장애 여부, 종교, 신념, 이념 등등. 등장인물들 중 일부는 데비안드이자 성 소수자이며 흑인이었다. 주인공 일행 다수는 여성이자 데비안트였다. 데비안트이지만 장애를 가진 인물들도 나온다. 이 사회에서 특정 개인은 언제나 복합적으로 차별의 굴레에 처해있음을 잘 드러내는 지점이다. 예컨대 나는 중년 남성으로 사회적으로 절대 약자로 볼 수 없지만, 수도권이 아닌 지방 출신이라는 차별을 당해왔고, 경제적 가난이라는 구조적 차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엑스맨이 아주 다양한 초능력들을 보여주는 반면, 여기서는 네 가지 범주로 묶이는 한정적인 능력들이 발현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일단 점프. 이건 아마도 영화 [점퍼]에서 개념을 가져온 것 같다. 순간이동이나 텔레포트 라는 단어 대신 점프 라는 단어를 쓴 것 부터 그렇고, 작중 점퍼들이 활약하는 모습들도 이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음은 키넨시스. 부록의 설명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 능력은 염력 혹은 염동력이라 부를만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말에 언급된 영화 [푸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능력인 것 같다. 키넨시스의 다양한 능력들 중에 스윙은 스파이더맨에게서 따왔음을 암시해놓았다. 그리고 파이어스타터 라는 개념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중 등장인물인 리웨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비밀스러운 인물이라 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보이안트는 천리안 능력과 투시 능력이 결합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제일 난해한 능력이 텔레파스다. 부록의 설명도 난해하고 모호하며, 작중 등장하는 주요 텔레파스들의 능력도 잘 드러나지 않아서 이 이야기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 능력이다.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인 세 명의 여성이 모두 이 비밀스러운 능력을 사용한다. 지금까지 다른 작품들에서 접했던 텔레파시 능력은 주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한 사람 혹은 여러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이 작품의 텔레파스는 다수의 사람들을 연결시킨다는 허브 능력과 상대와 심리적 매듭을 묶는다는 바인드 능력 그리고 상대의 기억을 읽고 지우는 능력 등이 있고 심지어 상대를 조종하기도 한다. 이 세계관에서 가장 강력한 데비안트는 모두 텔레파스로 묘사된다. 제1차 텔레파스 전쟁의 팔레스타인 쌍둥이와 제2차 텔레파스 전쟁의 홍콩 출신 아이리스 쳉이 모두 아주 강력한 텔레파스였다. 그리고 주인공 신화경 때문에 제3차 텔레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구체적으로는 다를 수 있겠지만, 아주 단순하게 이해한다면 강력한 텔레파스는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일종의 정신지배자로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데비안트들이 손을 잡거나, 신체접촉을 통해 서로 다른 능력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거나 새로운 능력을 발현한다는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여기서부터 명확하게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생기는 것 같다.

등장인물들이 정말 많아서 인물들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이번 소설에서 작가는 여성 등장인물들에게 많은 신경을 썼다. 일단 절대적으로 여성들이 많다. 주인공 일행 중 남성은 하태빈이 유일한데, 나는 중반까지 이 인물도 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중간에 수염 묘사가 있어서 남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화경의 엄마 동료들 중에서도 장 폴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이다. 가장 악랄한 악역처럼 그려지는 급진주의 데비안트 단체 ‘여성들의 목소리‘ 주요인물들도 단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이다. 특히 무니야 알 바크르는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또 극초반과 극후반에 등장하는 비밀스러운 존재 최서윤도 전체 이야기를 꿰어 맞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악역 여성이다.

이 많은 여성 등장인물 중에 가장 인상적인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마리야 사무체예바 이다. 아주 짧게 등장하여 비중이 별로 없는 인물이지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이리스 쳉 역시 인상적인 인물이지만, 마리야의 활약이 더 멋지게 느껴졌다.

주인공 3인방으로 칭할 수 있는 신화경, 조유영, 리웨이 이 세 여성은 좀 많이 답답하다. 이 세 명의 캐릭터가 이 소설의 가장 큰 약점이자 문제라고 느낀다. 이건 이 소설의 구조와 시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작가가 다른 구조와 시점을 사용했다면 훨씬 더 흥미롭게 그려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거슬리는 부분이 바로 시점이다. 맨 첫장면은 3인칭 시점으로 시작한다. 이 부분이 가장 자연스러운 서술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1인칭 시점으로 서술 주체가 바뀐다. 부자연스러웠다. 바로 앞의 시작 부분이 훨씬 자연스럽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그 부자연스러움이 더 잘 느껴졌다. 이거 등장인물이 엄청 많은데 매번 서술자를 바꿔가며 1인칭으로 가려나 하고 우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참 지나고 나니 다시 2인칭으로 바뀌었다. 누구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서술자가 너, 바로 주인공 신화경 그리고 독자에게 말하는 방식이었다. 이건 앞서 1인칭 보다 훨씬 더 부자연스러웠다. 2인칭이라면 서술자가 계속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설명해야 한다. 주인공 옆에 그런 인물이 있었나? 아니, 주인공의 어린시절을 왜 2인칭으로 서술하지? 주인공 곁에 유영이 등장하는 것 조차 한참 후인데, 그보다 더 과거를 과연 누가 주인공에게 설명할 수 있지? 이건 일종의 오류이고 잘못된 서술 방식이라는 거부감이 들었다. 이후 다시 3인칭과 1인칭이 나오기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2인칭으로 서술한다.

이경희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내‘가 ‘너‘에게 하는 이야기다. 제가, 당신들에게.˝ 라고 적었다. 작가가 굳이 가장 중요한 시점의 많은 분량을 2인칭으로 고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작가의 의도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것이 문제이자 패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마지막 장면의 반전 효과를 노리고 2인칭 시점을 사용하며, 그 서술자가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도록 정보를 차단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조유영의 능력과 리웨이의 능력이 주인공 화경의 능력과 엮이며 뭐가 뭔지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전개를 그려낸다. 게다가 작가의 말 이후에는 쿠키 라고 결말까지 보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에 대해 리웨이 시점을 추가로 적어놓았다. 마블 시리즈 덕분에 쿠키 영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과 그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 이해했는데, 소설에도 쿠키 분량을 넣다니! 참신한 시도이기는 하지만, 거부감이 들었다.

이 소설의 가장 안 좋은 점은 세 개 정도로 꼽을 수 있다. 첫번째는 2인칭의 과거 시점이자, 인터넷 방송 대본 및 댓글 형식을 차용한 2장의 서술 방식이다. 일단 너무 산만하고 쓸데없이 분량을 키운 방식이다. 이 책이 이렇게 두꺼운 이유는 여기서 내용에 비해 공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본의 형태로 서술한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댓글들을 쓸데없이 너무 많이 달았다는 생각도 든다. 작가의 말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나는 작가의 욕심이 과했다고 본다.

두번째는 해방구였던 예카테린부르크가 함락되는 날의 최종 묘사가 너무 모호하다는 점이다. 작가가 강조하는 부분이 강력한 텔레파스가 폭주하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점이라고 보인다. 앞서 팔레스타인의 쌍둥이와 아이리스 쳉의 전례가 있었듯이. 그러면 이게 왜 어떻게 위험한지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말에 에반게리온을 언급했던데, 가장 중요한 폭주의 순간을 화경에게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생각들을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도록 수많은 글씨들을 중첩되게 겹쳐 인쇄한 방식으로 연출한 것이 에반게리온의 결말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라는 질문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문제는 주인공 3인방의 관계와 능력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은 점이다. 유영은 조용하고 튀지 않으려던 화경이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수용소와 같은 학교를 지배하고 있던 존재임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인 것처럼 나온다. 그래서 유영은 이후에 마치 도장깨기 하듯 전국의 수용소와 같은 학교들을 해방하러 다닌다. 유영과 화경의 관계와 애증은 그래도 좀 드러나는 편이다. 하지만 일부러 꽁꽁 감춰두었던 리웨이와 화경 그리고 유영이 얽힌 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화경의 엄마가 분신할 때 불은 붙인 존재가 리웨이임을 밝히며 리웨이가 왜 화경에게 집착하는지 그 단서는 보여줬지만, 본질적으로 리웨이가 화경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화경을 무조건 보호하려는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게다가 예카테린부르크 함락 시점에서 화경을 죽이려 했던 리웨이가 나중에 달에서 다시 살리려고 하는 것도 단순히 의뢰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또 이 소설의 시작시점에서 화경이 느낀 명백한 살의는 리웨이가 거의 확실한데, 리웨이가 왜 이 우주선의 모두를 죽이려 한 것인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왜 유영의 능력인 몸을 바꾸는 것을 리웨이가 쓸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혹시 리웨이의 몸은 유영이 장악한 상태였던 걸까? 그래서 사실 죽은 것은 유영이 아니라 리웨이였던 걸까? 이런 부분들은 단순히 난해하다기 보다는 작가가 확실하게 드러냈어야 할 부분들을 독자의 상상에 맡긴 것이 아닌가 싶다.

이외에도 사소한 단점들이 몇가지 눈에 띄지만, 글에 반해 장점들도 명확한 소설이다. 일단 68혁명으로부터 68년 후를 시간 배경으로 정한 것에서 부터 알 수 있듯이 역사상 존재했던 대표적인 혁명을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혁명의 한가운데 해방구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담아내려고 애쓴 것이 인상적이다. 파리 꼬뮌, 68혁명,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홍콩 민주화 운동,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독립을 이끈 발트의 길 비폭력 저항운동 등이 이 해방구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살바도르 아옌데 등 남미의 혁명가들과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을 떠올릴 수 있는 상황들도 인상적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바꾸는 일을 주로 하는 활동가로서 전 지구적 혁명이라는 이야기는 언제나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화경이라는 엄청난 능력자가 만든 예카테린부르크 라는 해방구가 너무나도 멋진 무대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혁명의 한 가운데에서 해방구를 지키려 애쓰는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존재들을 떠올렸다. 한편으로 선의로만 가득한 존재가 필연적으로 부조리한 인간의 본능을 마주하는 상황도 인상적이었다. ˝구제하지 못할 모순덩어리들. 독재에 맞서는 숭고한 존재인 동시에 누군가를 성적으로 음행하는 존재며,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워왔으면서도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존재며, 퀴어 퍼레이드를 주관하면서도 인종이 다른 누군가를 우스개 삼는 존재며, 전쟁 난민을 포용하는 일에 기부금을 내면서도 타국에서 온 소녀의 몸을 돈으로 희롱하는 존재며, 자신의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누군가의 가족을 파괴하는 존재며......˝

완벽한 인간이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숭고한 영웅이자 혁명가라고 해도 인간적인 결함들은 존재할 것이다. 그런 혁명가들이 아무리 선의로 해방구를 열었다고 해도 그 안에서는 온갖 부조리한 더러운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혁명은 너무나도 가슴 뛰는, 매력적인 단어이지만 그 혁명의 이면과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그리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지도 모른다. 국민들이 촛불을 통해 내란 수괴를 몰아냈지만, 그 다음 대통령은 촛불과는 관계없이 기득권의 편에 서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글을 마치자. 소설을 읽으며 너무 오글거리는 장면들이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를 점령한 직후 노래를 이어부르는 장면이다. 앞서 언급한 발트3국 독립을 이끈 당시에 불렀던 노래라던가 프랑스 국가 라던가 혁명과 관려한 외국 노래들을 이어부르다가 한국인인 주인공 일행들로 순서가 이어지자 처음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더니 그 다음에는 소녀시대의 노래들을 부르는 장면이 나왔다. 시간 배경은 1968년으로부터 68년 후라고 했으니, 2036년이다. 2036년의 10대들은 여전히 소녀시대 노래를 듣고 부를 것인가? 이화여대 시위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다고 들었고, 이번 윤석열 탄핵 시위에서 소녀시대 뿐 아니라 여러 아이돌들의 노래가 불렸다고 들었다. 그래서 작가가 소녀시대의 노래들을 사용했으리라 본다. 하지만 뭔가 어색하고 오글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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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 3년


탈핵신문 기사를 읽고 오늘로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 3주년이 되었음을 알았다.

해당 기사 보러 가기: http://www.nonukes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12048


기사에 따르면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던 2023년 8월 당시 약 134만톤의 오염수가 저장되어 있었고, 3년 동안 16만 7천톤을 버렸지만, 그 사이에 약 7만톤의 새 오염수가 발생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후쿠시마에서 수소폭발을 일으킨 발전소 4기 모두 데브리 라고 부르는 녹아내린 핵 연료봉 다발이 어떤 상태인지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흘러 들어가는 지하수와 온도를 낮추려고 일부러 붓고 있는 냉각수 등이 매일 끊임없이 나온다. 핵폭발 사고가 일어난 것이 2011년 3월 11일인데, 지금 2026년 8월 중순까지 공기 중으로 그리고 지하수로 그리고 오염수 방류를 통해 지속적으로 방사능이 새어 나오고 있다. 탈핵 강의를 할 때마다 반복하는 얘기인데, 아마 백여년이 더 지나도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은 이 사고를 수습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지금 이 4기의 발전소 잔해를 수습할 기술이 없는데, 사오십년 혹은 칠팔십년 지난다고 그런 기술이 금방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기사를 보니 일본의 '전국어업협동조합연합회'가 어제 "어업인과 국민의 이해를 구하지 않은 채 계속되는 ALPS 처리수 해양 방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바다에 버리는 오염수는 일본의 동쪽 바다를 통해 태평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과연 일본 국민들은 안심하고 해산물을 먹을 수 있을까?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해산물을 정말 좋아하는 나는 일본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 살고 있었다면 못 먹었을 것이다. 물론 한국도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절대 아니다. 방사능은 계속 새어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새어나올 것이다. 현재 인류는 이걸 막을 기술 자체가 없다. 꾸준히 새어 나온 수백가지 방사능 물질들은 해양 생물들에게 축적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방사능에 오염된 해양 생물들이 태평양 전체를 돌아다니게 되므로 한국에서 먹는 해산물들이 완전히 안전한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해양 생물들이 한국 어민들의 배와 그물만 피해갈 리는 없으니까.


이재명 대통령은 2023년 8월 23일 국회 앞 계단에서 열린 방사능 오염수 방류 규탄 촛불집회 자리에서 “대통령의 직무가 영토를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제일인데 대한민국의 영토와 바다를 오염시키겠다는 일본에 왜 우호적인 것이냐”라고 물었다. 하지만 본인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원전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방사능 오염이라는 현실에 대해 눈과 귀를 닫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통령에 대해 거의 기대하는 바가 없었기에 본인이 했던 말조차 안 지키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본인이 다른 정치인들을 비판할 자격은 절대 없을 것이다. 


모기


며칠 전 차에 모기가 한 마리 들어왔다. 운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팔과 다리 등 여기저기 가려운 곳이 생겨 살펴보니 방금 막 모기에 물린 상태였다. 그때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사이로 유유히 날고 있는 모기를 보았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은 모기를 잡기 위해 휘저었다. 처음 몇 번의 시도는 계속 빗나갔지만,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 중일 때 모기도 잠시 차 천장에 내려 앉은 것을 보고 얼른 손을 휘둘렀다. 감각이 있었다. 모기는 죽었고, 내 손가락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모기 피가 아니라 내 피였다.


한창 더웠던 8월 초까지는 모기를 거의 보지 못했는데, 아주 조금 기온이 떨어지자 마자 모기들이 엄청 기승을 부리는 느낌이다. 거의 매일 대여섯 곳 이상 물리는 느낌이다. 대체로는 물리고 몇 시간 지나면 크게 가렵지 않고 물린 자국이 작아지는데, 가끔 물리자 마자 긁지 않았는데도 크게 부풀어 오르면서 엄청나게 가려운 경우가 있다. 지금은 팔에 두 군데, 허벅지에 하나, 등에 하나 크게 부푼 자국들이 있다. 아무 미칠 것 같다. 참다가 도저히 안 되어서 벌레 물린 곳에 바르는 약을 사서 갖고 다니며 가려울 때마다 바르는데, 별로 효과가 없다. 가렵지만 않으면 내 피를 좀 빨아먹는 것 정도는 참아줄 만한데, 가려워도 너무 가려워서 견디기가 어렵다. 


다시 날이 더워졌다. 아마 9월 초 정도까지는 다시 폭염과 열대야가 나타날 것 같다. 가을이 오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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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8-24 2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모기는 한 여름에는 오히려 한마리도 보이지 않아요.너무 폭염이라 물 구덩이가 없어 앙을 깔수 없기 떄문이죠.오히려 태풍이 오는 9월이후 물 구덩이가 주변에 많아지면서 모기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데 근 11월까지 날라다니는 것 같아요.
그래 전 9월 이후부터 버물리를 주변에 두고 잠을 청하는데 모기 잡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그렇지요ㅜ.ㅜ

감은빛 2026-08-31 17:46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말씀처럼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11월까지 모기를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올해도 마찬가지겠죠. 요즘 거의 매일 모기 때문에 잠을 잘 못 자고 있어요.

chika 2026-08-25 1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모기는 예전 풀모기 크기의 반도 안해서 잡기도 쉽지 않아요. 가려움을 느낄 때 약을 발라도 물린 자리주위로 부풀어 오르고 다음날은 빨갛게 상처처럼 남아서 벌레물린 자국처럼 보여요. 이거 모기 알러지... 라는 것 같았어요.
주말부터 폭염이 다시 시작되니 모기도 잠시 들어간듯한데 정말 9월에 모기가 창궐할 듯요.

방사능오염은 이미 우리손을 떠난듯하고요 ㅠㅠ

감은빛 2026-08-31 17:51   좋아요 1 | URL
모기 알러지도 있군요.
최근 몇 차례 물린 곳이 정말 크게 부풀어 오르던데, 이게 알러지인지 궁금하네요.
오늘이 8월의 마지막 날. 내일부터 9월이네요.
모기가 창궐할테니 잠을 어찌 자야 하나 두렵네요.

방사능 오염이 우리 손을 떠났다고 해도 계속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향후 30년 안에 수소폭발이 일어난 4기의 발전소를 폐쇄할 거라고 장담하면서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어가겠다고 했다는데, 30년은 어림도 없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100년 안에는 손도 못 댈거라고 봅니다. 그럼 100년 동안 계속 오염수를 방류하게 둘 것인가? 이건 또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제대로 된 대통령이고 제대로 된 정부라면 국민을 위해서 일본을 향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어요. 그런 정부를 언젠가는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꼬마요정 2026-08-29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새벽에 발바닥이 물려 깼답니다. 발바닥을 무는 건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ㅠㅠ 피를 잔뜩 먹은 모기가 벽에 붙어 있어서 잡고 또 한 마리가 다리 사이를 날길래 딱 잡으려고 하는데!!! 저기 탁자 위에서 카프가 우웩우웩 토하려고 하는 거예요. 바닥으로… 모기를 포기하고 잽싸게 카프를 바닥으로 내린 뒤 다시 모기 잡으러 갔는데 사라졌어요ㅜㅜ 결국 한 마리만 잡고 토쟁이 땜에 한 마리 놓쳤죠. 근데 아침에 화장실에서 피 먹은 모기 두 마리 잡았습니다. ㅎㅎ 방사능 오염은 정말 우리 손을 떠난 듯 합니다ㅜㅜ

감은빛 2026-08-31 17:55   좋아요 1 | URL
발바닥과 손바닥 그리고 팔굼치 등은 정말 미칠 것 같아요.
하필 모기를 잡으려는 순간에 카프가 그랬군요. ㅠㅠ

저도 안방에서는 잘 안 잡히는 모기들을 화장실에서 잘 잡는 편입니다.
잡는 순간 대부분 피가 팍 터지더라구요.
안방에서 저를 물었던 놈들이 화장실에서 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요.

방사능 문제는 요 위에 치카님 댓글에 적어 놓은 답글을 참조하세요.
그냥 포기할 문제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반가움의 표현


배송 일을 하면서 간혹 아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아는 분의 집으로 배송을 가는 경우도 있고, 운전하는 중에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도 한다. 나는 평소에도 무표정인 경우가 많은데, 반가운 사람을 만났을 때 막 그렇게 반가운 표정을 짓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만난 것이 좋으니 웃기는 하지만, 그게 약간 억지 웃음처럼 활짝 웃는 표정은 아니고, 반가움의 표현 역시 그저 인사말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내가 그저 적당히 반가움을 표현할 때 상대방이 격하게 반갑다는 표현을 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다. 이건 아마 성격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정말 얼굴 표정에서부터 온 몸의 동작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사람들. 


어제 그런 분들을 두 분이나 만났다. 한 선배 활동가는 내가 일터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유리로 된 작은 방에서 회의중이었다. 나는 회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내가 챙겨야 할 것들만 얼른 챙기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회의 중이던 선배 한 분이 나를 보더니 양 손을 번쩍 들어 격하게 흔들었다. 얼굴도 활짝 웃는 모습. 그렇게까지 안 해도 그저 인사만 나눠도 서로 반갑다는 것은 전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한참 후에 일을 완전히 마치고 동네 헬스장으로 가고 있었다. 일을 마치면 한 삼사십분 가량 운동을 하고 씻기 위해 곧바로 헬스장에 가는 편이다. 한참 골목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저쪽 일방통행 길에서 천천히 다가오던 경차 하나가 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열리더니 한 여성이 큰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에 양 손을 격하게 흔들었다. 가끔 마주치는 동네 활동가 중 한 분이다. 자주 만날 때는 매주 마주치기도 했는데, 최근 몇 달은 그리 자주 만나지 못했었다. 서로 다른 일들로 바빴던 듯.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것이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반갑다고 표현할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건 성격의 영향일 것이다. 이 두 사람 외에도 늘 만나면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는 몇몇 분들을 안다. 지금도 그 분들의 그 환한 웃음과 큰 몸동작들이 눈에 보일 지경이다. 누군가 나를 반가워 해준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나도 그 순간에는 기분이 좋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누군가를 반가워하는 편이 아니라서 조금은 불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상대방이 저 사람은 별로 반가워하지 않네 하는 오해를 할까 싶기도 하고. 


근손실 이후


어제 운동하고 샤워를 마친 후 평소와 달리 탈의실에 사람이 없길래 잠시 거울로 내 몸을 관찰했다. 지난 세 달 가량은 꾸준히 운동을 열심히 했다. 7월부터는 폭염 때문에 달리기를 멈췄지만, 가끔 헬스장 트래드밀에서 달리기도 했다. 9월이 되어 날이 조금 선선해지면 다시 밖에서 달려야지. 암튼 최근에는 벤치프레스와 케틀벨 운동들을 열심히 하고 있다. 벌써 6년이 넘게 지난 교통사고 때문에 나는 긴 시간 운동을 할 수 없었고, 긴 시간 열심히 운동하며 만들어진 근육들이 사라졌다. 근손실 이후 다시 운동을 해도 되는 시점이 왔을 때 좀 열심히 운동을 했었는데, 과거만큼 효과적으로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여러모로 의욕을 잃었었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했던 몇몇 동작들을 할 정도의 근력과 유연성을 모두 잃어버렸던 영향이 컸다. 운동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제법 오랫동안 아주 간단한 맨몸 운동 수준의 가벼운 운동만 했다. 그 시기에 달리기를 좀 열심히 했고, 근력 운동은 손을 놓고 있었다.


최근 3개월 열심히 운동을 한 결과는 아직 몸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 어깨가 넓어지고 흉근이 드러나 보이는 느낌 정도. 근손실 이전에도 나는 근육의 크기가 큰 편은 아니었다. 이건 유전의 영향도 크고 또 펌핑 운동을 아예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근 선명도가 조금 좋은 편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그래도 운동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바벨 스내치, 케틀벨 스내치 등의 난이도가 조금 있는 운동들을 좋아하고 잘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근손실 이후 이런 운동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근력과 유연성을 잃었다. 흔히 3대 운동이라고 부르는 무게를 늘리는 운동들, 스쿼트,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 이런 류의 운동들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가끔 하기는 했지만, 자주 하는 운동은 아니었다는 이야기. 그래도 어려서부터 역도를 해서 흉근이 발달한 것이 내 자랑 중 하나였다. 근손실 이후로는 그런 자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 가장 열심히 하는 운동 중 하나가 벤치프레스와 인클라인 벤치프레스이다. 사라져버린 내 흉근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어제 잠시 살펴보고 과거 운동했던 경험을 토대로 잠시 생각해봤는데, 이대로 1년 정도를 열심히 운동한다면 근손실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더라도, 어느 정도 지금보다 탄탄한 토대는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1년 후 정도에는 과거에 좋아했었던 스내치 운동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지금 다니는 헬스장이 집에서 가깝고 깨끗하고 다 좋은데, 프리웨이트 공간이 좀 애매하다는 점이다.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닌데, 이용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게다가 퍼스널 트레이닝, 그러니까 트레이너가 붙어서 1대1 교육을 하는 이용자들이 주로 그런 공간들을 쓰고 있어서 빈 프리웨이트 공간을 쓸 기회가 거의 없다. 게다가 빈 바벨도 부족하다. 그래서 대체로 본 운동으로 벤치프레스와 간단한 덤벨 운동들을 하고 정리 운동으로 케틀벨 운동을 하고 끝내는 편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체력이 좋아지면 점점 더 다양한 운동을 시도하고, 좀 더 효율적으로 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아니면 일 마치고 바로 가지 않고, 좀 더 사람들이 없는 시간대를 찾아본다던가 해야지.


쓰고 싶은 말들은 좀 더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읽고 싶은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 그리고 쓰고 싶은 글들과 써야 하는 글들이 있는데, 언제나 시간은 부족하다. 물론 좀 더 부지런해지거나, 좀 더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면 좋겠지만. 이것도 여름이 가고 조금 선선해지면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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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8-20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환한 웃음과 큰 동작으로 맞이하는 분들은 타고난 성향인 것 같아요. 후천적 노력으로 극복하기 힘든 천성이죠.

감은빛 2026-08-31 17:58   좋아요 0 | URL
천성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아무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26-08-30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손실을 예방하기 위해 아침에 계란을 먹으라는 글을 신문에서 보고 실천하고 있어요. 여기서 포인트는 아침에 먹으라는 것. 아침에 미리 단백질을 섭취해 놔야 한다는 것, 이에요.^^

감은빛 2026-08-31 18:00   좋아요 0 | URL
나이 들수록 단백질을 잘 챙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더라구요.
아침에 계란을 먹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거의 평생 아침을 안 먹고 살아서 상관없지만,
아침을 챙겨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샐러드에 계란과 견과류를 곁들여 먹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어제 낮에 피씨로 브런치에 썼던 글을 하나 옮기고 저녁에 긴 회의에 참여했다. 밤 늦게 해당 글을 북플에서 확인하고 싶어서 들어갔는데, 갑자기 다시 로그인을 하라고 나왔다. 로그인을 하고 보니 북플 앱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나중에 계속 쓰다보면 다시 익숙해지겠지만, 지금은 메뉴가 완전히 바뀌어 무척 불편하다. 12시가 지나서 늘 그렇듯 ‘지난 오늘‘ 게시판을 찾아보고 싶었는데 메뉴의 포맷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 있어서 한참동안 못 찾았다. 나중에서야 결국 찾아냈다. 뭔가 더 좋아졌다는 느낌은 없고, 그냥 불편해졌다는 느낌만 든다.

닥터스

지난 오늘 메뉴에서 과거 오늘 내가 쓴 글들을 가볍게 살펴보다가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와 [닥터스] 를 언급한 부분을 읽었다. 통속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가장 대중적인 소설이자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중 하나일 것이다. 비슷한 이미지의 시드니 셸던이 많은 책을 낸 것에 비하면 이 작가는 딱 저 두 권만 기억에 남아있다. 그래서 80년대 말에 당연히 저 두 권을 읽었었다. [러브 스토리]는 너무 뻔한 이야기라서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닥터스]는 역시 뻔한 이야기였음에도 이상하게 마음에 오랫동안 남았다. 그리고 문득 이 책을 한번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에 이 책을 사서 읽었을까? 모르겠다. 서울로 가져온 책 중에 이 책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내 집 책장에는 없다. 혹시 부산에 이 책이 있을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마다 부산에 갈 때마다 책장에 있는 책들을 쓱 훑어보곤 하는데, 이 책은 없었다. 지금 이 책을 다시 구매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닥터스 라고 검색하니 책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럴리가! 이렇게 유명한 책이, 한때 엄청난 베스트 셀러였던 책이 없다고? 정말 없었다. 다시 에릭 시걸을 검색해보니 [러브 스토리]와 그 후속작인 [올리버 스토리]는 나오는데 [닥터스]는 번역본이 없고 영어 원서만 나왔다.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책이 없으니 괜히 사람이 더 집요해졌다. 알라딘 앱을 열어서 중고책을 검색했다. 책이 나왔다. 당시에 1권, 2권 두 권으로 출간했었나보다. 1권은 중고조차 거의 없었다. 우주점이라 표현되는 전국 알라딘 중고 매장에도 거의 없었고, 판매자 중고로 표현되는 곳에만 물량이 좀 있었다. 2권은 우주점에도 다수 있었고, 판매자 중고에도 제법 많았다. 음, 우주점 중에서 1권과 2권을 모두 가진 매장이 있으면 구매할까 했는데 없었다. 각기 다른 매장에서 각각 따로 구매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쉽지만 구매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나중에 도서관에서 찾아봐야겠다. 책 구매를 포기하고 나니 문득 그 당시에 라디오에서 자주 들었던 책 광고가 기억났다. [러브 스토리]를 쓴 세계적인 작가 에릭 시걸의 신작 이라고 말하는 여성 성우의 음성이 머리 속에서 재생되었다.

어긋나는 사랑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을 극장에서 봤을 때 서로 어긋나는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이게 영화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앞서 [닥터스]라는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거였다. 서로 어긋나는 인연의 모습이 떠올라서.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쓴다면 안타깝게도 서로 이어지지 않는, 어긋나는 인연을 그려보고 싶었다. 원래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건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약간은 비뚤어진 마음을 늘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며칠 전에 한 친구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가 나를 부러워한다는 얘길 했다. ˝형은 결혼도 해봤고 아이들도 있잖아.˝ 좀 충격이었다. 결혼을 해봤지만, 현재는 이혼한 늙은 홀아비일 뿐이고, 아이들이 있지만 아이들은 이제 다 자라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게 뭐가 부럽다는 걸까? 물론 아직 결혼을 해보지 못하고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그 친구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나보다 한참 젊고 아직 얼마든지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야말로 이젠 늙은이 처지라 더는 연애 경험을 하기 어려운데, 오히려 내가 그를 부러워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소설을 쓰자. 내가 지금 현실에서 연애를 할 수 없다면, 내가 만든 세상 안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를 만들며 대리 만족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골방에 처박혀 소설을 썼던 시절에도 그런 측면이 있었다. 내가 짝사랑했던, 현실에서는 이어지기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며 만든 캐릭터와 나를 투영한 주인공 캐릭터를 연결하는 이야기를 그리며 일종의 대리만족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소설이라도 현실성을 감안해야지. 그래서 좋아하는 감정을 담고, 연애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구상하더라도 무조건 그냥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현실성이 없지 않은가. 시련이 주어지고 서로 어려움을 겪어야 하겠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어긋나는 것이 현실적인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니 젊은 시절에 썼던 단편들과 구상해놓고 써나가다가 결국 완성하지 못했던 장편들에서도 주인공들의 사랑은 대개 이어지지 못했었다.

고민들

누구나 그 시기에 혹은 그 나이대에 걸맞는 고민들이 있다. 이번에 아이들을 만났을 때 각자의 고민들을 들었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작은 아이가 약속 장소에 한참 늦게 왔다. 큰 아이와 나는 배가 고파서 먼저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지난 번처럼 이번에도 작은 아이는 우리가 음식을 다 먹고 나서야 도착하겠지 생각하며 천천히 먹었다. 큰 아이는 음식을 먹으며 재잘재잘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런 와중에 같이 알바를 하고 있는 동료들의 태도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오래전부터 일을 대하는 내 태도가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모습이라 그로 인한 문제점들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아이도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가 동료에게 짜증을 느끼는 부분들이 내가 과거 다른 동료들에게 느꼈던 지점들과 거의 같았다. 이런 성향도 유전일까? 아이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고 아이가 충분히 이야기 했다고 느낄 즈음에 내 과거 이야기를 전해줬다. 세상이 언제나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걸 늘 생각해야 삶이 조금 편해질 수도 있다. 이런 느낌을 전해주고 싶었다.

큰 아이가 피곤하다고 집으로 들어가고 작은 아이를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아이가 집까지 걸어가고 싶다고 했다. 버스로 약 30분, 걸어가면 1시간 10분 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지난 번에도 아이가 걷고 싶다고 해서 같이 걸어갔었다. 그때는 중간에 길을 좀 잘못 들어서 훨씬 더 오래 걸렸었다. 걸어서 아이를 데려다주고 내가 다시 전철을 타러 이동하면 막차 시간이 아슬아슬 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 걸음이 빨라졌다. 작은 아이는 걸으며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도 산책하면서 여러 차례 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아이는 친구들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은 홀로 다른 학교에 진학해서 친구가 없었다. 새학교에서 새 친구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 같이 약 한 시간을 걸으며 아이는 과거 친했던 친구들 이야기로 시작해서 지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외톨이로 지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친한 척해야 하는 친구 같지 않은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작은 아이에게도 현실이란 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길 해줬다.

두 녀석이 각자의 고민으로 나름 힘든 일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아이들의 고민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지났다. 아이들 스스로 고민들을 해결해 나가기를 바라며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나이 대에 부모님께도 친구들에게도 고민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고민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지금 아이들에게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있기를. 아이들이 힘들때 언제든 아빠 하고 부르면 내가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게 내 남은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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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8-18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을 잘 안봐서 몰랐는데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된 모양이네요.

감은빛 2026-08-20 20:53   좋아요 0 | URL
시각적인 면에서는 좀 더 심플해진 측면이 있어요. 좌측에 있던 메뉴가 아예 없어지고, 하단 메뉴가 생겼는데, 그러면서 없어진 메뉴들이 좀 있었고, 어떤 메뉴가 어디로 갔는지 애매한 부분들이 많아서 좀 아쉽더라구요.

페크pek0501 2026-08-30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의 성장 시절에 또는 젊은 시절에 나의 고민에 대해서 또는 나의 진로에 대해서 상의할 상대가 없었다는 게 나쁜 일이었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영화 속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좋은 책 몇 권을 추천해 주는 장면을 볼 때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땐 그저 내 나이 또래들과 놀기 바빴죠.^^

감은빛 2026-08-31 18:02   좋아요 0 | URL
젊은 시절에는 또래들과 노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
시기에 맞는 일을 잘 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올해 3월 25일 브런치에 썼던 글이다. 작년부터 브런치 라는 곳에 글을 연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계정을 만들어 두었었다. 하지만 늘 바쁘다는 핑계로 글을 쓰지 못했고, 일단 어떻게든 시작은 해보자는 생각에 올해 2월에 여기 알라딘 서재에 썼던 글들을 거기다 옮기며 브런치에 첫 글을 올렸다. 처음 생각은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 매체에 대한 이야기를 브런치에 연재처럼 쓰려고 했다. 연재라는 제약을 두면 나도 조금 더 열심히 글을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영상매체들의 유사성이나 대조되는 측면들을 비교하는 글과 원작이 있다면 원작과 비교하는 글을 쓰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늘 현실은 생각하는대로 되지 않는다. 브런치에 연재하고 싶다는 욕심과 달리 바빠서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고, 가끔 올린 글들은 모두 알라딘에 과거 썼던 글들을 가져간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2월부터 3월까지 몇 개 올리지 않은 글들 중에 브런치에만 쓴 글은 아래 글이 유일하다. 그리고 나는 약 5개월 동안 브런치를 잊고 살았다. 역시 익숙한 알라딘 서재가 제일 마음이 편했다. 브런치를 아예 포기하는 마음으로 아래 글을 알라딘으로 가져온다. 영상 매체들을 비교하는 글과 영상 매체와 원작을 비교하는 글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 알라딘에 계속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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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도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열차를 떠올릴 수 있다. 007을 비롯한 무슨 첩보 액션 영화 같은 곳에서 아주 빠른 고속열차 안과 그 위에서 벌어지는 액션 장면들을 보여줬던 것이 생각난다. 우연히 폭탄이 설치된 고속철도를 다룬 영화 두 편을 비슷한 시기에 보았다. 일본영화 [신칸센 대폭파]와 대만영화 [96분]이다. 두 영화 모두 설치된 폭탄이 열차의 속도와 연동되어 일정 속도 이하로 달리면 터진다는 설정이었다. 이 설정은 곧바로 영화 [스피드]를 떠올리게 한다. 키아누 리브스와 산드라 블록의 이 영화는 1994년 개봉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정 속도 이상으로 달려야 터지지 않는 폭탄이 설치된 설정의 고속철도 영화가 저 [스피드] 보다 더 재미있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고속철도는 철도 위를 달리는 열차이다. 그것도 고속으로. 이미 고속으로 달릴 길이 보장된 고속철도에 일정 속도 이상으로 달려야 한다는 제약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다. 반면, 영화 [스피드]에서 일정 속도 이상으로 달려야 터지지 않는 폭탄이 설치되었던 건 버스였다. 버스는 도로를 달리고, 도로는 다른 차량으로 막혀 속도라 떨어질 확률이 높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영화는 일단 기본 설정에서부터 30년 전 영화보다 더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물론 열차는 정차역을 만나면 멈춰야 한다. 다만, 고속철도는 애초에 일반 철도보다 정차역의 수가 적다. 그리고 폭탄이 설치되었다는 비상 상황이라면 정차해야 할 역을 지나치는 것이 물리적인 어려움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고속철도인 KTX 이야기를 아주 조금만 하고 본론인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자. 우리나라 고속철도 사업을 처음 입안한 것은 학살자인 전두환의 친구이자 그 다음 대통령인 노태우 시절이었다. 처음 계획은 경부선 철도 옆으로 나란히 고속철의 선로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구 경북 출신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 세력은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가기를 원해서 경주역을 집어넣었고, 덕분에 경부선 선로와 다른 노선으로 설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경주에서 부산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천성산과 금정산을 지날 수밖에 없는데, 이 큰 두 산을 관통하는 아주 긴 터널을 뚫어야 하기 때문에 경부선 옆으로 나란히 달리는 노선과 달리 많은 자본과 시간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산을 대표하는 천성산과 부산을 대표하는 금정산은 그 자체로 큰 환경적, 생태적 가치를 가진 명산이기 때문에 두 명산을 뚫어 고속철도를 건설한다는 발상 자체가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시절에 이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제 본격적으로 공사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시기였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노무현은 공약으로 고속철도 사업 백지화를 공언했지만, 막상 대통령이 된 후에는 공사가 계속되는 상황을 방치했고, 결국 천성산의 내원사와 금정산의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에서 대대적인 반대 운동에 나섰고, 크고 작은 환경단체들이 힘을 모아 고속철도 사업 강행으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를 제기했다. 사실 정치적인 맥락으로 억지로 끼워 넣었던 경주를 제외했다면 답은 간단했을 것이다. 기존 경부선 옆으로 고속철도를 설치했다면 시간도 사회적인 자본도 모두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결과는 우리 모두가 다 보았듯이 공사를 강행하여 개통했다. 그러면 고속철도 설치로 인해 우리 국민들은 더 편해졌는가?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시간은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나? 글쎄, 잘 모르겠다. 일단 철도공사는 KTX 개통 후에 기존 경부선의 열차들을 대폭 줄이고, KTX 만 대량 편성했다. 사실 선로 자체가 분리되어 있는데, 왜 고속철도를 개통했다고 해서 기존 일반 열차들의 편성량을 줄이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 짓을 강행했다. 그리고 개통 초기 KTX 선로는 본인들이 자랑삼아 말하는 300 kmh로 달릴 수 있는 선로만 깔렸던 것이 아니었다. 고속열차가 300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구간은 일부 구간뿐이었고, 특히 대구 이후 부산까지는 경전선 선로를 깔아 뒀기 때문에 설계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나중에 한참 후에야 모든 구간을 300kmh 가 가능하도록 개선했지만, 이때는 여기저기 더 많이 생긴 정차역들이 문제였다. 실제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예매해 보면 철도공사의 말대로 2시간 40분에 부산에 도착하는 열차 외에 다른 정차역들 때문에 3시간 이상 걸리는 열차들도 많다. 25년 9월 철도경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실제 KTX의 평균 속도는 시속 300km가 아니라 시속 165km라고 한다. 고속철도를 어렵게 만들어 놓고도 고속으로 운행을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잠시 우리나라 고속철도 설치 과정의 문제와 운행의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만 살펴봤는데, 이제 본론인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선 [신칸센 대폭파]는 같은 제목의 과거 영화를 리메이크 한 영화이자, 그 후속작의 성격도 겸한 영화라고 한다. 작중에서 주요 인물이 과거 영화 시점과 관련한 사람으로 나온다. 1975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과거 작품과 이번 작품의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겠지만, 일본인이 아닌 해외에서 저 옛날 영화를 본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과거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보는 것에 지장은 없었다. 그냥 특정 인물이 과거 사건에서부터 시작된 어떤 특정한 상황 때문에 문제가 되어, 이번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흐름만 이해하면 상관없는 설정이다. 다만 일본 내에서 과거 영화를 보았던 장년층들은 이 영화를 통해 더 많은 것들을 얻어갈 수 있겠지.


영화의 첫 장면은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탐방온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인공인 타카이치 카즈야가 차장으로서 학생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이 배역을 맡은 배우는 쿠사나기 츠요시 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초난강으로 불리는 인기 있는 가수라고 나온다. 나는 이 사람이 국내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티비를 안 보고 살아서 이런 사람이 활동했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지만, 이 배우를 오랜만에 보아서 반갑다는 평들도 제법 많더라. 암튼 학생들에게 설명을 마친 후에 질문을 받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왜 차장이 되셨나요? 보통은 기관사를 꿈꾸지 않나요?" 라고. 음,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으로서 고속철도 승무원을 꿈꾸는 거라면 대개 기관사를 꿈꾸겠지. 하지만 현실에서는 차장을 비롯해 열차 내에서 승객들의 안전과 편의를 챙기는 승무원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대부분 기관사를 꿈꾼다고 누구나 기관사가 될 수는 없는 법이겠지. 하지만 이 질문에 쿠사나기 차장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답을 한다. "서로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같은 방향으로 갔다가 도착하면 흩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나?" 차장이 된 이유를 물었기에 답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현실에서 과연 이런 답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다음 장면에서 젊은 차장이 다가와 학생들 상대하시느라 수고하셨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본인이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맡겠다고 말했는데, 여기에 아주 정색을 하면서 대하는 모습도 좀 이상했다. 초반에 이 등장인물이 원칙주의에 따라 철저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일 것 같은데, 그냥 썩 좋지 않은 상관이자 선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이 두 차장이 경례를 하는 장면도 이상했다. 군인도 아닌 철도 승무원들이 경례를 하나? 일본은 그런가? 우리나라도 설마? 아니 장난처럼 경례를 하고 그를 받아줄 수는 있겠지만, 해당 장면은 장난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마치 군인인 것처럼 아주 진지하게 경례를 하고 받아주는 모습이었다.


다음으로 아오모리 역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열차에 타서 자리를 잡는 모습들이 차례로 나온다. 이 영화처럼 등장인물이 많은 영화라면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할 수밖에 없다. 짧은 등장 장면에서 해당 인물의 주요한 특징들을 보여줘야 하니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역시 여성 정치인이었다. 아마도 중의원인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성 보좌관과 함께 열차에 탔다. 그런데 그의 앞자리에서 뒤돌아 이 의원을 유심히 보던 아이가 갑자기 "마마카츠" 라는 단어를 말했다. 어! 최근에 본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서 "파파카츠" 라는 단어를 계속 들었었다. 그리고 2월 중순에 알라딘 서재에 쓴 [내 몸을 빌려드릴까요] 의 서평에서도 파파카츠를 비롯해 렌탈 여친, 소프랜드, 딜리버리 헬스 등 불법과 합법을 교묘히 오가는 일본의 성매매 문화에 대해 언급했었다. 파파카츠 라는 단어는 일본 학생들의 방과 후 활동을 말하는 부카츠 라는 단어에 중년 남성을 뜻하는 파파를 붙여 만든 것으로, 젊은 여성이 나이 많은 중년 남성들에게 성적 만족감을 주고 경제적 혜택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게 미성년자라면 원조교제인 것이다. 여기서 파파를 마마로 바꿨으니, 이 여성 정치인은 젊은 남성과의 성추문에 휩싸여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이 정치인이 이후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빌런 혹은 민폐 캐릭터가 될 것인가? 상식적으로 행동하여 이미지 쇄신을 꾀할 것인가? 나는 후자에 걸고 영화를 계속 봤다. 이따가 배역에 대해서 따로 다루기는 하겠지만, 카가미 유코 라는 중의원을 맡은 배우는 오노 마치코 배우였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이기도 하고 아는 얼굴이라 일단 반가웠다.


열차가 출발하는 장면에서는 각 역할을 맡은 직원들이 모두 손가락으로 확인 작업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관제실의 관제사도 화면을 보며 주로 쓰는 손(아마도 오른손) 검지를 오른쪽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가 해당 공정의 특정 부위에 손가락을 움직여 지칭하는 작업을 하고, 이후 역무원이 승강장에서 같은 동작을 취한다. 다음으로 주인공인 다카이치 차장이 여러 차례 이 동작을 취한다. 이어서 기관사가 이 동작들을 취하며 열차를 출발시킨다. 마츠모토 치카 기관사는 아마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다. 여기서 젊은 여성 기관사와 중년의 남성 차장을 배치한 의도가 읽힌다. 맨 처음 언급한 [스피드]의 산드라 블록이 떠오리기도 하고. 자, 드디어 열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감독은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열차 출발 직후 범인은 관제실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폭탄을 설치했다고 알린다. 그리고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폭탄을 다른 열차에 설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한 속도 이야기를 하는데, 다음 장면에서 그 다른 열차가 제한 속도(아주 낮은 속도)를 넘기자 폭발이 일어난다.


다음은 일본의 관료주의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관제실에 고속철도 회사(JR 동일본) 간부, 관할 경찰, 정부 관계자와 총리실 보좌관 등이 모인다.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 중에 최고는 아마 안노 히데아키의 [신 고질라]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 이야기로 빠질 여유는 없으니 일단 넘어가자. 암튼 이후로 관제실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아주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말 거의 마지막까지 한 차의 오차도 없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총리실 보좌관은 딱 생긴 대로 무례하게 굴며, 책상머리 공무원의 한계를 보여주다가 나중에 각성하여 진정성을 보이고, 형사들도 이런 영화 특유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담당 관제사와 관제소 책임자(찾아보니 종합지령소 총괄 지령장이라고 나온다.) 역시 딱 필요한 만큼의 역할을 하고 적당한 재미와 적당한 감동을 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상했던 틀대로 흘러가는 것은 열차 안에서의 장면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며 폭탄 설치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처음 등장했던 승객들이 딱 외모와 성격에 걸맞은 행태를 보인다. 민폐 캐릭터가 나타나고, 이를 말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차장이 나타나 수습을 하고 기관사는 위기를 겪고 등등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미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대부분 인지도도 있고 연기력도 괜찮은 배우들이고 그에 걸맞은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1975년 개봉작과는 달리 이번에는 JR 동일본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현실적이고 실감 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특히 하이라이트라고 부를 수 있는 선로를 갈아타면서 열차가 스치는 장면은 아주 멋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인 특유의 직업윤리를 보여주는 장면들, 위기 상황에서 기관사, 차장 등 승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등을 보여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이런 장면들 때문에 JR 동일본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한 것이겠지. 아, 그리고 승객 구출용 열차를 출동시켜 구출 작전을 펼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모두 구출하지 못하고 일부가 남을 수밖에 없도록 설정하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기는 했다.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은 역시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부분이다. 일단 범인의 정체가 너무 어이없다. 여고생이라니! 수학여행 일정 중 하나로 견학을 온 여고생이 언제 어떻게 이 열차에 여러 개의 폭탄을 설치할 수 있을까? 속도 감지 장치는 어떻게 설치했을까? 이 열차뿐 아니라 초반에 아주 느린 속도에서 터진 화물열차에는 또 언제 폭탄을 설치했을까? 영화 중반에 폭탄을 제조한 기술자는 등장하지만, 폭탄을 실제로 설치한 다른 공범의 존재는 나오지 않는데, 이 고등학생이 혼자 이걸 다 했다고? 아니, 여성이 문제가 아니라 고등학생이 혼자 했다는 설정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1975년 개봉작을 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이 후속작은 열차 승객들의 모습에서 현재의 사회를 잘 보여줬다고 본다. SNS 스타와 이슈만 쫓아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는 유튜버 등이 등장하고, 실시간으로 빠르게 정보가 유통되는 모습들을 잘 담았다. 너무 전형적인 모습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나중에 한 50년 후에 또 후속작이 나온다면, 그때의 관객들이 이 영화를 찾아보며 저 시대 사람들은 저렇게 살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수 있으리라.


자, 이제 배우들을 알아보자. 아, 먼저 감독부터. 히구치 신지 감독은 유명한 애니메이션 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신 고질라] 영화에도 안노 히데아키와 함께 참여했는데, 이 영화를 안노 작품이 아니라 히구치 신지 작품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이 감독 영화 중에는 저 [신 고질라]와 [일본 침몰] 이렇게 둘을 봤었다. 앞서 말한 주연 배우인 쿠사나기 츠요시는 아이돌 출신이라고 한다. 드라마와 영화도 많이 찍었던데, 내가 본 것은 [일본 침몰] 밖에 없었다. 이번에 맡은 차장 역할은 전형적인 일본 직업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연기는 아주 좋았다. 예전에 [일본 침몰]을 대충 봤었는데,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츠모토 치카 기관사는 논이라는 배우가 맡았다. 이 영화에서 열차 내 상황은 대체로 객실에서 벌어지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어서 기관사의 출연 분량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속도가 떨어지면 폭탄이 터진다는 설정이기 때문에 속도를 조절하는 장면 등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열차가 출발하는 장면과 폭탄이 설치된 후에 자동운행장치를 해제하는 장면 등에서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붙였다가 앞으로 내뻗는 동작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배우도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던데, 내가 본 것은 드라마 [미스킹] 밖에 없었다. 일본식 장기인 쇼기(将棋)를 다룬 드라마로 이 배우가 주인공을 맡았고, 돌풍을 일으키는 장기 기사로 꽤 괜찮은 연기를 보여줬다. 위에서도 언급한 카가미 유코는 오노 마치코 배우가 연기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안정된 연기를 보여줬다. 그리고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드리마 [아수라처럼] 에서도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4자매 모두 좋은 배우들이 맡아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오노 마치코가 맡은 둘째였다. 앞으로도 믿고 볼 수 있는 좋은 배우라 생각한다. 토도로키 미츠루 라는 기업인이자 유명 베스트셀러의 저자이자 인플루언서로 나오는 배역은 카나메 준 배우가 맡았다. 이 배우도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한 유명 배우라고 한다. 영화 [킹덤] 시리즈에 계속 나왔다고 되어 있는데, 솔직히 워낙 분장이 심한 영화라 누구인지 기억할 수가 없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에도 출연했다는 정보가 있는데, 주요 인물이 아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일본 영화 시리즈와 한국 영화를 엮어서 글을 써볼 생각도 있는데, 나중에 다시 볼 때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관제실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 총괄 지령장 카사기 유이치는 사이토 타쿠미 배우가 맡았다. 역시나 유명한 배우로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나왔던데,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실: 인연의 시작] 하나밖에 없었다. 폭탄을 설치한 범인인 고등학생 오노데라 유즈키는 토요시마 하나가 연기했다. 아역 배우로 시작한 이 배우도 많은 작품에 출연했더라. 내가 기억하는 건 [치히로 상] 나오는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이제 대만 영화 [96분]을 살펴보자. 제목인 96분은 타이베이에서 가오슝까지 실제 고속열차 운행 시간을 말한다고 한다. 대만에 대해 별로 관심 없이 살아서 지리를 전혀 몰랐었는데, 최근 대만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면서 조금씩 지리 감각이 생기고 있다. 타이베이는 대만 북쪽의 제일 큰 도시이자 수도이고, 가오슝은 남쪽에서 큰 도시인 것 같다. 대만 지도를 보면 서쪽 해안 쪽만 개발이 된 것으로 보이고, 섬의 동쪽에서는 큰 도시가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아마 지형의 영향 탓이겠지. 암튼 우리로 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로 일종의 '부산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는 과거의 폭탄 테러 사건에서 폭탄을 직접 해체하는 폭탄처리반 특수 요원인 주인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아, 아니, 그 전에 터널에서 어떤 사고가 난 현장에서 당시 현장에 투입된 인력이 한계가 있으므로 우선 터널 밖의 생존자 먼저 구한다는 입장을 발표하는 방송 장면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사실 한참 전에 이 두 영화를 봤었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두 영화를 다시 봤었지만, 그 후로 또 갑자기 바빠져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영화를 보고 글을 쓸 수는 없어서 일단 쓰고는 있는데, 디테일이 기억이 안 난다. 암튼 이 장면이 나중에 범인의 범행 동기가 되는데, 영화를 두 번이나 보고도 이해가 안 가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데, 얼마나 크든 규모에 상관없이 사고가 나면 수습하기 위해 공권력이 투입이 되어야 하고, 그들은 적절한 전략을 세워 최대한 안전하게 최대한 많은 생존자를 구출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전략을 너무 경솔하게 언론에서 떠드는 모습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과연 대만에서 그럴까? 아니라고 본다.


이 영화에서 다루는 사건은 세 개다. 맨 처음 등장하는 터널 사고, 두 번째는 극장과 백화점에 동시에 폭탄이 설치되어 극장은 무사히 해체했지만, 백화점이 터져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 그리고 현재 벌어지는 고속열차에 폭탄이 설치된 사건. 이 영화의 구조는 단순하다. 과거의 사건에서 중요한 사람을 잃었던 범인이 경찰의 무능과 비밀을 파헤치고 국민들에게 드러내기 위해 폭탄을 설치하는 함정을 판 것이다. 그 첫 시도가 극장과 백화점 동시 폭탄 설치 건이었는데, 경찰은 하나만 막고 다른 하나는 막지 못해(영화 후반에 밝혀지지만 못 막은 것이 아니라, 막을 수도 있었지만 폭발이 일어나는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음) 엄청난 인명 피해가 벌어졌다. 당시 경찰은 사건을 조작하여 폭파범이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발표했지만, 진범이 아니었다. 진범은 다시 함정을 판 것이었다. 여기서 이 영화의 핵심 주제는 인명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포기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맨 처음 터널 사고에서도 터널 안에 갇힌 생존자들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현실적으로 거기까지는 무리라 우선 터널 밖의 생존자들부터 구하겠다는 입장. 그리고 두 번째 사건에서 이미 시민들은 대부분 대피하고 소수의 경찰들이 남아 있던 극장과 아주 많은 시민들이 쇼핑을 즐기고 있던 백화점. 둘 중 하나가 무조건 희생되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두 개의 고속열차에 설치된 폭탄. 하나는 대다수의 승객이 내렸지만, 주인공인 폭탄해체 전문가가 타고 있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의 가족을 포함해 아주 많은 승객들이 타고 있는 상황. 이번에도 둘 중 하나는 무조건 터진다고 하면, 어느 열차를 포기하고 어느 열차를 살릴 것인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과연 옳은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운전자가 없이 무인으로 자동차를 운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자주 보인다. 만약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갈림길을 만나 무조건 둘 중 하나로 핸들을 꺾어야 한다면 인공지능은 어떤 선택을 하도록 설정해야 하는가? 직접 설정하지 않는다면 과연 인공지능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람이라면? 당신이라면? 차를 바로 멈출 수는 없고 왼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두 명이 죽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열 명이 죽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조건 다수를 살려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소수는 그냥 죽어도 되는가?


이 영화의 핵심은 이런 내용일 텐데 사실 썩 그렇게 흥미롭게 풀어내지는 못했다고 본다. 일단 앞서도 터널사고 당시 방송 장면을 말하면서 언급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실에서 벌어질만한 사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하다못해 작중의 어떤 세계관에서라도 있을만한 일이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서 몰입을 방해한다. 그럼에도 배우들은 열심히 노력했다. 그냥 오락 영화로는 썩 나쁘지는 않다.


대형 참사가 벌어진 후 추모제를 여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 무안 공항 참사도 잊지 말아야지. 추모제 참가자들이 큰 노란 리본을 매고 있어서 특히 세월호 참사 생각이 많이 났다. 작중 7살 어린이가 희생됐기 때문에 범죄자의 편에 동조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 사연을 보면서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가만 보면 신파적 요소들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마지막 장면은 무조건 관객을 울리기 위해 만든 것이고.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폭탄이 터지는 조건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스피드]와 앞서 살펴본 [신칸센 대폭파]는 단순했다. 특정한 속도 이하로 떨어지면 터지는 것이었다. [신칸센 대폭파]에서는 시속 100킬로미터 이하로 속도가 떨어지면 폭파한다는 상황이었기에 시속 300을 달릴 수 있는 열차를 120 정도에 맞춰 달리도록 만들어 시간을 벌면서 어떻게든 승객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100 이하는 폭발하기에 정류장에 설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속도가  줄어들면 터지기는 하는데, 그 속도가 딱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영화를 두 번이나 봤는데도 정확하게 그 조건이 뭔지 알 수 없다. 대신 영화에서는 유명하고 유능하다는 물리학 강사를 등장시켜서 그가 그 속도를 계산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폭탄이 설치된 두 열차 중 하나의 속력을 가능한 한 줄여서 약 시속 30킬로미터로 달리면서 승객들이 열차에서 뛰어내리라고 안내한다. 그 와중에 잘 뛰어내려서 별로 다치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떨어지면서 다치고, 심지어 사람들이 미는 와중에 밟히는 사람들도 생긴다. 속도를 줄이는 와중에 사람들은 앞다퉈 출구 쪽으로 나가려고 밀고 난리가 나고, 사람들이 넘어져 밟히고 깔리는 장면은 이태원 참사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영화를 멈춰야 했다.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려면 특정한 사건이 벌어지는 핵심 원인은 단순해야 한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야 그만큼 더 집중할 수 있다. 관객들이 모두 물리학자가 아닌데, 물리학자를 등장시켜서 폭탄이 폭발할 속도를 계산한다고? 어느 누가 그런 장면을 보고 몰입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물리학 강사는 폭탄을 설치한 범인도 아닌데, 어떻게 그 원리를 그렇게 잘 아는지, 그렇게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두 열차를 나란히  달리게 만들어서 주인공이 다른 열차로 건너가는 장면도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서는 정말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되면 물리 법칙 따위 다 무시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시속 30으로 달리며 많은 승객들이 내린 이 열차에는 이젠 미처 뛰어내리지 못한, 뛰어내릴 수 없는 노약자들만 남아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지루해지기 시작하는데, 영화에서는 이걸 액션 장면을 커버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액션도 그닥 볼만하다고 볼 수 없다.


이쯤에서 이 두 영화를 비교하며 작품 속 설득력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이 두 영화 모두 두 개의 열차가 나란히 같은 속도로 달리며 무언가를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신칸센 대폭파]에서는 승객을 구출하기 위한 기자재들을 담은 짐을 옮기는 것으로 나온다. 시속 100 이하로 줄일 수 없기 때문에 속도감과 함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잘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열차가 같은 속도로 나란히 달리게 하기 위해 관제소에서 관제사가 집중해서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96분]에서는 주인공인 사람이 나란히 달리는 열차 사이를 뛰어서 건너간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관제소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관제사의 지시도 없이 두 열차가 같은 속도로 나란히 달릴 수 있나? 불가능하다고 본다. 설득력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아, 앞서 이 영화는 선택의 문제를 강요한다고 했었다. 마지막 장면으로 가면 각각 폭탄이 설치된 두 열차에 두 쌍의 부부가 각각 나눠타고 있다. 자, 선택해. 누구를 죽일거야? 라고 묻는 느낌이다. 맨처음 주인공 부부(신혼여행 이야기는 나오는데, 결혼식 얘기는 없는 걸 보면 사실혼 관계일지도)가 탔던 열차에는 주인공의 아내가  있고, 물리학 강사가 있다. 주인공이 건너간 열차에는 주인공과 물리학 강사의 아내가 있다. 이렇게 일부러 설정해 놓고 하나가 터지면 하나가 산다는 설정은 참 잔인하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볼 때에는 참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시간이 좀 지나서 글을 쓰려고 보니 더 디테일을 따지고 드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어쨌거나 각본가와 감독은 주인공이 죽어서 속죄하는 그림을 원했다고 본다. 결국 영웅의 희생으로 나머지 사람들이 살아남는 모습으로 끝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는 동안 좀 묘한 장면이 작은 화면에 펼쳐진다. 터널에서 무용수 아내를 잃은 진범의 존재 외에 공범이 있는 것처럼 암시하는 장면이었다. 이건 뭘까? 후속작을 예고하는 걸까? 해석해보려고 두어 번을 돌려봐도 알 수 없었다.


감독은 홍쯔쉬안이라고 한다. IMDB를 보면 5편의 영화와 1편의 드라마를 연출한 것으로 나온다. 각본을 맡은 것은 3편이었다. 이 영화 외에 본 것은 없었다. 주인공인 송캉런(宋康任 / 작중에서 아런 阿任 으로 불림)은 린바이홍(林柏宏 / 우리말로는 임백굉)이 연기했다. 이 배우가 그 배우였는지 전혀 몰랐는데, 찾아보니 인상적으로 보았던 영화 [괴짜들의 로맨스]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저번에 글을 썼던 영화 [숨통을 조이는 사랑]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와! 확실히 연기는 잘하는 배우였구나. 영화가 별로여서 그렇지 배우들은 열심히 연기를 한 것이 확실히 맞다고 느낀다. 주인공의 연인이었다가 아내가 된 황신(黃欣)은 송윤화(宋芸樺) 배우가 맡았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 [나의 소녀시대] 라는 영화가 유명하다고 하고, 그 외에도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찍었더라. 류카이 라는 물리학 학원 강사는 왕보제(王柏傑)가 연기했다. 이 배우는 저번에 소개한 영화 [백만 팔로워는 추리중] 이란 영화에도 나왔었다. 그때도 썼지만, 드라마 [화등초상]에서 보았었다. 또 최근에 본 영화 [역병]에도 출연했더라. 신기하게 내가 최근에 본 세 개의 영화에 출연했다. 주인공 아런의 상관으로 주인공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던 사람이자, 폭발사건을 조작해 마치 범인이 현장에서 폭발에 휩쓸려 죽은 것처럼 조작한 경찰 그리고 막판에 그 모든 책임을 지는 것처럼 비참하게 죽는 리제 역은 리리런 배우가 맡았다. 이 사람도 왕보제 배우와 함께 [백만 팔로워는 추리중]에 나왔었다.


단순히 오락 영화로만 접근한다면 이 두 영화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폭탄이 설치된 고속 열차 이야기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이야기일테니까. 다만 사건을 다루는 디테일과 등장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활용하는 측면에서는 일본 영화 [신칸센 대폭파]가 훨씬 낫다고 본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명확하고 단순한 구조라서 훨씬 더 몰입할 수 있다고 본다. [96분]은 감정적으로 사람을 많이 뒤흔드는 영화였다. 만약 오락 영화도 즐기며 적절한 감동과 눈물을 원한다면 이 영화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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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8-17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성산 도룡뇽에게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가냘프나 눈빛이 형형하던 지율 스님도 떠오르네요.

감은빛 2026-08-20 20:55   좋아요 0 | URL
지율스님께서 단식하시던 그 시절에 저도 그 현장에 있었어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투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