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글쓰기


 앞에 메는 가방에 넣는 작은 수첩이 있다. 어디를 다니든 이것저것 끄적이는 수첩으로 삼는다. 돈을 얼마나 썼는가를 적기도 하고, 만난 사람하고 나눈 이야기를 쓰기도 하며, 그때그때 느낀 여러 가지를 적바림하기도 한다.

 빈 공책 두 벌을 마련한다. 빈 공책 하나에는 사진일기를 쓰기로 하고, 다른 하나에는 책일기를 쓰기로 한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아빠가 셈틀 앞에 너무 오래 매달리는 일은 좋지 않다고 느낀다. 따지고 보면, 아이랑 부대끼느라 셈틀 앞에 앉아 글쓰기를 할 겨를도 얼마 안 되지만, 셈틀 앞에 앉는 겨를을 더 줄여, 아이 옆에 나란히 앉거나 엎드려서 내 공책에 내 삶을 적으려 한다. 이렇게 하면 아이는 아빠 곁에서 놀거나 아빠를 따라 빈 종이나 달력이나 그림종이에 이것저것 그리겠지.

 종이에 글을 천천히 적는다. 셈틀로 적바림하는 글은 한글을 알면 누구나 읽는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없는 셈틀 글이다. 종이로 적는 글은 한글을 안달지라도 삐뚤빼뚤 쓰면 누구도 읽기 힘들다. 천천히 쓰되 또박또박 써야 하고, 바삐 쓴달지라도 꾹꾹 눌러 가면서 써야 한다. 종이에 쓰는 만큼 더 쓰고 싶어도 팔과 팔뚝과 손목과 손가락이 아프거나 저려 더 못 쓰곤 한다. 아이랑 놀거나 밥을 하거나 아이 오줌을 누이거나 하면서 쓰다가 쉰 다음 다시 써야 하기 일쑤인데, 이러거나 저러거나 괜찮다. 셈틀로 글을 쓸 때에는 애먼 전기를 먹으며 내내 켜 놓아야 한다.

 셈틀로 써서 셈틀로 읽는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에 찍어 나오는 종이책을 바란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이 종이책이 될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지만, 내가 쓰는 이야기를 책으로 묶을 때에는 전자책 아닌 종이책으로 묶고 싶다. 아주 많은 사람한테 읽혀야 하지는 않다. 꼭 알맞게 읽어 꼭 알맞게 잘 살아가는 길동무로 삼으면 즐겁다. 종이에 적바림하는 글은 나 혼자 읽을는지 모르고, 옆지기가 읽어 줄는지 모르며, 나중에 아이가 읽어 줄 수 있겠지. (4344.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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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의 철학
사이토 지로 / 개마고원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싸움판에서 길어올린 평화꽃
 [헌책방에서 만난 책 6] 사이토 지로, 《아톰의 철학》



- 책이름 : 아톰의 철학
- 글 : 사이토 지로
- 옮긴이 : 손상익
- 펴낸곳 : 개마고원 (1996.8.20.)


 (1) 평화를 사랑하는 아톰


 일본에서고 한국에서고 널리 사랑받거나 알려진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만화책으로는 1951년부터 그렸고, 만화영화로는 1963년부터 빚었다고 하니, 아주 놀라운 작품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우주소년 아톰〉이 제대로 읽히거나 올바로 읽혔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거의 ‘저패니메이션 앞잡이’쯤으로 읽힌다든지 ‘전쟁에 진 일본사람들한테 꿈과 사랑을 심어 준 만화’쯤으로 이야기하고 그칩니다.

 〈우주소년 아톰〉을 제대로 보았다거나, 제대로가 아니더라도 차분하게 만화책 한 권 만화영화 한 편을 보았다면, ‘저패니메이션 앞잡이’라든지 ‘전쟁에 진 일본사람들한테 꿈과 사랑을 심어 준 만화’라는 말은 섣불리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소년 아톰〉을 비롯한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작품은 ‘저패니메이션’이라든지 ‘전쟁에 져서 시름하는 사람한테 꿈을 심는’ 흐름하고는 사뭇 동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만화를 사랑해서 만화를 그린 데즈카 오사무 님이요, 전쟁을 싫어해서 싸움박질은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한결같이 만화로 담은 데즈카 오사무 님입니다.


.. ‘로봇이니까, 동물이니까’라는 차별로 경계선을 긋는 어리석음에 대해 데즈카는 비판한다 …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왜 서로 미워하고 죽여야만 하는 걸까. 진정으로 지켜야 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단호히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미래의 로봇 이야기를 통해 데즈카는 계속 묘사했던 것이다 … 데즈카는 〈마짱의 일기장〉부터 마지막 작품인 〈네오 파오스트(1988)〉에 이르는 모든 작품에서 철저하게 전쟁을 부정한다. 또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지배하는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의 만화가 생명의 소중함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  (18, 23, 59∼61쪽)


 만화 〈우주소년 아톰〉에 나오는 ‘아톰’은 몇 가지 장치가 있습니다. 아톰은 일곱 가지 숨은 힘이 있다고 하는데, 아톰이 내는 힘은 10만 마력이지만, 100만 마력이나 200만 마력 힘을 뽐내는 로봇하고 싸워도 거뜬히 이깁니다. 어느 로봇이나 전자두뇌하고 인공지능이 있으나, 아톰한테만큼은 다른 로봇한테 없는 ‘사랑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은 곱게 어우러지면서 슬기로 거듭납니다.

 무엇보다 아톰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로봇이요, ‘나쁜 일을 할 수 없’는 로봇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로봇을 만들 때에도 비슷하게 만들기는 하는데, 아톰을 만들 때에는 더 빈틈없이 ‘거짓말 못하도록’ 만들고 ‘나쁜 일 안 하도록’ 만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사람들은 ‘거짓말 못하는 아톰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안 믿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나쁜 일 할 수 없’는 아톰을 자꾸자꾸 싸움판으로 끌어들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나쁜 짓 저지르는 전쟁무기와 전쟁로봇을 끊임없이 만들어 모진 뒤탈이 생기니, 이 뒤탈을 아톰이 마무리해 달라고 바랍니다. 아톰 또한 로봇이기에 제아무리 ‘싸움꾼 로봇’이라 할지라도 ‘동무 로봇’을 망가뜨리거나 죽여야 할 때에는 몹시 괴롭고 슬픕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톰이 다른 로봇을 부수면서 얼마나 슬퍼하는가를 헤아리지 못하거나 깨닫지 않습니다.


.. 그러나 버려졌다고는 해도 그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로봇)이지, 원래부터 전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아니었다. 나중에 나온 로봇만화들은 이 ‘출생의 비밀’을 무시하고 전사의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다 … (만화 〈뱀파이어〉에서) 이 연설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인간들에게 “원시인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옷을 입는 것도 그만두고, 돈을 없애고, 회사도 학교도 없애 버리자고 주장한다. 어처구니없는 주장임에는 틀림없지만, 언뜻 공감을 느끼게 하는 내용 같지 않은가? 통제되고 관리되는 사회의 억압에 인간들은 진저리를 치고 있다. 야수가 뭐가 나쁜가. 그것이야말로 ‘생명 그 자체’라는 주장이 오히려 매력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  (22, 101쪽)


 《아톰의 철학》이라는 책은 아톰과 같은 로봇을 만든 뜻을 잘 읽습니다. 아톰은 사랑받도록 하려고 만든 로봇입니다. 아들을 교통사로 잃은 텐마 박사가 제 아들로 삼으려고 만든 로봇이 아톰입니다. 아톰은 나중에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풀어 주는 원자력 로봇’이라는 뜻으로 오차노미즈 박사가 새로 붙인 이름 ‘아스트로 보이’를 줄인 ‘아톰’일 뿐, 제 이름은 텐마 박사 아들과 같은 이름 ‘토비오’입니다.

 그러니까 아톰은 ‘아톰’일 때에는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을 벗삼고픈 넋을 느긋하게 누리지 못합니다. 아톰은 ‘토비오’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들 싸움판과 시끌벅적한 도시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호젓하게 제 삶을 누릴 수 있어요.

 돈도 좋아하지 않고 이름값도 바라지 않으며 1등이나 경제성장 따위란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 아톰입니다. 착한 사랑을 바라고 따순 믿음을 꿈꾸며 너른 손길을 아끼는 아톰입니다. 모진 짓을 하는 나쁜 사람일지라도 목숨은 건져 놓아야 한다고 여기는 아톰입니다. 누구한테나 목숨은 보배롭다고 느끼는 아톰이에요. 사람이든 로봇이든 함부로 죽여서 안 될 뿐 아니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아톰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길을 걸어야 하고, 목숨을 선물받은 누구나 이 고마운 목숨을 아끼면서 사랑해야 한다고 여기는 아톰이에요.


.. 생명을 구하고 구할 수 없고 하는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생명과 마주할 수 있는 것, 눈앞의 타인에게 순수하게 동화되어 가는 태도 그 자체가 휴머니즘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사랑과 공감의 연대감도 휴머니즘이 아닐까 … 블랙잭은 엄청난 보수를 요구하는 것으로 오히려 명예욕이라든지 출세욕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잡념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시킨다. 성장도, 생명을 가지고 노는 악마도 되지 않았기에 깨끗한 것이다 … 인간의 마음을 탐구해 보고 거기에서 진심어린 삶에 대한 열정을 찾아냈을 때 허무적인 블랙잭의 눈에도 언뜻 ‘부드러운 빛’이 머무는 것이다 … 한계가 있는 생명이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살며 삶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냐고 말한 불새의 첫 메시지를 ..  (128, 131, 186쪽)


 생각해 보면, 《아톰의 철학》 같은 책부터 옳게 읽힐 때에 〈우주소년 아톰〉 또한 옳게 읽히리라 생각합니다. 데즈카 오사무라 하는 일본 만화쟁이를 왜 일본에서 그처럼 높이 우러르거나 섬기는가를 참다이 살펴야 합니다. 벌써 1960년대부터 대단한 만화영화를 빚기도 했고 미국으로 만화영화를 팔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돈벌이나 이름값으로서 데즈카 오사무 만화가 빛나지 않습니다. 데즈카 오사무 만화는 1950년 〈정글 대제〉부터 1989년 〈아돌프에게 고한다〉까지 한결같은 목소리로 ‘전쟁 싫어 평화 좋아’ ‘미움 싫어 사랑 좋아’를 이야기한 작품이기 때문에 빛납니다. 자그마치 마흔 해 동안 쉬지 않고 ‘사랑 만화’를 그린 데즈카 오사무 님이기 때문에 그토록 빛나는 별입니다.

 다만, 데즈카 오사무 님은 사랑과 평화를 아끼나, 일본을 비롯한 뭇 나라들은 사랑과 평화를 아끼지 않습니다. 온통 미움과 돈과 싸움뿐입니다. 기계 물질문명에 자꾸 찌들기만 합니다. 크나큰 도시가 더 커지기만 하며 자연을 짓밟습니다. 이리하여 데즈카 오사무 님은 슬픈 삶터에서 슬프게 울면서 따순 넋을 고이 건사하려는 ‘레오’를 ‘아톰’을 ‘사파이어’를 ‘블랙잭’을 ‘도로로’를 하나하나 그려서 선보입니다.


 (2) 평화를 모르는 아이들


 일본 만화 《맨발의 겐》이나 《농농 할멈과 나》를 보노라면 아이들끼리든 어른들끼리든 싸움박질하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일본 소설 《엄마 없는 아이와 아이 없는 엄마와》를 읽을 때에도 싸움이 잦은 일본 아이들 삶을 어렵잖이 헤아립니다. 어린 날 국민학교에서 이순신 전기를 읽을 때에도 허구헌날 전쟁놀이를 하던 아이들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 또한 어린 날 이야기로만이 아니라 삶으로도 늘 전쟁놀이를 즐겼고, 온통 싸움판이었다고 느낍니다.

 아이들끼리도 툭탁툭탁 싸움이 그치지 않고, 어른들은 무시무시한 몽둥이와 방망이를 들고 돌아다니며 윽박지르거나 두들겨패기 일쑤였습니다. 골목마다 담배 꼬나문 깡패가 버티면서 돈을 울궈내곤 했습니다. 혼자 골목을 다니다가는 동네 깡패라든지 학년 높은 선배란 사람들이 주먹질을 하거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요사이도 뒷골목에 동네 깡패가 어기적거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요사이는 푼돈을 노리는 깡패는 거의 사라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치안이 나아져서 깡패가 사라졌다기보다 더 큰 돈을 노리며 놀음놀이판으로 옮겨 갔기에 자취를 감춘다고 느낍니다. 더욱이, 이제는 맞돈을 안 갖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요. 카드만 챙기는 사람이 많으니 주먹다짐으로 족치더라도 건질 국물이 없을 만합니다.


.. 흥미진진한 전개를 바탕으로 하는 데즈카 만화의 스토리는 변화가 풍부한 구도와 격렬한 움직임, 그리고 이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스피디한 장면 연출의 신선함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 1951년 《소년》에 〈무쇠팔 아톰〉의 전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톰대사〉가 연재되었고, 1952년 4월호부터는 〈무쇠팔 아톰〉이 본격 등장해 16년 간이나 연재된다. 1954년에는 《소녀클럽》에 〈리본의 기사〉가 등장한다. 소녀만화 장르에 처음으로 제대로 골격을 갖춘 스토리 만화가 탄생된 것이다 ..  (16∼17쪽)


 지난날 아이들 삶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1700년대나 1600년대나 900년대나 500년대 아이들 삶을 헤아려 보고 싶습니다. 그때에도 아이들은 싸움박질과 싸움놀이로 하루해를 보냈을는지 궁금합니다. 돌을 던지고 나무몽둥이를 휘두르는 싸움박질과 싸움놀이를 그토록 재미나게 즐겼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은, 또 앞으로는 돌을 함부로 던진다든지 나무작대기를 아슬아슬 휘두른다든지 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는 주워서 던질 만한 돌을 찾기도 힘들 뿐더러, 나무작대기가 어디 있습니까. 제 어릴 적에는 돌이나 나무작대기는 아주 흔해서 새총도 고무줄만 있으면 쉬 만들었고, 야구방망이 없으면 마땅한 나무막대를 어디에선가 주워서 쓰곤 했습니다. 작은 돌멩이랑 나뭇가지로도 야구놀이를 했습니다. 흙바닥에서 돌을 굴려 땅따먹기라든지 돌치기를 합니다. 드물게 아스팔트를 깔아 놓은 데가 있으면 큰돌을 쥐고 아스팔트 바닥을 죽 그으면 하얗게 금이 그려집니다. 아스팔트를 깔아 자동차를 세우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돌멩이로 아스팔트 바닥을 죽죽 긋는 모습을 보면 놀라자빠지겠지요. 길을 다 망가뜨린다며 돌을 던지며 내쫓겠지요. 흙바닥은 흙바닥대로 금을 긋기 좋고, 아스팔트는 또 아스팔트대로 까만 바닥에 하얀 금이 재미났습니다.

 동네 나무도 타고 학교 나무도 탑니다. 학교 동상에 올라타며 놀기도 하고, 나즈막한 5층짜리 아파트 옥상에 몰래 올라가 놀기도 합니다. 꾸중을 듣건 말건 처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놀기에 바쁘고 놀기가 즐거우니, 나중에 꾸중을 들어 눈물콧물 쏙 빼더라도 금세 잊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이가 아빠한테 날이면 날마다 꾸중을 들으면서도 잔뜩 어지럽히는 놀이를 하든 자리에 누운 아빠 배나 무릎에 올라앉든 하는 모습도 매한가지라 할 만하겠군요.


..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발표된다는 기약도 없는 만화를 매일매일 그려 나갔던 데즈카. 만화를 그리는 것도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던 전쟁이란 상황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만약 또 전쟁이 일어나 자유롭게 만화를 그릴 수 없는 사회가 된다면 큰일이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가 이 젊은 만화가를 열정적으로 만화에 매달리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목숨을 걸고 탈주했으면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엔 다시 훈련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도망친다는 건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강제력을 전쟁은 가지고 있다. 반역자 비국민으로 낙인찍히거나 또는 린치를 당해 죽을 각오가 없는 한 탈출구가 없는 세계, 그것이 전쟁이다 ..  (45, 48쪽)


 치고박으면서 다투는 이야기를 그리는 만화나 영화를 자주 보면, 저절로 치고박으면서 다투는 삶에 젖어듭니다.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나 영화를 즐겨 보면, 시나브로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삶으로 촉촉히 젖습니다. 치고박으면서 다투는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은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이야기를 따분해 하기 마련입니다.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은 치고박으면서 다투는 이야기가 못마땅하거나 거북하기 마련입니다.

 전쟁놀이란 참 용합니다. 서로서로 맞선 동무를 죽이려고만 들지, 내가 먼저 죽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맞붙은 동무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여기지도 않는데다가, 서로서로 맞붙은 동무를 죽이면서도 죽이는 줄을 느끼지 않습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쉽게 죽여야 그럴듯한 장군이라도 되는 듯 우쭐거립니다. 죽음이나 죽임이 무언지를 깨닫거나 헤아리지 않습니다. 다치거나 죽어 꼼짝을 못하는 아픔이 어떠하고,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 살붙이는 어떠한 마음일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쪽(아군)하고 저쪽(적군)이 왜 서로를 미워하면서 싸우는지를 살피지 않아요. 전쟁놀이는 그냥 두 편으로 갈라 치고박아야 하는 싸움판일 뿐입니다.


.. 데즈카는 단 한 번도 젊은 세대에게 ‘전쟁이라는 것은 이렇게 엄청난 것이다. 그런 것도 전혀 경험하지 못한 너희들은 편안히 잘도 지내는구나’라는 식의 훈계 따위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만화라는 그릇에다 ‘마음’을 담아서 생명의 소중함(인간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포함해서)을 호소했고, 생명을 위협하는 악과 계속 싸웠던 것이다 … 사명감에 들떠 자기주장만을 만화에 가득 채우는 방식을 이 스토리 만화의 창시자는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품의 주제에 작가가 오히려 얽매여 버린다면 재미있는 만화는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나 보는 쪽에서도 ‘만화는 자유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데즈카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  (61, 64쪽)


 이제 요즈음 아이들은 예전처럼 전쟁놀이를 몰려다니면서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몰려다닐 겨를이나 땅이 아예 없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집집마다 틀어박혀서 싸움판과 같은 전쟁게임을 합니다. 아주 멋진 무기를 마음껏 휘두르면서 숱한 목숨을 거리낌없이 죽이고 베고 없앱니다. 미국 폭격기가 높다란 하늘에서 미사일과 폭탄을 쏟아부으며 ‘누가 죽고 어떤 집이 무너지는지’는 하나도 모를 뿐더러 생각조차 않듯, 전쟁게임을 즐기면서 전쟁이란 참말 무엇인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몰려다니며 전쟁놀이라도 하면, 때때로 다치고 엎어지고 깨지고 울고 하면서 가끔이나마 아프기라도 하지요. 오늘날은 아예 아파할 일이 없고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으며 함께 아파하거나 걱정하는 동무가 없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전쟁게임은 숫자로 실적을 올립니다. 숫자로 점수를 쌓습니다. 정치며 사회며 시민단체며 숫자를 셉니다. 숫자 아닌 사람을 마주하거나 숫자 아닌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평화를 배우지 못하고, 평화를 느끼지 않으며, 평화를 가까이하는 삶이 아닙니다. 어른들 또한 평화를 가르치지 못할 뿐더러, 새롭게 꾸준히 평화를 배우는 일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버스를 타든 자가용을 몰든 회사에서 일하든 집에서 살림을 꾸리든 평화를 느낄 틈이 없고, 평화를 느낄 틈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목매다는 숫자를 아이들한테 고스란히 물려줍니다. 사랑이 없고 믿음이 없으며 평화가 없는 채 살아가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아무런 사랑도 믿음도 평화도 물려주거나 이어주지 못합니다.


 (3) 《아톰의 철학》이란 ‘살아가는 생각’


 번역책 《아톰의 철학》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은 1996년에 한글판이 나왔는데, 1996년에는 〈우주소년 아톰〉을 둘레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이름으로 완전번역이 제대로 된 해는 2001년입니다. 2001년에 1쇄를 찍은 《우주소년 아톰》 완전번역은 모두 23권이고, 2010년에 2쇄를 찍습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작품을 두루 살피기 어려운 때에 나온 《아톰의 철학》이기도 하지만, 지난 1996년에 《아톰의 철학》을 한글판으로 옮긴 한국 만화쟁이 손상익 님은 ‘일본 만화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아톰의 철학》은 번역이 썩 안 좋습니다. 일본 만화는 몹시 싫어하면서 일본 현대만화를 마무리지었다 하는 데즈카 오사무 님 이야기책을 옮겼으니, 더 마음과 사랑을 쏟기 어려웠겠구나 싶습니다.


.. 데즈카 오사무의 사망 소식을 내가 처음 안 것은 1989년 2월 9일 저녁, 도쿄의 이케부루코역의 신문가판대 속보를 통해서였다. 그때 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선 채로 그 기사를 다 읽었다 ..  (11쪽)


 일본 만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자유입니다. 한국 만화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자유입니다. 그런데 일본 만화이기에 싫어할 까닭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한국사람이라 한국 만화를 더 좋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만화를 아름답다 여기며 사랑하고 싶습니다. 따스한 만화를 따스하다 느끼며 아끼고 싶습니다. 좋은 만화를 좋다고 살피며 껴안고 싶습니다.

 한국사람이 그린 한국 만화라지만 터무니없이 엉터리인 작품이 꽤 많습니다. 일본사람이 그린 일본 만화 가운데 놀랍도록 슬기로우며 아름다운 작품이 무척 많습니다.

 한국사람이기에 세계문학을 즐기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인 가운데 세계문학을 즐길 노릇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좋은 만화’를 이웃 일본에서 찾아볼 만합니다. 온누리에서 사진문화가 앞선 프랑스나 미국에 가서 사진을 배우고, 일본 또한 사진문화가 드높기에 일본으로 가서도 사진을 배우듯이, 온누리에서 만화문화가 남다르며 빼어난 일본땅 일본 만화를 잘 살피고 가누면서 훌륭한 작품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땅에서 한국 만화쟁이가 알뜰살뜰 일군 훌륭한 만화라면 일본이건 프랑스건 미국이건 스스럼없이 내놓으면서 나누어야겠지요.


.. “그림만 잘 그리는 것으론 안 됩니다. 그림 실력은 다소 처지더라도 아이디어나 재밌는 소재를 생각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도 처음엔 그림을 잘 못 그렸지만 부단한 연습을 통해 이를 극복했습니다.” … “당시(1940년대 첫무렵) 사회상은 미술 등의 예술활동에 대해 ‘국가생산성과 번영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없는 비국민적 행위!’로 간주했던 탓에 저는 숨어서 만화를 그리다시피 했어요. 그렇게 그렸던 중학교 때의 작품이 3천 장 정도 됩니다.” … “지금의 젊은 만화가들 가운데에도 미술의 기본 실력을 갖춘 사람은 몇 안 되는 형편이지요. 실력도 갖추지 못하고 무턱대고 그림만 좋아한다고 해서 데생 실력이 연마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때문에 기초를 다시 공부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타고난 재주로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그린다든가 만화스토리를 짜놓고 ‘나도 만화만은 훌륭한 솜씨를 갖췄어.’라든가 ‘내 그림은 정말 뛰어났어.’라며 나르시즘에 빠지는 작가가 많아 걱정입니다.” … “만화가들의 표현에 관한 자체 규제가 강화되자 이에 따라 ‘재미없는’ 만화가 넘쳐나게 됐지요.” … “어머니는 ‘만화와 의사 중 어떤 것이 좋아?’라고 물었죠. ‘그야 만화가 좋지요.’라고 대답했더니 ‘그렇다면 만화가가 되는 것이 어때?’라고 흔쾌히 말씀하시더군요. 제게 있어 만화가를 택했다는 것은 돈을 벌어 집안을 편하게 해 주겠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  (221, 224, 227, 229, 232∼233쪽 / 〈만화신문〉 만나보기 기사 1987.1.1.)


 만화책 《우주소년 아톰》은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넋’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야기책 《아톰의 철학》은 ‘아톰(데즈카 오사무)이 사랑하며 살아간 아름다운 넋이 무엇이었을까’를 헤아리는 이야기동무입니다.

 이론책이나 지식책이 아닌 이야기동무와 같은 책 《아톰의 철학》입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를 요리 파헤치거나 저리 뒤적이면서 학문으로 따지고 드는 책이 아닙니다. 만화를 사랑한 삶이 무엇이고, 만화라는 문화와 매체로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고파 했는가를 함께 즐기자는 이야기책입니다. 무시무시한 전쟁과 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사랑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면서 살아온 한 사람 발자국을 톺아보자는 삶책입니다.


.. 우리들도 버티고 서 있어야만 한다. 제멋대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여 떨어뜨리는 것도, 어려움에서 도망쳐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도 막고, 우리들은 생명 그 자체가 가리키는 길로 걸어가야만 한다 ..  (142쪽)


 평화로운 누리에서도 평화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슬프며 고단하고 괴로운 누리에서도 평화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따스하며 넉넉한 터전에서 사랑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메마르고 차가우며 모진 터전에서도 사랑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 가슴이 평화라면 평화꽃을 피웁니다. 내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열매를 맺습니다. 내 꿈이 평화라면 평화꽃을 아낍니다. 내 빛이 사랑이라면 사랑열매를 보살핍니다.

 나와 내 짝꿍과 내 아이 모두 평화와 사랑을 아끼는 삶을 보듬는 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내가 선 시골자락 조그마한 집에서 조용하면서 호젓하게 평화와 사랑울 누리는 삶을 일구며 하루를 즐기고 싶습니다. (4344.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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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책을 말할 자유


 집식구가 둘째를 배어 여러 달째 집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 집식구가 뜨개질을 하니 저절로 수많은 뜨개책을 사서 모으고 읽는다. 옆지기가 뜨개책을 산다고 하기 앞서부터, 나는 그동안 헌책방을 다니고 책마을 일꾼으로 일하면서 ‘한국 뜨개책이란 한 가지도 없는’ 줄 알았다. 굳이 옆지기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옆지기 스스로 뜨개책을 찾아보면 다 알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라안에서 나온 뜨개책이든 나라밖에서 나온 뜨개책이든 몇 백 권 사들였다. 한국에서 나온 뜨개책은 모조리 일본 뜨개책을 베꼈다. 사람들이 잘 모르기도 하지만, 뜨개질에서 쓰는 말 가운데 옳게 우리 말다이 쓰는 말이 퍽 드물다. 인터넷모임을 꾸리며 뜨개질을 나누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알아챈다. 스스로 뜨개질을 해 보니, 한국말로 된 마땅한 한국책이 한 가지도 없어, 다들 영어로 된 책을 나라밖에서 사다가 읽거나 일본말로 된 책을 사서 읽는다. 어려운 영어나 일본말을 몇몇 사람들이 고맙게 번역해 주어 뜨개질 실마리를 나누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예부터 뜨개질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뜨개질이 있다 하여도 ‘뜨개 교본’은 한 가지도 없었을 뿐더러, 온갖 무늬를 넣어 하는 뜨개법이란 없다. 이 모든 뜨개법은 나라밖에서 들여온다. 그리고,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기 일쑤이다. 지난날이든 오늘날이든 뜨개 교본은 일본 뜨개 교본에서 베끼거나 번역을 한다.

 옆지기는 첫째를 배었을 때까지 종이접기를 즐겨 했다. 종이접기를 하던 옆지기는 ‘종이접기 책’ 또한 한국책은 한 가지도 없는 줄 일찍부터 알았단다. 아무렴. 한국사람이 즐긴다는 종이접기는, 가만히 보면 그냥 종이접기가 아닌 ‘일본 오리가미’이기 일쑤이다. 한국에서 나오는 종이접기 책은 거의 모두 일본 ‘오리가미’ 책을 번역하거나 몰래 내놓는 도둑책이다.

 피아노 교본은 어떠할까? 교과서는 어떠한가? 사진책은 어떠하지? 문고판은 어떠했는가? 수많은 세계문학전집과 추리문학전집은 어떠했는가? 이 나라 책 가운데 일본책한테서 배우거나 훔치지 않은 책이란 몹시 드물다. ‘순수 창작 문학’이라는 책 아니고는 한국책이라 할 만한 책이란 없다시피 하다. 과학책이고 대학교재이고 다르지 않다. 전문서적이든 학술서적이든 매한가지이다. 역사책조차 일본책에 기대 온 나날이 대단히 길다. 역사 연구는 한국사람보다 일본사람이 더 깊고 넓게 해 왔고, 아직도 이 틀은 달라지지 않는다.

 일본이 잘났고 한국이 못났대서 이러한 이야기를 끄적이지 않는다. 삶을 삶대로 바라보고 책을 책대로 껴안는 가운데, 이 땅에서 우리 스스로 우리 깜냥껏 우리 슬기를 빛내어 나아갈 길을 찾고 즐겨야 하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끄적인다.

 이제부터라도 참다운 ‘한국 뜨개책’을 누군가 쓰면 훌륭하다. 이제부터라도 즐겁게 ‘한국 종이접기책’을 누군가 엮으면 아름답다. 대원사에서 펴내던 “빛깔있는 책들”이 있기 앞서, 일본에서는 “칼라 북스”가 있었다. “빛깔있는 책들”은 “칼라 북스”한테서 배우거나 흉내냈다 할 만하지만, 한국땅 대원사 “빛깔있는 책들”은 짜임새와 꾸밈새를 한국답게 어루만져서 내놓았다. “칼라 북스” 같은 책이 없이 “빛깔있는 책들”이 나오기 힘들었으나, “칼라 북스”는 “칼라 북스”요 “빛깔있는 책들”은 “빛깔있는 책들”이다.

 책은 이렇게 만들면 되고, 이렇게 즐기면 되며, 이렇게 말하면 된다.

 어떤 이는 한국이 ‘미국 식민지’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말을 몹시 싫어하거나 못마땅해 한다. 정치로는 식민지가 아니라 할는지 모르나, 한국 정치조차 미국 정치가 에헴 하면 깨깽 하는데, 정치마저 식민지가 아니라 하기 어렵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놓고 얼마나 시끌벅적 떠드는가. 미국 장관들 이야기이며, 미국 경제와 사회 이야기가 한국 언론매체에 얼마나 큼지막하게 나오는가.

 한국은 책마을을 비롯해 문화마을과 예술마을이나 여러 갈래가 ‘일본 식민지’라 할 만하며, 참말 식민지 굴레를 고스란히 붙잡는다. 털지 못하거나 씻지 않는다. 느끼지 못하니 털 생각을 못하고, 깨닫지 않으니 씻을 마음을 내지 못한다.

 한국책이 참으로 한국책답지 않은 줄 알아야 비로소 한국책을 만들고 나누며 즐긴다. 한국책이 얼마나 한국책답지 못한가를 모른다면, 우리들은 한국책 아닌 일본책이나 미국책이 마치 한국책이라도 되는 줄 잘못 알 뿐더러, 쥐뿔 하나 없는 주제에 알량한 자존심만 내세우고 만다.

 자존심은 밥을 먹여 주지 않는다. 구슬땀을 흘리며 논밭을 일구어야 밥을 먹는다. 우리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이 땅에서 아름다운 한겨레 살붙이로 다시 태어나면서 내 밥을 맛나게 먹고 이웃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

 2011년 오늘까지도 아직 한국에는 한국책이 없다. (4344.1.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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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꿍 바꿔 주세요! 웅진 세계그림책 109
다케다 미호 글.그림, 고향옥 옮김 / 웅진주니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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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이 바꿔 주셔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0] 다케다 미호, 《짝꿍 바꿔 주세요》(웅진주니어,2007)



 깊은 밤, 잘 자다가 깨어난 아이가 칭얼거립니다. 쉬가 마려우면 기저귀에 누든지 잠자리에서 일어나 변기에 누든지 하면 좋으련만, 아이는 깊은 밤이건 이른 새벽이건, 아직 때를 가리지 못합니다. 그저 눈빛 말똥말똥 빛내며 놀고파 합니다. 무거운 몸을 다시 일으켜 아이를 달래거나 토닥여야 하는가 싶어 한숨부터 나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거나 고단할 텐데 어버이라는 사람 마음이 이렇습니다. 쉴 겨를 없이 집일과 아이돌보기로 하루를 꼬박 지새우다 보니, 잠자리에서는 기운을 더 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직 아이가 하나인데 이런 몸이라면 아이가 둘일 때에는 어찌 되려나요. 아이를 셋 넷 다섯 여섯 키운 어버이들은 어떤 몸이거나 마음이었으려나요. 아이가 여럿이면 언니들이 동생을 잘 돌봐 주거나 놀아 주었으려나요.

 아이 어머니가 몸을 추스르며 아이를 안고 잠들어 줍니다. 몹시 고맙다고 느끼면서 귓결로 속삭임 한 마디를 듣습니다. “벼리가 이제 다 컸구나. 아빠가 다 키워 줬네.”

 다른 집 생각을 하고프지는 않으나, 여느 다른 집에서라면 이런 말은 으레 아빠가 할 테고, 이런 말을 들을 사람은 으레 엄마일 테지요.

 어버이 된 몸으로서 마지막 기운을 더 뽑아낼 수 없을 듯하면서도 어찌저찌 움직이면 또 마지막 기운을 한 번 더 쓸 수 있고, 여기에서 다시금 또 어찌저찌 하노라면 마지막 기운을 두 번 더 쓸 수 있곤 합니다. 한 사람 몸이란 워낙 이러한지, 어버이가 되면 누구나 이러한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내 생각에 머문다면 이렇게 하지는 못하고, 아이 생각을 한다면 이렇게 움직입니다. 나를 키워 온 어머니도 이렇게 움직이셨을 테고, 내가 내 아이한테 이렇게 움직일 테며, 내 아이도 나중에 커서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하겠지요.

 해가 바뀌어 아이는 네 살로 접어듭니다. 달수는 서른한 달. 아이 나이를 한 달 두 달 헤아리면서, 아이 나이 한 달을 함께 보내는 동안 한 달은 마치 한 해와 같다고, 아니 열 해와 같다고 느낍니다. 아이와 보내는 하루는 꼭 한 해와 같겠지요. 아이 나이는 서른한 달이라지만, 이 아이하고 서른한 해나 삼백열 해를 살아온 듯합니다.

 갓 태어났을 무렵에는 아이 옹알이나 아이 마음을 거의 못 읽었으나, 이제는 아이가 뒤돌아서 옹크릴 때에도 요 녀석이 뭘 생각하나 하고 읽습니다. 거짓으로 우는 소리를 내거나 놀이 삼아 칭얼거려도 고개 한 번 안 돌리며 알아챕니다. 아빠는 도마질을 하면서 아이를 타이르고, 아이는 말로도 제법 알아들으며 움직여 주곤 합니다. 그러나 말로 스무 번이나 쉰 번쯤 해야 비로소 몸을 움직여요.

 답답하고 갑갑하며 고단한데다가 힘겨운 아빠는 홀로 생각합니다. ‘난 오늘 아무것도 못할 듯해. 그러나 아무것도 못할 수 없어. 그러면 우리 집 식구들 모두 굶을 테니까. 머리가 아프든 손이 다쳤든 허리가 삐끗하든 집살림을 꾸려야 해.’ 말 안 듣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네가 우리 아이 맞니? 왜 이렇게 미운 짓만 골라서 하니? 같이 놀아 주지 못해서 그러니? 그렇다고 너하고만 내내 놀아 줄 수는 없잖니?’ 문득, ‘우리 아이 바꿔 주셔요.’ 하는 생각이 몽실몽실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를 바꿔 달랄 수 없고, 바꿀 수조차 없습니다. 밥 먹으며 온갖 곳에 흘리고 입 둘레가 지저분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창 칭얼거리다가 제풀에 곯아떨어진 모습을 보면서, 놀이에 빠져 오줌 마려운 줄 잊다가 바지에 싸는 모습을 보면서, 조그마한 손으로 뭔가를 만지작거리거나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 꼼틀꼼틀 살아숨쉬는 여린 목숨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길 말고 무엇이 있겠느냐고 곱씹습니다.


.. 난 오늘 학교 못 갈 것 같아. 머리가 아픈 것 같아. 배가 아픈 것 같아. 열이 나는 것 같아 ..  (1∼3쪽)


 그림책 《짝꿍 바꿔 주세요》를 읽습니다. 지난 2007년 3월에 한글판이 나온 일본 그림책입니다. 우리 식구는 이 그림책을 일본판으로 먼저 읽었습니다. 일본글은 모르면서도 그림이 예쁘고 줄거리가 살갑다고 느껴 헌책방에서 기쁘게 장만했습니다(우리 식구가 장만한 일본책은 1991년에 1쇄를 찍고 1996년에 20쇄를 찍었습니다. 2007년에 이 그림책을 옮긴 웅진출판사는 보도자료에 이 그림책이 2007년까지 일본에서 50만 부 넘게 찍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아이 또한 제 어버이처럼 일본글을 모를 뿐더러 아직 한글조차 모르지만, 아이도 이 그림책을 몹시 좋아합니다. 아빠는 그림책 그림만 보면서 아이한테 이야기를 지어서 읽어 주곤 합니다. 아이는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알 노릇은 없지만, 무릎에 앉히고 한 장씩 넘기며 따순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야기보따리’나 ‘이야기꽃’을 즐기는구나 싶어요.

 그림책 얼거리로 본다면 《짝꿍 바꿔 주세요》는 그림이 예뻐 한눈에 사로잡힐 만하지만, 그저 그림만 예쁘지 않습니다. 예쁜 그림에 걸맞게 예쁜 이야기를 펼칩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어린이 마음과 눈높이와 삶결에 따라 나즈막하면서 싱그럽고 보드라운 결을 곱게 보살핍니다. 짓궂은 짝꿍한테 시달리는 괴로움이 고스란히 담기고, 짓궂은 짝꿍한테 크게 성을 내는 마음풀이를 곱게 담으며, 짓궂던 짝꿍이 속으로는 제 여자 짝꿍하고 더 살가이 지내고픈 마음이었으나 이렇게 짓궂게 굴어서는 살가울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달아 부드러운 사이로 발돋움하는 흐름을 아리땁게 담는 가운데, 이 모두를 놓고 힘들어 했으면서도 너그러이 받아안는 조그마한 여자 아이 커다란 가슴을 흐뭇하게 담습니다.

 남자 아이든 남자 어른이든 참 어리석습니다. 짓궂게 군다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바둥거린들 무엇 하나 예뻐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남자들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대로 살면서 참사랑을 놓치곤 할 테지요. 여자 아이나 여자 어른이 남자들 어리석은 바보짓을 언제까지나 참아내거나 보아주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은 바보짓은 그만두고 따숩고 너른 손길을 나누거나 따사로우며 넉넉한 어깨동무를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밤샘 밤일 몰아붙여 돈을 더 벌어들인다고 집안이 더 즐거울 수 없습니다. 그저 돈만 더 번다고 집식구가 좋아할 수 없습니다. 집안에 자가용이 꼭 있을 까닭도 없으며, 자가용을 갖춘다 했을 때에 더 크거나 빠른 자가용을 갖출 까닭이란 없습니다. 꼭 있어야 하면 조그마하거나 값싼 자가용이어도 넉넉합니다. ‘내 살림집’이라면 굳이 아파트여야 하거나 넓은 집이어야 하지 않아요. 호젓하거나 아리따운 시골집에서 논밭 작게 일구며 조용히 살아도 참으로 기쁩니다. 군대를 크게 일으킨다고 나라 지키기를 할 수 없습니다. 미사일이며 탱크며 전투기며 군함이며 만들거나 꾸릴 돈으로 온누리 평화로우며 사랑스럽게 일구어야 아름답습니다.

 예쁜 어린이로서 예쁜 어린 나날을 보내며 예쁜 짝꿍이랑 예쁜 꿈을 꾸는 가운데 예쁜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삶을 일굴 때에, 예쁜 어른으로 무럭무럭 크면서 예쁘게 일을 하고 놀이를 즐깁니다.

 겉만 예쁜 말이 아니라, 속으로 예쁜 말입니다. 겉만 예쁜 옷이 아니라 온몸이 예쁜 삶이어야 합니다.


.. 학교 가기 싫다 ..  (21쪽)


 싸움터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싸움터에는 가기 싫습니다.

 시뻘건 피가 튀며 총알이 비오는 곳만 싸움터가 아닙니다. 출퇴근과 통학을 한다는 아침길부터 지옥철이거나 지옥버스라 한다면 싸움터입니다. 알맞춤한 벌이와 배움을 즐기는 알맞춤한 일터와 배움터가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로 복닥이며 싸움터로 바뀌어 버린 도시란 바로 싸움터입니다. 우리는 싸움터 아닌 일터와 배움터에서 서로 맑게 웃을 노릇입니다.

 밭을 갈고 싶다거나 눈밭을 걷고 싶다거나 장작을 패고 싶다거나 나물을 캐고 싶다고 생각하는 삶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착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꿈을 꾸면서 나부터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이리하여 날이면 날마다 아이랑 복닥이며 요 개구진 말괄량이랑 어떻게 놀며 어떻게 하루를 또다시 복닥여야 할는지를 놓고 아침부터 해롱해롱입니다만, 새삼스레 새힘을 내자고 다짐합니다. 서른한 달이 되는 아이는 엊그제부터 ‘어머니 전은경’과 ‘아버지 최종규’라는 소리를 똑똑히 말하는 한편, 제 이름 ‘사름벼리’도 똑부러지게 말합니다. 드디어 서른한 달 만에 식구들 세 사람 이름을 또박또박 익혀서 말합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 좋은 모습 좋은 꿈 좋은 삶을 빛내면 되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아이인 만큼 아이한테 애늙은이가 되라 바랄 수 없어요. 어버이는 어버이인 만큼 어버이답게 아이하고 부둥켜안는 나날을 보내야지요. 《짝꿍 바꿔 주세요》에 나오는 어린이는 매우 괴롭고 힘든 나머지 “짝꿍 바꿔 주세요!” 하고 속으로 외치고 외쳤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학교에 다시 나갑니다. 아니, 날마다 학교에 빠져 공원이나 길가 어디에서든 떨어져 지내고 싶지만, 눈물을 꾹 삼키며 다시 학교로 갑니다. 이윽고 못된 짓 일삼던 짝꿍은 제 잘못을 뉘우치며 “짝꿍 바꿔 주세요!”라 외치고파 하던 아이한테 모진 손길이 아닌 여린 손길을 내밉니다. 우리 집 돼지 한 마리도 고단한 나날 보내는 제 아버지가 너무 지쳐 드러누우면 고 조막만 한 손으로 이마며 볼을 쓰다듬어 줍니다. 짝꿍도 아이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내고 함께 살아갑니다. (4344.1.6.나무.ㅎㄲㅅㄱ)


― 짝꿍 바꿔 주세요 (다케다 미호 글·그림,고향옥 옮김,웅진주니어 펴냄,2007.3.3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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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2.31. 

인형을 이불에 감싸안고 재우는 어린이. 그래, 근디 너나 좀 주무셔 주시지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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