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 하나 태어나기까지


 후루룩 넘기면 다 본다는 사진책일 수 있습니다. ‘읽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본다’고 하는 말로는, 사진책을 후루룩 넘기면 다 보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 글로 된 책이라 하더라도 후루룩 넘긴 다음 ‘다 보았네’ 하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림으로 된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루룩 넘기고서는 ‘이제 책 다 보았어요’ 할 수 있어요.

 참말로 다 보았으니까 다 보았다고 말합니다. 다 읽지는 않았으니까 읽었다고는 안 하고 보았다고 합니다. 보는 일이란 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는 일이니까, 후루룩 넘기면서도 이쯤은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 할 때에는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샅샅이 훑는다든지 줄거리를 살핀다든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책을 읽는다 할 때에는, 이 책을 내놓은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어떠한 나날을 일구어 어떠한 꿈과 이야기를 책에 깃들었는가를 내 가슴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책읽기는 삶읽기가 됩니다. 책을 쓴 한 사람 삶을 읽을 때에 책읽기입니다. 사진으로 된 책이든 그림으로 된 책이든 만화로 된 책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있게 읽은 만화책이라 한다면, 만화책을 내놓은 사람 스스로 재미나게 살아가면서 당신이 겪거나 부대낀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재미나게 살았으나 책은 좀 따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분하게 살았는데에도 책은 꽤나 재미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려 하는 사람은 이 대목을 잘 돌아보거나 느끼거나 헤아려야 합니다. 참으로 줄거리며 알맹이며 ‘글쓴이 삶’이며 나 스스로 재미나게 느끼면서 즐겁게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들일 만한가를 돌아보거나 느끼거나 헤아려야 합니다. 시간을 때우거나 심심풀이로 삼으려고 억지로 읽는 책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숙제로 읽는다든지 독후감 때문에 읽는다든지 둘레에서 자꾸 읽으라고 건네니까 읽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읽는 책’ 가운데 만화책처럼 금세 읽어치우는 책은 없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만화책을 ‘읽는다’기보다 ‘읽어치웁’닙니다. ‘읽어서 치우니’까 읽어치운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만화책을 내놓는 사람은 얼마나 빨리 한 권 내놓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금세 읽어치우는 만화책 한 권이 태어나기까지는 몇 시간? 몇 날? 몇 달? 몇 해쯤 걸리려나요.

 처음부터 펜으로 슥슥 그릴 수 있는 만화쟁이는 틀림없이 있습니다만 몹시 드뭅니다. 만화를 그릴 때에는 먼저 연필로 그립니다. 연필로 원고 장수에 맞게 한 꼭지를 그립니다. 이런 다음에 펜으로 연필 위에 대고 그립니다. 점이 박히거나 뿌옇거나 빗금이 쳐진 ‘톤’이라는 조각을 오려서 붙입니다. 펜으로 그리다가 잘못 그리면 하얗게 지우고 다시 그립니다. 다 그리고 다 붙인 다음에 지우개로 연필 자국을 지웁니다. 이렇게 마무리한 만화 원고를 출판사로 손수 가져다 주거나 출판사 편집자가 원고를 받으러 와서 가져갑니다. 이 원고를 출판사에서 그대로 긁어서 엮은 다음 책으로 묶습니다.

 낱권책으로 한 권 묶일 만한 부피가 되는 원고를 주마다 그려서 모을 수 있고 달마다 그려서 모을 수 있습니다. 주마다 이어그리는 작품이라면, 이러한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거의 잠을 못 잡니다. ‘죽은 듯이 산다’고 할 만큼 밤을 지새우면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림만 그려서는 만화가 태어나지 못합니다. 만화에 담을 이야기를 살펴야 하고,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든 회사이든 일터이든 집이든 ‘뒤(배경)’에 그려 넣어야 하니까, 만화쟁이 눈으로 보아야 하고 사진으로도 찍으며 밑그림(스케치)을 그리기도 합니다. 몸으로 뒷모습(배경)을 느껴 보지 않고서야 싱그럽거나 살아숨쉬는 만화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걷는 모습 뛰는 모습 움직이는 모습 자는 모습을 만화로 그리자면 오래디오랜 나날에 걸쳐 ‘사람 모습 그리기’를 갈고닦아야 합니다. 새를 그리든 자전거를 그리든 밥그릇을 그리든, 그림을 그린 오랜 나날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만화로 담아 나누려는 만화쟁이 마음과 꿈을 담습니다.

 금세 읽어치우는 만화 하나 그리자고 만화쟁이 한 사람은 온삶을 바칩니다. 뚝딱 읽어치우고 다음 권이나 다음 책을 기다릴 수 있을 테지만, 이 만화 하나를 그리기까지 어떠한 손길과 땀내가 배었는가를 조금이나마 함께 느낄 수 있다면, 후루룩 본 다음 조금 느리게 다시 읽을 테고, 다시금 더 느리게 세 번 네 번 거듭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읽거나 거듭 읽거나 새삼 읽으면서 비로소 만화책이라고 하는 책을 읽는 참맛을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4344.2.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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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카메라는 39.5℃ - 패션 사진가 박경일의 라이프 포트폴리오
박경일 글.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패션 없는 한국에서 패션사진 찍자니까
 [찾아 읽는 사진책 19] 박경일, 《나의 카메라는 39.5℃》(랜덤하우스코리아,2007)



 패션사진을 하는 박경일 님은 《나의 카메라는 39.5℃》라는 책에서 “티베트나 몽골의 원주민들이 정말 순박한 얼굴로 민속 옷을 입고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람들의 인생이 보일 뿐이지 그걸 찍은 작가의 인생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혹 그런 사진을 보며 작가의 인생관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정작 나를 사로잡는 건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일 뿐이다(17쪽)”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옳습니다. 왜냐하면, 티베트 민속 옷을 입은 사람들을 찍는다 해서 이런 사진이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닌 사진을 찍으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인 줄 내세우는 작품들은 그다지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니까, 박경일 님 말처럼 ‘사진기를 바라보는 그 사람들 눈빛’이 보일 뿐입니다.

 참다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다큐사진은 스스로 다큐사진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이면서 갈래를 나누자면 다큐사진이 될 뿐입니다. 먼저 사진답지 않고서야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제대로 사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진은커녕 다큐사진이 못 되고, 이런 사진으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건네지 못합니다.

 참다이 사진이면서 다큐사진으로 갈래를 나눌 만한 사진을 들여다보면, 이 사진을 읽으면서 이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과 삶을 함께 읽습니다. 애써 이러한 사진을 찍는 사람 손길과 다리품을 읽고, 이러한 사진을 우리한테 보여주려는 사람 삶과 꿈을 읽습니다.

 박경일 님은 “내 사진이 단순히 예쁘다거나 멋지다는 개념으로 불리는 패션사진이 아니라 그 안에 분명한 스토리가 있고 나만의 아이디어가 녹아 있는 사진이 되기를 바란다(33쪽).”고 말합니다. 곧, 이야기가 녹아들지 않으면 ‘사진이 아니’요 ‘사진이 아니면서 패션사진 또한 아니’라는 셈입니다.

 옳게 찍은 다큐사진이 아니라면, 다큐멘터리라는 이야기를 느끼지도 못할 뿐 아니라, 사진으로서도 따분하거나 엉터리이거나 뒤틀립니다. 옳게 찍은 다큐사진이어야 다큐멘터리 이야기뿐 아니라 사진으로서도 즐거우며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박경일 님이든 다른 누구이든, 패션사진으로서 패션사진다웁기 앞서 사진으로서 사진다워야 합니다.

 사진으로서 사진다우려면 ‘내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어야 합니다. 내 이야기가 깃든 사진이란 ‘내 삶이 깃든 사진’입니다. 내 이야기와 내 삶을 사진으로 깃들일 때에 ‘사진이 태어나’면서 ‘갈래를 나눌 때에 패션사진이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박경일 님은 “처음 카메라를 메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는가가 문제가 아니란 것이었다(34쪽).” 하고 느낍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 해 보았자 ‘사진에 내 이야기가 담기’지 않습니다. 그저 예쁘장한 사진이 나올 뿐입니다. 길거리를 헤매면서 그럴듯한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대서 ‘사진에 내 삶이 스미’지 않습니다. 그저 그럴듯한 모습을 그럴싸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사진은 잘 찍은 작품이 아닙니다. 잘 찍은 작품이래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 가운데 잘 찍은 작품이 있기도 하지만, 잘 찍는 틀이나 솜씨나 매무새가 사진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없고 삶이 깃들지 못한다면 사진도 문화도 예술도 삶도 아닙니다.

 박경일 님은 “내츄럴한 사진은 자연스러운 느낌만 잘 살면 약간의 허점도 문제되지 않고 도리어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와 친밀감을 줄 수 있지만, 테크니컬한 사진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모델의 얼굴에 난 잡티 하나까지 사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쳐 버리기 때문이다(50쪽).” 하고 말하지만, ‘내츄럴’이건 ‘테크니컬’이건 조그마한 잡티 하나 때문에 사진이 망가지거나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담으려고 뜻하지 않은 모습이 사진으로 스며들면서 뜻밖에 놀라운 사진이 될 수 있다지만, 내가 담으려고 뜻하지 않은 모습이 엉뚱하게 스며든 나머지 내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안 되고 맙니다. 그래서 ‘내츄럴’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잡티 하나’ 때문에 다시 그 자리로 가서 다시 그 빛과 이야기가 살아날 때까지 기다립니다. ‘테크니컬’ 사진이기 때문에 잡티 하나로 사진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사진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 빈틈이나 어수룩한 데가 드러날 수 없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은 한복판에 담는 모습이든 구석퉁이에 넣는 모습이든 모두 살피며 보듬어 껴안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지, ‘내츄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매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테크니컬’ 사진 또한 사람이 이루는 사진이기에, 이러한 사진에도 ‘사람다운 느낌’을 담지 않고서야 즐거이 마주할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어떤 순간을 기다려 포착해 내는 것만으로는 내가 그리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을 평생 담아낼 수 없(61쪽)”습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꾸려야 합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꾸리다 보면, 사진기를 쥔 내 앞에 ‘내가 담아서 그리고픈 이야기가 깃든 모습이 어느 한때에 환하게 나타납’니다. 나는 이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환한 모습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나타나는 환한 모습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서 내 삶을 일굴 때에 시나브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다시금 마땅한 노릇인데, “정 노출대로 찍으면 매번 달력 사진 같은 것밖에 나올 수가 없다(85쪽).”는 말은 틀립니다. 노출을 제대로 해서 찍는다고 왜 ‘달력 사진’일까요. 게다가 ‘달력 사진’이 노출을 ‘정 노출’로 할까요? 게다가 ‘정 노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진 노출’이란 사진기를 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느 사람은 더 밝게 볼 수 있고, 어느 사람은 더 어둡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을 종이에 뽑으려고 사진관에 맡기면 으레 ‘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올 듯한데?’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진관에서는 제 사진을 ‘밝게 보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 눈에는 제가 찍은 사진빛 그대로 제 ‘노출’이니까,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제 사진을 보는 분 가운데에는 ‘너무 어두운 빛’이라 하는 사람이 있지만 ‘딱 좋은 빛’이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가는 대로 제 빛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제가 바라보는 빛이 가장 옳거나 좋거나 낫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제 빛은 제 빛을 뿐입니다. 바른 노출도 그른 노출도 넘치는 노출도 모자란 노출도 아니에요. 우리들이 사진기를 쥐며 ‘나한테 맞는 노출’을 찾자면, ‘내가 바라보는 삶과 사람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알아채야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창의성과 동떨어진 교육을 받고 자랐다. 사진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공학과에 들어가기 전부터 학원에서 스파르타 식 교육을 받는다. 학교에 가서 뭘 배울까 싶을 정도로 대학입시만을 위해 공부한다(84쪽).”고 하니까 ‘정 노출’이니 하고 생각하고야 맙니다.

 그런데 내 사진이 ‘달력 사진’이면 어떻습니까. 내 사진이 ‘예술사진’이어야 아름다운 사진일까요. 내 사진이 ‘일 등급 사진’이 될 때에 비로소 나는 내 사진길을 잘 걸었다 할 만하겠습니까. 내 사진을 남들이 어떻게 재거나 따지든, 내 사진에 내 이야기를 소롯이 담아 내 삶을 어여삐 보듬는 나날이라면, 내 사진길은 씩씩하며 당차고 기쁩니다.

 박경일 님은 “8×10 카메라로 만든 시리즈. 무거운 카메라만큼이나 모델도 나도 경직되어 있는 게 느껴진다(177쪽).”고도 말합니다. 무거운 사진기를 쓰니까 모델이나 사진쟁이가 무거워질까요. 가벼운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가 가벼워지나요. 값나가는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는 값나가는 사람으로 탈바꿈하는지요. 싸구려 사진기를 쓰면 모델이나 사진쟁이는 싸구려로 나동그라지는가요.

 은행원이었다가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박경일 님 사진삶을 담은 책 《나의 카메라는 39.5℃》 책날개 첫머리에는 박경일 님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패션 사진가가 된 은행원”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최고’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진 찍는 사람 가운데 ‘최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쟁이는 어떻게 사진을 해야 ‘첫손가락’이 될까요. 어떤 패션사진을 찍어서 선보여야 ‘으뜸’이 되는지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만 있습니다. 사진이 돋보인다거나 사진이 놀랍다 할는지 모르나, 돋보이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 아니며, 놀라운 사진이 대단한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입니다. 사진은 사랑입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이도 저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인 까닭에 ‘최고라 일컫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진은 사랑이니까 ‘첫손가락 꼽는’ 사랑이 없습니다. 사진은 삶인 만큼 ‘으뜸으로 여길’ 삶이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담아 좋아하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박경일 님은 《나의 카메라는 39.5℃》를 거의 마무리할 즈음에 “우리가 찍는 옷은 한복이 아니다. 전부 외국 디자이너들의 서양 옷이다. 그러니 한국인들이 입은 느낌과 외국인들이 입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파란 눈에 금발 머리카락의 유럽 여자가 한복을 입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모습으로 창경궁에 앉아 있는 사진이 화보로 나가면 우리가 보기에도 ‘별난 사진이다’ 하는 정도지 ‘우아하고 단아하다’고 하지는 않는다(18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즈음에서 박경일 님은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면서 책을 마무리합니다.

 한국에는 ‘패션’이 없습니다. 패션이 없는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찍어 본댔자 패션사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입는 옷은 ‘패션’이 아닌 ‘서양 옷’입니다. ‘한복을 걸친 서양사람’이 우스꽝스럽거나 웃기는 모습으로 보인다면, ‘서양 옷을 걸친 한국사람’도 우스광스럽거나 웃기는 모습으로 보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 옷을 입은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요. 온통 서양 옷만 입는 한국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한국 패션사진’은 ‘서양사람을 모델로 세워 서양 옷만 입히는 사진’에 머뭅니다.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하는 사람은 패션사진도 한국사진도, 끝끝내 사진도 못 하는 셈입니다.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하자면, ‘늘 서양 옷만 입는 한국사람 삶’이 무엇인가를 찬찬히 꿰뚫을 뿐 아니라 마음속 깊이 사랑하면서 사진길을 걸어야 합니다. 까놓고 말해, 사진을 찍는 박경일 님 또한 한국 옷이 아닌 서양 옷을 입으며 서양(또는 일본) 사진장비를 들고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가 서양(또는 일본) 사진장비를 들고 사진을 찍는대서 서양사진이나 일본사진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살면서 한국사진을 찍습니다. 한국에 패션이 없고 패션사진이 없는 까닭을, 누구보다 ‘패션사진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한국에서 패션사진을 가장 잘 찍는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 스스로 옳게 깨닫고 바르게 알아채며 슬기롭게 사진길을 가다듬으며 살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은 자랑이 아닙니다. 사진은 내가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삶을 자랑하는 사람은 사진으로도 그림으로도 글로도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 갈무리하지 못합니다. (4344.2.24.나무.ㅎㄲㅅㄱ)


― 나의 카메라는 39.5℃ (박경일 글·사진,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2007.1.3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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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몸으로 책읽기


 몸이 아프면 드러눕고 싶습니다. 몸이 아프기에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몸이 아픕니다. 갑작스레 몸이 무거워지면서 끙끙 앓습니다. 그러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밥을 하고 반찬을 하며 국을 끓입니다. 나는 못 먹더라도 옆지기랑 아이는 먹어야 합니다. 찬물이 손에 닿으니 찌르르 떨립니다. 소름이 돋습니다. 그래도 쌀을 씻어 불리기를 마칩니다. 새벽나절에 일어나 쌀을 씻어 불린 다음 자리에 눕고, 아침나절에 다시 일어나 국을 끓이고 반찬을 합니다. 국물 간을 보는데 짠지 싱거운지 단지 느끼지 못합니다. 그예 머리가 핑 돕니다.

 날마다 새로운 빨래거리가 나옵니다. 아이는 아직 밤오줌을 가리지 못합니다. 아이는 한창 개구지게 놀아야 하니까 때에 절거나 지저분해진 아이 옷가지는 날마다 여러 벌 나옵니다. 물 만지기 싫고 몸이 무겁지만 빨래를 미루지 못합니다. 하루 더 지난대서 몸이 반드시 나아지리란 법이 없고, 몸이 나아지더라도 하루치 밀린 빨래를 하자면 다시 몸이 아플 수 있습니다. 식은땀 흐르는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빨래를 합니다.

 저녁나절 억지로 책 한 권을 읽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았다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 읽었을까요. 대수롭지 않을 뿐더러 참 얕은 생각에서 허우적거리는 책 하나를 읽으니 머리가 더 어지럽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사진책이 몹시 드물고, 사진을 말하는 책마저 참 드뭅니다. 그래도 사진책이 아예 안 나오지는 않습니다. 몇몇 이름난 상업사진가하고 연예인들 사진책은, 어찌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툭툭 쏟아진다 할 만합니다. 제대로 삭이며 살아낸 사진을 담은 사진책이 아니라, 이름값으로 내놓는 사진책들이라 여기며 밀어젖힐 수 있지만, 온통 이런 책들이 ‘사진책’이나 ‘책’이라도 되는 듯 나오다 보니까, 이런 사진책을 내놓는 연예인들이나 상업사진쟁이한테 들려줄 ‘사진이야기’를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지만,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사진과 삶과 사람을 둘러싼 살가운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오순도순 나누면서 사진을 즐기며 사랑하는 길을 나누고 싶다 생각하면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글조각을 붙듭니다.

 고작 며칠 살짝 아플 뿐인데 몸이며 마음이 이렇게 흔들린다면, 오래도록 아픈 사람들은, 열 해 스무 해째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내 옆지기 같은 사람들은, 당신 몸과 마음을 어떻게 건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가요. 몸이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이 나라에서 쏟아지는 책들은 ‘안 아픈 사람’이 써서 ‘안 아픈 사람’이 만들고 ‘안 아픈 사람’이 읽자는 책이기만 하겠구나 싶습니다. 더 들여다보면, ‘비장애인이 써서 비장애인이 만들고 비장애인이 읽는’ 책만 가득합니다. 장애인이 써서 장애인이 만들고 장애인이 읽는 책은 여느 책방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잘난 사람들이 쓰고, 지식이 넘치는 사람들이 쓰며, 이름을 드날리는 사람들이 쓰는 책만 떠도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조금이라도 아파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으면 좋을 텐데요. 한 번이라도 아픈 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으면 기쁠 텐데요. 아픈 몸과 마음이 낫지 않는 느낌 그대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으면 아름다울 텐데요.

 죽음을 한 달 앞둔 이오덕 님이 쓴 일기에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 말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와 아프지 않은 사람이 말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다릅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처음에는 누구나 “죽음이 두렵지 않다” 하고 말할 테지만, 아니 죽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테지만, 아픈 사람들은 늘 죽음을 곁에 낀 채 살아갑니다. 죽음하고 벗하고 죽음하고 길동무를 합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습니다. 아픈 사람은 이것도 못 먹고 저것도 못 먹습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합니다. 아픈 사람은 이 일도 못하고 저 일도 못합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이 책도 읽고 저 책도 읽습니다. 아픈 사람은 이 책도 못 읽고 저 책도 못 읽습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제 목숨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이어질 줄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아니 제 목숨이 언제쯤 마무리될는지 헤아리지 못한다고 말해야 옳을 테지요. 아픈 사람은 오늘 숨을 거둘는지 이듬날 눈을 감을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아니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일 분 이 분이 애틋합니다. 일 분을 애틋하게 여기면서 책을 읽어 예순 해하고, 일 분을 애틋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책을 읽어 예순 해일 때, 두 사람이 읽은 책은 어떤 책이 될까요.

 오늘날 수많은 글쟁이들은 살아서 이름을 높이 드날릴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백 해나 이백 해쯤 뒤에는 이원수 님이나 권정생 님처럼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아픈 몸으로 아파하면서 살아내는 마음으로 쓴 글이 아니라면 참다이 읽히는 책이 아닙니다. (4344.2.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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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신기루 2011-02-24 08:44   좋아요 0 | URL
저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제가 쉬이 갖지 못할 경험과 지식을 얻을 수 있어 책을 좋아합니다만,
된장님의 글을 읽고 나니 그러한 책에도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네요.
『오체불만족』 등 장애인 분들이 쓰신 책이나 점자책 등 장애인 분들을 위한 책은 간혹 나오고는 있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싶습니다.
된장님도 옆지기님도 하루속히 나으시길 빕니다.

파란놀 2011-02-24 09:36   좋아요 0 | URL
저는 나을 수 있으나, 옆지기는 나을 수 없어요..
(그러나 나을 수 없다 해서 장애등급 판정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 법체계에서는)

오체불만족은 '성공담'이지 '장애인 이야기'는 아니에요. 장애인 이야기를 담은 책은 '기류 유미코' 님이 쓴 책쯤은 되어야 비로소 장애인 이야기랍니다. 그러나 이런 책은 거의 안 팔리고 안 읽힌답니다...

그나마 <머나먼 갑자원>이나 <사랑의 집(도토리의 집)>조차 못 읽히니까요...

무해한모리군 2011-02-24 09:13   좋아요 0 | URL
된장님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된장님 글을 읽으니 권정생 선생이 그리 모든 것에 관대하고 따뜻하실 수 있으셨던건 아픈 사람의 시선이었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파란놀 2011-02-24 09:38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권 선생님이나 이오덕 선생님, 또 나중에 전우익 선생님 같은 분들이 주옥 같은 글과 책을 내놓을 수 있던 까닭은 바로 '아픈 몸과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이에요. 아프다 해서 모두 이러할 수는 없고, 아픔만으로 모두를 담지는 못하지만, 아픈 사람 삶에서 사랑할 수 있는 따스한 손길로 내 끼니를 내가 농사지어 내가 손수 지어 차려 먹고 치우는 살림살이를 꾸리는 매무새일 때에는, 우리들한테 아름다운 이야기를 꽃피운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남이 아닌 당신 손'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해서 먹었습니다.
 

사진읽기 삶읽기 사람읽기 2
― 사진책 함께 읽기


 책이든 먹을거리이든 뜨개바늘이든 자전거이든 ‘함께 사기(공동구매)’를 하는 분들이 무척 많습니다. 여럿이 한꺼번에 장만한다 하면 조금 더 값싸게 살 수 있다고 해서 ‘함께 사기’를 합니다.

 사진책이 너무 비싸다며, 사진책 하나 장만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작고 값싸게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이 사서 읽도록 해 준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작고 값싸게 만든 사진책조차 사진을 찍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겁게 장만해 주지 않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사진책은 몹시 안 팔리는 책이다 보니, 사진책 만들어 내놓는 데에 돈이 많이 들고, 이렇게 많이 드는 돈 걱정을 하는 한국에서는 사진책이 참 비싼 책이라고 느낄밖에 없습니다.

 꼬인 실타래를 누군가는 풀어야 할 텐데, 좀처럼 풀릴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더 수수하며 더 알차며 더 옹근 사진책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조금 비싸거나 조금 짐스럽거나 조금 벅차더라도 푼푼이 돈을 그러모아 한 달에 한 권쯤 사진책을 장만하는 손길을 만나기 힘듭니다.

 꽤 값나가는 사진책이라 하더라도 한 권에 5∼7만 원입니다. 날마다 이천 원씩 모으면 다달이 한 권쯤 장만할 수 있습니다. 나라밖 좋은 사진책 가운데에는 만 원을 살짝 넘는 책부터 삼사만 원짜리 책이 꽤 많습니다. 이제는 인터넷책방에서 나라밖 책 주문을 잘 받아 주니까, 인터넷책방에서 이런저런 나라밖 사진쟁이 이름을 살피면서 한 권씩 받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사진쟁이 백 사람 사진책을 하루아침에 사들이려 하면 살림이 무너집니다. 사진쟁이 백 사람 사진책을 한꺼번에 장만한다 해 보았자, 이 사진책을 하나하나 살피거나 받아들인다 할 수 없습니다.

 없는 살림에도 더욱 힘을 쏟아 다달이 서너 권이나 대여섯 권씩 사진책을 장만할 수 있겠지요. 없는 살림이니까 한 달에 한 권씩만 장만할 수 있겠지요. 있는 살림이라면 날마다 한 권씩 장만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사서 읽는다고 ‘사진 읽는 눈’이 훨씬 훌륭해지지 않으며, 더 적게 사서 읽기에 ‘사진 읽는 마음’이 더 얕지 않습니다. 사진책 한 권을 읽더라도 내 마음가짐과 매무새가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살림이 넉넉하다면 다달이 여러 권을 사서 여러 권을 가만히 견주면서 읽습니다. 살림이 팍팍하다면 다달이 꼭 한 권만 사서 이 한 권을 한 달 내내 구석구석 샅샅이 살피면서 서른 번이고 삼백 번이고 거듭거듭 읽습니다.

 여러 가지 사진책을 나란히 놓고 견주어 읽을 때에는 이렇게 읽는 대로 ‘사진 읽는 눈썰미’를 키웁니다. 한 가지 사진책을 오래도록 살피며 파헤칠 때에는 이렇게 읽는 대로 ‘사진 읽는 마음결’을 가다듬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을 같은 사진기로 찍어도 저마다 다 다른 사진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같은 사진책을 같은 자리에서 읽어도 사람마다 다 다른 사진넋을 품겠지요.

 나는 내 나름대로 좋은 알맹이를 얻으면 됩니다. 나는 내 깜냥껏 사랑스러운 열매를 맺으면 됩니다. 내 나름대로 붙잡은 사진감에 따라 사진책을 만들고 싶은 꿈은 ‘사진책 백 권을 만들어’ 이룰 수 있는 한편, ‘사진책 한 권을 만들어’ 이룰 수 있습니다.

 사진책을 백 권 만들어 내야 훌륭하다 할 수 없습니다. 사진책을 한 권 만들었기에 어설프다 할 수 없어요.

 사진책을 천 권이나 만 권 장만하여 읽었기에 더 깊거나 어여쁜 사진눈을 북돋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진책을 백 권이나 다문 열 권을 읽었으니까 더 어수룩하거나 못난 사진눈으로 나뒹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목숨이나 자연이나 풍경이나 물건과 마주하는 내 삶을 찍습니다. 사진책을 읽을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언제나 내 삶에 따라 사진을 찍고 사진을 읽습니다. 내 삶을 찍으며 내 삶을 읽습니다. 내가 오늘 선 자리를 돌아보고, 내가 어제 길은 길을 되씹으며,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꿈꿉니다.

 요즈막은 사진찍기에 크게 마음을 쏟아 신나게 사진을 즐기다가, 나중에 하루이틀 흘러 사진이 재미없다고 느끼면 사진기를 팔아치울 수 있습니다. 사진기를 샀다가 파는 사람이 꽤 많아요. 인터넷을 뒤지면 새 사진기를 팔겠다고 내놓는 수많은 사람들 글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마, 온누리에 손꼽힌다는 분들 아름다운 사진책을 샀어도 이 사진책을 ‘누구 사 갈 사람 없어요?’ 하며 내놓는 분이 퍽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 번 헤아려 봅니다. 사진을 좋아하려다가 사진하고 멀어진다고 해서 나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좋다는 사진책을 애써 장만했다가 팔려고 내놓는 일은 슬픈 일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다는 사진책을 누군가 애써 장만했’기 때문에, 이 사진책을 헌책방에 내놓든 인터넷장터에 내놓든, 우리 나라에 ‘좋다는 사진책 한 권’이 더 돌고 돌 수 있습니다. 새책으로 사서 헌책으로 내놓아 주는 사진책인 만큼, 두 번째로 이 사진책을 사서 읽을 사람은 조금 값싸게 사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사서 읽을 사람이라면 다문 100원이나 500원이라도 조금 더 값싸게 사서 읽을 수 있겠지요.

 누군가 내놓을 사진책을 조금 더 값싸게 사들이자며 기다리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기다리더라도 나부터 ‘내가 사진책 한 권 한 달에 한 권쯤’ 사서 읽으며, 이 사진책을 스스럼없이 헌책방에 슬쩍 내놓을 수 있는 매무새가 되어 본다면 퍽 즐거우며 아름다우리라 느낍니다. (4344.2.2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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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2.20.
 : 따뜻한 날 논둑 달리기



- 날이 많이 풀린다. 그렇지만 우리 집 물은 아직 안 녹는다. 더 따뜻해야 하며, 해가 더 높아야 한다. 이제 좀 물이 녹아 물 길으러 다니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아마 따스한 봄비가 내려야 비로소 물이 녹지 않을까. 봄비가 올 때까지는 물 긷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 따스한 날, 따스한 볕을 받으며 자전거를 달리면 아이도 한결 좋아하리라 생각하며 자전거수레를 꺼낸다. 아이는 자전거 탄다며 좋다고 춤을 춘다. 두꺼운 겉옷을 입힐까 하다가 속에 여러 벌 껴입었으니, 수레에서 이불 덮으면 괜찮겠거니 생각한다.

- 해가 들지 않는 멧기슭에는 눈이 고스란히 남지만, 해가 비치는 자리에는 눈이 다 녹았다. 따스한 바람결을 느끼면서 논둑길을 달린다. 아이는 수레에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가 아이보고 노래 좀 불러 달라 하지 않았지만, 아이 스스로 신나니까 노래를 부른다. 아이하고 함께 자전거를 타면 저절로 싱싱한 노래를 들을 수 있구나.

- 내리막에서는 아이가 “아빠, 달려? 시원해!” 하고 말한다.

- 마을 어귀 보리밥집까지만 찾아가서 달걀 열 알이랑 한두 가지 까까를 산다. 아이는 음성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 준 깨끼옷을 입었다. 설날이 지난 지 한참이지만, 아이는 설날이랑 아랑곳하지 않고 ‘예쁜 옷’이요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벼리 사 주셨어요.” 하고 외면서 춤을 춘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아이는 노래를 부른다. 지난 설날부터 읍내 장마당이 다시 선다. 주말께에 장마당이 서면, 아이를 수레에 태우고 장마당 마실을 다시 해 볼 수 있겠구나 싶다. 조금씩 조금씩 이 마을 저 마을을 자전거수레를 달리면서 아이한테 따순 시골바람 내음을 느끼도록 해 주고 싶다.

- 집에 닿으니 등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날이 참 따뜻해지긴 따뜻해졌구나. 오늘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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