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 하나 태어나기까지


 후루룩 넘기면 다 본다는 사진책일 수 있습니다. ‘읽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본다’고 하는 말로는, 사진책을 후루룩 넘기면 다 보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 글로 된 책이라 하더라도 후루룩 넘긴 다음 ‘다 보았네’ 하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림으로 된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루룩 넘기고서는 ‘이제 책 다 보았어요’ 할 수 있어요.

 참말로 다 보았으니까 다 보았다고 말합니다. 다 읽지는 않았으니까 읽었다고는 안 하고 보았다고 합니다. 보는 일이란 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는 일이니까, 후루룩 넘기면서도 이쯤은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 할 때에는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샅샅이 훑는다든지 줄거리를 살핀다든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책을 읽는다 할 때에는, 이 책을 내놓은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어떠한 나날을 일구어 어떠한 꿈과 이야기를 책에 깃들었는가를 내 가슴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책읽기는 삶읽기가 됩니다. 책을 쓴 한 사람 삶을 읽을 때에 책읽기입니다. 사진으로 된 책이든 그림으로 된 책이든 만화로 된 책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있게 읽은 만화책이라 한다면, 만화책을 내놓은 사람 스스로 재미나게 살아가면서 당신이 겪거나 부대낀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재미나게 살았으나 책은 좀 따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분하게 살았는데에도 책은 꽤나 재미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려 하는 사람은 이 대목을 잘 돌아보거나 느끼거나 헤아려야 합니다. 참으로 줄거리며 알맹이며 ‘글쓴이 삶’이며 나 스스로 재미나게 느끼면서 즐겁게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들일 만한가를 돌아보거나 느끼거나 헤아려야 합니다. 시간을 때우거나 심심풀이로 삼으려고 억지로 읽는 책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숙제로 읽는다든지 독후감 때문에 읽는다든지 둘레에서 자꾸 읽으라고 건네니까 읽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읽는 책’ 가운데 만화책처럼 금세 읽어치우는 책은 없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만화책을 ‘읽는다’기보다 ‘읽어치웁’닙니다. ‘읽어서 치우니’까 읽어치운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만화책을 내놓는 사람은 얼마나 빨리 한 권 내놓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금세 읽어치우는 만화책 한 권이 태어나기까지는 몇 시간? 몇 날? 몇 달? 몇 해쯤 걸리려나요.

 처음부터 펜으로 슥슥 그릴 수 있는 만화쟁이는 틀림없이 있습니다만 몹시 드뭅니다. 만화를 그릴 때에는 먼저 연필로 그립니다. 연필로 원고 장수에 맞게 한 꼭지를 그립니다. 이런 다음에 펜으로 연필 위에 대고 그립니다. 점이 박히거나 뿌옇거나 빗금이 쳐진 ‘톤’이라는 조각을 오려서 붙입니다. 펜으로 그리다가 잘못 그리면 하얗게 지우고 다시 그립니다. 다 그리고 다 붙인 다음에 지우개로 연필 자국을 지웁니다. 이렇게 마무리한 만화 원고를 출판사로 손수 가져다 주거나 출판사 편집자가 원고를 받으러 와서 가져갑니다. 이 원고를 출판사에서 그대로 긁어서 엮은 다음 책으로 묶습니다.

 낱권책으로 한 권 묶일 만한 부피가 되는 원고를 주마다 그려서 모을 수 있고 달마다 그려서 모을 수 있습니다. 주마다 이어그리는 작품이라면, 이러한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거의 잠을 못 잡니다. ‘죽은 듯이 산다’고 할 만큼 밤을 지새우면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림만 그려서는 만화가 태어나지 못합니다. 만화에 담을 이야기를 살펴야 하고,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든 회사이든 일터이든 집이든 ‘뒤(배경)’에 그려 넣어야 하니까, 만화쟁이 눈으로 보아야 하고 사진으로도 찍으며 밑그림(스케치)을 그리기도 합니다. 몸으로 뒷모습(배경)을 느껴 보지 않고서야 싱그럽거나 살아숨쉬는 만화로 담아내지 못합니다.

 걷는 모습 뛰는 모습 움직이는 모습 자는 모습을 만화로 그리자면 오래디오랜 나날에 걸쳐 ‘사람 모습 그리기’를 갈고닦아야 합니다. 새를 그리든 자전거를 그리든 밥그릇을 그리든, 그림을 그린 오랜 나날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만화로 담아 나누려는 만화쟁이 마음과 꿈을 담습니다.

 금세 읽어치우는 만화 하나 그리자고 만화쟁이 한 사람은 온삶을 바칩니다. 뚝딱 읽어치우고 다음 권이나 다음 책을 기다릴 수 있을 테지만, 이 만화 하나를 그리기까지 어떠한 손길과 땀내가 배었는가를 조금이나마 함께 느낄 수 있다면, 후루룩 본 다음 조금 느리게 다시 읽을 테고, 다시금 더 느리게 세 번 네 번 거듭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읽거나 거듭 읽거나 새삼 읽으면서 비로소 만화책이라고 하는 책을 읽는 참맛을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4344.2.24.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