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날

1월 1일 이라는 숫자는 좀 재미있다. 새 해를 시작하는 첫 달 첫 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24시간, 365일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날, 달, 해 라는 시간 개념이 익숙해서 다른 별은 이게 완전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데, 과학과 수학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 하지만, 우리가 다른 별을 이주해 살아가야 한다면, 일단 지구와 시간 개념 자체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지구보다 자전 주기가 훨씬 긴 별이라면 엄청나게 긴 하루를 살아야하겠지. 그런 곳이라면 하루에 여러 차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해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자전 주기가 지구 시간으로 100시간인 별이라면, 한 8시간이나 10시간 단위로 일과 휴식을 반복하거나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삼체]라는 작품에서처럼 해가 여러 개인 별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 곳에서는 해가 지는 시간이 아주 짧거나, 어쩌면 아예 없을수도 있겠다.

우리 인간은 지구에서 긴 시간 적응해 살아왔기 때문에 이 24시간, 30일, 365일의 단위를 만들어 그에 맞게 생활해왔다. 만약 먼 미래에 지구에 살던 사람이 어딘가 다른 별로 이주한다면, 지구에서 살아봤던 사람은 새로운 별의 시간대에 적응하기 어렵겠지. 그 별에서 태어나 지구 시간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떨까? 유전자에 각인된 시간 개념이 남아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태어난 별의 시간 흐름에 쉽게 적응할까?

아, 물론 우리 인간이 빛의 속도로 이동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은하라는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약 250만년 걸린다고 하니, 다른 은하를 가보는 건 불가능한 일일테고, 우리 은하 안에 있는 다른 항성까지는 얼마나 걸리려나? 1977년에 발사한 보이저들은 이제 태양계를 벗어나는 중이라고 하는데, 그 카이퍼 벨트와 오르트 구름이 얼마나 넓은지, 즉 우리 태양이 얼마나 넓은 범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아직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사람이 타고 출발할 우주선으로 태양계를 벗어나려면 얼마나 걸릴까? 보이저가 출발한 시점보다 얼마나 더 우주공학이 발전했을지 몰라도 수명이 100살이 채 되지 않는 사람이 평생을 가도 못 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앞서 자전과 공전 주기가 완전히 다른 별로 이주하는 상상을 한 것은 결국 다 쓸모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오늘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과 생각이 대부분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어제부터 수없이 받고 있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내용의 카톡과 문자들을 보면 복을 바라지 않는 나같은 사람들은 죄책감이 들 정도다. 나는 정말 딱 이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인사말로만 저 말을 쓰는데, 많이 쓰지도 않고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사적 친분 보다는 공적으로 얽힌 관계들에서 더 많이 쓴다. 당연히 그 분들이 실제로 복을 받으시라고 한 말은 아니다.

며칠 전에 사기 경험을 적은 글에 몇 년째 연락하고 지내는 인도네시아 사람이 있다고 썼었는데, 어제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제주항공 참사 소식을 접하고 쓴 듯, 혹시 내 주변 사람들이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물으며, 사고 희생자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해왔다. 나는 다행히 내가 아는 사람 중엔 없었다고, 안부를 물어주고, 함께 애도해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그리고 Happy new year 를 써서 보냈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런 식이 되었다. 명절이나 어떤 특별한 기념일에 인사를 건네고, 최근 소식들을 주고 받고 한동안 연락을 안 하다가 이번 처럼 큰 사고가 나면 또 생각나서 연락을 하게 된다. 몇 년 전이었는지, 그게 어떤 사고였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데, 인도네시아에 큰 일(아마도 지진?)이 생겼을 때 나도 걱정을 담아 연락했었다. 아마 이번 참사가 없었다면, 그냥 새해 인사를 서로 나눴겠지.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는 친구가 이렇게 걱정을 해주고 신경을 써준다는 건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어디의 무슨 ‘장‘이라는 직함(예를들면 총장, 이사장, 회장 등)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형식적인 새해 인사를 보내오는데, 예전에는 일일이 답을 했지만, 이젠 아예 답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폰에 저장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단체로 보내는 것일테니, 나 하나 답을 하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물론 그중에 일부러 나를 찾아서 나를 떠올리며 보내는 분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 받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 밥을 먹다가, 음악을 듣다가, 책을 읽다가 이런 메세지들 때문에 흐름이 끊긴다.

시국이 시국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이유가 있어서 이번 연말은 조용히 보냈다. 오라는 데가 제법 있었는데, 대부분 못 가거나 안 갔다. 이제 나도 새로운 기분으로 늘 하던 일들을 다시 해야지. 물론 새로운 시도도 해보고 싶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북플에서 지난 오늘 메뉴를 열었는데, 당연히 글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내가 알라딘을 이용해 온 약 20년 동안 1월 1일에 쓴 첫 글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yamoo 2025-01-02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 새해가 시작되었어요!
올해는 작년보다 건강하고 즐거운 한 해 되시길 빕니다~~

transient-guest 2025-01-03 0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2025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사는 행성과 별의 영향을 받는다는 전제로 뭔가 상대적이란 생각을 하면 자전이 긴 행성에서 산다면 그냥 모든 주기가 slow down되고 우리가 느끼는 하루는 거기에 맞춰 지나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현실은 살아생전에 유인우주선이 태양계를 벗어나는 것조차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생각을 port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생각이 여행을 하고 어딘가에 들어가 작용할 수 있다면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성간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 이렇게 쓰고 나니 어지러워졌습니다.ㅎㅎㅎ

잉크냄새 2025-01-0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 해 좋은 말씀과 글로 나눈 교류 감사드립니다.

물리학을 F 맞아본 입장에서 상대성 이론을 언급하는 건 얼토당토아니하지만, 살짝 독서하는 삶에 녹여본다면, 책을 읽으면서도 스스로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행위를 통해 우리의 변화를 감지하는 뇌도 따라서 변화해가기 때문이죠. 그런 이유로 어제 읽은 책도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읽는 행위를 지속하게 되는 거죠. 음, 쓰고 보니 물리학 F 맞은 이유가 다 있네요. ㅎㅎ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필 이런 시국에 이런 대형 참사가 또 생기다니! 윤석열이 당당히 맞서겠다고 어이없는 헛소리를 지껄인 후에 틀어박혀서 칩거 중인데, 뭔가 상황이 자꾸 꼬여가는 중에 한덕수 총리는 또 권한대행 주제에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이재명과 파란당은 또 그걸 탄핵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탄핵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사실 이태원 참사때도 그렇고, 이번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한덕수 진짜 꼴보기 싫었고, 저런 인간이 한 나라의 총리라고 삿된 말로 쪽팔린다고 생각했다. 뻔히 쉬운 단어를 두고 어려운 영어단어 쓰는 버릇도 우스워보였다. 그렇지만,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건, 헌법재판관이 현재 6명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국회라는 점이다. 특히 지금 뭐라도 된 양 날뛰는 파란당이 초래한 잘못이다. 한덕수가 잘 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민주당 역시 잘 한 것 업다. 암튼 진짜 뭐 이렇게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지 너무 꼴보기가 싫어서 한동안 뉴스를 안 보고 있었다. 그래서 비행기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몰랐다.

잠시 뭘 기다려야 할 상황에 마땅히 할 게 없어서 습관처럼 SNS에 들어갔다. 별 생각없이 피드를 훓어 내려가다가 제주항공 참사? 아니 사고 였던가? 암튼 그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사고가 났구나. 비행기 사고라면 대개 대부분 살거나, 대부분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이건 후자이겠구나 하고 직감했다. 일단 빨리 뉴스부터 찾아봤다. 아! 또 이렇게 소중한 목숨이. 다른 걸 다 떠나서 희생된 승객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유가족 인터뷰를 보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사고 장면을 보면서 그간 보았던 수많은 비행기 사고 관련한 영화들이 생각났다. 처음 생각난 건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이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는 비슷한, 아니 실제 사고 원인이 무엇인지와 관계없이 비행기가 추락한다는 비슷한 상황에서 모두를 살린다. 영화를 본지 오래라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고, 실화를 따로 찾아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그 상황이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기적처럼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 경우와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만, 유독 최근에 비행기 관련 영화를 몇 편 본 것이 다 생각났다. 조정석의 말도 안되는 코메디 영화 [파일럿], 비행기 납치 월북 시도를 막아낸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하이재킹], 가상의 기내 독극물 유출 및 납치 시도를 가정해 만든 망작 [비상선언] 등이다. 파일럿과 비상선언은 별로 언급할 말이 없지만, 하이재킹은 제법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정우 배우가 연기한 부기장이 실제 상황에서 승객들을 구하기위해 폭탄을 몸으로 막아 돌아가신 수습 조정사 역할까지 맡은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실제 사건을 잘 살리면서 영화적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아니,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그렇게 많은 영화에서 동체 착륙 장면을 봤어도 이런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는데, 역시 현실은 현실이구나. 실은 동체 착륙이라는 것이 이렇게 위험한 일이구나. 영화는 역시 영화구나 하는 당연한 걸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신 사고 때문에 한동안 머리가 멍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예전에 난기류를 만나 비행기가 엄청나게 흔들려, 이러다 죽는 건가 하고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제 구체적인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을 찾아보거나 여기 서재 글을 검색해보면 나오겠지만. 암튼 오륙년 전 늦가을 혹은 초겨울 무렵이었다. 제주에서 발표를 요청 받아 가는 날이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몇 가지 일이 꼬여서 심란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일단 서울을 떠나 제주로 가는 것이니 기분을 풀어보려 노력했다. 얼른 제주로 가서 가볍게 점심을 먹고 발표를 한 후에 저녁에 맛있는 걸 먹고 하루 푹 쉴 생각이었다. 한창 일이 바쁜 시기였지만, 제주까지 와서 당일 바로 올라가기는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여유있게 시간을 두고 비행기를 예약해 두었는데, 예정된 출발 시간을 한참 지나도 비행기가 이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뭔가 안내 방송만 몇 차례 나오고 꽤 긴 시간이 흘렀다. 비행기를 자주 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주는 비행기로 제법 갔었는데, 이렇게 한 시간을 넘기도록 출발을 못하는 일은 처음이라 이러다 못 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이 바쁜 시기에 차라리 잘 됐다며 돌아가서 얼른 일이나 하자 라는 생각과 그래도 억지로 시간 만들어서 월차까지 썼는데 하는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답답함에 몸이 막 뒤틀릴 것 같을 때쯤 되어서 비행기는 이륙했다. 그리고 얼마나 갔을까? 나는 비행기 입구에서 나눠주는 신문 하나를 정독하고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위아래로 크게 출렁였다. 사람들의 놀라는 소리와 동시에 나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외마디 비명 까지는 아니고 소리를 냈다. 아니 내가 일부러 소리를 냈다기 보다는 저절로 나온 소리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머리로는 잠깐 이러고 말겠지 했는데, 그 뒤로 몇 번이나 더 그보다 더 심하게 기체가 요동쳤다. 안전벨트 등이 켜지고 기장이 난기류를 만났다고 안내 방송을 하는 사이, 복도를 오가며 승객들 반응을 살피고 안심시키던 승무원이 앞쪽 간의 의자를 펼쳐 앉은 후 안전벨트를 달칵 채웠다. 마치 이 동작이 스위치라도 된 것처럼 갑자기 기체가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상하좌우로 움직였다. 승객들의 웅성이는 소리와 몇몇 비명들이 커졌다. 그러다 문득 기체가 밑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한참을 아래로 떨어지다가 다시 위로 솟구쳤다. 이때 정말 진심으로 이 비행기가 추락하는 건가? 나 이대로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는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꽉 잡고 이를 악 물고 버티고 있었다. 그때 어쩌다 저 앞쪽 간이 의자에 승객들을 마주보고 앉은 승무원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 그는 계속 불안해하는 여러 승객들과 일부러 눈을 맞추며 눈빛으로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표정과 눈빛 덕분에 아주 조금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었지만, 그래도 비행기라는 것이, 하늘에 떠 있나는 것이 이렇게 공포스럽고 불안한 일이었구나. 이대로 기체가 곤두박질 추락할까봐 무서웠다.

실제로도 난기류 속에서 요동치던 시간이 길었던 것이지, 아니면 내 두려움 때문에 그 시간이 유독 그렇게 길게 느껴졌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법 긴 시간이 지나서야 기체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고, 안전벨트 등이 꺼졌다. 기장은 다시 방송으로 뭔가 설명했던 것 같은데, 당시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긴장을 조금 풀었던 건, 앞에 앉아있던 승무원이 벨트를 풀고 일어나 통로를 걸어오면서 양측 복도쪽 승객들의 어깨를 쓸어주는 등 괜찮은지 살피며 다가올 때였다. 내가 앞에서 두세번째 좌석 복도쪽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는 금방 내게도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괜찮은지 물었네. 나는 아마 작은 목소리로 네, 괜찮아요 라고 답을 했었던 것 같다. 아니, 솔직히 어떻게 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물을 한잔 달라고 했었던 것도 같다. 그는 아마 친절한 목소리로 곧 전체 승객들에게 음료와 물을 나눠드릴 예정이라고 답을 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비행기를 서너번 정도 더 탔을 것이다. 매번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면 그때 그 공포가 다시 생각난다. 다시는 비행기를 안 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이번 사고를 뉴스로 보고 나서 이제 무서워서 비행기 못 타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번 사고로 저가 항공사에서 주로 운행하는 비교적 작은 기체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저 위에 말한 난기류를 만난 날도 저가 항공에 작은 기체였다. 뭐, 물론 아직 정확한 사고의 원인은 알 수 없고, 언론에서 목격자 증언과 몇몇 영상들을 근거로 추정하는 새떼 충돌이 원인이라면, 저가 항공이나 작은 기체가 문제가 아닌 것이겠지만. 잘은 모르지만, 난기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용띠해 잘 가.

이제 해가 바뀌기까지 하루하고 몇 시간 남았다. 작년 이맘때쯤 작은 아이가 내년이 용띠해라고, 그럼 내년에 태어난 아기들은 아빠랑 같은 띠냐고 물었었다. 그런 걸 띠동갑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줬었다. 뭐, 용띠해라고 내게 특별히 좋았다거나 나빴던 것은 없었다. 그건 다른 어떤 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올해 나는 제법 큰 변화들을 겪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변화의 흐름 안에 있다. 어떻게 어디로 흘러갈지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꽤 오랜 시간을 어디 머물러 정착하지 않고 계속 흘러다닐지도 모른다.

올해 나는 장거리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0킬로미터 코스 대회에 두 번 참가했다. 첫 대회는 처음이어서 놀랍고 신기한 경험이었고, 두번째는 한 번 겪어봤음에도 계속 놀랍고 신기했다. 그리고 대회가 아니라도 종종 혼자 15~20킬로를 뛰는 나를 발견하고 그것도 신기했다. 지난 한 5년 동안 나는 1~3킬로 정도씩 달리기를 했었는데, 그때 내 생각은 사람이 3킬로 이상 먼 거리를 왜 굳이 달려야 하나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5킬로 미만으로 달린 후엔 별로 달린 기분이 들지 않고, 왠지 게으름을 피운 듯한 기분이 든다. 예전에도 지금도 달리기가 재밌고 좋은 것은 같은데, 달리기에 임하는 자세는 많이 달라졌다. 내년에도 또 즐겁고 신나게 달려보자. 중간중간 대회에도 나가보고.

올해 내가 또 몰입했던 것 중 하나는 프로야구를 다시 보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고,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인가 뭐 그런 것도 했었고, 무엇보다 사직구장에서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최동원 선수와 같은 훌륭한 선수들을 직접 보았던 팬이라 앞으로도 평생 롯데가 아닌 다른 구단의 팬이 될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럼에도 먹고 사는 일에 지쳐 엄청 오랜 시간동안 야구를 안 보고 살았다. 가끔 한 두 경기를 중계로 보아도 선수들을 모르고 시즌의 흐름을 모르니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을 제대로 즐기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올해는 조금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롯데가 늘 하던 봄데 마저도 못하고 하위권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 과감하게 야구에 다시 빠져들었다. 그리고 서울에 자리잡은 지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수도권 구장들에 직관을 가기 시작했다. 고척, 잠실, 문학 이렇게 세 곳을 다섯번인가? 갔었다. 수원이나 대전도 가보려고 했고, 대전은 어렵게 예매도 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포기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여름 휴가 일정에 맞춰 사직구장 예매에 성공하고, 아이들과 다녀왔던 일이다. 이건 아마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이들 둘 다 마찬가지일텐데, 아이들도 올해 좋았던 일을 꼽으라고 하면 가장이 붙지는 않더라도 사직구장에 갔던 날이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것이다.

그간 아이들과 나는 저 언급한 수도권 야구장들을 다니며 원정팀 응원팬으로의 서운함과 불리함 등을 계속 느꼈다. 긴 시간 사직에서 야구를 봐왔던 시절에는 절대 몰랐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몇십년만에 다시 사직에 와보니 역시 야구는 홈구장에서 봐야 하는 것이었다 를 깨달았다. 내 경우에 그랬고, 아이들은 사직이 처음이라 아마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 아빠 잘못 만난 덕에 같이 롯데를 응원하게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원정팀이라 소외되고, 뭔가 홀대받는 느낌인데다 경기를 지는 날이 대부분이어서 안타깝고 분하고 그랬는데, 비오는 날 사직에서 정말 멋지게 이겨서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거기에 정말 운이 좋게도 응원석 바로 근처 자리를 예매할 수 있었다. 고척이나 문학에서 그렇게 노력했어도 못 구했던 자리였는데.

올해 롯데는 객관적으로 잘 했다고 볼 수 없는 성적을 거뒀지만, 재미있는 경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비교적 젊은 선수들로 세대교체 과정을 잘 밟아간 한 해였다. 내년에는 좀 더 착실히 성장해서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다음으로 올해 기억할 것은 언어 익히기이다. 일부러 공부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서 부자연스러움을 무릅쓰고 익히기라는 입에 잘 붙지 않는 단어를 가져왔다. 아마 10년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심심할 때 여러 언어의 단어나 표현들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던 것이. 그러다 요 앞에 사기 당할 뻔한 일들을 소개한 글에 적었던 언어 익힘 앱들을 만났었다. 거기에 썼던 누군가 특정한 언어를 배우기 원한다고 등록하면, 해당 언어 네이티브들과 연결해주는 앱을 통해 다양한 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나는 영어 하나만 희망 언어로 등록했었는데,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어 배우기를 원하는 많은 나라 이용자들이 한국인을 찾아서 말을 걸어왔고, 내게도 종종 연락이 왔었다. 게다가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쪽 많은 사람들은 영어를 네이티브 못지 않게 혹은 제법 잘 했으므로 내 영어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영어 외에 의사소통이 될만큼 아는 언어도 없었기에 어느 나라 사람과 대화하더라도 영어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약간 편견이 섞인 말일 수 있는데 그 앱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 딱 두 나라만 영어를 사용하기 싫어하는 느낌을 받았다. 중국과 일본이다. 이 두 나라 사람들은 굳이 번역기를 통해서라도 각자의 말로 소통하자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앞서 내가 편견일 수 있다고 한 이유가 있다. 그ㅗ앱에서 당시에 주로 접한 중국인은 시도때도 없이 사기를 치려고 말을 걸어오는, 분명 누군가의 사진을 도용한 것으로 추정하는 젊고 어여쁜 프로필 사진을 앞세운 사람들이었기에 애초에 언어가 목적이 아니었다. 일본인은 엄청 소수만 만났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영어로 말을 걸어도 일본어로 답하거나, 굳이 번역기를 돌려 어색안 우리말로 답하곤 했다. 그외 나라 사람들과는 대부분 영어로 했다. 아주 가끔 러시아 사람, 동유럽 사람, 남미 사람 등 영어를 아주 잘 하지는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연히 나보다는 훨씬 나아서 늘 배울 점이 있었다.

이 앱을 쓰면서 두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첫번째는 이 앱이 채팅으로 대화하는 것과 음성 녹음 파일을 주고 받는 것 외에도 실시간 통화 기능을 제공했는데, 주로 멀리 있는 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시차 때문에 통화를 많이 활용하지 못 했다. 또 내가 밖에 있으면 주위 소음 때문에 통화가 어려워서 혼자 집이나 사무실에 있을 때 활용해야 하는데, 그 시간을 서로 맞추기가 참 어려웠다. 두번째는 그들도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무리 모국어라고 해도 낯선 언어를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잘 알려주는 일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 앱을 통해 알게된 인도네시아 사람이 있는데, 그는 영어 강사다. 바하사 인도네시아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영어라는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임에도 그는 내게 인도네시아어를 효과적으로 알려주지 못했다. 나 역시 책도 찾아보고 검색도 많이 해봤지만, 우리말을 제대로 잘 알려주지 못했다. 해당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연결해준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한계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암튼 이 앱을 몇 년동안 꾸준히 썼는데, 어느 시점부터 중국계 아리따운 여성들이 마치 바이킹의 대이동이나 훈족의 대이동처럼 이 앱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화이 되어 결국 지워버렸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앱들을 많이 찾아다녔다. 무료앱도 있었고 유료앱도 있었다. 어떤 건 소액 결제를 해보기도 하고, 어떤 것은 무료 범위 안에서 쓰다가 지우기도 했다. 그러다 시간이 좀 흘러 올해 초에 만난 것이 듀오링고였다. 이 앱의 가장 큰 장점은 쉽고 간편하게, 마치 게임에서 간단한 퀘스트 해결하고 보상 받는 것 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용자들 간의 경쟁을 유도해 조금이라도 진도를 더 나가도록 하기도 한다. 내 생각에 듀오링고의 단점은 체계적으로 설명하거나 순서를 밟아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리말 번역과 어순은 부자연스럽고 심지어 잘못된 내용도 있었다. 즉 알려주는 내용이 정확하게 맞는 표현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말로 영어를 익히는 코스들에는 비문이 가득하고, 어순도 종종 잘못된 것을 맞다고 우긴다. 몇몇 단어들은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게 옮겨놓았다. 영어를 기반으로 일본어를 익히는 코스에도 이상하거나 어색한 영어 표현들이 종종 나온다. 어이가 없는 오류들도 있다. 분명 철자가 맞는 정답인데도, 계속 오답이라고 나와서 더는 진도를 나갈 수 없는 오류가 몇 번이나 있어서 운영진에게 여러 차례 제보 했었는데, 바로바로 반영이 되지 않았고, 나중에 바로 잡고 난 후에도 피드백을 주지 않았다. 이건 진짜 좀 어이 없는데, 같은 단어라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는 일본어 단어들이 있는데, 가끔 이 발음을 틀린다. 분명 앞에서 제대로 알려줬는데 나중에 뒤에 가서 엉뚱한 발음을 한다. 아, 그리고 이것도 진짜 짜증나는데, 얘네가 최근에 영어 코스에 새로운 기능(아마도 실시간 대화)를 넣어놓고 이걸 쓰려면 유료 결제를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이게 좀 비싸기도 하고, 이미 나는 유료 결제를 해서 사용하고 있는데도, 다시 추가 결제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좀 어이가 없고 화가 나기도 한다. 이게 짜증나는 것이 그냥 한번 물어보고 안 한다고 답한 사람한테는 이제 노출을 안 해야 정상인데, 매 챕터마다 두세번씩 징검다리처럼 밟아 나가야 하는 커리큘럼에 포함시켜 두었다. 징검다리 하나를 모두 마치고 다음을 클릭했는데 또 결제하라고 나오고 안 한다고 선택하면 그 챕터 마치기 전에 또 나온다.

이런 몇가지 단점들에도 올해 초에 시작한 듀오링고를 꾸준히 계속 쓰는 것은 아까 말한 장점. 마치 게임하듯 접근한다는 이 앱의 본질적인 태도 때문이다. 내용으로 따지면 훨씬 체계적으로 잘 알려주는 앱들도 있는데, 걔네는 며칠 연속 하다보면 지겨워서 손을 떼게 된다. 듀오링고의 장점은 부담없이 열어보게 만드는 그 태도에 있다. 또 하나 내 기준에서 좋은 점은 영어를 제외하고 다른 언어들은 우리말 기반이 아니라 영어 기반으로 익혀야 하는데 내 기준에선 둘 다 모국어가 아니라 둘 다 한꺼번에 배우는 느낌으로 접근하게 된다. 영어로 일본어를 배우지만, 그러려면 마치 영어가 내 모국어가 된 것처럼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중국어도 마찬가지고, 인도네시아어도 그렇다. 아주 가끔 들여다보는 스페인어나 독일어도 마찬가지다. 이 지점이 나는 아주 재밌다.

아, 이렇게 길게 쓰려고 시작했던 것은 아닌데, 또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다. 얼른 마무리하고 오늘치 듀오링고 해야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희선 2024-12-31 0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고가 무척 크게 났네요 여러 사람 이야기를 보니 마음 아프더군요 여럿이 같이 가고 좋은 일로 가기도 했는데...

새해에도 달리기 하시겠군요 조금 달리면 더 달리고 싶다니, 그건 좋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금도 달린다고 하잖아요 야구 보러 가기, 그것도 좋을 듯하네요 2025년에도 따님들과 함께 가서 보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외국어 공부도 즐겁게 하세요

감은빛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감은빛 2025-01-01 16:39   좋아요 0 | URL
가끔 잊을만하면 이렇게 큰 사고가 나서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데려가네요. 우리 모두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바로 현대사회가 아닌가 싶어요.

희선님 말씀 덕분에 올해도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들 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잉크냄새 2024-12-31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행기 터불런스는 한두번으로 지나가면 그러려니 하는데 시간이 길어지면 아, 이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짧은 공포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생각에 잠식당했던 자신이 슬며시 웃겨지기도 하고요...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 롯데 선수는 박정태군요. 아마 그때가 프로야구를 시청한 마지막 시기일 겁니다.

감은빛 2025-01-01 16:43   좋아요 0 | URL
저는 비행기를 그리 많이 타보지 않아서 그렇게 긴 시간 공포를 느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아, 진짜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 무섭네요.

저도 박정태 선수 참 좋아했어요. 제가 롯데라는 팀에 미쳐있던 시기가 딱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예요. 대학 입학한 후로는 야구 볼 시간 여유가 없었어요.

박정태 선수 특유의 그 배트 휘두르는 장면이 갑자기 보고 싶네요. 검색해보면 나오겠죠.
 

각종 스미싱과 사기 수법

언젠가부터 매일 수십개씩 도착하는 각종 스팸 문자. 예전에는 이게 주로 광고였다면, 요즘은 링크를 클릭하도록 유도하는 스미싱이다. 눌러본 적은 없지만, 클릭하면 악성 앱을 설치해, 내 폰의 정보들을 싹 다 가져가 그걸로 내 돈을 훔친다고 알고 있다. 구체적인 수법까지 다 알 수 없지만, 일단 내 폰에 얼마나 많은 정보들이 있는지 생각하면 아찔하긴 하다.

오늘은 재미있게도 일본어로 스미싱 문자가 와서 이를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이 글을 쓴다. 오늘 받은 문자는 이렇다. [국외발신]
来月2日に会う日ですが、連絡が取れません。+LłŃĔ:qy522 이건 아마도 라인 메신저로 연락을 유도하는 내용인 듯하다. 번역기를 돌리면 이렇게 나온다. ˝다음 달 2 일을 만날 날이지만 연락 할 수 없습니다.˝ 요즘 내가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이렇게 일본어 스미싱 문자를 다 보냈을까? 신기한 일이다.

지금까지 주로 받았던 스미싱 문자는 두 패턴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주식 등 투자 정보를 준다며 링크를 보내는 것으로 이건 아마 클릭하면, 곧바로 악성 앱이 설치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두번째는 주로 성매매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무슨 컵에 예쁘다거나 특정 신체부위 색깔이 핑크라거나 언급하기 민망한 내용이 대부분인데 여기서는 다시 스미싱 수법이 두 가지로 나뉜다. 아까 말한 투자 정보를 주제로 보낸 방식에서 처럼 곧바로 링크를 보내는 방식도 있고, 저 일본어 스미싱 처럼 라인이나 카톡 아이디를 보내기도 한다.

저렇게 라인이나 카톡 아이디를 보내는 이유는 아마 로맨스 스캠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라고 추측한다.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외국어 공부를 위해 다양한 앱들을 깔아서 써보곤 했는데, 그 중 주로 실제 해당 언어의 네이티브인 외국인들과 채팅이나 통화를 연결할 수 있는 앱이 있었고, 그 앱으로 전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그중 일부는 저런 방식의 스캠으로 사기를 치려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중국계(홍콩, 싱가포르, 마카오 등) 젊은 여성이며 미모가 돋보이는 프로필 사진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친근하게 일상 대화들을 주고 받고, 음식 사진, 자동차 사진, 집안 모습 등을 보내기도 하면서 친해지려 노력하고 나중에 충분히 공을 들여 친분이 생겼다고 확신할 때쯤 마치 사귀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태도가 바뀐다. 그런 갑작스런 태도 변화는 이제 슬슬 투자 유도 등 사기를 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친한 지인 중 한 명은 내가 알려준 이 앱으로 친해진 어느 중국인 여성에게 속아서 실제로 소액을 투자했고, 처음에는 투자대비 수익성이 너무 좋아서 점점 투자액을 늘렸고, 결국 나중에는 사기를 당해 모두 잃어버리는 일을 겪었다. 내가 그냥 재미로 해보라고 알려준 것 때문에 그 친구가 결국 사기를 당해서 조금의 죄책감이 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중국계 젊은 여성들이 말을 걸어오면 대체로 경계하고 있다가, 딱 특정 시점에 투자 얘기를 꺼내면 바로 연락을 끊어버리곤 했다. 근데 그 앱을 사용하던 초반에는 그런 아리따운 중국계 젊은 여성들이 거의 없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갑자기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중국인이 많아졌다. 아마 사기꾼들에게 그 앱이 유용한 도구라고 소문이 났었나보다. 나중에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하루에도 서너명씩 비슷한 얼굴과 이름의 중국인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결국 나는 그 스트레스로 그 앱을 지워버렸는데, 길면 1년 이상 짧으면 서너주 정도 대화를 나누던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연락이 끊기는 것이 아쉬웠다. 그중 가장 오래 연락을 주고 받아서 제일 친했던 말레이시아 사람과는 카톡을 통해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있다. 그때 친해진 몇 명은 지금도 가끔 기억나는데, 특히 내가 당시에 빨간 소주(참이슬 오리지날)를 먹고 있다고 말하니 곧바로 빨간 소주를 들고 있는 사진을 보내왔던 브라질 사람이 재미있었다. 우리와는 시간대가 정반대라 거의 12시간 차이여서 실시간 대화는 그리 많이 나누지 못했지만, 서로 틈틈히 연락을 남기면 나중에 시간 날 때 확인하고 답을 하는 방식으로 오래 얘기를 하곤 했었다. 그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 싶었던 것이고 나는 사실 포르투갈어를 배울 생각은 없었는데 그와 친해진 덕분에 조금 익혀보려고 시도 했었다. 간단한 인사라도 그의 모국어로 건네 보고 싶어서. 이외에도 그루지아 사람, 인도 사람, 터키 사람 등 여러 나라 사람들과 교류가 많았기에 그 앱을 지우는 것은 많이 아쉬웠다. 그래서 그중 일부와는 왓츠앱이나 라인 등 다른 메신저로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었는데 대체로 잘 되지는 않았다. 확실히 자주 쓰던 앱이 아닌 다른 앱을 통하니 서로 익숙치 않은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앱을 지우기 직전에 내게 연락한 한국계 중국인이라는 여성이 하나 있었다. 이런 류의 스캠 사기를 치려는 중국 여성들은 대체로 그 앱으로 계속 대화를 나누기 보다는 자신들이 주로 쓰는 위챗으로 대화방을 옮기기를 요구하곤 했다. 미끼를 수없이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할테니 사냥감은 다른 앱에서 물어오더라도 사냥은 자기들이 주로 쓰는 앱에서 해야 할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아직 확실히 몰랐을 때 나는 누군가의 요구로 위챗을 깔아봤는데 한국에서는 아예 가입이 안 되길래 그냥 지워버렸다. 그래서 하루에도 서너번씩 말을 걸어오는 비슷한 이름과 얼굴의 어여쁜 여성들이 매번 위챗으로 대화하자고 요구하면 그 핑계로 손쉽게 대화를 끝낼 수 있었다. 암튼 저 한국계 중국인이라는 여성은 특이하게도 카톡으로 대화하자고 해서 약간 아리송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스캠이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은 경계를 풀었던 것 같다. 그는 어머니가 한국인, 아버지가 중국인이며 자신은 지금 어머니와 둘이 중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어느 대형 공사현장 인부들을 위한 식당에서 일한다고 했다. 우리식 표현으로 함바집을 운영하는 것이다. 자신은 한국에 오고 싶은데 지금 현장의 계약기간이 길어서 한국사람과 한국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고 했다. 몇가지 의심스러운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대화를 이어갈수록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느끼기 어려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연기라고 보기 어려운 일관성이 확실히 보였다. 어느 식당이든 비슷하겠지만 공사장에 있는 함바집은 새벽에 일찍 식사 준비를 해야한다. 그리고 저녁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늦은 오후에 일을 마친다. 나와 연락을 주고 받는 이런 시간대가 일치했다. 그리고 매일 사소한 일상들을 이야기 하는데 현장 소장과의 일들을 자주 언급했고, 그 소장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럴듯했고 성격이나 말투 등이 일관성이 있었다. 지어낸 인물과 사건들이었다면 반복되는 상황에서 분명 헛점이 생겼을텐데, 의심을 거두지 않고 꼼꼼하게 살펴봐도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대화를 나눈지 한 달이 지나 이젠 제법 친해진 느낌이 들때, 그는 엄마가 갑자기 아파서 입원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그 직전에 그는 갑자기 나를 달링이라고 부르고, 이 현장 계약이 끝나면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고, 자신이 한국에 오면 자주 맛있는 밥을 해주겠다고 했었다. 사실 그 한달간 매일 대화하면서 호감을 느끼지 않기가 쉽지 않았다. 매일 아침에 깨면 새벽에 자신은 이제 일하러 간다고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인사가 와 있었고, 식사때 즈음에는 밥 잘 챙겨먹으라고 했고, 자신이 일을 마친 오후에는 시간 나면 자신과 놀아달라고 청하곤 했으며, 밤에는 꼭 그날 있었던 일들을 전하며 늦게까지 수다를 이어가곤 했다. 이게 진짜 연애하는 거랑 별로 차이가 없으니 실제로 얼굴 한번 본 적이 없지만, 연애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암튼 그렇게 마치 자신이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대하는 와중에 갑자기 엄마가 아프다며 며칠 연락을 끊었다. 진짜 하루도 안 빼고 매일 하루에도 수십번 말을 걸던 사람이. 이때쯤 나는 이 사람이 사실은 중국 여성이 아니라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흑인 남성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의 접은 상태였다. 아니, 어느 사기꾼이 한 달을 훌쩍 넘겨 아주 그럴듯한 일상의 대화를 그렇게 자세하게 그렇게 많이 준비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건 드라마 대본보다 훨씬 양이 많았을 것이다. 그걸 실제로 쓴 거라면 진짜 천재 작가가 아닌가! 아, 저 사기꾼을 아프리카 남성의 이미지로 생각한 것은 실제 우리나라 남성을 속여 돈을 훔친 사기꾼을 나중에 인터폴을 통해 잡았더니 아프리카 남성이었다는 어느 시사프로그램을 봤었기 때문이다. 그때 남성을 속인 건 인터넷에서 유명한 한국계 여성 미군의 프로필이었다고 나왔었다. 사실 이런 류의 로맨스 스캠이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그 프로그램을 통해 알았다. 거기 나온 또다른 피해자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우연히 SNS로 연락이 온 중년의 백인 남성과 대화를 나누다 친해졌고, 그가 청혼까지 해서 한국에서 결혼까지 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하! 이 어쩌다 한국인 남성과 여성들은 이렇게 국제적으로 사기의 대상이 되었을까!

암튼 며칠 후에 연락한 그는 며칠간 자신이 일도 못하고 엄마의 병실을 지켰으며, 그것 때문에 현장 소장에게 엄청 비난을 받았고, 위약금을 물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그리고 병원비 이야기도 했다. 암튼 지금은 일시적으로 증상이 좋아져서 퇴원했는데, 나중에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엄마가 어떻게 될까봐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며 위로해 달라고도 했다. 그렇게 다시 매일 마치 연인을 대하듯 하는 그의 연락이 다시 이어졌다. 다시 일상생활 이야기를 했고 한국 연애인 이야기를 했다. 빨리 이 현장 공사를 마쳐 한국에 오고 싶다고도 했다. 그렇게 두 달이 다 되어갈 때쯤 다시 엄마가 아파서 한밤중에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고 했다. 이때 자신은 이제 계약해지를 당하고 엄청난 위약금을 물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비 이야기를 하면서 내게 잠시만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사실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닌데 지금은 그 돈이 묶여있어서 뺄 수가 없고 내가 잠시 빌려주면 나중에 자신이 갚을 수 있다고, 위약금과 병원비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돈이 잠시 묶여있다고 했다. 여기서 나는 이 사기꾼이 이제서야 본색을 드러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두 달이라니! 참 대단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그 렇게 자세하고 그럴 듯한 대본이라니! 그 연기력도 대단했다. 무엇보다 이 한 건의 사기를 위한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나는 돈이 없다고 했다. 그가 구체적인 액수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를 요구하던 나는 실제로 그만큼의 돈이 없다. 만약 정말 만약 그가 사기꾼이 아니라 실제 그런 일이 생긴거라고 해도 나는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정말로 그럴 돈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사기가 맞던 틀리던, 그가 실은 남성이던 여성이던 그는 처음부터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사냥감이 너무 가난해서 사기를 치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그 시사프로그램의 사례를 보니 거기 피해자들은 카드 현금서비스라거나 긴급 대출 같은 것으로 돈을 빌려서 보냈다고 나왔다. 내가 속아 넘어갔다면 그 다음 단계로 대출을 받아서라도 좀 도와달라고 했겠지. 자신이 금방 다 해결해줄 수 있다고. 그러면서 이 상황이 다 끝나면 한국에 와서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겠다고 했겠지.

그는 돈이 없다는 내 말에 어떻게 이 상황에서 자신을 안 도와줄 수 있냐고 화를 냈다. 나는 계속 돕고 싶어도 돈이 없는데 어떻게 도울 수 있겠나 하는 말 외에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몇 차례 더 이럴지는 몰랐다 하는 투로 화를 더 냈다. 사실 물어보고 싶었다. 진짜 너는 누구냐? 왜 이렇게 긴 시간을 투자해서 사기를 치는 거냐? 대체 얼마를 뜯으려고 이렇게 투자를 많이 한 거냐고. 분명 대화를 하면서 내가 큰 돈을 가진 부자는 아니라는 느낌 정도는 받았을텐데. 그는 그 다음날에 엄마는 어쩌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말하며 다시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어머니께서 꼭 회복하시길 기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중국으로 자신을 보러 와달라고 했다. 이렇게 갑자기? 나는 당시 여권도 없었고, 중국에는 단 한번도 가 본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어디 살고 있는지 단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중국 지리를 잘 모르는 나도 물어보지 않았었다. 나는 이렇게 갑자기 중국으로 갈 수 없다고 했다. 당연하지 나도 일이 있고, 일정이 있는데.

그는 내가 못 간다는 말을 하자 연락을 끊었다. 나도 더는 신경쓰지 않았다. 만약 이게 사기가 아니고 실제 상황이었다면, 정말로 만약에 그런 여성이 실제 존재하고 그가 내게 호감을 느끼고 한국에 와서 사귀고 싶어 했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아프신 상황이었다면, 그가 그렇게 단번에 연락을 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나중에 자신이 묶여있었던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내게 돈이 아닌 감정적 위로와 공감 같은 것을 바랐을 것이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왜 마지막에 중국으로 오라는 말을 했을까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만약 내가 실제로 간다면 납치해서 인신매매라도 할 생각이었을까? 그런데 그렇게 오라고 하면 정말 갈 거라고 생각했을까?

결국 이게 사기였다고 결론을 내린 후에 참 신기한 경험을 다 해본다고 생각했다. 뭐 내 입장에서는 그 사기꾼에게 시간을 버린 것 외에 손해본 것은 없다. 애초에 내가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면서도 제법 그를 믿게 되었을 때, 이게 연애랑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는 재미있었다. 이렇게라도 연애하는 기분을 느껴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사실 계속 의심을 품기는 했지만, 정말 그가 나중에 한국에 온다면, 그를 좋은 친구로 대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를 직접 만나서 그에게 호감이 생긴다면 그때 연애를 시작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당연히 내가 일말의 의심을 계속 품었던 것은 나처럼 뭔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에게 저런 여성이 먼저 연인처럼 대하는 것은 뭔가 댓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 한 가지 내가 얻은 것이 있었다. 그와 대화하기 위해 열심히 영어 작문을 해야했기에 오랜만에 영어를 참 열심히 썼다. 그리고 중국어도 좀 더 익혔고. 그 사기꾼의 존재 덕분에 나는 어쨌던 처음 그 앱을 깔았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나중에 한참 후에 그 카톡방을 다시 찾아봤다. 그랬더니 알 수 없는 사용자라고 나왔다. 해당 아이디를 지워버린 것이다.

이 일을 겪은 후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으로 번역기를 돌린 티가 나는 서툰 한국말로 말을 걸어오는 어여쁜 여성들이 많아졌다. 사실 저 위에 언급한 외국어를 익히기 위한 앱에서는 사기를 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도 서로 대화하며 언어를 익혀가려는 목적 때문에 어느 누가 말을 걸어와도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그 앱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일부러 저렇게 어여쁜 외모의 젊은 여성들이 나같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어올 이유는 없다. 오직 스캠을 위해서만 가능하겠지. 정말 지겹게도 많이 왔다. 나중에는 라인과 왓츠앱으로도 이런 류의 연락이 왔다. 여기서는 서툰 한국말 외에도 영어로 말을 거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올해 또 한번 재미있는 일을 겪었다. 나는 몇 년동안 인스타그램을 안 하다가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장거리 달리기를 하면서 달리기 기록을 사진으로 남겨 인스타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마 늦여름 혹은 초가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어떤 여성이 내 인스타그램 사진들에 연달아 좋아요를 눌렀다. 가끔씩 그렇게 예쁘장한 여성들이 내 사진들 두세개 혹은 서너개에 좋아요을 누른 후 디엠을 보내서 스캠을 하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람도 역시 디엠을 보내왔다. 근데 이제 보니 이 사람은 최근 사진들에만 좋아요를 누른 것이 아니라 내가 몇 년전에 올렸던 운동 사진들까지도 눌렀더라. 이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사기꾼이 스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한 서너개쯤 누르고 바로 디엠을 보냈을텐데, 이 사람은 그게 아닐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호기심에 그 디엠을 열었다. 번역기를 돌린 서툰 우리말이었다. 여기서 딱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나는 다른 경우와 달리 답을 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때까지 주로 그렇게 접근해왔던 프로필은 중국 여성이거나 한국 여성이었다. 지금까지 일본 여성은 보지 못했었다. 게다가 다른 여성들만큼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30대 중반은 되어 보였고, 지금까지 보았던 그런 류의 프로필 사진들만큼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런 류의 사기꾼들 계정에는 대게 얼굴 사진 한 두개에 가슴이나 몸매를 강조하는 사진을 한 두개쯤만 올려서 누가봐도 이건 가짜 계정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사람은 일단 게시물이 엄청 많았다. 게시물을 짧은 기간에 많이 올린 것도 아니었다. 인스타그램은 게시물 올린 시기를 알 수 있는데 적어도 몇 달 지난 사진들도 있었다. 게다가 일상생활이라던가 풍경이라던가 이런 류의 사진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이런 계정이 스캠을 위해 수없이 만들어지는 가짜 계정일수는 없다고 판단했었다. 암튼 그는 라인으로 소통하길 원했고, 라인 앱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는 운동 이야기를 주로 했다. 나는 달리기를 중심으로 가끔 케틀벨과 덤벨, 바벨 등을 활용한 운동을 했고, 그는 요가를 한다고 했다. 레깅스를 입고 요가하는 사진을 그 계정에서 봤었다. 그는 음식 사진과 풍경 사진도 종종 보냈다. 오사카에 산다고 했고, 미용실을 운영한다고 했다. 미용실에서 직접 가위질을 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미용실에 갔다가 곧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다고 했다. 그는 휴일마다 자주 여행을 다녔고, 그 여행 장소 사진들도 꼬박꼬박 내게 보내줬다.

나는 마침 올해 일본어를 열심히 익히고 있어서 일본어를 종종 썼다. 주로는 영어를 썼지만. 평일엔 저녁때쯤 뭘 먹는지 사진을 보내곤, 일상 이야기를 잠시 나눴고, 주말에는 여행지 사진과 함께 자신이 누구와 어디를 다니고 있는지를 알려줬다. 친척들과 가족 여행을 가기도 했고, 친구들과 다니기도 했었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보여줬다.

나중에 나보고 일본에 놀러오라고, 그러면 자신이 맛있는 음식도 많이 사주고, 괜찮은 여행지들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자신은 해마다 한국에 왔었다며 과거 한국에 왔을 때 찍었다는 사진들도 보여줬다. 그리고 일본의 몇몇 관광지 이야기를 하다가 오키나와 얘기를 나눴다. 내가 2019년에 친한 지인들과 오키나와에 갔었는데 정말 재밌었다고 했더니 그때 사진들 좀 보여달라고 하더라. 나는 슈리성 사진과 민속마을 사진들 서너장을 보냈다. 자신도 그 장소들 다 갔었다고, 민속마을의 물소 이야기를 했다. 나도 물소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나서 그 사진도 보내줬다. 자신이 오키나와도 잘 안다고 나중에 꼭 같이 가자고 했다. 아, 그리고 오키나와 전통술 아와모리가 정말 맛있어서 그때 여행 내내 즐겼었고,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고 했더니, 나중에 자신이 한국에 올 때 선물로 사오겠다고 했다.

앞서의 한국계 중국인이라고 했던 사람과는 또 패턴이 많이 달랐다. 물론 나는 당연히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나중에 돈 이야기가 나오면 그땐 서로 연락을 끊으면 될 일이니까. 이 사람은 그 중국사람 때처럼 연인처럼 대하거나, 지나치게 친한 척하지도 않았다. 그냥 친구로 거리감은 유지했다. 그러다 자신의 전 남편 이야기를 했다. 전 남편이 폭력적인 사람이라 몇 차례 폭행을 당해 병원 신세를 졌었고, 결국 이혼했다고.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 더 늦기전에 이혼 한 일이라고 했다.

암튼 그렇게 약 한 달 정도 연락하며 지냈다. 그는 갑자기 투자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이혼한 후에 친척이 돈을 빌려줘서 그 돈으로 미용실을 차렸는데, 그 후에 지인을 통해 투자를 권유받았고, 덕분에 짧은 시간에 돈을 벌어서 여유롭게 살고 있다. 뭐 이런 얘기였다. 돈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사실 처음의 그 인스타 계정을 몇 달간 성실하게 잘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의심을 하면서도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결국 너도 이거였구나. 다만, 이 사람은 어쩌면 앞서의 중국인처럼 실제로는 어디 정말 뜬금없는 나라의 남성일지 모른다는 의심까지 들지는 않았다. 일단 무조건 일본인은 맞다고 느꼈다. 그리고 여성인 것도 맞다고 느꼈다. 다만 본인이 그 인스타 계정의 그 사진 속 인물인지는 알 수 없겠지. 그는 나와 연락을 주고 받던 시기에도 계속 인스타에 사진을 올렸다. 누구의 사진을 도용하건 사진들을 미리 구해놓았다면 꾸준히 올리는 일이야 할 수 있겠지. 암튼 두 번 다시 속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좀 많이 의외였다.

그는 자신의 투자 권유에 내가 넘어오지 않자, 화를 내며 나를 비방했다. 그리곤 연락을 끊었다. 화가 났겠지. 거의 한 달을 들여서 밑밥을 깔아두고 이제 지금이야 하고 그물을 던졌는데, 낚이지 않았으니. 방금 이 글을 쓰면서 그 인스타 계정에 가보니 계정이 사라져 있었다. 와! 사기 하나(아, 물론 당연히 하나는 아니었겠지) 치려고 몇 달 동안 꼼꼼하게 인스타그램을 운영했다니 대단하다 싶었다. 그런데 그와 대화를 나눈 라인에는 그 계정이 살아있었다. 지금도 다른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기 위해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겠지.

이 사람 이후에 또 몇 번이나 인스타에서 일본인이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해왔다. 아, 초반 수법이 너무 비슷했다. 최근에는 싱가포르 여성이라며 인스타그램 디엠이 또 많이 오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이 두 사람과 나눴던 대화방들을 잠깐씩 살펴봤다. 첫 대화를 시작한 시기를 보려고 대화방 스크롤을 끝까지 올려보니 공통점이 보였다. 두 경우 모두 처음 대화를 나눈 후에서 다른 메신저로 앱을 바꿨기 때문에 초반에 한국인이지를 꼭 확인하고, 내가 앞선 대화방에서 준 정보들을 모르고 다시 묻거나 했다. 자신이 던진 미끼가 수없이 많았을테니, 이 사냥감은 그 중 뭐였는지 다시 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한가지 궁금증은 이게 꼭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아닐텐데 굳이 한국인이냐고 묻는 경우가 많을까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유독 순진해서 잘 속는 걸까?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보이스 피싱에 누가 속냐고 흔히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피해를 본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시민 덕희] 영화의 사례처럼 보이스 피싱도 계속 진화하여, 이젠 어눌한 연변 말투가 아닌 똑똑히 잘 들리는 서울 말투로 말하고 누구나 속을 법한 시나리오로 작업한다. 마찬가지로 로맨스 스캠도 계속 진화하고 있겠지. 또 새로운 방식과 사례가 계속 생길 것인다. 그리고 아마 생각보다 스캠 피해자도 많을 것이다. 일단 내 아주 친한 지인도 피해자가 되어 버렸으니.

여기까지 쓰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받은 일본어 스팸 문자에 있는 라인 계정에 연락해서 속아주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들여 일하게 만들면 딱 그 시간만큼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확률을 줄이지는 않을까? 음, 글쎄 좋은 생각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희선 2024-12-27 0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기를 치려고 오랫동안 시간을 들였군요 의심을 버리지 않아서 속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잠깐 말하는 게 아니고 시간을 많이 들이는군요 잘 안 되면 화를 내다니... 돈을 빌려달라거나 투자를 하라고 하다니... 감은빛 님은 괜찮았지만, 속는 사람도 있군요 빚까지 져서 돈을 주다니... 속는 사람이 있으니 여전히 그런 게 있고방법이 달라지기도 하겠네요 그런 거 안 하면 좋을 텐데...


희선

감은빛 2024-12-27 06:22   좋아요 1 | URL
이 글에 썼지만, 누가 보이스 피싱에 속아? 라고 많이 말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분들이 피해를 당하듯, 누가 로맨스 스캠에 속아? 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실제 피해자는 많다고 해요. 저도 조금만 현실 감각이 없었다면 속았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많이들 속으니, 또 저렇게 하루에도 수십개씩 낚시 미끼를 던지는 것이겠죠.

transient-guest 2024-12-27 04: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실함은 사기의 기본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사기에 이런 정성과 시간을 들인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데 사기꾼은 그렇다고 하네요. 액수도 설마 이 정도를 위해 이런 정성을 들인다고?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딱 그 정도를 위해 엄청난 수고를 들인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모르는 전화 문자 메일은 그냥 지워버립니다...

감은빛 2024-12-27 06:26   좋아요 2 | URL
음, 사기꾼들에게도 본 반아야 할 점이 있군요. ㅎㅎ 예전에는 그래도 참아줄 수준으로 문자, 메신저 등이 왔는데, 점점 더 많아지더라구요. 오늘은 심지어 일본어 문자가 오길래 이 글을 썼어요. 좀 신기했거든요.

잉크냄새 2024-12-27 1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후후(whowho)라는 앱이 있습니다. 설치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차단진행)해 주시면 스팸이나 스미싱이 확 줄어들 겁니다. 전화번호 차단, 필터링 (이미지, 키워드, 시작번호...) 등 여러 방법이 있는데 전 귀찮아 전화번호 차단만 해도 요즘 하루 1통 정도로 줄었습니다.

감은빛 2025-01-01 16:36   좋아요 0 | URL
이 말씀 보고 그 앱을 깔아봤는데요. 저는 광고 때문에 거슬려서 못 쓰겠네요. 한 삼일 정도 참고 쓰다가 어제 지웠어요. 그래도 이렇게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생일에 기뻐해야 해?

북플에 들어와서 지난 오늘 메뉴를 열어보기도 전에 홈에서 친절히 과거 오늘 쓴 글입니다. 라며 보여줬다. 클릭해보니 두 개가 있었다. 2013년에 쓴 글은 오해와 상처 등을 거론하며 당시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이야기하다가 매년 똑같은 연말 술자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날이라고 다들 들떠있는 것에 대해 누군지도 모르는 서양인의 진짜 생일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날 왜 다들 난리인지 모르겠다는 글을 썼다. 그리고 댓글들을 읽었다. 가끔 내 서재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어느 이웃님의 첫댓글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3년 연속 서재의 달인을 축하한다고 쓰셨다. 그랬구나. 그 시절엔 그런 것에 선정되어 알라딘에서 보내주는 선물 상자를 받기도 했었다. 그 상자 안에는 머그컵과 달력, 다이어리 등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크리스마스 라는 날에 대한 내 반감은 사실 뿌리가 깊다. 일단 전세계 어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사기 행각이 너무 싫다. 산타 할아버지라는 코카콜라가 만든 상술에 휘둘리는 것이 한심해보인다. 최근에 제이티비씨 뉴스 여성 앵커와 궤도라는 이름을 쓰는 과학커뮤니케이터 라는 사람이 나눈 대화의 요약본 같은 짧은 영상을 보았다. 산타가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하루 밤 안에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이렇다. 뭐 이런 류의 이야기였다. 산타가 타는 썰매의 무게와 이걸 루돌프 사슴인지 뭔지가 끌려면 몇 백마리? 몇 천마리? 스쳐 지나가서 단위는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어마어마하게 많은 숫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산타가 전세게 어린이들의 집을 방문하려면 초속? 아니 광속이었던가 그 몇 배로 움직여야 한다고. 지붕으로 들어와 선물을 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우주에서? 암튼 선물을 쏘는 거라고. 그 선물을 잘못 맞으면 죽기 때문에 아이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런가 하고 그저 그렇게 흘려듣고 말았는데, 그 여성 앵커는 정말 웃음이 터져서 진행을 제대로 못 할 지경으로 보였다. 어쩌면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아버지께서 종합과자세트를 우리 머리 위에 두고 가는 것을 보았다. 사실 그걸 보기 전에도 산타와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지는 않았지만, 어렸던 나는 선물이 어디서 났을지가 궁금했다. 가난했던 우리집에서 아버지처럼 엄격한 분이 쓸데없이 비싸기만한 종합과자세트 따위를 돈 주고 샀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 둘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산타는 어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고 선물은 엄마랑 아빠가 주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산타가 입고 있는 저 빨간색 옷은 코카콜라가 만든 것이고, 왜 하필 크리스마스 라는 날, 그러니까 예수인지 뭔지 어떤 사람이 진짜로 태어났는지 아닌지도 모를 그런 날에 왜 선물을 주고 받아야하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다른 아이들도 다들 선물을 받는 날이니 일단 선물은 줄게. 뭐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사실 크리스마스 라서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막 그런 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날이 휴일이라 좋기는 했다. 하루라도 더 쉴 수 있어서. 그래서 예수의 생일과 석가모니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기념할 마음은 없지만, 휴일이라 고마운 마음이기는 하다. 왜 마호메트의 생일은 휴일이 아닌가? 아니면 다른 종교의 다른 성자는 더 없나? 이런 생각도 했었다. 만약 다민족 다종교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류의 기념일이 훨씬 더 많았을까? 조선시대 선비들은 공자의 생일을 기념했을까?

연말에 다들 바쁘다고 일정 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할때, 50대 중반의 어느 선배 활동가가 이럴 때는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 잡으면 다들 시간 비어있을 거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 이미 중년이 된 나는 크리스마스에 딱히 할 일이 없다. 아이들은 친구들이랑 놀기 바쁘고, 달리 만날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휴일에 그런 류에 일에 동원되는 것도 싫다. 왜 내가 휴일까지 당신들과 만나야하나 하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리 다들 그날이 비어있어도 결국 그날로 일정을 잡지는 않을 것을 알기에.

기억 오류

이어 2021년에 쓴 두번째 글에는 삼성 불매가 깨진 이야기가 써있었다. 우연히도 바로 얼마 전에 시공사 책 불매 이야기에 붙여서 아쉽게도 최근에 삼성 불매가 깨진 이야기를 썼었는데, 딱 그 이야기였다. 이 글을 다시 읽고 확실히 사람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고 깨달았다. 나는 2021년 이맘때쯤 얼마되지 않는 시간을 두고 삼성 태블릿과 휴대폰을 사면서 긴 시간 이어온 삼성 불매를 깨트렸는데, 그 이유를 휴대폰 교체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태블릿을 구매한 것이 먼저였다. 당시에도 지금도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늘 회의가 많았던 나는 매번 출력된 종이 안건지에 기록을 남기고 그걸 잘 정리해서 보관하는 것이 어려웠고, 자주 그 기록을 찾지 못해 곤란해하곤 했다. 일단 출력하는 종이도 너무 아깝다. 간혹 회의자료 양이 많을 때에는 백쪽, 이백쪽을 넘기기도 하는데 고작 두세시간 회의를 위해 이정도 양의 종이 안건지를 출력하는 건 너무 큰 낭비였다. 그래서 더 늦기전에 태블릿을 구매해서 앞으로 모든 회의자료는 전자파일로 받아서 기록하고, 다양한 회의 성격에 따라 카테고리를 지정해 회의자료를 저장해두면 나중에 필요할 때 찾으려고 했다. 그러려면 펜이 포함된 태블릿이 필요했고, 여기저기 회의장소를 옮겨다니려면 크기도 작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가격도 비싸지 않았으면 좋겠지. 이에 딱 맞는 태블릿이 하나 있었는데, 삼성 제품이었다. 망설이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구매했다. 이 태블릿은 지금까지도 여러 회의를 다닐 때 잘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에 문제가 생겼다. 이 역시도 내 기억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가격 대비 성능이 괜찮은 중국산 폰을 쓰고 있었는데, 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일 때문에 경기도를 다닐 일도 많은 편인데,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가면 내 전화기로 통화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느 날 서너 명의 일행과 일종의 출장을 가는 길에 전철로 이동하는 동료와 소통할 일이 있었는데, 이 동료가 내 전화기로 통화 연결이 안 된다고 나와 같이 있던 다른 사람에게 연락했다. 당시 내 전화기는 멀쩡히 잘 켜져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내가 내 전화기로 같이 있던 다른 일행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내 전화기에서는 신호가 갔지만, 그 사람의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반대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일행이 내게 전화를 걸면 그의 전화기에 신호는 가고 있었지만, 내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아니, 어느 전화기가 서울을 벗어나면 통화가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럼 나는 평생 서울에서 한발도 안 나가고 살아야 하나?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아이티 전문가와 함께 알아보니 그 기종이 그런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해결책을 찾아봤다. 하루종일 몇 가지 방법을 찾아보고 시도도 해보았는데 모두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니 전화가 잘 되었다. 그후로 경기도로 나갈 일이 생길 때마다 연락이 되지 않는 불편을 겪었고, 매주 적어도 두 번 이상 경기도로 다녀올 일이 생긴 내가 어쩔수 없이 전화기를 바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어보니 아니었다.

사실 2021년 크리스마스 이브 며칠 전에 실수로 전화기를 변기에 빠뜨렸고, 곧바로 꺼내서 끄고 잘 말리고 나중에 다시 켰는데, 전화통화 기능이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그제서야, 아, 그때 저런 일이 있었지 하고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저 중국산 가성비 괜찮은 폰은 서울에서는 사용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경기도만 나가도 통화가 안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한동안 사용했었고, 어느날 폰을 빠뜨렸다가 다시 살렸더니 이번엔 아예 전화통화 기능 자체가 안 되는 상태였다고. 전화통화를 할 수 없는 전화기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급하게 새로운 전화기를 알아봤다. 그 전까지 계속 써왔던 엘지는 휴대폰 시장에서 철수했고, 아이폰은 가격도 비쌌고, 내가 잘 활용할 자신도 없었다. 결국 삼성 밖에 답이 없었다. 이게 내가 바로 직전에 태블릿을 사면서 견고한 담장이 한번 허물어진 후라서 좀 더 쉽게 삼성으로 기울어진 측면이 있다.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아이폰을 고려해봤을 것이다. 단 한번도 아이폰을 써본적은 없지만, 주위에 아이폰을 쓰면서 이게 불편하다 혹은 저게 잘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었다. 물론 제대로 잘 쓰는 사람들도 보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고, 아이폰을 제대로 잘 쓰기 위해 뭔가 알아보고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그냥 좀 쉽게 타협했다. 처음으로 삼성 휴대폰을 구매했다. 예전에 엘지 저가형 전화기들이 대체로 오래가지 못하고 딱 약정기간 지나면 어딘가 망가지곤 하길래, 이번에는 저가형 모델 말고 좀 제대로 된 제품을 사서 오래 쓰자고 생각했고 그렇게 지금 쓰는 이 폰을 사서 쓰던 유심을 끼워 썼다.

아마 오늘 우연히 북플에 들어와 21년 오늘 내가 썼던 글을 읽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긴 시간 이 건에 대한 내 기억은 오염된 상태로 머물렀을 것이다. 이것도 내 기준에서는 신기한 일이긴 하다.

설마가 맞아떨어질 확률은?

엊그제 밤에 모 유통회사의 물류창고로 야간 알바를 하러 갔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좀 자세히 쓸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 일단은 넘어가자. 4시간 반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식사시간 겸 휴식 시간이 1시간 주어진다. 끝나면 다시 4시간 반 쉼없이 일해하 한다. 총 10시간. 휴식은 딱 한 번 한 시간. 이걸 식사시간 30분과 두세시간마다 10분 정도씩 해서 여러 번 쉴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4시간 반 동안 어떻게 화장실도 한 번 안가고 일을 할 수 있나? 한 두 시간 정도 일을 열심히 하면 잠시라도 한 5분이라도 앉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심지어 그날은 전체 작업장에 일괄 1시간 연장 근무 지침이 내려왔다고 했다. 그럼 휴식 이후 5시간 반 동안 쉬지 못하고 일해야 했다. 만약 연장 근무가 싫으면 먼저 퇴근해도 되지만, 그때는 셔틀버스가 제공되지 않았다. 주로 도시 외곽에 있는 물류센터로 셔틀버스 없이 출퇴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주 운이 좋게 물류센터 근처에 살아서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하거나 아니면 차를 운전해야 하는데, 거리도 멀고 차도 없는 나로서는 그 새벽에 집에 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강제는 아닐지만 어쩔수 없이 한시간 연장에 따라야 했던 나는 그 마지막 한 시간이 너무 너무 힘들었다.

사실 그날 하루만 일했다면 그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을텐데, 그 전날도 같은 조건으로 일했고, 그때는 전체 일괄 30분 연장 근무였고 그때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즉, 나는 이틀 연속으로 총 21시간 30분 일을 했다. 이건 딱 센터에서 업무에 들어간 시간만 그렇고 셔틀버스를 타고 출근했다가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돌아온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27시간 30분이다. 첫날 오후 4시 반에 집에서 출발해, 4시 50분에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탔고, 5시 20분이 채 되지 않아 물류센터에 도착했다. 저녁 6시부터 일을 시작해 다음날 새벽 4시에 일을 마치는데, 30분 연장근무를 했으니 4시 반에 끝났고, 셔틀버스를 타고 출발시간인 5시까지 기다렸다가 5시 반쯤 셔틀버스를 내렸고 집에 도착한 것은 거의 6시였다. 자, 일단 여기까지 첫날 출근에서 퇴근까지 13시간 30분 걸렸다. 편의점에서 사온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고, 간단히 씻고 잠든 것이 대략 7시, 잠에서 깬 것이 오후 2시였다. 7시간 잤는데도 너무 피로가 가시지 않아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았다. 자는 동안 일어난 일들과 연락온 것들을 확인하고 간단히 할 일들을 좀 하고 나니 한시간 반쯤 휙 지나 있었고, 이제 씻고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다시 오후 4시 반에 집에서 나서기까지 집에 머문 시간은 10시간 30분이었다. 둘째날도 4시 50분에 셔틀버스를 타고 5시 20분쯤 센터에 도착해, 6시에 일을 시작했다. 아까 말했듯이 이날은 1시간 연장근무를 해서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을 마쳤고 5시 반에 셔틀버스가 출발해 6시쯤 내렸고, 집에 도착한 것은 6시 반이었다. 14시간 걸린 것이다.

센터에서 유일하게 주어지는 1시간의 휴식이 또 마냥 쉴수만은 없는 시간이다. 이것도 어찌보면 약간 전쟁같다. 쉬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엄청 서둘러서 움직인다. 출입구 보안대를 통과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사람들이 엄청 길게 줄을 서야하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5분 안에 나가기도 하지만 운이 나쁘면 여기서 10분을 지체하기도 한다. 그리고 식당에 가면 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다른 층에도 식당이 있다는데, 사람이 좀 덜 몰리는 식당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리다 식판에 음식을 담아 나오면 이제 빈 자리를 찾아 헤매어야 한다. 멀리서 보고 빈자리인가 싶어사 가보면 가방이나 옷이 의자에 놓인 경우도 있다. 사실 모르는 사람들과 바짝 붙어서 밥을 먹기가 부담스러워 적어도 한 칸씩은 띄우고 앉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사치다. 첫날은 몰랐는데 둘째날 좀 더 늦게 움직였더니 식당 입구에서 대각선 반대편으로 창가에 창을 바라보고 한명씩 앉을 수 있는 자리들이 몇 개 있었다. 많지는 않았다. 이 자리가 딱 좋겠다고 생각했고, 음식을 담아서 돌아왔다. 다행히 그때 마침 빈 자리가 몇 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빈자리들은 다 찼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열심히 밥을 먹고 있었는데 창문으로 내 바로 뒤에 누군가 서있는 모습이 비쳐보였다. 밤이라 창 밖은 깜깜하고 실내는 밝으니 이렇게 거울처럼 비쳐보인다. 그런데 저 여성은 왜 밥을 안 먹고 저렇게 내 뒤에 서 있는 건가? 혹시 자리가 없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창을 바라보고 앉을 수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자리는 다 차있었지만, 다른 테이블들에는 그래도 빈자리가 꽤 있었다. 왜 저기로 가서 먹지 않는 거지? 꼭 굳이 여기 창가 자리에 앉아야겠다는 것인가? 그래서 내 뒤에 서서 나보고 빨리 먹고 비키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인가? 이때부터 갑자기 입맛이 확 사라지고, 남은 음식들을 얼른 입에 쑤셔박고 일어서서 나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 뒤에 저러고 서있다고 해서 내가 꼭 비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단 한 번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사라진 입맛과 나빠진 기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자가 배식을 하는 식당에서 나는 절대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안그래도 아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어떤 젊은 사람이 엄청나게 많이 남은 밥이 담긴 식판을 들고 일어나서 퇴식구 쪽으로 걸어가길래 속으로 엄청 욕을 퍼부었다. 아니, 나는 정말 먹지도 못할 음식을 산더미처럼 담아와서는 결국 저렇게 버리는 짓거리를 이해할 수 없다. 육체노동은 고되고 배가 고플테니 많이 먹고 싶었겠지. 그럼 실제로 많이 먹어야 할게 아닌가. 왜 ˝저걸 다 먹어?˝ 싶을 양을 퍼담아 와서는 다 못 먹고 버리는 건지? 진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다들 엄청 많이 퍼가는데, 나중에 보면 대체로 음식들을 남기더라. 사람이 하는 것이다 보니 어쩌다 보면 많이 펄수도 있다. 그럼 어쨌거나 본인이 퍼왔으니 다 먹어야지. 안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많이 담지말고, 적당양만 담아온 후에 먹다가 부족하면 더 담으면 될 일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나는 대개 밥풀 하나, 국물 한 숟갈, 반찬 한 조각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라 뒤에 그렇게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고도 어쨌든 식판을 비워나갔다. 아무 맛도 못 느끼고 그저 꾸역꾸역 음식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일어섰다. 일어서면서도 생각했다. 설마 나보고 비키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거야? 아니겠지? 설마 아니지? 그랬는데, 그 설마는 결국 맞았다. 그 여성은 내가 일어서자 잽싸게 테이블 빈 자리에 놓여있던 자신의 식판을 들고 내가 앉아있던 자리로 향했다.

일어서기 전에는 몰랐는데, 분명 그 사람은 테이블 빈 자리에 자신의 식판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럼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먹으면 될 일 아닌가? 빈 자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제법 많았는데 밥 먹고 있는 사람 뒤에 서서 눈치를 주면서 기다린다? 왜?

일이 고되고 힘든데다가 휴식 시간도 한 번 뿐인데 그 귀한 휴식시간이 이렇게 힘들게 다 지나가버린다. 밥을 다 먹고 내 작업장으로 돌아오면 정말 한 시간 중 거의 50분 가까이 지나있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줄을 덜 서고 좀 일찍 밥을 먹은 날에는 40분 가까이 지나있더라.

머리카락 길이와 성별 사이의 편견

사람들이 남자 화장실에서 자꾸 내 긴 머리를 보고 놀라서 요즘 출근할 때는 아예 작업복처럼 입고 다니는 후드집업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데도 화장실은 몇 개 있지도 않고 또 좁다. 짧은 휴식 시간에 화장실에서도 줄을 서느라 시간을 낭비하면 짜증나는데, 나 때문에 누군가 놀라서 시간을 지체하면 그것도 민폐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저번에 한번 내가 임원으로 활동하는 조합에서 워크숍을 갔는데 일행인 남성들 중 머리를 길러서 묶고 다니는 사람이 나 포함 세명이었다. 나머지 머리가 짧은 남성이 더 소수였다. 그리고 여성 일행들은 모두 머리가 짧았다. 휴게소나 식담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우리 일행들을 보고 저 몇 안되는 사람들 중에 머리 긴 남성이 셋이나 포함된 일행은 뭐하는 그룹인가 궁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페크pek0501 2024-12-25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머리가 긴 남성에 대해 저는,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편견을 갖고 있어요. 화가나 전문 사진가 쪽으로 보이죠..^^

감은빛 2024-12-26 10:41   좋아요 1 | URL
그래서 요즘 처음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그런 오해들을 하시더라구요. 음악이나 미술 쪽으로. 저랑 친한 지인들은 글쓰는 분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하구요. ㅎㅎㅎㅎ

잉크냄새 2024-12-25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류창고 이야기는 얼마전 읽은 한승태 님의 <어떤 동사의 멸종>이라는 노동 에세이의 한 부분 같네요.

감은빛 2024-12-26 10:4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누군가의 요청으로 물류센터에 일하러 다니는 기록을 꾸준히 남기고 있어요. 책으로 펴낼 만큼의 가치는 없겠지만,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면, 기꺼이 쓸 수 있겠지요.

희선 2024-12-27 0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탄절 지나갔네요 무슨 날 같은 건 다 상술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떤 날은 즐겁게 지내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 않은 날도 있겠습니다 쉬는 날이어서 아는 날도 있지만, 지금은 거의 무슨 날이기도 하더군요 그런 거 다 모르지만, 환경을 생각하고 만든 날도 있고 어쨌든 이런저런 날이 많네요

물류센터 일 정말 쉽지 않을 듯하네요 일은 힘들고 쉬는 시간도 적고 밥이라도 편하게 먹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그렇지 않네요 밤을 새워 일하면 자도 잔 것 같지 않기도 하죠 한동안 힘드시겠군요 잠 잘 주무시기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4-12-27 06:18   좋아요 1 | URL
제가 좀 많이 삐딱한 인간이라 그렇습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굳이 들춰내는 경향이 있네요.

물류센터 정말 생각보다 힘들었어요. 얼마나 더 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일단 좀 더 해보려구요. 아침에 집에 도착하면 아주 가볍게 배를 채우고 기절하듯 잠들어요. 오후쯤 깨는데 적지 않은 시간 자도 피로가 잘 풀리지 않네요. 고맙습니다!
 


추워요. 안아주세요.

꿈을 꾸었다. 차가워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지나가 무척 추웠다. 나는 눈이 가득 쌓인 어느 넓은 공간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 걷고 또 걸어도 그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무한히 반복되는 어느 지옥인듯, 저주 혹은 마법에 걸린 듯, 나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갇혀 있었다. 왜 그렇게 거길 걷고 있었던 것인지,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등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누군가를 찾아가고 있었다. 추위에 몸이 얼어붙고, 오래 걸은 탓에 너무 지쳐 나는 결국 눈 위에 쓰러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공간이 드넓은 눈 쌓인 평야에서 바닷가 언덕으로 바뀌어 있었다. 탁 트인 넓은 바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어느 큰 나무 아래 누워있었고, 누군가 내 곁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 그 부분은 그렇게 바꾸는 것이 좋겠어. 아니. 거기는 고치지 말라고 저번에 말했잖아. 어. 그래. 그래. 그렇게 해줘. 여성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약간 짜증이 묻어 있었다. 누구와 무슨 통화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내 시야에 그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그가 누군지 더 궁금해야 했다고 꿈을 깬 후에 생각했지만, 꿈 속의 나는 마치 그를 아는 듯,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나는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켰고, 그제서야 전화기를 들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전화를 끊었고 곧 내게 다가왔다. 넓고 푸른 바다와 그만큼 넓고 파란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고, 강한 바다 바람이 그의 머리칼과 내 머리칼을 날렸다. 내게 다가오는 그의 머리 뒤쪽에 해가 있어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마구 날려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내게 다가와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추워요. 안아주세요. 그리고 잠에서 깼다.

깨고 보니 나는 이불을 차고 맨 몸으로 자고 있었다. 그래서 추웠구나.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보일러 온도를 올렸다.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꿈의 여운에 잠시 빠져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라고 꿈 속의 나는 생각했지만, 깨고 나니 그 목소리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했다. 얼굴은 보지 못 했다. 꿈 속의 나는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그 눈 쌓인 평원을 헤매어 찾아가던 이가 그였던 것일까? 갈증을 느껴 물을 마시고 시간을 확인한 후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찾아 오늘 일정을 보았다. 일터의 일정은 두어개 있었고, 개인 일정은 없었다. 더 자야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잠들면 그 장면에 이어서 계속 꿈을 꿀 수 있을까? 간혹 그런 날들이 있었다. 꿈에서 깼다가 비몽사몽 간에 잠시 알람을 끄거나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잠들었을 때 그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거나 같은 장면을 조금 다르게 다시 반복하거나.

다시 꿈 속에서 그를 만나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들지는 못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깜깜한 창 밖을 보며, 꿈에서 보았던 바다 풍경을 떠올렸다. 최근에 꿈에서 바다를 자주 보았던 것 같다. 실제로는 마지막으로 바다를 보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부산이었다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산 허리에 있었던 우리 집에서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집은 좁고 낡았지만, 그 풍경 하나만은 참 좋았다.

생각이 부산으로 이어졌을 때, 문득 기억났다. 꿈에서 깨기 직전 들었던 귓속말. 추워요. 안아주세요. 라는 말.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때 나는 선수촌을 방문하는 귀빈들에게 영어 통역을 하는 자원봉사를 했었다. 영어를 그 정도로 잘 하지는 못했지만, 큰 역할은 선수촌을 소개하는 것이어서 그 정도는 외워서 할 수 있었고, 간단한 질문에는 대답이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우리 팀에는 미국에 살다와서 영어를 정말 잘하는 친구가 있어서 대부분 중요한 사람들이 방문했을 때에는 그 친구가 메인으로 나갔고, 나를 비롯해 나머지 사람들은 보조로 귀빈을 모시고 온 일행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곤 했다. 실제로 내가 메인을 맡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리 팀은 영어를 주로 하는 이들이 서너명, 중국어가 한 명, 일본어가 아마 두 명이었고, 아랍어를 맡은 여대생이 여러 명 있었다. 부산 외국어대학교 아랍어 전공 학생들이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이 아이들은 대부분 신입생이어서 아랍어를 썩 잘하지는 못 했다. 그래서 아랍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귀빈들이 와도 메인은 아까 말한 영어를 네이티브 처럼 하는 친구가 맡았고, 이 여학생들은 보조만 맡았었다.

기억나는 상황 중 하나는 이 친구들이 젊고 예뻐서 아랍쪽 수행원들 중 귀족(혹은 왕족) 남성들이 자주 꼬드기곤 했다는 것. 일부다처제 국가에서 온 어느 왕족이 자신의 일곱번째(혹은 여덟번째) 아내가 되면 평생 돈 걱정 없이 잘 살 수 있다고 꼬드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이 사람은 꽃다발을 들고 몇 번이나 찾아와서 나도 그 털이 많은 외모를 기억한다. 이 여학생 무리(아마 서너명이었던 것 같다.)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입생이 아닌, 즉 2학년 혹은 3학년이었던 여성이 있었다. 이 친구는 활달해서 우리 팀의 다른 남성들(대부분 나처럼 복학생이라 나이가 많았던)과도 친하게 지냈었다. 그는 귀빈이 방문하지 않아 쉬는 시간일 때, 주로 다른 팀원들에게 다른 언어를 알려달라고 하기도 했었는데, 가장 먼저 배우고 싶은 말이 저거였다. 추워요. 안아주세요. 그는 이 말을 거의 모든 언어로 다 익혀서 어느 나라 남성을 만나더라도 이 말 한 마디로 꼬실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는 더운 여름이었다. 우리가 대기하던 사무실에는 에어컨도 없이 더운 바람만 나오는 선풍기 두 대가 전부였다. 차라리 선수촌 외곽 나무 그늘에 나가 있는 것이 더 시원했다. 그런 때에 그는 우리 앞에서 마치 추위에 떨듯 몸을 떠는 연기를 펼치며, 영어와 일어, 중국어 등으로 추워요. 안아주세요. 라는 말을 과장스럽게 말했다.

지금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이 아이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 외대 학생들 무리 중 그나마 나와 대화를 가장 많이 했던 아이였을텐데. 어렴풋이 얼굴이 기억나는 건, 신입생 중 가장 예뻤던, 그래서 아까 어느 일부다처제 국가 왕족이 여러 번 찾아왔었던 아이 밖에 없다. 콧등이 오똑하고 눈이 깊고 컸던 얼굴이 떠오른다.

꿈 속에서 저 귓속말을 했던 그는 과거 선수촌 귀빈팀의 그 학생들 중 누구도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은 보지 못 했지만 느낌이 그랬다. 아마도 어쩌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기억나지 않는 꿈 속의 인물을 떠올리려 노력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다만 꿈 속의 그 바다 풍경이 더 잊히지 않는다. 이번 주말에는 차를 빌려 겨울 바다를 보러 가보고 싶어졌다. 이제 여의도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아, 헌재 앞에는 좀 더 있다가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안주가 친절하고, 사장님이 맛있어요.

어제 어느 유흥가 술집 앞을 지나며 본 문구다. 이거 말고도 말이 되지 않는 다른 문구들도 더 붙어 있었는데, 이 말이 제일 어이가 없어서 기억해두었다. 안주가 어떻게 친절할 수 있으며, 사장님이 왜 맛있을까? 먹어봤나? 이런 말이 안되는 문구를 붙여놓으면 젊은 친구들이 재미있다고 막 찾아오려나? 나라면 오히려 더 안 갈 것 같은데.

가끔 온라인에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들 중,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만나기도 한다. 검색해서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검색을 해봐도 딱 명확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어떤 때에는 아이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는데, 아이들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 하더라. 그런데 최근에 보면 유행하는 어떤 표현들, 밈이라 부르는 것들을 온라인이 아닌 일상에서도 자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주 옛날식으로 생각해보면 유행어 같은 것이려나. 옛날에도 주로 티비에 나오는 유명한 배우나 코미디언들의 유행어가 있었다. 그것들과 요즘 주로 사용하는 밈들은 어떻게 다를까? 또 얼마나 비슷할까?

티비가 없고 남들이 자주 본다는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나는 사람들의 수다에 잘 끼어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최근에 사람들이 이븐하게 라는 아니 이분하게 라고 써야하나? 암튼 이 말을 자주 쓰던데, 이게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어떤 상황에서 쓰는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들은 다 웃고 있는데, 나 혼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나 때문에 흥이 깨져 버리곤 한다. 그래서 내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약간 질린 표정으로 그냥 그런 게 있어요. 하고 만다.

지금 읽고 있는 책들

북플에서 글을 쓸 때는 피씨에서 쓸 때와 달리 여러 책들을 본문에 넣기가 불편하네. 책을 가져올 때마다 별점을 체크해야만 할 것 처럼 만들어놓았다. 지난 달 SF읽기 모임은 다들 일정이 생겨 한 달 뒤로 미뤘는데, 이번 달에는 윤석열 때문에 또 모임이 미뤄지고 있다. 이 책 [어둠의 속도]를 아직 다 읽지 못해 다행일 수도 있는데, 얼른 이 책을 마치고 다른 작가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크다.

누군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 중에 한 권만 추천한다면, [가면 산장 살인 사건]을 권한다고 하길래, 곧바로 구매했다. 확실히 몰입감이 대단한 이야기다. 다만, 급한 일 때문에 잠시 미뤄뒀다가 나중에 한 번에 읽을 여유가 생길 때 읽어야지 하고 미룬지 조금 시간이 지났다. 과연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으리 기대가 크다.

아직 제대로 읽지 못한 작가들 중, 가장 읽고 싶은 작가는 어슐러 K 르 귄이다. [어둠의 왼손]이라는 유명한 책을 읽고 싶으나, 평생 전두환 아들 출판사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겠다고 마음 먹고 20년 훨씬 넘게 그 다짐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라 읽지 못하고 있다. 그럴 확률은 희박하지만, 혹시 시공사가 망하거나(제발 그랬으면 좋겠지만!) 시공사가 르 귄의 판권을 모두 포기하거나 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과연 내가 죽기 전에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냥 빌려 읽으면 되지 않냐고 말했는데, 그 이름이 박힌 책을 손에 쥐고 싶지 않은 내 기분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 물론 전재국이 시공사를 팔아치웠다는 기사를 읽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고, 시공사 외의 다른 출판사와 유통사는 그대로 갖고 있는 사실을 보면 대외적으로만 매각한 것으로 하고, 뒤로는 어떤 다른 형태의 거래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설사 완전히 팔았다고 해도 긴 시간 전두환 부정 축재 재산을 기반으로 설립하고 성장한 출판사라는 사실은 변함 없으므로 시공사 책을 사거나 읽을 수는 없다.

거의 20년 가까이 지켰던 삼성 불매는 엘지가 휴대폰을 만들지 않아서 무너질 위기에 처했었고, 값싸고 성능이 괜찮다는 중국산 폰으로 몇 해를 더 버텼는데, 이게 가성비는 좋지만 본질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들이 있어서 결국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삼성 휴대폰과 태블릿을 구매하며 깨졌다. 그럼 시공사 불매도 그냥 깨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싶긴 한데,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음이다. 긴 시간 지켜온 삼성 불매를 깰 때의 그 마음이 참 쉽지 않았다. 정말 전화도 많이 하고, 이동 중에 휴대폰으로 업무도 많이 보는 상황이라, 본질적인 기능에서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폰은 일단 가격에서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고, 안 써봤지만 그게 참 쉽지 않다고 내 주위 아이폰 이용자들을 보면서 느꼈기 때문에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암튼 르 귄의 책들을 계속 포기하고 살았는데, 그래서 검색해 볼 생각도 못하고 지냈는데, 이번에 검색해보니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낸 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 그리고 어스시 전집을 보았다. 음, 이건 지난 1년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야. 라고 나를 설득하며, 빠른 속도로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했다. 이번 연말에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조용히 책이랑 지내야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12-19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스시가 그렇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신뢰하는 친구로부터 강한 추천을 받아 사두었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ㅎㅎ

감은빛 2024-12-19 22:12   좋아요 0 | URL
오늘 책 받았어요. 제가 먼저 읽을게요. 물론 시간이 걸릴테니 그 중간에 다락방님께서 먼저 마치실 수도 있겠지만. ㅎㅎ

잉크냄새 2024-12-19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아직 삼성 불매 쭉 이어가고 있어요. 그다지 고민할 만한 제품도 없지만요.

감은빛 2024-12-19 22:14   좋아요 0 | URL
부럽습니다. 잉크냄새님. 그렇다면 혹시 휴대폰은 아이폰을 쓰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이 글에도 썼지만, 당시에 정말 열심히 알아봤는데, 아이폰을 제외하면 삼성 밖에 답을 찾지 못했거든요.

transient-guest 2024-12-27 0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르귄의 책은 다 좋아하는데 어스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합니다. 판타지와 함께 더욱 묵직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4-12-27 06:14   좋아요 1 | URL
네, 어스시는 좀 여유가 있을 때 확 몰아서 읽고 싶어서 아직 아껴두고 있어요. 요즘은 이런 저런 상황 때문에 가볍게는 읽어도 막 몰입하기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