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탄생 -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
최경봉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말은 아직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책읽기 삶읽기 50] 최경봉, 《우리말의 탄생》(책과함께,2005)


 (1) 한국사람·한국말·한국말사전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한국말사전을 들추어야 합니다. 한국사람으로서 내가 쓰는 말글이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가를 살펴야 하니까요.

 퍽 예전에는 한글학회 일꾼이 힘을 모아 한국어사전을 내놓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여러 학자나 대학교나 출판사나 국립국어원까지 한국어사전을 내놓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들은 아이들한테 읽힐 국어사전을 애써 찾아서 쥐어 줍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여러 가지 국어사전을 어릴 적부터 곁에 한 권쯤 두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은 국어사전보다 영어사전을 자주 들춥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 가운데 국어사전을 틈틈이 들추면서 말을 살피거나 익히려는 분은 몹시 드뭅니다. 찾아본다면 영어사전을 찾아보지, 국어사전을 뒤적이지 않아요. 늘 쓰는 한국말이지만, 늘 쓰면서 어떠한 말뜻이요 말쓰임이며 말느낌인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 개화 세력은 양반 귀족의 소통 도구였던 한문보다는 일반 대중의 소통 도구였던 한글을 공식문자로 삼음으로써, 자신들의 생각과 정책을 일반 대중과 폭넓게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 일본어 상용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는 상황에서 조선어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도 점점 바뀌게 된다. 그럼 이 세상에 조선어는 무용하다는 세 명의 아동은 십 년 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어를 해야만 살 수 있는 현실을 보며, 아마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  (27, 283쪽)


 이야기책 《우리말의 탄생》은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라는 이름이 딸립니다. 한국어사전이 없이 한국말이 없다 할 만하기 때문에, 책이름이 《우리말의 탄생》입니다.

 그런데 ‘-의 誕生’이라는 말투는 한국사람 말투라 할 만할까 아리송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지만, 못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해서 한국사람 말투라 해도 괜찮은지 알쏭달쏭합니다. 한국사람 말투대로 적자면 “우리 말이 태어나다”라 해야 할 텐데요. 또는 “새로 태어난 우리 말”이라든지 “갓 태어난 우리 말”이라 하든지요.

 곰곰이 살피면, “最初의 국어사전” 또한 한국사람 말투일 수 없습니다. “첫 국어사전”이라 해야 한국사람 말투입니다. “국어사전 만들기 50年의 역사”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국어사전 만들기의 50년의 역사”처럼 적지 않으니 반갑기는 하지만, “국어사전 만들기 50년 역사”쯤으로는 적어야 비로소 한국사람 말투라 할 만합니다. 한 걸음 더 헤아린다면 “국어사전 만들기 50년 발자취”라든지 “국어사전 만들기 쉰 돌 발자취”라 할 수 있어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이 으뜸으로 자리잡았고, 일제강점기 앞서는 한문이 으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 풀려난 1945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영어가 으뜸으로 자리잡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느 한때고 한국말이 으뜸으로 자리잡은 적이 없습니다. 나라에서는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려 하는 데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지자채와 교육부에서도 엄청나게 큰 돈을 들이붓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아이들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며 아름다이 나누도록 북돋우는 데에는 거의 아무런 돈도 품도 땀도 마음도 사랑도 베풀지 않습니다.


.. 조선어사전을 집필할 당시에는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민족의식과 관련된 단어의 경우 뜻풀이를 축소하거나 아예 수록 대상에서 빼버리는 일이 있었던 반면, 언어 현실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폭넓게 사용되던 일본식 어휘들은 많이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립국가의 공용어가 될 민족어 사전과 식민 지배를 받는 일개 민족어의 사전이 같은 체제와 내용으로 출판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41쪽)


 한국사람은 한국말 발자취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기껏 안다고 한다면 세종큰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지식이 있다뿐, 막상 훈민정음이 어떤 글이고 이 글을 지난날 지식인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거의 모르기 일쑤입니다.

 그래도 최경봉 님 같은 분들이 《우리말의 탄생》 같은 책을 써 주기에, 이 책 하나를 읽으면서 한국말사전이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지만, 한국말사전이 태어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에 깃드는 말마디부터 썩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언어 현실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폭넓게 사용되던 일본식 어휘들은 많이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같은 말마디를 한국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왜 이런 말마디로 한국말사전 이야기를 펼쳐야 할까요.


.. 사전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전에는 어려운 단어가 우선적으로 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찬자들이 많았다 ..  (182쪽)


 어렵다 싶은 낱말이란 따로 없습니다. 쉽다 할 만한 낱말 또한 따로 없습니다. ‘있다’나 ‘없다’라는 낱말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겠습니까. ‘보다’와 ‘쓰다’는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요. 영어사전에서 ‘be’나 ‘go’나 ‘get’ 같은 낱말을 찾아본다면 알 테지만, 영어사전에서는 이런 ‘쉽다 할 만한 낱말’을 아주 꼼꼼하면서 길게 풀이합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있다-없다-보다-쓰다-주다-갖다-넣다-가다’ 같은 낱말을 어떻게 풀이하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이러한 낱말부터 옳게 다루지 못하는 한국말사전이라면 한국말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이냥저냥 쓰는 말마디를 되도록 더 많이 주워담은 잡동사니 책이라고 해야 할 뿐입니다.


 (2) ‘언어민족주의’가 있을까


 한국말사전 쉰 해 발자취를 담는다는 책 《우리말의 탄생》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답답합니다. 이 책은 ‘한국말사전이 처음 태어난 쉰 해 발자취’를 다룬다고 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조선어학회 언어민족주의 비판’이 곳곳에 자꾸자꾸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차분하게 한국말사전 발자취를 다루는 학문책이었으면 좋으련만, 왜 자꾸 글쓴이 ‘한쪽 생각만 옳다’는 투로 이야기를 펼치는지 안타깝습니다.

 글쓴이 생각은 옳을는지 모르나 그를 수 있습니다. 글쓴이 생각을 밝히려 한다면 아예 주의주장을 다루는 책으로 내야지, 책이름을 “우리 말글이 태어나다”나 “첫 국어사전 발자취”라 적으면서 껍데기를 씌우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말에 담긴 민족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면서, ‘언어는 사회적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는 생각보다는 ‘언어는 민족의 얼’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진리로 자리잡았다. 언어의 타락을 민족혼의 타락으로 보는 경향이나 조선어가 가장 위대한 언어이고 훈민정음이 가장 위대한 문자라고 보는 국수주의적 경향도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이다 ..  (34쪽)


 ‘말은 사람들이 생각을 나누는 그릇’ 노릇만 하지 않습니다. 영어는 영어를 쓰는 겨레나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 얼을 보여줍니다. 한자와 중국말은 중국사람 넋을 보여줍니다. 한자와 일본말은 일본사람 얼을 밝힙니다. 티벳말은 티벳사람 넋을 보여주고, 덴마크말은 덴마크사람 얼을 밝혀요.

 어느 겨레가 쓰는 말이든 이 말을 쓰는 겨레얼이 깃듭니다. 영국사람이 쓰는 영어하고 미국사람이 쓰는 영어는 같을 수 없습니다.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는 넋과 얼이 사뭇 달라요. ‘사람들이 생각을 나누는 그릇’ 노릇을 틀림없이 하면서, 저마다 다 다른 겨레와 나라마다 제 터전과 삶자락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말마디에 싣습니다. 섣불리 ‘국수주의’이니 무어니 하고 꼬리표를 붙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훈민정음이 가장 훌륭한 글이라 할 수 없으나 ‘가장 요즈음에 만들고 가장 과학 원리에 따라 만든 글’이니, 깊이 살피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테지요.


.. 조선어사전편찬회의 결성은 주시경 이후 조선어 연구의 한 경향이 된 언어민족주의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결과였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는 곧 우리 민족의 얼이자 우리 민족 그 자체’라는 언어민족주의에 기대어 연구 방향을 설정하였다 ..  (67쪽)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살피는 일이 ‘언어민족주의’일 수 없습니다. 제 겨레나 제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이 쓰는 말을 살피는 일은 언어주의도 민족주의도 언어민족주의도 아닙니다. 그저 학문입니다. 한 마디를 붙일 수 있다면 나라와 겨레와 말과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어요.

 영국사람이 영어사전을 만들고, 독일사람이 독일어사전을 만드는 까닭은 언어민족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영어학이나 독일어학이나 중국어학이 나오는 까닭 또한 언어민족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한국어학을 하는 분들은 자꾸 ‘무슨무슨 민족주의’ 또는 ‘무슨무슨 국수주의’라는 이름표를 섣불리 붙이곤 합니다. 이런 주의주장을 해야 논문이 되거나 학문이 되는지 잘 모르겠으나, 말을 살피거나 다루는 사람들한테 자꾸 애먼 ‘주의자’라고 하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살피는 사람은 주의자가 아닐 뿐더러 ‘기계’도 아닙니다. ‘의사소통 도구’로만 한국말을 살피는 기계인 학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 나무를 보다가 숲속에서 길을 잃은 꼴이 된 조선어학회는 자신들의 아집에 사로잡혀 모국어의 정리와 통일의 결정체가 될 모국어사전의 출판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홍기문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의 의미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부정했던 것은 조선어학회의 아집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조선어 연구가 쇼비니즘적 경향을 띠는 것이었다. 국수주의에 경도된 언어 연구는 조선어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이어질 것이고, 당시 조선어학회의 위상을 볼 때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의 신성함을 지키는 절대적 문화 권력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  (232쪽)


 글쓴이 최경봉 님은 ‘국수주의’와 ‘언어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이라는 말을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비판합니다. 책은 《우리말의 탄생》이지만, 우리 말글이 어떻게 국어사전으로 갈무리되면서 틀을 잡는가 하는 이야기에서 이래저래 벗어나려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를 살핀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사람이었다고 《우리말의 탄생》에서 거듭거듭 나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일제강점기 조선어학자들이 조선말이 어떠한가를 말하거나 밝힐 때에 어떻게 말하거나 밝히려나요. 《이응호-미군정기의 한글운동사》(성청사,1974) 같은 책에서 그러모은 예전 자료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만, 일제강점기에 일본말을 즐겨쓰던 사람들은 식민지살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권력을 누립니다. 조선어학회 사람들이건 조선말을 살피는 학자이건 독립운동을 하며 조선말을 살피는 사람은 ‘권력 아닌 탄압’을 누립(?)니다.

 글쓴이는 어쩌면 나무도 숲도 보지 않으면서 ‘국어사전 발자취’를 살피려 하면서, 일부러 조선어학회 비판에만 불꽃을 피우지 않나 싶기까지 합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이라 해서 더 거룩하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한국사람한테는 거룩하거나 훌륭합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쓰는 일이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습니다.

 미국사람은 미국땅에서 미국말을 쓸 때에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땅에서 일본말을 쓸 때에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겠지요.

 하나도 민족주의가 아니며 국수주의라든지 쇼비니즘 따위가 아닙니다. 말결이고 말흐름이며 말삶입니다. ‘절대적 문화 권력’이란, 지난날 한문을 쓰던 지식인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말을 아끼던 지식인이며 오늘날 영어를 사랑하는 지식인입니다. 이들 지식인은 예나 이제나 우리 말글을 옳거나 바르거나 알맞게 쓰지 못합니다.


.. 그들(민족주의 언어학자)은 일관되게 우리말이 우리 민족과 함께 수천 년을 이어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계통론적 시각에서 우리말의 기원을 다른 언어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일일 수 있었다 ..  (331∼333쪽)


 말투를 하나하나 따진다면, “다른 언어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같은 말투는 우리 말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말투대로 말을 하자면, “다른 말과 얽혀 살펴보는 일이 이들 학자한테는”이라고 가다듬어야 합니다. “관련 속에서” 같은 말투는 영어를 일본사람들이 옮겨적던 말투를 한국 지식인이 생각없이 받아들여 퍼뜨리는 말투입니다. 앞에 ‘-와 + 의’처럼 붙인 토씨 또한 일본 말투입니다. ‘自體’ 같은 한자말 또한 우리 말투가 아닙니다. ‘것’을 아무 데나 넣는다든지 ‘그들’ 같은 대이름씨를 섣불리 쓰는 말투 또한 우리 말투가 아니에요.

 말은 계통론으로도 살피지만, 한 곳에서 오래도록 살아낸 사람들 말버릇으로도 살핍니다. 고장말로도 살피는 말이요, 이웃한 고장이나 이웃한 나라나 겨레하고 견주면서도 살피는 말이에요.

 어느 한 가지로만 살필 수 없는 말입니다. 말은 죽기도 하지만 태어나기도 하고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어느 한 가지로 틀을 지을 수 없는 말이에요. 어느 한 가지 틀을 섣불리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적기법이라든지 띄어쓰기라든지 맞춤법이라든지 받침이라든지, 무엇 하나를 놓고도 참 오래도록 힘겨운 입씨름을 하거나 생각을 그러모은 끝에 국어사전 하나를 빚습니다.


.. 이희승 《국어대사전》은 ‘국어사전이면서 백과사전이나 각종 전문사전의 구실을 겸할 수 있도록 엮은’ 사전으로 우리 국어사전의 특성을 잘 보여준 대표적인 사전이다 … 그 어휘의 증가분 중 상당 부분이 외래어나 한자어라는 점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어휘 수록 양상은 새말의 수용이나 전문어의 확대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 ..  (364쪽)


 글쓴이가 《국어대사전》을 비롯한 ‘고침판 이희승 국어사전’을 얼마나 살펴보고 이렇게 적는지 궁금합니다. ‘ㄹ 항목’ 하나만 살펴보더라도 이희승 국어사전에 일본말이든 서양말이든 외국 물건이름이 얼마나 많이 실렸으며, 뜬구름 잡기라도 되는 듯한 외국사람 이름이 얼마나 많이 실렸고, ‘스쿨걸’과 ‘스쿨보이’ 같은 영어까지 마구잡이로 쑤셔넣은 이희승 국어사전인 줄을 스스로 살폈더라면, 이러한 이야기를 펼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롱’이나 ‘라이프’나 ‘리빙’ 같은 낱말은 영어이지 한국말이 될 수 없습니다. ‘롱스커트’나 ‘로스트 비프’나 ‘록(= 바위)’이나 ‘리레코(= 리레코딩)’나 ‘리딩(= 읽기)’이나 ‘리밋(= 한계)’ 같은 영어를 슬그머니 실어 놓은 매무새로 올림말 숫자를 늘린 이희승 국어사전인데, 올림말 숫자가 많대서 새롭거나 남다른 한국어사전이 될 턱이 없습니다. 이런 영어까지 실었으니, 우리가 안 쓰는 한자말이나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만 쓰는 한자말은 오죽 많이 실었겠습니까.

 이희승 님이 엮은 한국어사전은 이 한국어사전대로 보람과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낱말이 아닌 일본말과 일본 한자말을 지나치게 실은 대목에서 비판을 받을밖에 없습니다. 우리 낱말을 다루는 책이어야 할 국어사전에 왜 우리 낱말을 제대로 못 실을까요. 게다가 최경봉 님은 왜 이러한 대목을 옳게 짚지 못할까요.

 한자말을 쓰는 일이나 영어를 쓰는 일을 꼭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쓸 만하다면 써야지요. 쓸 만하지 않다면 안 써야지요. 엉터리로 쓰거나 얄궂게 쓰거나 겉치레로 쓴다면 한국어사전에는 함부로 싣지 말아야지요.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 또한 이런 대목에서 비판받아야 할 뿐 아니라, 풀이말과 올림말과 보기글이 어긋나는 대목이 많습니다. 국립국어원 누리집 한국어사전은 잘못된 풀이말과 올림말과 보기글을 꾸준히 바로잡지만, 정작 종이로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은 잘못된 곳을 바로잡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의 탄생》이라는 책에서는 오늘날 나오는 한국어사전을 다루면서 오늘날 나오는 한국어사전에서 잘 돌아보며 담은 대목이나 잘못 건드리며 얄궂게 된 대목을 찬찬히 보여주지 못합니다. 남영신 님이나 박용수 님이 일군 ‘우리말 분류사전’ 이야기는 한 줄로도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김광해 교수가 이룬 ‘유의어·반의어 사전’이라든지, 정재도 님이 이룬 ‘국어사전 바로잡기’라든지, 임홍빈 교수가 펼친 ‘말느낌(뉘앙스)에 따라 다른 말풀이’와 같은 새로우면서 깊이있게 파고드는 한국어사전 톺아보기 이야기 또한 다루지 못해요.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최경봉 님은 “우리 말글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펼칩니다만, 이 책에 나온 이야기로 헤아리자니, “우리 말글은 아직 안 태어났”습니다. 더욱이 “우리 말글이 태어나올 땅이 꽁꽁 막혔”습니다. 학자와 정부와 관료와 지식인과 여느 학부모까지 “우리 말글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알껍데기에 무쇠붙이를 철썩 뒤집어씌웠다”고 할 만합니다. 태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태어날 수 없게끔 가로막힌 한국말 이야기를 펼치자니, 《우리말의 탄생》이 구석구석 갑갑하거나 턱턱 막힐 수밖에 없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4344.4.14.나무.ㅎㄲㅅㄱ)
 

  

(밑에는, 이희승 국어사전 올림말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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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몽 2012-02-2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쓰신 글이신지요...?
너무 가슴아프게(?) 잘 읽었습니다.
'가슴아프게'라고 한 것은, 저도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좋은 점을 얘기해 놓고는 끄트머리에 '그래서 한글을 뛰어나'-이것도 꼭 '우수'라는 한자말을 쓰지요...-라고 끝을 맺지요.
그리고 한글이 뛰어나다고 하던 나랏말학자들도, 하지만 우리말 만으로는 말글사는 데에 모자라고 한자말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더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한글이 우수하다고 하는 그 분들도 잘 들어보면, 흔히 인터넷에 떠도는, 맨날 똑같은 그 얘기 말고는 근거를 들지 못합니다.(마치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정광태 씨 노랫말에서 밖에서 못 찾는 것처럼...)
그리고 딴겨레말 떠받들고 우리말 죽이는 국립국어원과 엄청난 돈을 들이고도 완전 엉터리로 만든 표준국어대사전까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여튼 너무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http://2dreamy.wordpress.com/

파란놀 2012-02-21 06:08   좋아요 0 | URL
제가 쓴 글이 아니면 서재에 올릴 수 없겠지요.

..

한글은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한국말을 한겨레가
가장 슬기로이 담는 그릇이지만,
이 그릇을 제대로 다룰 때에 좋은 그릇이고,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슬픈 그릇이 됩니다...

깨몽 2012-02-21 12:01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가요...^^;;
여튼 꿰뚫어 보시는 힘이 대단합니다.
이른바 나랏말학자라는 이들과 우리말글운동한다는 이들도 잘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얘기를 해도 바로 보기 싫어하는 것을 꿰뚫어 보시니...
그러고 보면, 되장 님도 그렇지만, 제가 존경하는 이오덕 선생님이나 이 책을 쓰신 최경봉 님,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말글을 바로 보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그런 분들이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습니다.(엉터리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앉아... ㅡ.ㅡ)
아마 그래서 이 글이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을 만한 글이 많아 마음이 좀 급하긴 하지만,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보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혹 SNS(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하시면 알려주시면 말씀 나누면서 배웠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파란놀 2012-02-21 13:31   좋아요 0 | URL
저는 따로 트위터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주류이거나 아니거나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옳게 바라보며 제대로 살면 되지요~
 

 

[누리말(인터넷말) 63] 북스, 신간, 도서, 책

 누리신문에서 ‘책’을 다루는 자리를 보면 ‘책’이라 말하는 곳보다 영어로 ‘북’이나 ‘북스’라 쓰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문화’라고도 적지 말고 영어로 ‘컬쳐’라 적고, ‘문화인물’이라 하지 말고 ‘컬쳐피플’이라고 할 노릇입니다. ‘언론’이라 안 하고 ‘미디어’라 적었으니까요. 그런데 ‘북스’라는 자리에 들어가면, ‘북스뉴스’부터 ‘이주의 신간’이나 ‘추천도서’나 ‘집중분석 이책’이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차림판일까요.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면서 말놀이를 하겠다는 뜻일까요. 책은 책이 아니라는 소리인가요. 뒤죽박죽 얼기설기 얼렁뚱땅입니다. (4344.4.1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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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52] 긴치마

 아이 어머니가 뜨개질로 아이 입을 치마를 떠 줍니다. 길다 싶은 치마로 뜨지 않았을 테지만 아직 아이한테는 퍽 깁니다. 아이는 긴치마를 입고는 즐겁게 뜁니다. 할머니·할아버지가 한복을 사 줄 때에 치맛자락이 자꾸 발에 밟히니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걷거나 뛰라 말했더니, 아이는 이 말을 곧바로 알아듣고는 긴치마를 입고 다닐 때에는 으레 치맛자락을 잡고 움직입니다. 치마라면 다 좋으니까 긴치마이며 짧은치마이며 깡똥치마이며 다 좋아합니다. 아버지가 웃도리를 입으면 웃도리를 보고도 치마라 말하며 두 손으로 꼭 잡고는 밑으로 죽 내리려고 합니다. 아침에 문득 어느 한국어사전 하나를 펼치다가 ‘롱스커트’라는 낱말이 실렸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해 봅니다. 한국어사전이라 하지만 ‘롱스커트’와 ‘미니스커트’ 같은 영어는 실으면서 막상 ‘짧은치마’ 같은 한국말은 안 싣습니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아이가 입은 치마가 길면 ‘긴치마’라 말하고, 아이가 입은 치마가 짧으면 ‘짧은치마’라 말하지만, 이런 치마 하나조차 한국말로 옳게 밝히며 적기가 힘들구나 싶습니다. 바지도 그래요. 아니, 바지는 아예 ‘긴바지’도 ‘짧은바지’도 한국어사전에 못 실립니다. (4344.4.1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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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는 힘들지만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달삯을 벌어들이느라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무 살부터 내 삶길을 글쓰기와 사진찍기로 맞추면서 살았다 하더라도 도시에서 글을 써서 돈을 벌기란 몹시 벅차다. 더더구나 나처럼 돈이 되는 글이 아니라 돈이 안 되는 글, 이른바 ‘우리 말 이야기’랑 ‘헌책방 이야기’를 즐겨쓰는 사람이 무슨 글삯을 벌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용하게 굶어죽지 않고 어찌저찌 버티었다. 힘들 때마다 형이 살림돈을 도와주었으니까 버티었다 할 텐데, 날마다 수없이 글을 써대려면 밑천이 있어야 하기에 날마다 이모저모 책읽기에도 여러모로 마음을 많이 썼다.

 시골집으로 옮기고부터는 도시에서처럼 죽기살기로 글을 쓰지 않는다. 다만,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용솟음치는 글을 쓴다. 그나마, 샘솟는 글을 모두 쓴다거나 어느 만큼 후련하게 쓰지는 못한다. 글을 좀 쓰고 싶어도 아이하고 복닥여야 하고, 집일을 해야 하며, 밥을 차려야 하는데다가, 요사이는 시골집 깃든 둘레에 있는 이오덕학교에서 날마다 한 시간씩 책이야기 공부를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글조각을 붙잡을 겨를이 거의 없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책을 읽지 않는다면 글을 쓰기란 참 힘들다 할 만하다. 글을 쓰는 주제에 책조차 안 읽는다면 무슨 글을 쓴다 하겠는가.

 요즈음, 나는 책을 참 못 읽는다. 그래도 오늘날 여느 사람들과 견주면 꽤 많이 읽는다 할는지 모르지만, 종이책 몇 쪽 넘기기조차 몹시 버겁다. 요 며칠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 읽어 주기도 제대로 못한다.

 등허리가 몹시 쑤셔서 자리에 털썩 드러누운 채 두 눈이 감기기 앞서 몇 가지 책을 넘겨 보곤 했다. 이 가운데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안목,2011)는 꽤 잘 읽혔다. 예전에 처음 나올 때(2005년)에 진작 읽은 책이니 다시 읽어도 잘 읽힌다 할 터이나, 다시 읽으면서도 새로 읽는 느낌이었고, 필립 퍼키스 님 글책은 여러 차례 되읽어도 늘 새삼스럽게 기쁘다.

 생각해 보면, 일이 쌓이고 몸이 힘들기 때문에 이 책 저 책 자질구레하다 싶은 책까지 못 들춘달 수 있다. 참으로 읽어야 할 책을 더 깊이 읽는다 할 만하고, 참말로 아름답구나 싶은 책을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면서 읽는다 할 테지.

 저녁나절, 아이는 제 엄마한테 “빨강머리 보고 싶어.” 하면서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또 보았다. 같은 이야기를 언제나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다시 보는데, 오늘 본 〈빨간머리 앤〉에는 앤이 후두염에 걸린 미니메이를 돌보는 이야기가 흐른다. 빨간머리 앤은 미니메이가 살아난 뒤에 후유 한숨을 돌리면서 마릴라 아주머니한테 ‘세 쌍둥이를 건사하던 일을 겪지 않았다면 미니메이를 보살필 수 없었으리라’ 하고 말하면서, 지난 괴로운 일을 나쁘게만 돌아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 앤은 얼마나 학교를 다니고 싶었으며, 공부를 하고 싶었겠나. 그러나 앤은 학교도 못 다니고 공부도 못하며 어머니나 아버지 사랑 또한 받지 못했어. 그런데 이렇게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낸 나날이 있어서, 좋은 삶동무 다이애나를 사귀고 다이애나 동생인 미니메이를 보살필 슬기를 몸으로 아로새기듯 얻었겠지. 책이란 종이책만 책이라 하겠나. 몸뚱아리 책도 책이고 설거지 책도 책이며 빨래하기 책도 책일 테지. 책을 읽기는 힘들지만, 용케 책하고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그럭저럭 버티며 오늘 하루도 마감하며 이제 슬슬 자리에 누워야겠다. (4344.4.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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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쑥부침개와 책읽기


 옆지기 귀빠진날을 맞이했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어제부터 곰곰이 생각했다. 귀빠진날이 닥치고 나서 생각한대서야 무얼 달리 뾰족히 할 만할 수 없겠구나 싶은데, 요 몇 해 사이 무슨 일을 하든 하나하나 차근차근 내다보면서 헤아린 일이란 거의 없지 않느냐 떠올린다. 미리미리 살피거나 보듬지 못하기 일쑤라고 느낀다. 숱한 집일이 밀려드니까, 이 집일을 껴안기만 하더라도 다른 일은 하나도 할 수 없다. 새벽과 밤에 잠을 쪼개어 글조각을 붙잡는데, 졸립거나 고단한 몸을 버티며 글조각을 붙잡는 일이란 퍽 부질없거나 덧없는지 모른다.

 옆지기 귀빠진날인 오늘은 새벽 여섯 시 이십삼 분에 일어난다. 요즈음 새벽에 꽤 늦게 일어난다. 새벽 서너 시쯤에 일어나서 일손을 붙잡아야 그럭저럭 글조각 보듬기를 할 만한데, 새벽 여섯 시라면 너무 늦다. 이때에 일어나면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침 일곱 시부터는 아침밥을 차리느라 부산을 떨어야 하니까. 일곱 시 이십 분이나 삼십 분 즈음에 쌀을 씻어 불리고, 아침에 끓일 국을 무엇으로 할는지 생각한다. 미역국이나 다시마를 넣은 국이라면 미역이나 다시마를 미리 손으로 끊어서 불려야 한다. 다른 국 또한 이무렵부터 국거리를 손질한다.

 아이는 오늘 따라 아홉 시 반 즈음에 일어난다. 요 몇 달 사이, 다른 날에는 아침 일곱 시 반이나 여덟 시에 어김없이 일어났는데, 하도 신나게 뛰놀다 보니 오늘만큼은 꽤 많이 고단했나 보다. 열 시가 가까워 일어났는데에도 아침밥이자 낮밥을 먹을 무렵부터 눈가에 졸음이 꽤 쌓인 모습이다.

 느즈막하게 일어난 아이를 데리고 비탈논으로 간다. 우리가 짓는 비탈논은 아니고, 웃마을 이오덕학교에서 짓는 비탈논이다. 이 비탈논 둑자리를 따라 송송 돋는 쑥을 뜯는다. 아이는 처음에 몇 차례 아버지 흉내를 내어 쑥을 뜯어 보더니, 이내 논둑이며 논바닥이며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신나게 잘 논다.

 저녁밥을 차리려고 또 한 번 아이를 데리고 논둑으로 나온다. 아이는 아이대로 마음대로 노래하면서 뛰놀고, 아버지는 바지런히 쑥을 뜯는다.

 내가 옆지기한테 해 줄 만한 선물이란 무엇일까. 없는 돈으로 무엇을 해 줄 수는 없다. 무언가 먹고프다 한다면 자전거를 몰고 읍내로 달려가서 장만한 다음 낑낑대며 돌아올 수 있겠지. 지난 한 해 동안 튀김닭 한 번 피자 세 번 자전거배달을 했다. 이 멧골자락까지 날라다 주는 곳은 없으니까.

 오늘은 아침과 저녁으로 쑥부침개를 해 본다. 아침에 마련한 쑥부침개에는 밀가루가 좀 많이 들어간 듯해서 저녁에 하는 쑥부침개에는 밀가루보다 쑥을 훨씬 많이 넣는다. 아침보다 곱절을 더 뜯은 쑥으로 부침개를 해 보았다.

 따지고 보면, 저녁에는 쑥부침개라기보다 쑥버무리튀김에 가깝다. 조금 더 바삭하게 되도록 해야 할 텐데, 아직 잘 안 된다. 불을 꽤 작게 해서 스텐팬으로 했는데, 불을 이보다 훨씬 작게 하고 기름을 더 적게 둘러서 해야 할까. 불크기는 알맞은데 기름을 살짝 더 둘러 볼까.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다가 멧골자락 작은 집으로 옮긴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라면 봄에는 봄내음이 물씬 나는 밥상을 차리는 데에 있지 않을까 살짝 생각해 보았다. 나는 아직 나물을 잘 모른다. 하나씩 배워야 할 텐데, 책으로는 배울 수 없을 듯하다. 이 풀 저 풀 뜯어서 먹으며 몸으로 배워야 하겠지. 망초도 어찌저찌 먹어 보려 하다가, 텃밭을 고르며 하도 많이 나와서 망초를 데치거나 볶거나 어찌저찌 해서 먹어 보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사람들이 왜 망초를 잘 안 먹는지 알 만하다고 느꼈다. 이렇게 질리게 금세 돋아나며 텃밭을 뒤덮으니까, 이 망초를 솎아내자고 얼마나 고달프겠나. 따지고 보면 쑥도 금세 퍼져서 돋곤 하는데, 쑥은 사람한테 향긋한 냄새이면서 봄맛을 돋우기 때문에 그닥 안 싫어할까. 그러나 텃밭 풀을 뽑고 흙을 갈아엎을 때에는 나 또한 쑥이고 뭐고 가리기 힘들더라. 꽃다지이건 뭐건 하나하나 따로 갈무리하기 벅차더라. 참말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갈면서.

 쑥부침개를 아침과 저녁으로 내리 하면서, 국에도 쑥을 꽤 넣어 본다. 국을 마시며 가만히 코를 킁킁거리면 쑥내가 난다. 이 쑥을 앞으로 며칠 더 즐길 수 있을는지, 또는 4월 내내 쑥을 즐길 만한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밥에도 쑥을 넣어 쑥밥을 해 볼 수 있을까. 옆지기한테 한 번 물어 보고 나서 쑥밥을 해 보고 싶다. 뜯을 사람도 적고 먹을 사람도 적으니, 온 논둑과 밭둑 쑥은 도맡아서 뜯고 도맡아서 밥거리로 마련한다. 쑥떡까지는 못할 듯싶지만, 쑥밥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쑥부침개는 옆지기한테 어줍잖게 내민 선물이라면, 쑥밥은 나한테 남우세스레 내미는 선물이 될까. 그러면 아이한테는 어떤 쑥을 내밀어 주면 좋으려나. (4344.4.13.물.ㅎㄲㅅㄱ)
 

 

아침이자 낮밥...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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