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하는 하루를 사진으로 담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5] 《타부 치요시오:田渕義雄-森暮らしの家》(小學館,2002)



 사진으로 담는 이야기는 한 갈래가 아닙니다. 사진찍기 한길이란 한 가닥이 아닙니다. 보도사진이 되든 상업사진이 되든 예술사진이 되든, 사진은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나아가지 않습니다.

 사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으레 ‘세상을 바꾼 사진’을 말합니다. 사진은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만, 사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할 때에 ‘깜짝 놀랄 만한 사진’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아요. 하나도 깜짝 놀랄 만하지 않을 뿐더러, 더없이 수수한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여느 사람 여느 삶 여느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루이스 W.하인 님 사진이든 도로시아 랭 님 사진이든 ‘여느 사람 여느 삶 여느 모습’입니다. 무언가 대단하거나 남다르거나 돋보이거나 빼어난 사람들 빼어난 삶 빼어난 모습이 아니에요. 아주 어린 아이들을 공장에서 부려먹던 일이 ‘흔했을’ 뿐더러, 가난한 집에서는 누구나 으레 이렇게 일을 했기에 이처럼 ‘수수한 여느 모습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이민자이든 이주노동자이든 이름나거나 잘생기거나 어찌어찌한 사람이 아니라 ‘수수한 여느 사람’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나중에 이름값을 얻은 ‘루이스 W.하인’이요 ‘도로시아 랭’입니다만, 이들 사진쟁이는 ‘수수한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담기 앞서까지 참으로 수수한 여느 사진쟁이였습니다. 수수한 여느 사진쟁이가 수수한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세상을 바꾸는 사진이 있다 한다면 이렇게 세상을 바꾼다’고 하겠어요.

 《森暮らしの家》라는 책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森暮らしの家》라는 책은 딱히 사진책 갈래에 넣을 만하지 않을 수 있으나, 차분히 돌아보면 사진책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사람 타부 치요시오 님이 당신 삶을 사진으로 보여주니까 사진책입니다. 숲속에서 나무로 집을 짓고 자연과 하나되어 보내는 삶을 이렁저렁 글로도 담지만, 무엇보다 사진으로 담아 보여줍니다.

 언뜻 보기에 숲속에서 전기를 안 쓰고 자연에서 얻는 푸성귀랑 나무랑 햇볕이랑 물로 꾸리는 삶이란, 오늘날 도시물질문명 사회에서는 톡톡 튄다든지 꿈만 같다든지 엉뚱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별 모든 사람은 숲사람이었고 들사람이었으며 멧사람이자 바닷사람이었습니다. 도시사람이기 앞서 누구나 시골사람이던 우리들이에요. 《森暮らしの家》라는 사진책은 숲에서 숲을 사랑하고 아끼면서 보내는 나날이란 ‘잘난 삶’이 아니라 ‘여느 삶’이요, 대단하거나 거룩하거나 훌륭하다는 이름이 아니라, ‘수수한 삶’이면서 이름을 붙이지 않기에 즐거운 나날임을 가만가만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살림하는 하루를 사진으로 담은 책”이 《森暮らしの家》라 해도 좋습니다. 숲에서 살림하는 하루이니까, ‘숲살림 사진책’이라 할 수 있겠지요. 숲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집을 어떻게 짓고 집을 어떻게 가꾸며 하루하루 살림을 어떻게 꾸리면서 즐거움을 맛보는가를 보여주는 사진책이라 하겠어요.

 숲에서 사는 사람으로서는 숲삶을 담는 책입니다. 바닷가에서 살아간다면 바다삶을 담으면 되고,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게 살거나 조촐하게 산다면 그예 골목삶을 담으면 돼요.

 아이를 돌보며 내내 집에 붙어서 보내야 하는 삶이라 한다면, 나 스스로 내 집살림을 사진으로 담으면 됩니다. ‘살림하는 내 하루’라 해서 보잘것없거나 하잘것없지 않습니다. 여느 수수한 삶이기 때문에 초라하거나 볼썽사나울 까닭이 없습니다. 살림하는 내 하루이기에 나 스스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살림을 일구는 내 삶인 만큼 나 스스로 얼마든지 사진에 담을 값과 뜻과 멋과 맛이 있어요.

 예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살림살이는 예쁘게 담으면 됩니다. 어지러이 늘어놓는 사람들 살림살이는 어지러이 늘어놓은 대로 담으면 돼요.

 인문지리학이나 문화인류학을 하는 전문가나 학자들은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살피어 이야기를 담거나 사진을 찍거나 글을 씁니다. 사건과 사고를 다룬다는 보도사진이란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담는 일’입니다. 아흔 살 할머니가 쪽방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갈 때에 이 모습만 담아야 보도사진이 되거나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중산층이라 할 만한 네 식구들 여느 수수한 모습을 가만히 담아 놓아도 얼마든지 보도사진이나 다큐사진이 됩니다.

 기록사진과 앨범사진은 종이 하나만큼 다르지만, 두 사진은 한몸입니다. 쓰임새에 따라 달리 자리잡을 뿐이나, 기념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한동아리입니다. 우리 집에서 우리 식구들 담는 사진이 되든, 이웃집 가난한 살림살이를 담는 사진이 되든, 똑같은 보도사진이자 예술사진이 되면서 다큐사진이든 기념사진이든 됩니다. 이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이랑 이 사진을 쓰려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다뿐,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나누는 마음은 마찬가지예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거나 봉사를 하러 가거나 취재를 하러 갈 때에도 얼마든지 놀랍거나 대단한 사진을 얻습니다. 아니, 멀리 사진마실을 갈수록 놀랍거나 대단한 사진을 얻습니다. 내 둘레나 내 가까이에서 사진삶을 꾸린다면 하나도 놀랍지 않고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사진을 얻습니다. 아니, 얻는다기보다 즐기지요. 내 둘레랑 내 가까이에서는 아주 흔하며 너른 수수한 사진을 즐깁니다. 그런데, 사진이란 바로 흔한 삶이 아닐까요. 사진이란 곧 수수한 모습이 아닌가요. 사진이란 무엇보다 너른 이야기가 아닐는지요. (4344.1.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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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1-20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숲살림 사진책이라.

약간 유행처럼 해외블로거들 사이에서 아침식사 사진 찍은 책들이 나왔더랬습니다.
사진, 그리고 그 사진이 담고 있는 시간과 시간의 흐름이 다 어우러져 인상적인 사진책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파란놀 2011-01-20 08:37   좋아요 0 | URL
스스로 즐겁게 살아가며 사진을 즐기고,
스스로 재미나게 살아가며 글을 쓰면,
책이란 참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뜨개책


 뜨개질을 안 하면서 뜨개책을 쓸 수 없겠지요. 뜨개질하는 사람 마음을 모르거나 살피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뜨개질 이야기를 쓰거나 나눌 수 있나요. 새내기로서 양말 한 켤레 뜨개하기란 얼마나 힘들며 오래 걸리는 줄을 사람들은 얼마나 헤아릴까요.

 헌책방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나, 헌책방 얘기를 책으로 묶거나 신문·잡지·방송에 싣는 사람은 헌책방을 얼마나 다녔을까요. 헌책방을 얼마나 생각해 보고, 사랑하거나 아끼며, 헌책방 일꾼 삶을 어느 만큼 헤아렸을까요.

 철거민이 되어 보아야 철거민 삶을 알 수 있다고 하겠지요. 철거민과 이웃이거나 동무라 하더라도 나 스스로 철거민일 때처럼 느끼지는 못해요. 기사를 읽거나 현장체험을 했다면 지식과 몇 가지 경험은 있되 삶은 아니에요.

 누구나 뜨개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헌책방을 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어떤 뜨개’를 말하는 사람인가요. ‘어떤 헌책방’을 다루려는 사람인가요.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서 ‘아이키우기 책’을 쓸 수 없어요. 자전거마실을 즐기지 않으면서 ‘자전거여행 책’을 쓸 수 없어요. 헌책방과 책과 삶과 사람과 사랑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헌책방 이야기책’을 쓸 수 없어요. 아니, 책 아닌 글조차 쓰지 못해요.

 사진기 단추를 누른대서 모두 사진이지 않아요. 볼펜을 놀리거나 자판을 두들겼대서 다 글이지 않아요. 생김새가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사람 노릇을 하지 않아요. 겉모양이 밥과 똑같다 하지만, 플라스틱으로 만든 밥을 먹지 못해요. 플라스틱 꽃은 냄새도 없고 살아숨쉬지 않아요.

 살아숨쉬어야 비로소 사진이에요. 살아숨쉬어야 바야흐로 글이에요. 살아숨쉬는 헌책방을 살아숨쉬는 내 넋으로 고이 껴안으면서 한몸 한마음이 되는 가운데 샘물처럼 맑고 시원하며 한결같이 솟아나야 참말로 ‘헌책방 이야기’라고 느껴요. 발바닥으로 써야 하는 ‘헌책방 이야기’이고, 눈물과 웃음으로 나누어야 할 ‘헌책방 이야기’예요.

 나는 두 아이 아버지로서 이렇게 말합니다. (4344.1.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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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책에 쓰는 글


 셈틀 켜서 글을 쓸 겨를을 내기 힘들다 보니, 새벽·아침·저녁·밤으로 공책을 펼쳐 글을 쓴다. 낮에 아이하고 놀거나 책을 읽히다가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면, 이때에도 공책에 글을 쓴다. 아이는 아빠 하듯 저도 작은 수첩에 ‘글씨 작은’ 그림을 줄 맞추어 깨알같이 그린다. 공책에 글을 쓰기로 한 지 어느새 보름쯤 지난다. 얼마나 쓸까 궁금했는데 앞으로도 신나게 쓰겠구나 싶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셈틀 앞에 앉는 겨를을 줄일밖에 없다. 그러면 이제는 공책에 글을 꽤 많이 쓰는 삶이 될 텐데, 공책에 쓴 글은 언제 타자로 옮길 수 있을까. 이래저래 까마득하다. 다만, 공책을 쓰다가 셈틀을 켤 수 없어도 내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끝없는 이야기를 적바림한다. 한숨과 눈물과 웃음을 고스란히 적는다. 조금은 홀가분하다고 느끼고, 살짝살짝 마음풀이를 한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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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33] 손닦는천

 어릴 때부터 ‘수건(手巾)’이라는 낱말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지만, 뾰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딱히 다른 낱말을 쓰는 어른도 없었습니다. 손을 닦든 낯을 닦든, 닦는 천인데, 어쩐지 ‘수건’은 제 쓰임새를 옳게 나타내지 못한다 싶었어요. ‘손수건’은 어떤 천일까요. ‘손수건’이란 말이 될까요. ‘발수건’은 또 어떤 천인가요. ‘발수건’이란 말이 될 수 있는가요. 아이를 씻기고 나서 물기를 훔칠 때에 아이한테 “저기 수건 가져오셔요.” 하고 말은 하지만, 아이한테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늘 아리송합니다. 아이 머리카락과 몸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생각합니다. 먼 옛날 농사짓던 사람이나 고기잡던 사람은 어떤 물건을 쓰면서 어떤 낱말을 주고받았으려나요.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건’이라 할 뿐 아니라 ‘타올(타월/towel)’이라고도 하지만, 우리 아이한테 참말 이 말을 고스란히 그냥 그저 그예 가르쳐야 하나 알쏭달쏭합니다. 깊어 가는 밤, 새근새근 잠든 아이 옆에 나란히 누워 헤아려 봅니다. 우리 아이한테는 ‘손닦는천’이라 하고 ‘발닦는천’이라 하며 ‘접시닦이천’이라 말해 볼까.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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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
송언 / 내일을여는책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딸내미 아빠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송언,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



- 책이름 :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
- 글 : 송언
- 펴낸곳 : 내일을여는책 (1997.5.25.)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시골 땅과 하늘을 바라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던 아이는 도시 땅과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도시에서는 아이한테 달빛 하나 가르치기 몹시 힘들었습니다. 워낙 갖은 불빛이 많아, 아빠가 제아무리 손가락으로 밤하늘 높다란 자리에 걸린 동그라미 하나를 가리킨다 한들, 달인 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시골에서는 달 둘레에 온갖 별이 반짝입니다. 달은 달대로 가리키며 가르쳐 주고, 별은 별대로 손가락으로 꼽으며 가르쳐 줍니다.

 도시에서 살며 풀과 꽃과 나무를 가르쳐 주기 참 벅찼습니다. 골목동네 곳곳에 예쁘장하거나 앙증맞게 꽃그릇이나 텃밭 일구는 분들 터전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으니 그럭저럭 가르쳐 줄 수 있었으나, 다른 모든 곳에서는 꽃이니 풀이니 나무이니 만나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그저 ‘빠방(자동차)’하고 건물만 가득합니다.


.. 경기도 땅 덕소의 연립주택 3층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큰놈 이슬이는 어두컴컴한 지하 셋방에서 꼬박 5년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유독 잔병치레가 잦았다 ..  (11쪽)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제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배웠거나 무엇을 배울 수 있었나 돌아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가까이 바다가 있고 갯벌이 있으며 골목동네 놀이동무하고 어울렸습니다. 바다는 쇠가시울타리로 꽁꽁 막히기는 했어도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다니며 바라보았고, 아직 새 건물 들어서지 않은 빈 땅에는 논이나 밭을 일구는 분이 있었으며, 물웅덩이에서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기찻길 옆 연탄공장 둘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라든지, 바로 이 옆에 붙은 국민학교를 여섯 해 다닌다든지 하면서 철길과 골목집과 판자집 삶을 ‘이런 삶은 이런 모양이다’ 하고 배우지는 않았으나, 내 둘레 사람들 여느 삶은 다 이러했으니 물처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노느라 바쁜 나날이었고, 한두 시간쯤 되는 길은 으레 걸었으며, 누군가하고 만나기로 했으면 ‘몇 시 몇 분 어디’에서 만난다 하지 않고 ‘언제쯤 어느 둘레’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삼십 분이든 한 시간이든 가볍게 기다리면서 골목골목 쏘다녀 본다든지 다른 동무랑 논다든지, 나중에 중학생쯤 되면 가만히 책을 읽으며 기다린다든지 했습니다.

 도시라지만 도시 같지 않은 인천에서 나고 자랐기에 사람다운 빛을 그럭저럭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싶은데, 아주 깊디깊은 도시 한복판 삶터였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는지 두렵습니다. 시골 아닌 도시에서 나고 자란 탓에 도시 아닌 시골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처럼 풀이나 꽃이나 나무 이름을 척척 헤아리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셨으면서 도시로 나와서 시집가고 아이 낳아 기르는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셨을까요.


.. 어제 저녁 무렵이었다. 지난 일요일에 내려왔으니 덕소에 오신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가 불쑥 물었다. “얘, 아범아. 요 아래 왜 노는 땅이 있지 않디?” “그런데요?” “내일도 사무실에 나가지 않는다니 함께 텃밭 좀 일궈 봤으면 해서 말이다.” “우리 땅도 아닌데 괜찮을까요?” “어차피 놀고 있는 땅인데 텃밭 좀 일궜다고 설마 뭐라 그럴라구.” “그럴까요, 그럼?” ..  (42쪽)


 도시에서 태어났으나 두 돌이 지나기 앞서 멧골자락으로 옮긴 첫딸 사름벼리는 앞으로 이 시골자락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거나 살피거나 헤아릴는지 궁금합니다. 제 아버지는 제 아버지를 키운 어머니한테 없는 여러 가지 길을 찾으며 살아갔다면, 딸아이는 제 아버지한테 없는 여러 가지 길을 살피며 살아갈까요. 제 아버지는 제 아버지를 키운 어머니와 달리 도시에서 시골로 왔다면, 딸아이는 제 아버지와 달리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로 가는 삶을 맞아들이려나요.

 어머니는 심부름을 참 많이 시켰고, 저는 심부름하기를 몹시 즐겼습니다. 어머니한테서 이것저것 곧바로 배운 집일은 드물지만, 언제나 곁에서 알짱거리면서 어깨너머로 요모조모 익혔습니다. 딸아이는 제 아버지가 했듯 저 또한 아버지 바지꽁무니 둘레에서 어정어정거리면서 이냥저냥 발치너머로 익히려나요. 어머니 삶이 제 삶이 되고, 제 삶이 아이 삶이 됩니다. 아이 삶을 생각한다면 아버지 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아주 또렷합니다. (4344.1.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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