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는 힘들지만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달삯을 벌어들이느라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무 살부터 내 삶길을 글쓰기와 사진찍기로 맞추면서 살았다 하더라도 도시에서 글을 써서 돈을 벌기란 몹시 벅차다. 더더구나 나처럼 돈이 되는 글이 아니라 돈이 안 되는 글, 이른바 ‘우리 말 이야기’랑 ‘헌책방 이야기’를 즐겨쓰는 사람이 무슨 글삯을 벌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용하게 굶어죽지 않고 어찌저찌 버티었다. 힘들 때마다 형이 살림돈을 도와주었으니까 버티었다 할 텐데, 날마다 수없이 글을 써대려면 밑천이 있어야 하기에 날마다 이모저모 책읽기에도 여러모로 마음을 많이 썼다.
시골집으로 옮기고부터는 도시에서처럼 죽기살기로 글을 쓰지 않는다. 다만,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용솟음치는 글을 쓴다. 그나마, 샘솟는 글을 모두 쓴다거나 어느 만큼 후련하게 쓰지는 못한다. 글을 좀 쓰고 싶어도 아이하고 복닥여야 하고, 집일을 해야 하며, 밥을 차려야 하는데다가, 요사이는 시골집 깃든 둘레에 있는 이오덕학교에서 날마다 한 시간씩 책이야기 공부를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글조각을 붙잡을 겨를이 거의 없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책을 읽지 않는다면 글을 쓰기란 참 힘들다 할 만하다. 글을 쓰는 주제에 책조차 안 읽는다면 무슨 글을 쓴다 하겠는가.
요즈음, 나는 책을 참 못 읽는다. 그래도 오늘날 여느 사람들과 견주면 꽤 많이 읽는다 할는지 모르지만, 종이책 몇 쪽 넘기기조차 몹시 버겁다. 요 며칠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 읽어 주기도 제대로 못한다.
등허리가 몹시 쑤셔서 자리에 털썩 드러누운 채 두 눈이 감기기 앞서 몇 가지 책을 넘겨 보곤 했다. 이 가운데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안목,2011)는 꽤 잘 읽혔다. 예전에 처음 나올 때(2005년)에 진작 읽은 책이니 다시 읽어도 잘 읽힌다 할 터이나, 다시 읽으면서도 새로 읽는 느낌이었고, 필립 퍼키스 님 글책은 여러 차례 되읽어도 늘 새삼스럽게 기쁘다.
생각해 보면, 일이 쌓이고 몸이 힘들기 때문에 이 책 저 책 자질구레하다 싶은 책까지 못 들춘달 수 있다. 참으로 읽어야 할 책을 더 깊이 읽는다 할 만하고, 참말로 아름답구나 싶은 책을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면서 읽는다 할 테지.
저녁나절, 아이는 제 엄마한테 “빨강머리 보고 싶어.” 하면서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을 또 보았다. 같은 이야기를 언제나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다시 보는데, 오늘 본 〈빨간머리 앤〉에는 앤이 후두염에 걸린 미니메이를 돌보는 이야기가 흐른다. 빨간머리 앤은 미니메이가 살아난 뒤에 후유 한숨을 돌리면서 마릴라 아주머니한테 ‘세 쌍둥이를 건사하던 일을 겪지 않았다면 미니메이를 보살필 수 없었으리라’ 하고 말하면서, 지난 괴로운 일을 나쁘게만 돌아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 앤은 얼마나 학교를 다니고 싶었으며, 공부를 하고 싶었겠나. 그러나 앤은 학교도 못 다니고 공부도 못하며 어머니나 아버지 사랑 또한 받지 못했어. 그런데 이렇게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낸 나날이 있어서, 좋은 삶동무 다이애나를 사귀고 다이애나 동생인 미니메이를 보살필 슬기를 몸으로 아로새기듯 얻었겠지. 책이란 종이책만 책이라 하겠나. 몸뚱아리 책도 책이고 설거지 책도 책이며 빨래하기 책도 책일 테지. 책을 읽기는 힘들지만, 용케 책하고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그럭저럭 버티며 오늘 하루도 마감하며 이제 슬슬 자리에 누워야겠다. (4344.4.13.물.ㅎㄲㅅ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