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왈 曰曰 - 하성란 산문집
하성란 지음 / 아우라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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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도심 학교를 새도심으로 옮기는 한국사람
 [책읽기 삶읽기 39] 하성란, 《왈왈》


 설을 맞이해서 아이를 데리고 여러 어르신을 만나뵈러 다닙니다. 집을 여러 날 비우고 돌아다닙니다. 집에서만 지낼 때에는 돈 쓸 일 없으면서 집일을 하느라 몹시 바쁩니다. 집일을 하느라 바쁘다지만, 정작 집안을 말끔히 치우거나 갈무리하지는 못합니다. 이 일 저 생각에 매여 이것 하고 저것 하면서 어수선합니다. 날마다 고단한 몸으로 잠들고, 새벽마다 다시금 기운을 내어 일어납니다.

 살림집을 떠나 여러 날 바깥에서 잠을 얻어 자고 밥을 얻어 먹습니다. 집안을 쓸고 닦는다든지, 밥을 차리고 치운다든지, 아이하고 놀아 주거나 아이 책을 읽힌다든지, 내 일을 하거나 내 책을 읽는다든지, 이런저런 일을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모처럼 다른 사람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밥을 먹고 나서 치우지 않는데다가, 그야말로 방바닥에 얌전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합니다.

 가만히 보면, 설이란 모든 일손을 쉬면서 어우러지는 때라 할 만합니다. 찬찬히 살피면, 설날은 내 일을 내려놓고 서로서로 얼크러지는 자리라 할 만합니다. 바쁜 일이건 느긋한 일이건 안달하지 않아도 좋은 때일 테지요.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복닥이지 않아도 기쁜 자리일 테지요.

 다만, 설이나 한가위에는 으레 일하는 사람만 일한다고 합니다. 일하는 사람만 더 일해야 하니 설이나 한가위를 못마땅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느 때에는 어떠한가요. 여느 때부터 일하는 사람만 일하지는 않는가요. 여느 때부터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함께 즐기고 함께 나누어 왔다면, 설이든 한가위이든 일하는 사람만 일할 까닭이 없습니다. 설이라 더 힘들고 한가위라 더 고단하지 않아요. 여느 때 여느 자리부터 서로서로 일손을 나눌 뿐 아니라, 다 함께 일손을 붙잡는 보람을 누려야 합니다. 여느 때 여느 자리에는 집일을 거들지 않다가 설에만 집일을 거들라 할 수 없습니다. 여느 때 여느 자리에서는 집일은 아랑곳하지 않다고 설이니까 집일을 돌보라 할 수 없어요.

 닥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는 일을 으레 할 뿐입니다. 삼백예순나흘은 엉터리인데 꼭 하루만 제대로 구르도록 할 수 없습니다. 한글날에만 한글을 사랑한다거나, 예수님나신날에만 예수님을 거룩히 섬긴다거나, 광복절에만 제국주의 식민지살이를 돌아본다거나 할 수 없습니다. 늘 되새기는 우리 삶입니다. 노상 곱씹는 우리 나날이에요.


- 오늘 중3인 큰아이는 과학고를 탐방했다. 식물원처럼 멋진 학교 건물에 반해 ‘열공’해서 꼭 입학해야지 결심하려는 순간 전학년 성적이 전교 일이 등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에 기가 팍 꺾인 참이다. (10쪽)
- 큰애는 보는 내내 ‘금잔디’가 된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이 ‘아줌마’에겐 남자보다 꽃이다. 눈이 즐거우면 그만이다. (16쪽)
- 아기를 키우면서 글을 쓰던 십여 년이 떠오른다. 아기는 꼭 마감을 코앞에 두었을 때 아팠다. (48쪽)


 소설쓰는 하성란 님 산문모음 《왈왈》을 읽습니다. 하성란 님은 당신이 살아온 결에 따라 글을 꾸준히 썼고, 이렇게 꾸준히 쓴 글이 모여 책 하나 태어납니다.

 하성란 님 산문모음 《왈왈》에 담긴 이야기는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따질 수 없습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가를 수 없습니다. 괜찮다거나 어수룩하다거나 잴 수 없습니다. 읽을 만하다거나 읽을 만하지 않다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그예 하성란 님 삶입니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이름난 대학교에 보낼 마음으로 서울 강아랫마을로 살림집을 옮기려고 애씁니다. 누군가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으로서도 더 돈을 굴리며 더 돈을 긁어모으려고 아파트 사고팔기를 합니다. 가까운 길이니 걸어서 오가는 사람이 있으나, 가까운 길이니까 자가용 타고 휙 다녀오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있으니 있을 때에 마음껏 쓰는 사람이 있고, 돈이 있기에 이때에 나보다 힘든 가난한 이웃이나 피붙이한테 주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거의 모두라 할 만큼 어느 집에나 텔레비전을 모십니다. 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한복판에 텔레비전을 모시곤 합니다. 집에 텔레비전을 모시는 집에서는 으레 텔레비전을 켜고, 으레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나누며, 으레 텔레비전 새소식에 귀를 기울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텔레비전을 안 모시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아주 드물지만 없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금잔디’이니 무어니를 다루며 이야기꽃 피울 테지만, 누군가는 금잔디인지 은잔디인지 하나도 모르며 눈길조차 안 두곤 합니다. 정치가 어떻고 겨울아시아대회가 어떠하며 해적이 어떻다는 둥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정치이든 겨울아시아대회이든 해적이든 알아듣지 못할 사람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가 아닌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입니다.


- 어렴풋이 우리가 이사가던 풍경이 떠오른다. 젊은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젊은 엄마는 리어카를 밀며 쉬며 갔다 …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것은 그렇게 리어카 한 짐도 되지 않았다 ..  (34쪽)
- 무청이 무성한 데다가 꽃까지 피었다. 무꽃은 처음 보았다. 엄지 손톱만 한 꽃들이 동글동글 맺혀 있다. 대체 어떻게 해서 꽃까지 피울 수 있었을까. (47쪽)


 인천에서는 제물포고등학교를 송도로 옮기느니 마느니 하고 떠들썩합니다. 벌써 옮길 만한 학교는 일찌감치 옮겼는데, 이제 와서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할 까닭은 없습니다. 옮기지 말아야 한다면, 제물포고등학교에 앞서 축현초·인천여고·대건고·박문초부터 따져야 하며, 이 학교들을 옛도심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이들 학교를 옮기지 말아야 했습니다. 새도심에 새 학교를 지었어야지, 옛도심에서 옛 학교를 파내는 일부터 글러먹었습니다. 새도심에만 사람이고 옛도심에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옛도심 사람들이 새도심 아파트로 옮긴다 하더라도 옛도심에서 죽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며, 옛도심 오래된 내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옛도심 작은집에서 가난하면서 아름다이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아닌 사람을 헤아리고, 잇속이 아닌 사랑을 살폈다면, 처음부터 옛도심 학교는 옛도심 학교대로 알뜰살뜰 돌보면서 새도심에는 새도심에 걸맞게 새 학교를 지었어야 합니다.

 인천은 서울 강웃마을에서 서울 강아랫마을로 숱한 학교가 파 옮긴 일을 따라했습니다. 제물포고등학교도 옮기려면 얼마든지 옮길 노릇이요, 인일여고이든 인천여상이든 중앙여상이든 동산중·고이든 박문여고이든 신나게 옮길 일입니다. 학교 하나를 놓고 이러쿵저러쿵해 보았자 밑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학교 하나 옮기든 말든 그다지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로울 일이란, 우리가 우리 삶을 어떻게 일구느냐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알차며 아름답게 일군다면,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을 옮기더라도 옛도심과 새도심이 서로 슬기로우며 아름다울 수 있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형편없거나 엉망진창으로 내몬다면,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이 옛도심 자리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더라도 우리 삶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도시 물질문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리에서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 누구하고 이웃하며 누구하고 동무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도시에서 이루려는 꿈은 무엇이요, 도시에서 하려는 일과 놀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걸어갈 앞날은 어떠한 길인지 곱씹어야 합니다. 개발을 해야 한다면 어떠한 개발을 어떠한 크기로 왜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몽땅 때려부수고 새로 짓는 개발인지, 살리거나 지키거나 가꿀 모습은 살리거나 지키거나 가꾸면서, 고치거나 보듬거나 다듬을 곳은 고치거나 보듬거나 다듬는 개발인지를 톺아보아야 합니다.

 아파트와 쇼핑센터만 우람하게 새로 지으려는 개발인지, 동네사람이 동네 발자취와 땀방울과 살림살이를 아끼면서 서로 돕고 어깨동무하는 터전을 일구려는 개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파트와 쇼핑센터를 짓는다면 이 아파트와 쇼핑센터에는 누가 들어오며 누가 즐기는 터전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개발을 하는 돈은 어디에서 나오며, 개발이익을 누가 거두고, 이 같은 개발 효과는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지며, 앞으로 서른 해 뒤에 똑같은 개발을 다시금 하려는지, 오래오래 동네를 아름다이 보살피려는 개발인지를 곰곰이 따져야 합니다.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이 옮긴다 해서 송도가 더 발돋움하지도 않으나, 제물포고등학교 한 곳이 옮긴다 해서 옛도심이 폭삭 주저앉지도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나와 이웃이 어떻게 살아가며, 행정과 정치하는 동네 공무원이 동네를 어떻게 돌보도록 마음쓰느냐에 따라 사뭇 달라지는 삶이며 삶터입니다.


- 시골이 도시보다 변화가 적고 지루할 거란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하루하루가 변화무쌍했다. 밤이 되면 짙은 풀냄새가 차올랐다. 산 저쪽에서 울던 새가 다음날에는 산 이쪽에서 울었다. 아련히 먼 기억 속의 새소리였다. 빛을 좇아 모기장 틈으로 날아온 날벌레에 기겁한 아이가 비명을 질러댔다. (186쪽)
- 불쑥불쑥 앞을 가로막는 도로턱과 울퉁불퉁한 인도, 거기에다 상점에서 내놓은 물건들 때문에 지나치기도 쉽지 않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는 느리게 달리는 것도 빨리 달리는 것도 위험하다. 때때로 자전거를 메고 차도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사대강 사업 중 하나에 둔치의 자전거도로 설치가 들어 있다. 왜 자전거도로를 강에서부터 시작하는 걸까.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 순간 문앞에서부터 문제에 부딪힌다. 자전거도로가 난 그 강까지 자전거로 갈 생각을 하면 막막해진다. (210쪽)


 하성란 님 산문모음 《왈왈》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만 살고, 또 도시 가운데 서울에서만 살며, 또 서울에서도 아파트에서만 사는데다가, 자가용 몰아 이곳저곳 빠르게 싱싱 오가는 하성란 님이 쓰는 글은 저하고는 걸맞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도 골목동네에서 살았고, 시골마을로 식구들 모두 옮겨서 살아가며, 시골 가운데에서도 멧자락 깊은 데에 깃들고, 자가용은커녕 텔레비전도 없이, 자전거나 시골버스나 두 다리로만 다니는데다가, 꽤나 어수룩하지만 텃밭 하나 건사하는 삶으로 하성란 님 삶을 마주했을 때에는 퍽 따분합니다.

 나와 옆지기는 ‘으리으리한 건물’을 보면서 우리 아이를 학교에 넣을 생각이 없습니다. 학교가 학교다워야 아이를 학교에 넣습니다. 아이한테 ‘열공’을 시킬 마음이 없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에서 말하는 열공이란 한낱 ‘시험점수 높게 나오도록 내몰기’일 뿐인데, 이런 열공을 시킨다면서 아이 머리와 마음과 가슴을 망가뜨릴 수 없어요. 신문 안 읽고(시골에서 신문을 본댔자 며칠 늦게 봅니다) 방송 안 보며 맛집·멋집 같은 데에는 찾아다니지도 않는 주제이기에, 하성란 님 글은 하성란 님 삶을 소롯이 적바림하면서 수수한 멋을 예쁘게 보듬는다고 느끼면서도, 우리 식구들 삶하고는 참 동떨어졌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성란 님은 살림하고 아이 낳아 키운 어머니 마음으로도 글을 씁니다. 집살림과 아이돌보기에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인 글은 저 또한 퍽 읽을 만하다고 느끼지만, 이런 글은 너무 적습니다. 더 수수하고 더 투박하며 더 못나고 훨씬 못생긴 여느 자리 여느 삶 이야기를 솔솔 풀어낸다면, 나로서는 《왈왈》이라는 책을 우리 옆지기나 우리 장모님한테도 선물해 주겠건만, 살짝 수수하려다가 수수한 멋하고는 멀어지고, 조금 투박한가 싶더니 깍쟁이 같은 서울내음이 짙게 배고 말아, 혼자 읽고 혼자 덮습니다.

 하성란 님은 하성란 님 삶을 꾸리기 때문에, 하성란 님한테는 하성란 님 오늘 하루가 아름답습니다. 저는 제 삶을 일구니까, 저한테는 제 오늘 하루가 기쁘며 고맙습니다. 컨테이너집과 비닐집 차가운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저녁에 잠들어야 하는 옆지기네 어르신하고 설날 막바지를 함께 보내면서 이렁저렁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 ‘가난하다’는 밑바닥 사람들 20% 살림돈이 자그마치 1억이 넘는답니다. 아래쪽 20%조차 1억이 넘는다니 꿈만 같은데, 이런 푼수라 한다면 우리 살림이나 옆지기네 어르신 살림이란 1%에 들거나 0.1%에 들지 않나 싶기도 하고, 이 나라에서 80∼90%는 1억 넘는 돈이나 집이나 자가용이나 재산을 가졌다는 소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가용 한두 대 없는 집이 드뭅니다. 이 나라 60% 안팎은 아파트에서 살아간답니다. 어쩌면 벌써 70%를 웃돌는지 모르며, 앞으로는 아파트 사람들이 80%를 훌쩍 넘으리라 봅니다. 아니, 벌써 이와 같다 해야 옳을는지 모르지요.

 가난하다는 사람들도, 또 여느 자리 사람들도, 또 웬만한 사람들도 살림살이 눈높이가 ‘아파트 + 자가용’에다가 온갖 전기전자제품이랑 큰도시 살림살이인데, 하성란 님 같은 분들한테 어떠한 글을 쓰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하성란 님은 하성란 님 삶을 살포시 껴안으면서, 이 틀에서 사랑하고 믿는 고운 삶자락을 글꽃으로 여밀 수 있을 때에 아리땁다 할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가난한 사람들은 읽을거리가 매우 적고, 가난한 사람들은 바쁘거나 고된 나머지 스스로 글을 쓰지 못하며, 가난한 사람들하고 손잡는 삶을 글로 담는 사람이나 일꾼 또한 참 없습니다. (4344.2.7.달.ㅎㄲㅅㄱ)


― 왈왈 (하성란 글,아우라 펴냄,2010.12.10/1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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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집일 안 하기


 설날을 맞이해서 집을 떠나 여러 날째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닌다. 집에 머물지 않으니 집일을 안 하며 지낸다. 여러 어른들 만나뵈러 찾아다니는데, 어른들마다 아이를 귀엽게 보아 주시고 아이하고 즐거이 어울리며 놀라 주신다. 아이는 아이대로 귀엽다 해 주는 분이 많고 어울릴 사람이 많다 보니 아버지나 어머니 품에 있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주 모처럼 홀가분하게 지낸다. 게다가 손수 밥을 차려 식구들 먹이지 않으니 하루 내내 할 일이란 없다. 그저 자리에 앉아 밥상 고맙게 받아먹으며 입만 나불나불거릴 뿐.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니, 집을 치운다거나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참말 집일에 마음쓰지 않는다. 저녁이 되면 아이 옷가지를 빨래하지만, 집에 머물 때처럼 이 빨래 저 빨래를 하지 않는다. 설밥은 올해에도 어머니가 혼자서 다 하고 말았으니 도울 겨를이 없이 자잘한 일만 거들며 일마무리만 조금 돕는다. 올해에는 설밥을 함께 마련하고 싶었으나, 어머니는 밤새 혼자서 다 하셨단다.

 집일을 안 하고 아이랑 놀지 않는데, 정작 조용히 책을 읽지는 못한다. 마땅한 일이겠지. 어른들하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인천마실을 하면서 오랜만에 만난 동네 분이랑 사진벗이랑 이야기마당을 마련한다. 종이책은 읽지 않으나 사람책은 읽는다. 종이책을 들출 겨를이 없으나 사람책하고 내내 어우러진다.

 시골집으로 돌아가기 앞서 헌책방 한두 군데쯤 들를 수 있으려나. 인천에서도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겨우 맛보기만 했는데, 서울을 거치며 헌책방마실을 해 볼 수 있을까 궁금하다. 책 구경은 못하더라도 헌책방 사진은 한두 장이라도 찍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옆지기가 둘째를 낳기 앞서 옆지기네 어르신들 만날 수 있는 일로도 고맙구나 해야지. 헌책방마실은 다음에도 할 수 있고, 아이를 낳기 앞서 첫째랑 아빠랑 둘이서 얼마든지 할 수 있지. (4344.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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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헌책방


 설을 맞이해 옆지기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댁을 찾아왔고, 이튿날 헌책방거리 안쪽 골목집에서 잠을 얻어 잔 뒤 헌책방을 찾아가며 설 인사를 한다. 헌책방에는 책손이 가득하고, 새로 들어오는 책손도 많아 발을 디딜 틈이 없다. 아이는 사람이 많다며 좋아한다. 아이 손을 닦이던 손수건을 아이가 뺏어 들고는 낯선 사람이나 낯선 아이를 붙잡고는 손을 닦아 주겠다며 애쓴다.

 설날이 끝나고 토요일과 일요일이 잇달아 이어진 나날,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책을 찾아 읽으려는 사람들 발길로 꽤나 북적거린다. 그런데 지난날 발길하고는 좀 다르다. 지난날에는 이곳 헌책방거리로 대중교통을 타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제는 으레 자가용을 타고 찾아온다. 두 다리로 복닥복닥 오가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고, 길가에 죽 대 놓은 자가용이며, 차를 댈 곳을 찾는 사람들을 이곳저곳에서 마주한다.

 자가용을 타고 왔으니 사들인 책을 싣고 돌아가기 수월하겠지. 자가용을 타고 왔으니 책을 장만한 다음 골목을 거닐며 동네를 둘러본다든지 동네 밥집에 찾아가기는 어렵겠지.

 그래도 퍽 긴 설 쉬는날에 헌책방마실을 하는 사람들이 놀라우며 반갑다. 인천 배다리에는 이렇게 헌책방거리가 있으며, 설 쉬는날에도 씩씩하게 문을 열어 놓으며 책손을 기다리니 참으로 고마우며 즐겁다. 헌책방 일꾼은 헌책방을 지키며 책이랑 쉬고, 헌책방 책손은 책시렁 책들을 가만히 둘러보며 책이랑 논다. 부산 보수동이랑 청주 중앙동이랑 전주 홍지서림 골목은 어떠할까. 서울 시내 곳곳에 깃든 헌책방은 또 얼마나 많은 책손이 드나들까. (4344.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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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2-07 23:35   좋아요 0 | URL
인천 배다리 헌책방의 경우 인천분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울 같은 경우 지하철에서 내려서 걸어가야되서 불편하긴 하더군요.이럴때 차가 있으면 편하겠지요.그나저나 설 연휴기간에도 문을 연 헌책방도 계시네요.전 안여는줄 알고 아예 가지도 안았지만요^^

파란놀 2011-02-08 08:50   좋아요 0 | URL
꽤 많은 헌책방이 명절에도 문을 연답니다~
 


 어느 만큼이나 책읽기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지만, 막상 이 시를 쓴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어린이문학이기 때문에 어린이일 때에만 읽히고 지나친다든지, 어린이 아닌 사람은 읽거나 말하거나 아로새길 만하다고는 여기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첫째 아이를 함께 낳아 키우면서, 아이한테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서서 아장아장 귀여운 물오리들아. 나도 이제 찬바람 두렵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같은 노래를 곧잘 불러 줍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이 돌아가시기 앞서 마지막으로 쓴 시 〈겨울 물오리〉입니다. 나는 이 노래를 불러 주면서, 노래는 노래로 잘 짓기도 했으나, 노래에 앞서 시부터 훌륭하기 때문에 이토록 고운 노래가 태어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이 노래를 알 만한 어른이라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머니이곤 합니다. 아이를 함께 낳아 함께 키우는 아버지는 이 노래를 잘 모를 뿐더러, 이 시조차 거의 모릅니다. 아마 아버지 가운데 어린 날 이원수 님 문학을 살가이 마주하거나 즐긴 분은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오늘날이라 해서 이원수 님 문학을 읽히기는 만만하지 않다고도 느낍니다. 왜냐하면, 어린 날 이원수 님 문학을 제대로 맛보거나 즐기지 못한 어른이 아이를 낳는달지라도 아이한테 무슨 책을 읽혀야 좋을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아이만 낳는다고 아이한테 어린이책을 쥐어 주지 못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어린이책이든 어른책이든 책을 살가이 마주하는 가운데,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는 아이 눈높이로 삶과 사람과 사랑을 볼 줄 알아야 비로소 이원수 님 문학책을 비롯한 아름다운 어린이문학을 찾아나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짝꿍이랑 사귀는 이라면, 사랑하는 짝꿍이 좋아하는 갈래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선뜻 다가서지는 못할지라도 짝꿍이 좋아하는 갈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때가 잦으며, 짝꿍하고 나눌 이야기란 짝꿍이 좋아하는 삶을 조곤조곤 갈무리하는 이야기입니다.

 내 늙은 아버지나 어머니하고 이야기꽃을 피우자면, 내 늙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좋아하는 삶과 얽힌 이야기를 꺼내야 합니다. 나 혼자만 좋아하는 이야기를 꺼낸다면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마음을 살뜰히 쓰고, 생각을 알뜰히 기울여야 합니다. 살섞기와 입맞춤도 사랑이지만, 사랑은 살섞기와 입맞춤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읽기가 되어야 사랑이며, 삶읽기와 사람읽기를 찬찬히 이어갈 때에 비로소 사랑입니다. 내 짝꿍 사랑이 어떠한가를 읽지 못하고, 내 짝꿍 삶을 읽지 못하며, 내 짝꿍이 어떠한 사람이요 내 짝꿍 둘레를 이루어 온 숱한 사람들을 읽지 못한다면 사랑이 되지 못합니다.

 책 하나를 읽자면 깊이 아끼며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글쓴이 한 사람을 헤아리자면 이이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가 아니라, 이이가 쓴 글과 내놓은 열매와 걸어간 삶을 차분하며 올바로 바라보는 눈결과 손길을 살펴야 합니다. 틀에 박힌 눈이 아니요, 내 틀에 갇힌 눈이 아니며, 내가 마주한 글쓴이 한 사람이 어디에서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랑과 꿈으로 삶을 일구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책읽기를 어느 만큼 하는 사람일까요. 우리는 학교에 다니고 회사에 다니며 보금자리 살림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어느 만큼 책읽기 삶읽기 사람읽기 사랑읽기 꿈읽기를 하는 한 사람인가요. (4344.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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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니 리펜슈탈


 레니 리펜슈탈을 옳고 바르게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레니 리펜슈탈을 깎아내리거나 추켜세우지 않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레니 리펜슈탈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찬찬히 곱씹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은 레니 리펜슈탈이지 라니 리펜슈탈이나 니레 옹펜슈탈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안 많습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가를 깨달은 다음, 내가 하고픈 일에 내 모두를 바치는 사람은 더 적습니다. 내가 하고픈 일에 내 모두를 바치면서 온통 빠져드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어느 과학자는 핵폭탄을 다 만들고, 실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널리 만들어 사고팔도록 하고 나서야 겨우 핵폭탄 만드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가 하고 털어놓습니다. 온통 엉망진창으로 해 놓고 나서 느즈막하게 뉘우치는 사람이라 할 텐데, 이런 사람들은 뜻밖에도, 그동안 저지른 짓을 놓고 이렇게든 저렇게든 화살을 받지 않습니다.

 레니 리펜슈팔이 ‘린 리펜슈팍’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여자 아닌 남자로서, 그동안 어떠한 사람(남자)도 이루지 못하던 일을 이룰 뿐 아니라, 어떠한 사람(남자)보다 튼튼한 몸과 힘과 머리와 재주로 새 문화와 삶을 헤쳐 나간다고 한다면, 이이를 바라보거나 마주하거나 사귀려는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곱씹어 봅니다.

 이사도라 던컨은 이사도라 던컨일 뿐입니다.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은 앙리 까르띠에브레송일 뿐입니다. 최승희는 최승희일 뿐이요, 박경리는 박경리일 뿐입니다.

 레니 리펜슈탈은 하느님도 성모도 아닌 자그마한 한 사람이며, 여자입니다. 곧은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여자이고자 하던 레니 리펜슈탈이지만, 이러한 삶결을 바라보는 사람은 당신 스스로 얼마나 아름답고 작은 한 사람이며, 남자이거나 여자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수잔 손탁은 레니 리펜슈탈을 말할 수 없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조차 하지 않으면서 불바늘로 쿡쿡 쑤시는 글을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글이란 따스한 사랑으로 아리땁게 어루만지는 이야기이지, 불바늘 괴롭히기가 아닙니다. 수잔 손탁은 사랑을 찾아 글을 써야 하고, 사람들이 스스로 잃거나 내다 버린 사랑을 되찾거나 아낄 수 있도록 북돋우는 글을 써야 했습니다. 어쩌면, 수잔 손탁부터 스스로 사랑을 잃거나 내다 버렸을는지 모르는데, 사랑 없는 눈으로는 사람과 삶을 읽을 수 없으며, 사람과 삶을 읽는 사랑을 보듬지 않고서야 사진도 책도 작품도 문화도 예술도 과학도 철학도 교육도 역사도 사회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을 읽으면 레니 리펜슈탈이 살았던 한때를 읽는 셈입니다. 레니 리펜슈탈을 읽으면 레니 리펜슈탈을 둘러싼 사람들을 읽는 셈입니다. 레니 리펜슈탈 둘레에는 착한 사람이 몇쯤 있었을까요. 레니 리펜슈탈 가까이에는 참다운 사람이 얼마쯤 있었을까요. 레니 리펜슈탈을 바라보는 이 가운데에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누가 있었을까요.

 레니 리펜슈탈은 당신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받고 삶을 선물받으며 당신 스스로 꿋꿋하게 걸어갈 길을 씩씩하게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튼튼하게 한 발 두 발내디뎠습니다. (4344.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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