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모드 몽고메리 리틀 피플 빅 드림즈 19
마리아 이사벨 산체스 베가라 지음, 아누스카 알레푸즈 그림, 박소연 옮김 / 달리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숲노래 그림책 / 그림책비평 2025.5.4.

그림책시렁 1578


《리틀 피플 빅 드림즈 19 루시 모드 몽고메리》

 마리아 이사벨 산체스 베가라 글

 아누스카 알레푸즈 그림

 박소연 옮김

 달리

 2021.3.15.



  모든 말은 우리 마음입니다. 모든 글은 우리 길입니다. 말을 하면서 마음을 나누고, 글을 쓰면서 길을 걷습니다. 말을 마음껏 할 수 없는 곳이라면 그야말로 갑갑해서 숨이 막혀요. 글을 거리끼지 않고서 쓸 수 없는 나라라면 참으로 답답해서 숨을 못 쉽니다. 《리틀 피플 빅 드림즈 19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아주 단출하게 글순이 한 사람 삶길을 들려줍니다. 이렇게 간추려서 보여줄 수 있구나 싶어 놀랍기도 하고, 어린이한테는 거의 노래(시)와 같이 굵고 짧게 들려주는 몇 마디로 글눈과 말눈과 생각눈과 마음눈을 틔울 만하다고도 느낍니다. 자, 이제 헤아려 볼까요? ‘모든 사내’가 마음껏 글을 쓸 수 있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하거나 흙을 짓는 수수한 사내는 다른 수수한 가시내하고 똑같이 붓은커녕 종이조차 만질 일이 없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던 사내’도 알고 보면 한 줌밖에 안 되는데, ‘글돌이’는 무슨 글을 남겼을까요? 아름글을 남긴 사내도 있으나, 어쩐지 벼슬이나 돈이나 이름에 사로잡힌 글돌이가 무척 많아요. 루시 모드 몽고메리 님은 붓을 쥐기까지 쉽잖은 나날을 걸어야 했으나, 오히려 이 모든 가시밭과 굴레가 ‘글을 쓰는 밑거름’이 되어서 《앤》이라고 하는 새길을 낳았어요. 다시 말해서, 사내들은 집안일과 아이돌보기를 맡아야 ‘글쓰는 사람’으로 제대로 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ㅍㄹㄴ


《루시 모드 몽고메리》(마리아 이사벨 산체스 베가라/박소연 옮김, 달리, 2021)


루시가 사랑스러운 행동을 해도 미소조차 짓지 않았어요

→ 루시가 사랑스럽게 굴어도 웃지 않았어요

→ 루시가 사랑스럽게 놀아도 안 웃었어요

6쪽


그 시간이 루시에게는 위안이 되었어요

→ 그동안 루시는 마음을 달래요

→ 루시는 그때 마음을 다독여요

8쪽


읽고 쓰는 일은 시간낭비라 여기셨죠

→ 읽고 쓰기는 부질없다고 여기셨죠

→ 읽고 쓴들 쓸데없다고 여기셨죠

→ 읽고 쓰는 일이 아깝다고 여기셨죠

10쪽


글쓰기를 허락받지 못했던 어린 루시는 앤의 이야기를 통해 그토록 바라던 멋진 작가가 되었답니다

→ 글쓰기가 막힌 어린 루시는 앤 이야기를 그려서 그토록 바라던 글님이 멋지게 되었답니다

→ 글을 쓸 수 없던 어린 루시는 앤 이야기를 지어서 그토록 바라던 글지기가 되었답니다

28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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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시절 - 가장 안전한 나만의 방에서
임후남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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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책숲마실


책집지기를 읽다

26 경기 용인 〈생각을 담는 집〉과 《책방 시절》



  책집이란 잇는 쉼터입니다. 책집지기가 쓰거나 엮지 않았어도, 속에 담은 이야기가 빛난다고 여기는 책을 마을이웃하고 두루 나누려고 잇는 쉼터입니다.


  책집이란 속을 살피는 이음터입니다. 겉으로 번드레하게 꾸미는 책이 아닌, 속으로 흐르는 빛나는 씨앗을 살펴서 잇는 자리입니다.


  책집이란 들숲메를 잊거나 잃은 자리에 푸른바람을 한 줄기 일으키는 나들터입니다. 모든 종이책은 들숲메에서 왔습니다. 들이 없거나 숲이 없거나 메가 없다면 종이를 못 얻고 책을 못 묶습니다. 어느 책이건 푸른별에 들숲메가 우거지기 때문에 태어나게 마련입니다. 글 한 줄마다 푸르게 일렁이는 이야기가 깃드는 줄 알아보는 책집지기가 마을사람한테 조그맣게 푸른바람을 잇고 펴는 책집입니다.


  《책방 시절》은 경기 용인에 있는 〈생각을 담는 집〉에서 내놓은 조촐한 꾸러미입니다. 책집이면서 펴냄터인 ‘생각을 담는 집’이고, 시골에서 일구며 마주하는 하루를 자그맣게 담아냅니다. 책을 읽는 손과 책을 내려놓고서 일하는 손이 어울리는 길을 문득문득 옮겨적어요.


  ‘생각’이란 샘물처럼 새롭게 일으켜서 이곳에 생겨나는 씨앗을 가리키는 우리말입니다. ‘집’이란 너나없이 누구나 아우르면서 포근히 깃드는 곳을 나타내는 우리말입니다. 저마다 보금자리에서 생각을 길어올리기에 마을이 빛납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생각을 잇기에 만나고 헤어지면서 삶을 헤아리는 마음을 느낍니다.


  서울이라면 북적대는 사람들이 바쁜 일손을 쉬는 책집이 있을 만합니다. 시골이라면 철마다 어떻게 해바람비가 다르게 흐르는지 읽고 느껴서 나누고 누리는 책집이 있을 만합니다. 그리고, 종이책에 담은 삶이 아니더라도, 눈으로 담는 삶과 손으로 짓는 삶과 다리로 누비는 삶과 온몸으로 맞이하는 삶을 이야기로 들려주고 들을 만합니다.


  마을에 책집이 있기에 마을사람으로서 스스로 가꾸는 하루를 차분히 돌아보는 실마리를 나눕니다. 마을에 나무와 숲정이가 있기에 아이들이 숨을 돌리고 어른들은 일손을 쉴 수 있습니다. 마을에 이야기가 있기에 아이어른이 함께 자라면서 배우는 나날을 일굽니다.


《책방 시절》(임후남, 생각을담는집, 2024.7.5.)


ㅍㄹㄴ


무는 아주 작은 씨앗 하나가 큼직하게 자라 허연 몸통을 드러내지요. 그 모습을 보다 보면 헤벌쭉 입이 벌어집니다. (11쪽)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스스로도 즐겁지 않았던 그것을 또 자식에게 시키는가 하는 일입니다. 그 자식 역시 즐겁지 않은 일을, (33쪽)


저는 책방에 있을 때가 가장 좋습니다. 책방은 모두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저만의 공간이기도 하니까요. (41쪽)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렇게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낯선 세상에 혼자 태어났지만 가족을 만나고 사는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영행을 받아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처럼요. (106쪽)


아직 서울에서 일하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심심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서울이 그립지 않으냐고. 저는 그냥 웃었습니다. (145쪽)


돌아가신 후에야, 제가 나이들고 나서야 엄마의 삶이, 아버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내 부모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149쪽)


+


시골의 밤은 캄캄합니다

→ 시골은 밤이 캄캄합니다

→ 시골밤은 캄캄합니다

4쪽


밝은 햇살이

→ 밝은 해가

5쪽


사실 제가 먹는 것보다 다른 사람 주는 게 훨씬 더 많거든요

→ 막상 제가 먹기보다 다른 사람한테 훨씬 많이 주거든요

→ 정작 저보다 다른 사람한테 훨씬 많이 주거든요

12쪽


몸을 움직이며 일하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 몸을 움직이며 일하기를 즐깁니다만

→ 몸을 움직이며 일하면 즐겁습니다만

12쪽


손톱 끝이 새까매집니다

→ 손톱 끝이 새까맙니다

17쪽


초겨울 햇살이 참 좋습니다

→ 첫겨울 해가 참 따뜻합니다

35쪽


긴 설 연휴 중입니다

→ 설에 길게 쉽니다

→ 설말미가 깁니다

41쪽


누군가가 농사짓는 밭은 조심스러워

→ 누가 짓는 밭은 거리껴서

49쪽


타인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 남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남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59쪽


“늙은 오이 먹어요?” … 큼지막한 노각 네 개를 받아들고

→ “늙은오이 먹어요?” … 큼지막한 늙오이 넷을 받아들고

74쪽


이렇게 쓰는 것이 좋다, 라는 식의 강의가 아닌 첨삭을 하다 보니

→ 이렇게 쓰면 낫다고 들려주기보다 손질을 하다 보니

76쪽


단감일까 대봉일까 아님 토종감일까

→ 단감일까 불퉁감일까 아님 텃감일까

→ 단감일까 장두감일까 아님 텃감일까

84쪽


이제 평지가 된 길을 따라

→ 이제 반반한 길을 따라

→ 이제 고른 길을 따라

90쪽


심폐소생술을 한참 하자 검붉었던 입술이 회복됐고

→ 숨살리기를 한참 하자 검붉던 입술이 살아나고

→ 숨을 한참 불어넣자 검붉던 입술이 낫고

133쪽


무를 뽑을 때의 쾌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요

→ 무를 뽑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워요

→ 무를 뽑으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나요

137쪽


그 김치를 다 먹을 리 만무합니다

→ 그 김치를 다 먹을 수 없습니다

→ 그 김치를 다 못 먹습니다

139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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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까칠한 숲노래 씨 책읽기


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5.4.24.


《혼란 기쁨》

 김비 글, 곳간, 2025.1.31.



어제까지 비로 흠뻑 젖은 날이다. 아침에 우리 책숲에 가서 빗물을 치워야 할 텐데, 곧 태어날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거의 끝손질’을 하느라 집에서 꼼짝을 못 한다. 이제 개구리는 밤에도 아침에도 낮에도 운다. 풀벌레소리도 섞이고, 멧새소리가 어울린다. 오늘은 바람이 휘몰아친다. 바람이 휘몰아치니 마을도 조용하다. 얼핏 보면 ‘널뜀날씨(기후이변)’일 테지만, 널뛰는 날씨가 ‘봄날씨’나 ‘여름날씨’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을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심을 적에, 늘 가만히 제자리를 찾게 마련이다. 우리는 글(언론보도)이 아니라 길(마음에 새길 꿈)을 볼 노릇이다. ‘남이 쓴 글’보다는 ‘이 삶을 스스로 갈무리한 글’부터 읽고 돌아볼 때에, 집과 마을과 나라를 함께 사랑으로 돌볼 만하다.


《혼란 기쁨》은 ‘몸바꿈’으로 살아가며 쉰고개 한복판을 지나는 길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적은 꾸러미이다. 사람은 ‘몸을 입은 넋’이라서, 사람을 알려면 ‘겉몸’이 아닌 ‘속빛인 넋’을 들여다볼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난 즈믄해에 걸쳐 나라가 사람들을 옥죄는 구실을 하느라 속빛이 아닌 겉몸으로 가두거나 몰아세웠다고 할 만하다. 마음을 틔울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몸을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 스스럼없이 나누는 길도 가둔 얼거리이다. 나무는 암나무하고 수나무가 있어서, 둘은 다르되 하나인 빛으로 나아간다. 사람도 암사람하고 수사람이 있어서, 둘은 다르되 하나인 빛으로 마주한다. 어느 몸이기에 낫거나 나쁘지 않다. 그냥 다르기에 다른 결을 바라보고 받아들여서 맞이하는 삶이다.


그런데 ‘작은이(소수자)’를 말할 적에 어쩐지 예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소수자’만 가리키는 듯하다. 이 나라에서 참말로 ‘작은이’라면 ‘시골사람’과 ‘시골아이’이지 않을까? 그리고 ‘헌책집 일꾼’도 거의 눈에 안 뜨이는 ‘작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집살림과 아이돌봄을 도맡는 아버지’도 그야말로 ‘작은이’라고 해야 맞다.


사람은 짝찟기만 하려고 태어나지 않는다. 풀벌레와 새와 벌나비와 나무와 풀도 짝짓기만 하려고 살아가지 않는다. 어느 숨붙이를 보아도 짝짓기는 아주 짧다. 짝을 짓는 뜻은 ‘나와 너라는 두 사람 숨빛을 하나로 모은 우리 사랑’을 새롭게 빚어서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면서, 이제부터 두 사람 삶과 살림과 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지으려는 길이라고 느낀다.


우리는 ‘놀이’나 ‘노닥거리기’를 하려고 짝짓기를 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나라이건 이웃나라이건 ‘아기낳기’를 할 뜻이 아니라, 그냥 놀거나 노닥거리는 짝짓기가 지나치게 넘치고, 이런 줄거리로 소설·영화·연속극·만화가 지나치도록 많다. 이와 달리 ‘아기를 기다리는 기쁨’과 ‘아이를 돌보는 사랑’을 다루는 소설·영화·연속극·만화는 한 줌조차 안 된다.


일본말 ‘성소수자(성적 소수자)’를 언제까지 써야 할까? 우리는 우리말로 ‘나란사랑’으로 풀어낼 수 있다. 나란히 서는 짝짓기이니까. 어떤 짝짓기이건 대수롭지 않고 대단하지 않다. 한집안을 이루더라도 짝짓기를 안 하는 사람이 많고, 아기를 낳을 때에만 짝짓기를 한 사람도 많고, 굳이 한집안을 안 이루면서 짝짓기를 아예 안 하면서 고요히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이제는 ‘몸뚱이’와 ‘살점’은 덜 말해도 된다. 이제는 ‘몸을 입은 넋’을 말할 때라고 본다. ‘우리는 왜 다 다른 넋’이면서 ‘두 몸 가운데 하나인 몸’을 굳이 골라서 입는지 돌아보면서 말할 때라고 본다. 몸에 칼을 댈 적에 우리 넋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돌아볼 때이고, 우리 몸은 어떤 ‘죽임물(화학약품·항생제·호르몬제)’도 안 바라는 줄 헤아릴 때이며, 이런 이야기를 펼 때이다.


바야흐로 사람으로서 ‘사람’이라는 말뜻을 새기고서, ‘사랑’과 ‘사이(새)’와 ‘살다·살리다(살림)’와 ‘삼·삼다’라는 낱말을 곱씹을 일이라고 느낀다. 스스로 사람인 줄 알면 어지럽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다. 스스로 사람이라는 빛을 바라볼 때에는 북새통이 아닌, 물결치고 바람이 부는 하루라는 삶이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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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까칠한 숲노래 씨 책읽기


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5.4.23.


《꽃에 미친 김군》

 김동성 글·그림, 보림, 2025.1.7.



고흥교육지원청에 ‘폐교임대신청서’를 손글씨로 적어서 띄우려고 읍내로 나간다. 열다섯 해째 전남 고흥에서 살아가며 돌아본다. 고흥과 전라남도는 문화도 예술도 교육도 희망도 없는 막장이 맞구나 싶다. 그러나 이곳이 막장인 줄 느껴야 이곳을 아름터로 돌보고 손보는 길을 열 수 있다고도 느낀다. 민낯을 들여다보고서 맨손으로 가꿀 마음을 지필 적에 바꾼다. 민낯을 안 보거나 등돌리면 아무 일을 안 하는 셈이다. 겨우겨우 글자락을 써서 다 부치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닷새 동안 거의 안 자면서 몰아치듯 일한 몸이 “좀 쉬어야 안 카나?” 하고 외친다. 이제 비가 그치는 하루이다. 저녁까지 안개가 짙다. 밤에 이르러 구름이 다 걷히면서 개구리소리로 넘실거린다. 이른저녁에 곯아떨어진다. 《꽃에 미친 김군》은 ‘아쉬운책’을 넘어 ‘안타까운책’이다. 이미 느낌글(그림책비평)에 적었는데, 호미 날이 너무 작고, 흙이 너무 허옇고, 이만 한 풀꽃밭이라면 흙이 까무잡잡해야 하고, 나팔꽃을 올리려고 옛사람이 대나무 작대기를 박을는지 아리송하고, 지난날에는 울타리를 저절로 타고서 올랐을 텐데 싶고, 일본에서 땅감(토마토) 기를 적에 쓰던 나무대가 왜 조선 무렵에 나타나는지 모르겠고, 휜 소나무와 등꽃이 엉뚱하고, 꽃을 담은 그릇도 뜬금없고, 18세기 사람인 김덕형인데 20세기에 들어왔다고 여기는 살살이꽃(코스모스)은 안 맞을 텐데 싶더라. 책이름도 안 어울린다. 우리나라 살림자락을 헤아린다면 “꽃에 미친 김씨”나 “꽃아이”나 “꽃돌이”나 “꽃사랑이”쯤으로 붙여야 알맞다. 또한 “꽃을 잘 아는 사람”이란, 한갓진 선비나 나리가 아니라, 흙을 늘 만지고 일하던 ‘여름지기(농사꾼)’이다. 꽃을 알려면 씨앗을 알아야 하고, 싹을 알아야 하고, 흙을 알아야 하고, 날씨와 철을 알아야 하고, 집살림과 들숲메바다를 알아야 하고, 아이를 낳아 돌볼 줄 알아야 하고, 풀과 나무를 두루 알아야 하고, 새와 벌레와 지렁이와 굼벵이와 소똥구리를 알아야 하고, 뱀과 개구리를 알아야 하는데, 이 책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없다. 꽃이란, 씨앗을 맺는 낟알이면서 열매로 가는 끝길이면서 새길이다. “꽃만 쳐다봐도 되는 선비와 나리”는 그만 쳐다보자. 이제 우리가 볼 곳은 “내내 흙을 지은 할매할배”요, 우리 스스로 흙살림을 짓는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어야 하지 않을까? 수수한 흙지기나 멧사람을 그리면 될 텐데, 수수한 이웃과 동무를 그려내지 못 하는 붓끝으로는 아이어른 모두한테 이바지할 수 없다고 느낀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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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까칠한 숲노래 씨 책읽기


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5.4.22.


《나의 하염없는 바깥》

 송주성 글, 걷는사람, 2018.4.30.



새벽에 빗소리를 듣는다. 밤새 바깥은 술꾼이 주절주절하며 시끄러웠다. 시골은 밤새 개구리소리와 풀벌레소리와 멧새소리 세 가지가 어울리는 밤노래인데, 서울은 밤새 술판인 줄 새삼스레 느낀다. 알맞고 즐겁게 마시면서 서로 고즈넉이 생각을 나누는 술자리란 없이, 골목이며 마을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떠드는 자리여야 할 만큼, 하루가 고되고 밥벌이가 힘겹다는 뜻 같다. 술담배이건 밥이건 옷이건 돈이건, 알맞게 즐기고 나누고 베풀 수 있을 적에 손에 책을 쥔다고 느낀다. 10시부터 숭실대 앞 〈라이브러리 두란노〉에서 ‘섬섬꽃’ 2걸음을 편다. 오늘은 ‘어른이라는 분’을 글감으로 삼는다. 우리나라에서 어른이 사라졌다고 여기는 분이 많다만, 흙으로 돌아간 어른은 이제 그만 그릴 때이다. 바로 우리가 스스로 어른으로 서서 아이곁을 돌볼 노릇이다. 《나의 하염없는 바깥》을 읽는 내내 갸우뚱했다. 틀림없이 ‘나’를 글로 담아내는 듯하면서도 정작 ‘나’는 안 보이고 ‘남’만 가득하다. 요즈음 나오는 ‘젊은시인’과 ‘원로시인’ 모두 ‘나’를 안 그리고 ‘남’만 그리는 듯싶다. ‘나를 나로서 바라보는 날’이 없기에 ‘스스로 짓는 삶’을 글로 못 담는 셈인가. 나무 곁에 서지 않으면 ‘나’를 볼 수 없을 텐데.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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