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바람새 바람꽃
한금선 사진 / 눈빛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빛깔 고이 살아가는 사람들 삶자락
 [찾아 읽는 사진책 23] 한금선, 《집시 바람새 바람꽃》(눈빛,2007)



 사진을 찍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늘 마실을 다닙니다. 사진을 찍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이곳저곳으로 사진마실을 다닙니다. 온누리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이야기를 사진으로 살포시 적바림하고자 꾸준하게 사진마실을 즐깁니다.

 누군가는 한국땅 곳곳을 누빕니다. 누군가는 여권 빈자리가 없을 만큼 나라밖 이곳저곳을 돌아다닙니다. 일본사람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지구별 어린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사진책으로 낸다면서 자그마치 백 나라가 넘는 숱한 나라를 밟습니다. 한 나라에서 마주하는 한 아이 이야기만으로도 사진책 하나는 거뜬히 나올 텐데, 백 군데가 넘는 나라에서 마주한 숱하게 많은 아이들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서리거나 깃들었을까요.

 겨우내 우리 멧골집 물이 꽁꽁 얼어붙어 날마다 웃마을 집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물을 긷고 빨래를 했습니다. 집살림을 알뜰히 건사했다면 집안 물꼭지가 얼지 않았을 테고, 밥하기며 빨래하기며 집치우기를 한결 알뜰살뜰 했겠지요. 눈이 오건 눈바람이 모질건 날마다 물통과 빨랫감을 짊어지고 멧길을 오르내리기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으레 아이는 아버지 손을 잡고 멧길을 오르내립니다. 빨래하며 물 긷는 길을 함께 다녔습니다. 아이는 멧길을 걸으며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는 이런 아이 모습을 틈틈이 사진으로 찍습니다.

 오늘은 겨울이 물러서는 봄비가 내리니 이제 우리 멧골집 물도 녹을까 싶어 한낮까지 기다려 보지만, 도랑에 남은 얼음이나 계단논에 펼쳐진 얼음은 아직 안 녹습니다. 아마 우리 살림집 얼음도 한참 먼 듯합니다. 하는 수 없다 생각하며 또 물통이랑 빨랫감을 짊어지고 멧길을 오릅니다. 빨래를 마치고 물통을 들고 내려오는데, 봄비를 맞는 멧자락 작은 나무에 대롱대롱 겨우내 매달리던 잎사귀에 달린 물방울이 아주 예쁘다고 느낍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춥니다. 빨래하고 물 긷느라 사진기를 안 챙겼는데, 집으로 얼른 돌아가 사진기를 들고 나올까 생각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이 예쁜 모습을 보았으니까 굳이 사진으로 안 담아도 되잖나 생각합니다. 터덜터덜 내려옵니다. 집에 닿아 물통과 빨래를 내려놓습니다. 무언가 떠오르듯 사진기를 집어들고 우산을 쓰고는 후다닥 달려나옵니다. 내려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도랑 둘레 겨울잎 천천히 썩으며 흙으로 돌아가는 빛깔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어느덧 조금 아까 보던 겨울나무 앞입니다. 가쁜 숨을 고르며 사진기를 듭니다. 감도 200에 셔터빠르기 1/15초 조리개값은 4.0으로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흔들렸나?’ 생각하며 다시 한 장, ‘아닌데? 또 흔들린 듯하군.’ 하면서 거듭 한 장.

 감도를 높이고 셔터빠르기를 올릴 수 있습니다만, 감도 400이나 800은 내키지 않습니다. 감도가 높아질수록 사진은 뿌얘지니까요.

 인천에서 살면서 골목동네 마실을 하며 사진 찍던 피 퍼붓던 날을 되새깁니다. ‘이때에도 감도는 200까지만 놓고 찍었지. 감도 400으로 놓고 사진 찍은 적은 없잖아?’ 하도 1/15초이니 1/8초이니 하고 사진을 찍어댔기에, 넉 장째에 이르러 흔들림 없다 싶은 사진을 얻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노릇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셈틀을 켜고 사진을 옮겨 크게 보면 가늘게 떨렸을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니까 시골살이 사진을 찍습니다. 골목에서 살던 지난날에는 골목살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시골에서든 골목에서든 헌책방마실을 즐겼기 때문에 헌책방을 찾아다닐 때면 으레 헌책방마실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저는 제 삶결에 따라 제 사진을 찍습니다. 제 삶이 남들하고 견주어 빛깔이 더 고운지 거무튀튀하거나 꾀죄죄한지는 모릅니다. 그저 저는 제 삶을 좋아하면서 하루하루 맞이하니까, 이렇게 제 삶을 좋아하며 맞이하는 하루하루를 고스란히 사진으로 옮깁니다. 딱히 감추거나 애써 꾸미면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제 삶이 못나지 않으니까 딱히 감추지 않습니다. 제 삶이 도드라지게 훌륭하니까 애써 꾸미지 않습니다. 잘났거나 못났다고 느끼지 않는 제 삶인 만큼, 오늘 하루를 보내는 그대로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며 글로 씁니다. 제 사진은 제 삶이며 제 빛깔입니다.

 우리 멧골집 살림은 가난합니다. 인천 골목동네에 살던 때에는 더 가난했는데, 그래도 용케 잘 살아 밥을 굶지 않았습니다. 우리 살림살이는 정부에서 말하는 최저생계비만큼 닿지 않기에 기초생활보호 대상자였지만, 옆지기 아버님은 파산을 해서 빚이 많고, 우리 아버지는 교사로 정년퇴임을 해서 연금을 받기 때문에, 기초생활보호 급여를 줄 수 없다 했습니다. 한쪽 어버이가 빚쟁이이고, 한쪽 어버이는 살림이 그럭저럭 괜찮대서 두 어버이네 아이들이 똑같이 빚쟁이가 되거나 그럭저럭 괜찮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버이한테 얹혀 사는 살림이 아니라, 독립된 호적으로 제금나서 살아가는 부부요 애 아빠이고 애 엄마이니까요.

 우리 살림집 둘레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든 우리 살림을 돌아보든, 가난하다 해서 슬퍼야 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니까 우리들이 웃을 때에 더 해맑지 않습니다. 내 둘레 알 만한 부자들도 울고, 우리들도 웁니다. 부자인 사람도 웃으면서 살고, 가난뱅이인 사람도 웃으면서 살아요. 어디에서나 삶입니다. 누구한테서나 꿈입니다. 서로서로 좋은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한금선 님 다큐사진 《집시 바람새 바람꽃》(눈빛,2007)을 읽습니다. 집시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한금선 님이 이 책에서 전미정 님을 만나 들려준 이야기, “편견이 생기려 하면 아예 그 반대 행동을 선택하는 게 습성처럼 되어 버렸죠. 솔직히 저도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스스로 마취를 걸어요. 편견을 넘어서면 더 아름다운 세상이 있는데 용기를 내자. 사실 사진을 찍으며 겪는 경험들은 스스로를 검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해요. 편견과 바로 마주한 공간에서 가장 솔직한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더 투명하게 볼 수 있거든요(149쪽).”가 아니더라도, 집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으레 ‘편견’에 젖습니다. 한금선 님도 편견이 있었다 밝힙니다. 다만, 한금선 님은 ‘편견을 딛고 서려 애씁’니다.

 아마, 한금선 님은 한금선 님 나름대로 ‘편견을 딛고 섰’기 때문에 집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아 사진책 하나 내놓을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편견’이란 집시가 집시 아닌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아닙니다. 집시 아닌 사람이 집시를 바라보는 눈이 편견입니다.

 집시가 집시 삶을 사진으로 담는다면 어떤 이야기가 태어날까요. 가난한 사람 스스로 가난한 이웃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어떤 모습을 빚어낼까요. 아니, 빚어내지 않겠지요. 가난한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사진으로 찍을 뿐입니다.

 다큐사진은 가난하게 살아가는 ‘안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밀어낸’ 모습을 담는 사진이 아닙니다. 다큐사진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 사진입니다. 부자를 담든 가난뱅이를 담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곳에서 제 삶을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좋아하거나 믿으면서 어우러지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사진쟁이 스스로 이들하고 이웃이 되어’ 찍는 사진입니다.

 다큐사진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입니다. 다큐사진은 ‘편견 없이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다큐사진을 찍는 사람은 ‘편견이 있어도 아름다운 사진’을 찍습니다. 외려 ‘편견 때문에 더 돋보이는 사진을 얻는 날’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이 있든 없든,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내 사진에 담을 사람들 삶에 어떠한 이야기가 깃들었는가를 만나려 하거나 사귀려 하는 흐름’으로 사진을 찍기 때문입니다. 온누리에 빛나거나 온누리를 비추는 손꼽히는 아름다운 다큐사진쟁이들이란 ‘그림 그럴싸한 사진’을 낳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누리에 빛나는 다큐사진쟁이는 사진으로 담기는 사람들하고 즐거이 손을 맞잡으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동무입니다. 놀이동무요 마음동이며 밥동무입니다. 밥 한 그릇 함께 나누어 먹고, 잠자리 함께 나누어 자며, 술 두어 잔 싱긋 웃으면서 나누는 동무예요.

 빛깔 고이 살아가는 사람들 삶자락을 ‘빛깔 고이’ 담으면 한결 좋습니다. 다큐사진쟁이가 할 몫이란 내 사진으로 담을 사람들이 얼마나 ‘빛깔 고이’ 살아가는가를 동무로 지내면서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은 으레 흑백사진만 찍습니다. 아니, 흑백사진이어야 비로소 다큐사진이 되는 듯 여깁니다.

 흑백사진으로도 훌륭하다 싶은 다큐사진이 태어납니다. 흑백사진에도 짙기가 달라 0부터 10까지이든 하나부터 열까지이든, 까망과 하양이 아리따이 어우러지는 빛그림을 낳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무지개빛인 사람들 삶을 까망과 하양이라는 두 갈래로만 못박는다면 ‘빛깔 고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여느 사람들은 어떻게 마주하려나요. 여느 때부터도 ‘편견 품으며 바라보는 여느 사람들’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다큐사진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편견씻이’를 하며, ‘동무되기’를 하려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책 《집시 바람새 바람꽃》은 사람들한테 얼마나 편견씻이에 이바지하는 사진책이 될까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한금선 님은 이 사진책을 당신 스스로 품던 편견을 씻고자 애쓰면서 찍었기 때문입니다. 한금선 님은 당신이 마주한 사람들(집시)이 얼마나 ‘빛깔 고이’ 살아가는가를 느끼면서 사진으로 담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 안팎에 빨래를 널며 이쁘게 웃는 이 사람들은 무지개빛 모습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싱그럽거나 아리땁거나 사랑스러울까요. 편견씻이를 하는 데에도 사진찍기는 제몫을 하겠으나, 편견씻이보다 사랑하기를 하는 데에도 사진찍기는 제몫을 톡톡이 합니다.

 한국땅에서 사랑하기를 나누려는 다큐사진을 일구는 사진쟁이를 만날 수 있기를 꿈꾸고 싶습니다. 한국땅에서 살가운 내 동무와 이웃을 내 살림집 가까이에서 마주하면서 이쁘게 담는 결 고운 다큐사진쟁이를 만날 수 있는 날을 손꼽고 싶습니다. (4344.2.27.해.ㅎㄲㅅㄱ)


― 집시 바람새 바람꽃 (한금선 사진,눈빛 펴냄,2007.8.22./25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비에 책읽기


 봄비라 해야 할는지 모르겠지만, 봄맞이 비가 내린다. 지난밤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그러나 틀어 놓은 물꼭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아침에 뒷간에 다녀오면서 도랑을 들여다보니, 얼음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제법 넘친다. 그러나 도랑에도 얼음이 다 녹지 않는다. 우리 집 물꼭지에도 얼음이 다 녹아 물이 콜콜콜 흐르자면 아직 멀었겠지. 한낮이 되어 빗줄기가 더 굵어지거나 날이 좀 포근해지면 물이 녹을까. 삼월이 되어야 녹을까, 삼월이 되어도 한참 동안 안 녹으려나.

 이 봄맞이 비가 내리는 이월 끝물, 나는 무슨 책을 읽을까 생각하다가, 《초원의 집》 둘째 권하고 《엉클 톰스 캐빈》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초원의 집》 아홉 권을 얼른 끝낼 수 있지만, 다 읽으면 너무 서운해서 한 해에 한 권씩만 읽을까 싶기도 하고, 여섯 달에 한 권을 읽을까 싶기도 하다. 《엉클 톰스 캐빈》은 을유문화사에서 1973년에 옮긴 판을 헌책방에서 찾아냈다. 옛날 자잘한 세로쓰기 판으로도 500쪽 가까운데, 《엉클 톰스 캐빈》이든 《톰 아저씨 오두막》이든 알뜰히 옮긴 ‘요즈음 나오는 책’은 하나도 없다. 더구나 스토우 아줌마가 쓴 다른 문학은 한글판으로는 거의 찾을 길이 없다.

 어느덧 아침이 밝았고, 아이도 일어난다. 이제는 셈틀을 끄고 아침밥을 차려야겠네. 오늘은 봄동을 넣은 봄맞이 떡볶이를 해 볼까. (4344.2.27.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어른들은 왜 이렇게 우리말을 못 할까요


 올봄에 내려 했으나 아무래도 봄에는 힘들지 않을까 싶은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에 담을 글을 쓴다. 이제 큰 고비는 지났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어른들이 잘못 쓰는 말’ 꼭지를 다 썼으니까. ‘어른들이 잘못 쓰는 말’이란 수천 가지가 아닌 수만 가지나 수십만 가지가 되기 때문에, 이 가운데 삼사백 가지쯤 추려서 갈무리하는 내내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드디어 이 골머리 터지는 글쓰기를 마쳤다. 아마 오늘 저녁이나 다음주부터 아이들하고 푸름이들이 궁금해 하는 이야기를 쓸 텐데, 얼추 쉰 가지 물음을 추리면서 맨 마지막에 내가 쓴 물음 하나를 넣는다.

 “어른들은 왜 이렇게 우리말을 못 할까요?”

 내가 어린이나 푸름이라 할 때에 어른들한테 들려주고 싶은 한 마디이다. 왜 이렇게 어른들은 우리말을 엉터리로 하면서, 우리말을 알맞고 바르게 배우려 하지 않을까요? 우리말을 엉터리로 쓰면서 엉터리로 쓰는 모습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말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면서 책 많이 읽거나 가방끈 길거나 교수이니 국회의원이니 뭐니뭐니 하고 내세운들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4344.2.27.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귀지를 파는 아빠


 아이 코에 소금물을 먼저 두어 방울씩 넣는다. 아빠가 코를 킁킁거리며 아이도 코를 킁킁거리라고 이른다. 아이 가슴에 천손수건을 올려놓고 솜막대기를 아이 콧구멍에 살살 넣고 돌린다. 소금물로 콧속이 젖으면서 아이 콧속에 붙던 코딱지가 살며시 떨어지고, 솜막대기에 크거나 작은 코딱지가 콧물하고 엉겨붙는다. 때때로 아이한테 콧물 어린 코딱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큼지막한 녀석이 콧속에 들어갔으니 숨쉬기가 힘들지.” 코를 말끔히 판 다음, 모처럼 귀도 파기로 한다. 아이는 아빠 허벅지에 풀썩 드러눕는다. 귓구멍에 찰싹 붙어 안 떨어지려 하는 귀지를 살살살 판다. 옆에서 뜨개질을 하던 애 엄마는 ‘무슨 귀지 파는데 그렇게 무거운 얼굴’이느냐며 사진기를 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하고 붙어 지내지만, 정작 애 아빠는 아이하고 나란히 찍히는 사진이 거의 없다. 아니, 한두 장 있을까 말까. 누군가 다른 사람이 찍어 주어야 애 아빠가 아이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사진으로 담는다만, 이렇게 해 주는 사람이란 없다.

 드디어 굵직하거나 길다란 귀지를 파낸다. 아이한테 귀지를 보여준다. “오, 나왔져?” “응, 나왔어. 이제 귀지도 나왔으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 좀 잘 들어 줘.” 아이는 뒷말에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아이 이를 닦이고 손발을 닦아 주며, 낯을 닦는다. 수건으로 손·발·낯을 훔친다. 아이는 폴짝폴짝 뛰면서 “벼리 이 닦았어요. 손 닦았어요. 발 닦았어요.” 하고 제 엄마한테 가서 외친다. 그러나 저녁 열 시가 넘고 열한 시가 되도록 잠들려 하지 않으니까 아주아주 괴롭다.

 지난날 우리 어머니는 두 아들 코며 귀며 어떻게 다 파 주고, 손톱과 발톱 어떻게 다 깎아 주며, 손발이랑 낯을 어찌 다 씻겨 주었을까. 한 아이 귀지를 파는 데에도 등허리가 쑤시고 눈이 따끔따끔하다. 뒷덜미가 저리고 손가락이 떨린다. (4344.2.27.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금요일의 노래
문병란 지음 / 일월서각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일흔다섯 늙쟁이가 부르는 시노래
 [책읽기 삶읽기 42] 문병란, 《금요일의 노래》



 어느덧 일흔다섯 줄 나이에 접어든 ‘늙은 시인’ 문병란 님 시를 그러모은 《금요일의 노래》를 읽습니다. 《금요일의 노래》라는 이름이 붙은 시집에 실린 시에는 ‘늙어가기’라는 꼬리말이 하나씩 붙습니다. 문병란 님은 마흔 쉰 예순 일흔, 이렇게 차츰 늙은 나이로 접어들면서 ‘늙는 맛’을 깨닫습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젊은 사람은 늙는 맛을 느낄 수 없고, 어린 사람이 늙는 멋을 알아챌 수 없습니다.

 그러면, 늙은 사람은 젊은 맛이나 어린 멋을 느끼거나 알 수 있을까요. 젊은 날을 거쳤고, 어린 날을 지난 늙은 사람이 떠올리거나 헤아리거나 살피는 젊은 맛이나 어린 멋이란 무엇일까요.


.. 고향 참새 소리 들어 본 지 얼마만인가 ..  (고향 참새 : 늙어가기 1)


 하루에 책 한 권씩 읽을 수 있다면, 나이 일흔다섯인 사람이 읽은 책은 나이 열다섯인 사람이 읽은 책보다 훨씬 많습니다. 나이 스물다섯이나 서른다섯인 사람이 읽은 책하고 견주어도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늙은 사람은 젊거나 어린 사람하고 맞댈 때에 ‘어마어마하게 많다’ 싶도록 책을 읽었으니 한결 훌륭하다 할 만할까요, 훨씬 빼어나다 할 만할까요. 책을 더 읽은 사람은 책을 덜 읽은 사람보다 똑똑하다 할 만할까요, 뛰어나다 할 만할까요.

 늙은 사람은 이런 일도 해 보고 저런 사람도 겪어 봅니다. 젊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이 사귀거나 만나는 사람으로는 ‘늙은 사람이 만나거나 사귄 사람 숫자이며 깊이이며 너비’를 좇거나 따르지 못합니다.

 늙은 사람이기에 더 많은 사람을 마주하거나 사귀었대서 ‘사람을 더 잘 알아보’거나 ‘사람들 마음을 한결 살뜰히 읽는다’ 할 만할까요. 젊은이는 사람을 볼 줄 모르고, 어린이는 사람을 사귀는 멋을 모른다 해도 될까요.


.. 내가 처음 배운 말은 / 맘마·밥·엄마·아빠. / 그 다음 배운 말은 / 응아·쉬야였다 ..  (하지 마라 : 늙어가기 6)


 스물다섯 나이로 시를 쓰는 사람하고 일흔다섯 나이로 시를 쓰는 사람이 같을 수 없습니다. 스물다섯 시쟁이가 일흔다섯 시쟁이를 흉내낼 까닭이 없고, 일흔다섯 시쟁이가 스물다섯 시쟁이를 좇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쟁이한테서 시를 받아 시집을 엮는다든지, 신문이나 잡지에 시를 싣는다는 사람들은 일흔다섯 나이가 아닙니다. 책을 만드는 일꾼이나 신문·잡지를 엮는 일꾼은 으레 스물다섯 언저리부터 마흔다섯이나 쉰다섯 언저리까지입니다. 예순다섯을 넘으면서 책을 만들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엮는 일꾼은 없습니다.

 일흔다섯 나이를 고이 헤아리면서 일흔다섯 나이를 사랑하는 시를 엮자면 일흔다섯 나이여야만 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열다섯 나이에 쓴 시라든지 다섯 나이에 쓴 시를 어여삐 돌아보면서 이들 푸름이와 어린이 시를 엮을 때에 열다섯 나이이거나 다섯 나이여야만 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늙은 사람 시를 읽어 가슴으로 담자면, 늙은 사람 몸과 마음으로 내 삶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시를 읽는 나는 내 눈길과 눈썰미와 눈높이에 따라 받아들이지만, ‘시가 태어나 우리 앞에 놓이기’까지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가를 읽어내자면, ‘늙은 사람 시를 읽을 때에는 늙은 사람 삶’이어야 하고, ‘푸름이 시를 읽을 때에는 푸름이 삶’이어야 하며, ‘어린이 시를 읽을 때에는 어린이 삶’이어야 합니다.


.. 좋은 시라니? / 좋은 일 없는 나라에서 / 그런 욕심 금물 아닐까 ..  (경칩 : 늙어가기 14)


 이 나라에서뿐 아니라, 이웃 일본을 비롯해 온누리 여러 나라에서는 ‘만화책을 책으로 안 여긴다’든지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보는 책으로 여긴다’든지 하는 얕은 울타리를 아직 높직하게 쌓습니다. 사진책을 사진책으로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는 한편, 사진책을 사진책대로 즐기는 매무새를 찾아보기란 몹시 힘듭니다.

 ‘사진을 한다’고 하면 으레 ‘예술 하시나 보네요’ 하고 여기지, ‘어떠한 사진을 찍어 어떠한 사람들하고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는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만화책을 읽는다 한다면, ‘어떠한 만화책을 장만해서 만화에 깃든 어떠한 이야기를 곰삭이며 어떠한 이웃하고 어떠한 삶을 꾸리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림책을 읽을 때이든 어린이책을 읽을 때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시집을 읽는다 한다면,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삶을 일구면서 어떠한 넋을 담은 시인가’를 읽으면서, 내 삶과 내 이웃 삶을 가만히 톺아보아야 알맞습니다.

 싯말을 요리조리 잘라서 이 대목은 무슨무슨 수사법을 썼다라든지, 이 싯말에서는 무슨무슨 주의주장을 담았다든지 하고 외는 일이란 ‘시 비평’도 ‘시읽기’도 아닙니다. 그예 뭇칼질입니다.


.. 2007년 8월 17일 금요일 창작과 비평 6년 전 묵은 호 111호 54년생 후배의 시를 더듬더듬 읽고 있는데, 고장난 뻐꾹시계가 멋대로 정오를 알린다 외출할 것이냐 말 것이냐 내 마음은 점점 외로워져 가는데 살기도 힘들고 나의 내장은 먹은 것이 잘 안 내린다 읽는 시가 설컹설컹 목구멍에 걸린다 무슨 놈의 서정시가 이렇게 꼬장꼬장 어렵기만 한담! 혓바닥에 깔깔하고 눈알이 울울하다 창비에 시를 게재한 지 수 년이 지났는데 그 사이 필진이 많이 바뀌었구나 ..  (금요일의 노래 : 늙어가기 47)


 “좋은 일 없는 나라”에서는 “좋은 시”가 없다 했습니다. “좋은 삶 없는 나라”에서는 “좋은 시 읽을 일” 또한 없습니다.

 나 스스로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좋은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좋은 넋으로 좋은 글을 읽거나 써야 합니다.

 누가 해 주는 “좋은 나라 만들기”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좋은 대통령감이 나타나서 좋은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개혁과 혁명과 혁신 따위를 이루어 줄 일이란 없습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내 살붙이랑 천천히 “좋은 집 일구기”를 해야 합니다. 내 이웃과 동무하고 “좋은 삶 함께 지내도록 어깨동무하기”를 이루어야 합니다.

 나부터 좋은 삶을 즐길 때에 좋은 나라가 되면서 좋은 시가 태어납니다.


.. 이틀째 궂은비는 내리고 / 김소월의 두 배를 살아온 지루한 삶 ..  (똥파리 사냥 : 늙어가기 52)


 김소월 님보다 세 곱을 산다 해서 더 뛰어나지 않겠지요. 거꾸로 김소월 님보다 일찍 흙으로 돌아간대서 더 알차지 않습니다. 김소월 님만큼 살았으니까 비로소 해맑거나 말끔하다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일굽니다. 나는 나한테 주어진 하루를 고맙게 맞아들입니다. 나는 내 몸과 마음에 맞추어 내 나날을 보냅니다. 내가 몸이 튼튼하면 튼튼한 대로 더 바지런히 일하거나 놉니다. 내가 몸이 여리다면 여린 대로 골골 앓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누군가는 조금만 일해도 돈을 왕창 벌겠지요. 누군가는 새벽부터 밤까지 몸이 망가지도록 일하지만 돈 몇 푼 못 쥐겠지요.

 돈을 더 번대서 더 기쁜 삶이 아닙니다. 이름을 드날리니까 참 좋은 삶이 아닙니다. 튼튼하다는 몸으로 술을 엄청나게 퍼마신대서 신나는 술잔치가 아닙니다. 내 길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깨달아, 씩씩하고 꿋꿋하게 걸어가야 비로소 기쁘며 좋은 삶이에요.


.. 서울은 소문을 만드는 곳 / 그 소문을 밑천 삼아 / 떼돈을 버는 곳 ..  (소문의 도시 : 늙어가기 54)


 문병란 님이 서른을 살짝 넘겼을 무렵 쓴 시하고 일흔을 훌쩍 넘긴 때에 쓴 시는 같으면서 다릅니다. 마음이 같다 할 수 있으나, 마음이 달라졌다 할 수 있습니다.

 서른다섯 살부터 일흔다섯 살까지 한결같이 잇는 마음이 있지만, 이동안 거듭나거나 부딪히거나 곰삭이면서 새롭게 거듭나는 마음 또한 있어요.

 한우물을 판대서 한마음이기만 할 수 있습니다. 한우물을 파며 걸어온 삶 또한 숱한 갈래 수많은 생각과 꿈과 사랑이 피고 집니다.

 소문을 밑천 삼아 떼돈을 벌어들인 문병란 님이라 한다면 일흔다섯 나이에까지 시를 붙잡을 까닭이 없었는지 모르며, 떼돈을 벌었으니까 더 돈을 붙잡고 싶어 돈내음 구리게 나는 시를 더 매캐하게 뿜어댈는지 모릅니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문병란 님으로서는 소문을 붙잡기는커녕 돈자락 꽁무니조차 그닥 붙잡지 못한 ‘어수룩하’고 ‘어리석’으며 ‘어설픈’ 시쟁이 삶을 고만고만하게 보내지 않느냐 싶습니다.


.. 아내는 내 시의 애독자 / 책에 나오면 내가 먼저 읽고 / 그 다음 나의 아내가 읽는다 ..  (아내는 외출 중 : 늙어가기 60)


 못난 놈은 못난 놈끼리 논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돈쟁이는 돈쟁이끼리 놀고, 정치꾼은 정치꾼끼리 놉니다. 공무원은 공무원끼리 어울리며, 농사꾼은 농사꾼끼리 어깨동무합니다.

 서로서로 한마음이 되는 동무하고 놀며 어울리고 어깨동무하는 삶입니다. 서로서로 한마음이 되지 못하면서 겉치레로 손을 맞잡는 일은 옳지 않고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끼리 어울립니다. 짓궂은 사람은 짓궂은 사람끼리 복닥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끼리 마음이 잘 맞고,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끼리 생각이 잘 맞습니다.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사람은 저처럼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사람이 반갑습니다. 자가용을 씽씽 모는 사람은 저처럼 자가용을 씽씽 모는 사람이 반가울 테지요.


.. 늙는다는 것 / 젊어서는 몰랐네 ..  (무지개 노래 : 늙어가기 119)


 그나저나, 문병란 님은 당신 일흔다섯 나이에 내놓는 시집에 왜 “금요일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궁금합니다. 금요일에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금요일을 맞이하면 흥얼거리는 노래이기 때문에?

 ‘늙어가기 47번’으로 “금요일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문병란 님 일흔다섯 나이 시집이란 “늙은 시인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늙은 시인이 이 땅에서 얼레벌레 일흔다섯이 되도록 용케 안 죽고 용하게 잘 살아서 시도 쓰고 술도 마시며 당신하고 똑같이 늙은 옆지기하고 오순도순 살아간다고 기쁘면서 슬프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당신 젊을 때에는 젊은 시를 썼고, 당신 늙을 때에는 늙은 시를 씁니다.

 서른다섯에도 시집을 한 권 내고, 일흔다섯에도 시집을 또 한 권 낼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싶습니다. 여든 살에도 시집을 다시 한 권 낼 수 있다면, 스무 살이나 마흔 살에 낼 수 있던 시집 못지않게, 또는 열 살이나 서른 살에 냄직한 시집하고는 새삼 다르게 웃음과 눈물이 아리땁게 스미리라 생각합니다. (4344.2.27.해.ㅎㄲㅅㄱ)


― 금요일의 노래 (문병란 글,일월서각 펴냄,2010.12.23./12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