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2


 책으로는 훌륭한 소리로 진보와 평화와 평등을 외치지만, 막상 집에서는 가부장 권력을 휘두르는 이는 ‘진보’인가 ‘남녀평등주의’인가 ‘평화운동’인가.

 자격증과 졸업증을 바랄 뿐 아니라, 이런 종이쪽이 없으면 벼랑으로 내몰기 때문에, 반성문이든 사상전향서이든 무어든 자꾸자꾸 글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른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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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문 1


 ‘사상전향서’란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가. 그러나, 이런 종이쪽을 썼대서 생각이 바뀌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저 이런 종이쪽은 사람을 얽어매려는 쇠사슬이다. 주민등록증에 붉은 줄을 긋고는 한 사람을 ‘죽을 때까지 죄인으로 손가락질’하는 셈하고 마찬가지이다.

 반성문이란 참으로 쓸데없는 종이쪽이자 모진 폭력이다. 그러나, 이 종이쪽을 써야 비로소 뉘우쳤다고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글은 그럴싸하게 쓰면서 삶은 엉터리라면 반성문이란 무슨 뜻인가? 기록? 자료?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한 사람 ‘성적’이나 ‘재주’를 보여주지 않듯이 반성문이란 어느 한 사람 삶을 뉘우친 자국이 될 수 없다. 오로지 이 한 사람이 살아온 나날과 부대낀 나날이 온삶과 온사랑으로 ‘뉘우침글’이 된다.

 반성문 없이 옳고 바르게 살아갔으나 반성문을 안 썼으니까 나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하거나 깎아내리거나 떠들어도 되는지 궁금하다. 시인 신동엽 님은 일제강점기에 쓴 ‘平山八吉’이라는 창씨개명을 놓고, 시인 이원수 님은 일제강점기에 쓴 친일시를 놓고, 따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반성문이란 삶으로 보여줄 노릇이지, 글로 적바림한대서 뉘우침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이쪽이 아닌 온몸에 아로새긴 뉘우침글을 읽어야 사람과 삶과 사랑을 읽을 수 있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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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쓴 글과 읽는 글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쓰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읽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나이가 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녔거나 책을 많이 읽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적게 다니거나 못 다녔거나 책을 조금 읽었거나 못 읽었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린이라면 나중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겠거니 생각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일 때에도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글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알아듣거나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 깃든 마음을 함께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들꽃과 들풀을 바라보면서 받아들이거나 느낍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밥을 먹고 국을 마십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똑같이 밥그릇을 비우지 못합니다. 아이는 어른처럼 젓가락질이나 숟가락질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대로 젓가락질을 하고, 아이는 아이 밥통만큼 밥그릇을 비울 수 있어요.

 아이한테 어른처럼 밥그릇을 비우라거나 젓가락질을 하라고 바라거나 시킬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어른처럼 원고지에 글을 쓰거나 사진기를 손에 쥐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어른한테 나무라듯 아이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는 아이 눈높이로 다가서야 하고, 아이한테는 아이 마음밭에 걸맞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에 맞추지 않았으니까, 이 글을 못 알아듣거나 못 받아들이거나 못 느낀다 할 만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누가 이 글을 읽을까’ 하고 헤아린다면, 글이 사뭇 달리 읽히겠지요. 아니,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가 아니라 삶높이를 곱씹으면서 ‘글을 읽는 사람 삶높이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떻게 있는가’를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돌이키면서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혼자 잘났다고 떠벌이는 글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혼자 똑바로 잘 하면서 살아간다고 내세우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나 언제나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걸림돌이란 너무 무섭습니다. 아니, 슬프다고 해야 할까요. “꽃이 참 예뻐요.”라든지 “밥이 참 맛나요.”라든지 “물이 참 맑아요.”라든지 “하늘이 참 파래요.”라든지 “바람이 참 따스해요.”라든지 “소리가 참 고와요.”라든지 “흙이 참 보드라와요.”라 할 때에 알아듣지 못하는 슬픈 마음밭이라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꽃이 무슨 꽃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입니다. 꽃이나 나무 스스로 내가 어떤 이름이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이기 마련이기에, ‘다른 사람이 붙인 이름’을 모르면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누군가 ‘개불알꽃’이라 하든 말든, 이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괭이불알꽃’이라든지 ‘소불알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누군가 ‘제비꽃’이라 하든 말든,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땅보라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듯 자그맣게 피어나는 보라빛 꽃송이인 만큼,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어떠한 이름이든 내가 느끼며 받아들이는 삶을 내 깜냥껏 슬기로이 곰삭이면서 사랑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떠한 글이든 내가 읽으며 깨달은 삶을 내 손으로 사랑하고 내 마음으로 아끼면서 좋아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았을 때, 누군가는 1억 원이라는 돈을 선뜻 내놓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1만 원을 내놓을 수 있고, 누군가는 마음속으로 비손하면서 부디 아픔과 걱정을 잊으면서 웃고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빨래를 거들 테고, 누군가는 김치 한 접시를 갖다 줄 수 있겠지요.

 만화책 《어시장 삼대째》(대명종,2010) 29권을 읽으면, 205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대째 어시장 가게에서 일하는 ‘마사’라는 사람이 어린 날 당신 아버지한테 “아버지, 왜 같은 전갱인데 저렇게 분류를 하는 거야?” 하고 여쭙니다. 마사네 아버님은 “그건 말이다. 같은 전갱이라도 맛이 다르기 때문이지.”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전갱이일 테지요. 그런데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물고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다른 ‘전쟁이’이고요.

 이오덕 님이 쓴 책을 마흔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송건호 님이 쓴 책을 스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남주 님이 쓴 시집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권정생 님이 쓴 동화책을 열다섯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이 쓴 동화책이나 동시책을 서른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누군가는 한 권만 읽어도 ‘아무개를 다 알았다’고 하겠지요. 누군가는 이오덕이든 송건호이든 리영희이든 김남주이든 권정생이든 이원수이든 다 똑같은 ‘책’이라 하겠지요. 그리고, 누군가한테는 한 사람이 내놓은 책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깃들고, 같은 책 한 권일지라도 이 한 권에 깃든 꼭지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배었다고 느끼겠지요.

 누군가 글을 씁니다. 누군가 글을 읽습니다. 누군가 책을 만듭니다. 누군가 책을 삽니다. 오늘도 해는 뜨고 오늘도 달이 뜨며 오늘도 바람이 불고 오늘도 햇살이 비칩니다. 오늘도 개구리는 알을 깨며 왁왁 울 테며, 오늘도 왜가리는 개구리 먹이를 찾아 이 논 저 논 누빌 테지요.

 아름다운 책은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책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삶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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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ck Knock Who's There? (Paperback)
샐리 그린들리 지음, 앤서니 브라운 그림 / Puffin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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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석 장 느낌글 010] 똑똑! 누구세요?


《똑똑! 누구세요?》를 들고 아이한테 읽히던 밤 무렵입니다. 아이는 졸음이 가득하면서 좀처럼 잠들지 않습니다. 아이가 좀처럼 잠들지 않는 까닭은 덜 놀았기 때문일 텐데, 내 어린 날에는 어떠했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나도 우리 아이처럼 자야 할 때를 훨씬 지나면서도 안 자려 했을까 떠올리고, 나도 우리 아이처럼 내 어버이를 고달프게 했을까 곱씹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눈을 감고 꿈나라로 가지 않습니다. 문을 똑똑 두들기는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이윽고, 아이 방문을 똑똑 두들기는 마지막 손님이 찾아듭니다. “포근하게 안아 주는 덩치 큰 아빠”입니다. 아빠는 “모락모락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이랑 소곤소곤 들려줄 이야기를 갖고 왔”답니다. 잠자리맡에서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줄 때에 아이가 금세 잠드는 일이란 없습니다. 두 번 세 번 읽어 준다 한들 스르르 잠들지 않습니다. 아이로서는 이렇게 제 어머니와 아버지하고 보내는 1분과 1초가 애틋하면서 사랑스러울 테니까요. 이 겨를을 더 누리거나 한껏 즐기고 싶을 테니까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가 어서 잠들면 같이 잠들거나 조용히 일어나 이제껏 미룬 다른 일을 할 생각이겠으나, 아이는 놀이동무를 바랍니다. (4344.4.30.흙.ㅎㄲㅅㄱ)

― 앤서니 브라운 그림, 샐리 그린들리 글, 조은수 옮김, 웅진씽크빅 펴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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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
앨리스 프로벤슨 외 지음, 김서정 옮김 / 북뱅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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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바람과 햇볕과 물과 흙을 사랑해 주셔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 앨리스·마틴 프로벤슨,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북뱅크,2008)


 나이가 이백 살이나 삼백 살이나 오백 살이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이 이 나라 곳곳에 있습니다. 끔찍한 전쟁통에도 살아남은 나무요, 고단한 식민지살이를 견딘 나무입니다. 예나 이제나 무섭디무서운 세금을 버틴 나무라 할 만하고, 서글픈 계급과 신분을 딛고 살아온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먼 옛날, 길을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깔지 않던 먼 옛날을 떠올려 봅니다. 아득한 옛날, 논이나 밭이나 논둑이나 밭고랑에 풀약을 치지 않던 아득한 옛날을 헤아려 봅니다. 모든 먹을거리는 사람들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아서 일구던 지난날을 곱씹습니다. 그 옛날 궁궐에서는 임금님이나 신하들 똥오줌을 거름으로 삼았을까요, 쓰레기처럼 내다 버렸을까요. 그 옛날 한양에서는 한양사람 똥오줌을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큰 문 넷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안쪽에도 논이나 밭이 있었을까요. 오늘날 서울 북촌이라 하는 곳에서 살던 옛날 양반이나 사대부들이 누던 똥오줌은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똥장군을 지고 똥오줌 뒷간을 치우던 일꾼이 따로 있었을까요. 똥장군을 지고 양반집이나 사대부집 똥오줌을 치우던 일꾼은 이 똥오줌을 농사짓는 성 바깥 사람한테 돈을 받고 팔았을까요.

 어느 때부터인가 건축법이 바뀌어, 시골에서 집을 지을 때에도 정화조를 묻고 수세식변기를 쓰도록 합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유기농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집을 마련하자면 정화조와 수세식변기를 달아야 건축허가를 내주도록 법이 바뀌었습니다. 유기농 농사란 말이 좋아 ‘유기농’이라는 한자말이지, 토박이말로 쉽게 이야기하자면 ‘똥오줌 거름으로 짓는 농사’입니다. 사람똥이든 소똥이든 똥을 모아 삭힙니다. 먹고 남은 밥쓰레기를 건사합니다. 가을걷이를 한 논자락에서 목아지 남은 벼포기를 건사합니다. 가을이 지나며 잎을 떨구는 나무들은 제 잎을 제(나무)가 크는 거름으로 삼습니다. 제(나무)가 뿌리를 내린 흙이 튼튼해야 하니까 스스로 잎을 떨구어 이 잎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어 여름이 흐르는 동안 천천히 삭아 흙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나무는 제 잎을 거름으로 삼으며 흙을 돌볼 때에 가장 튼튼하게 살아갑니다. 나무는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받아먹으면서 제 잎을 키우다가는, 겨울나기를 할 때에는 이 잎을 흙한테 돌려줍니다.

 사람은 날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바람을 들이켜고 햇볕을 쬡니다. 다만, 요즈음 사람들은 날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지만, 바람을 들이킨다는 생각을 잊습니다. 바람을 들이키지 않으면 1분조차 살아갈 수 없는 줄 뻔히 지식으로 알지만, 자가용을 지나치게 자주 멀리멀리 몹니다. 전기를 너무 많이 쓰고, 전기 먹는 물건을 너무 많이 건사합니다. 도시에서 얻는 일자리는 내 몸이 살아가도록 돕는 자연한테 무엇 하나라도 알뜰히 돌려주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아니 날마다 먹은 밥부피만큼 내놓을 똥오줌을 자연한테 예쁘게 돌려주지 않아요. 모두 쓰레기처럼 다루거나 버립니다.

 햇볕조차 거의 받아먹지 않아요. 햇볕은 없어도 되도록 땅밑에 굴을 파서 오갑니다. 높은 건물을 세워 유리창과 벽으로 꽁꽁 막은 다음 한낮에도 전깃불을 환하게 켭니다. 일을 마쳤건 볼일을 다 보았건, 건물 바깥으로 나오기 무섭게 자가용을 타거나 땅밑길로 다닙니다. 하루 5분이나마 햇볕을 쬐는 도시사람은 퍽 드물다 할 만합니다.


.. 단풍나무 언덕 농장에는 누가 살까요? 우리들이 살아요. 개 두 마리, 말 다섯 마리, 돼지 한 마리도 살지요. 그리고, 거위와 닭, 소와 염소, 양, 또, 특별한 고양이 네 마리가 산답니다 ..  (3쪽)


 도시에서 지내던 때에는 꿈을 꾸기 어려웠지만, 도시에서 지낼 때에도 해마다 봄이면 느티꽃을 보려고 여기저기 쏘다녔습니다. 버들꽃을 보려고 용을 썼습니다. 골목동네 이웃들이 예쁘게 돌보던 앵두나무와 복숭아나무와 매화나무와 석류나무와 호두나무와 배나무와 대추나무 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거닐곤 했습니다. 조그마한 내 살림집에는 이런저런 나무를 돌볼 수 없기에, 아이를 걸리거나 안고 몇 시간씩 요 골목 조 골목을 쏘다니면서 숱한 골목나무를 만났습니다. 자그마한 골목집 앞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서 시멘트조각을 들어내고 밤나무 두어 그루를 돌보는 골목집이란 얼마나 예뻤는지. 인천 율목동은 한자로 지은 동네이름이 ‘율목’이지만, 우리 말로 하자면 ‘밤나무’입니다. 관청이나 나라에서는 동네이름만 율목동이라 붙이고, 동네사람은 고즈넉히 밤나무를 돌봅니다. 때때로 두릅나무를 보고 엄나무를 봅니다. 골목동네에서 감나무는 퍽 흔하다 싶은 나무이고, 포도나무를 기르는 집이 제법 있습니다.

 한두 해쯤 살다 떠날 생각이라면 나무를 심지 않겠지요. 열 해쯤 집을 묵히면 돈이 되리라 꿈꾸었다면 돌과 시멘트를 골라 애써 텃밭을 일구지 않겠지요. 스무 해를 살고 마흔 해를 깃들이려는 마음으로 나무를 심거나 텃밭을 일굽니다. 내 아이와 살붙이를 사랑하는 넋으로 나무를 돌보거나 텃밭을 보듬습니다.

 요사이, 나라안 어디를 가더라도 벚나무가 가득합니다. 봄날 벚꽃이 예쁘기는 예쁘지만 지나치게 벚나무만 왕창 심습니다. 애써 심으려 한다면 한쪽에 벚나무일 때에 맞은쪽에 매화나무라든지 복숭아나무라든지 살구나무를 심으면 좋을 텐데요. 미루나무와 꿀밤나무와 잣나무를 심어도 좋을 텐데요. 왜 벚꽃만 보아야 하고 왜 벚꽃놀이만 즐겨야 하며 왜 벚꽃잔치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꼭 잔디를 심어 잔디밭을 이루어야 예쁘지 않습니다. 쑥밭을 이루도록 해도 즐겁습니다. 꽃다지밭이라든지 냉이밭이 되도록 해도 예뻐요. 흙땅이 흙땅 스스로 온갖 풀씨와 나무씨를 받아들여 조촐한 숲이 되도록 사람 손을 멀리할 때에도 참말 예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느티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해마다 느티꽃이 지고 느티열매가 맺으면서 느티씨앗이 땅으로 떨어져 천천히 싹을 틔우고 천천히 뿌리를 내리며 새롭게 크는 숱한 느티줄기를 만날 수 있어요. 커다란 느티나무 둘레 땅바닥이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이 아닌 흙바닥일 때에는 느티씨가 사람들 발길에 밟히지 않으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주 조그맣지만, 잎사귀 모양과 가지 생김새는 고스란히 느티나무인 자그마한 느티줄기가 무럭무럭 자랍니다.


.. 개를 안아 들어요. 저울에 올라가요. 둘이 같이 무게가 얼마인지 봐요. 개를 내려놔요. 저울에 올라가요. 혼자 무게가 얼마인지 봐요 … 고양이 몸무게도 그런 식으로 잴 수 있어요. 그런 식으로 말 몸무게도 잴 수 있어요. 저울이 그만큼 튼튼하고, 여러분이 말을 들어 올릴 수만 있다면요 … (말) 이븐을 싹싹 손질하고, 꼼꼼히 빗질하고, 깔끔히 다듬어 깨끗하고 예쁘게 만들어 놓으면, 진흙탕에서 뒹굴어요. 말이 뒹구는 걸 보면 정말 재미있어요. 지금까지 한 일이 말짱 허탕이 돼도 웃지 않을 수가 없어요 … (숫염소) 샘은 아이들이 가득 탄 마차를 끌 수도 있어요. 그러고 싶을 때만요! 가끔은 갇혀 있는 게 지겨운지 울타리를 부수고 나가기도 해요. 그러면 모두들 화를 내요. 울타리 고치는 일 때문만은 아니에요. 뛰어나간 샘이 장미를 먹어 버리거든요. 가시까지 다 먹어요, 글쎄 ..  (16, 23, 38∼39쪽)


 그림책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북뱅크,2008)를 읽습니다. 책 겉에 “뉴욕타임즈 선정 올해의 책 수상작”이라 큼직하게 적힙니다. 언제 적에 이러한 상을 받았는지 아리송합니다. 2007년이나 2008년에 이러한 상을 받지는 않았겠지요. 미국에서는 1974년에 처음 나왔으니까, 아마 그무렵에 이러한 상을 받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하고 단짝을 이루는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 계절》은 1980년대 첫무렵에 한 번 옮겨진 적 있습니다.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는 이번에 처음으로 옮겨졌지 싶습니다. 자그마치 서른다섯 해 만에 한국에 알려지는 책이라 할 텐데요, 2010년대 미국에서 ‘단풍나무 농장’ 같은 데가 살아남았을는지 사라졌을는지 궁금합니다. 퍽 외딴 시골자락에서 전기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자그마한 살림터는 몇 군데쯤 있을까요. 아미쉬 공동체라면 있겠지요. 다만, 전기가 없으니 인터넷도 없을 테고, 어쩌면 전화조차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편지를 받거나 부칠 수는 있겠지요. 아니, 편지조차 받을 수 없도록 외져서, 우체국으로 찾아가야 편지를 받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 나무 빽빽한 숲 한쪽 조용한 구석, 눈은 높이 쌓이고 참나무는 겨우내 잎을 달고 있는 곳에 우리가 사랑했던 사냥개 존이 묻혀 있어요. 고양이 세 마리도 있어요. 처음 같이 살았던 샴고양이 웹스터, 귀엽지만 지저분하고, 식탁에서 먹을 걸 슬쩍하곤 했던 하양 고양이 크룩, 맥스랑 닮은 통통한 수코양이 보이. 이 조용한 구석에서 가장 예쁜 들꽃이 자라요. 봄이 되면 눈이 녹기도 전에 첫 번째 새소리가 들려요. 부엉이가 이른 아침 나무 우듬지에서 우는 곳도 여기고, 건방진 까마귀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곳도 여기예요. 여기서 엄마 사슴은 새끼를 낳고, 날아가던 거위들은 쉬어 가요. 여우가 사냥꾼을 피할 수 있는 곳도 여기예요 ..  (54∼55쪽)


 그림책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를 펼치면 아이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 외딴 시골자락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는지 안 다닐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학교를 다닐 테고, 어쩌면 학교를 안 다니겠지요. 학교를 다닌다면 이 시골자락 아이들은 꽤 멀다 싶은 길을 서로서로 동무가 되어 뛰고 달리고 놀고 어깨동무하면서 오가겠지요. 학교와 집 사이는 한 시간 남짓 걸어야 하는 길일 수 있고, 이곳 아이들은 하루 몇 시간씩 걷는 일이 익숙하겠지요. 자동차를 탈 일이란 거의 없을 테며, 굳이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거나 놀러 다닐 일이란 없겠지요.

 한국으로 치면 롯데월드나 에버랜드 같은 데에 놀러갈 까닭이 없습니다. 집이 놀이터이고 농장이 놀이터이며 들판과 멧자락이 놀이터입니다. 냇물이 놀이터이고 우람한 나무가 놀이터이며 나무로 우거진 깊은 숲이 놀이터입니다.

 동물이 동물원에 갇히지 않습니다. 모든 짐승은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 깃들입니다. 집에서 키워 알이나 고기나 가죽이나 털이나 젖을 얻으려 하는 집짐승만 우리를 마련하여 기를 뿐, 사슴이든 여우이든 멧돼지이든 곰이든 다람쥐이든 숲과 들판과 멧자락에서 예쁘게 살아갑니다.

 집에서 말을 기르고 말을 타며 말을 돌봅니다. 열 살 안팎인 아이들이 혼자서 말을 타고 혼자서 말한테 먹이를 주며 혼자서 말을 쓰다듬고 닦아 줍니다. 열 살 안팎인 아이들은 날마다 흙에서 뒹굴고 햇볕에 그을리며 시원하거나 따뜻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들입니다.

 아이들한테는 따로 지구과학이나 생물이나 화학이나 사회나 도덕이나 정치경제 같은 과목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살림터에서 저희 동무랑 어버이랑 이웃하고 삶을 배웁니다. 작은 마을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나누는 이야기가 ‘국어’가 되고 ‘문학’이 됩니다. 해와 달과 별과 구름과 무지개와 미리내가 ‘산수’가 되고 ‘제2외국어’가 됩니다. 새소리를 살필 줄 알고, 빗소리를 가늠할 줄 알며, 바람소리를 알아챌 줄 압니다. 식물도감이 아닌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 푸나무를 껴안습니다.

 훌륭하다는 자연그림책이나 자연백과를 수백 수천 권 곁에 끼고 살아간대서 자연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나날이 되지 않습니다. 손수 흙을 만지면서 흙을 살필 때에 비로소 자연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나날이 됩니다.

 엊그제 음성군 소이면에 있는 어느 냇둑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이 냇물에 둑을 쌓으며 돌을 깔아 놓느라 벌써 66억 원이라는 돈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퍽 깊다 싶은 시골자락 자그마한 냇물인데, 이 냇물에 애써 둑을 쌓고 돌을 깝니다. 마치 서울 청계천을 보는 듯합니다. 충청북도 멧골이나 시골에는 남녘땅을 통틀어 ‘커다란 물줄기 넷’이 지나지 않습니다. 낙동강이니 한강이니 영산강이나 금강이니를 사람 손길로 쓰다듬는다면서 몇 조인지 몇 십 조인지 몇 백 조인지를 쓴다 하더니, 이렇게 조그마한 시골자락 물줄기를 구태여 건드리면서 수십 억원을 쓰는군요. 그나저나, 자그마한 시골자락 냇물을 만지작거리면서 쓸 66억 원이라면, 이 시골자락 사람들한테 햇볕전기를 쓰도록 시설을 갖추고, ‘똥오줌 거름 농사’를 짓도록 보탤 때에 참으로 시골자락 보금자리를 아끼거나 살리는 길이 아닌가 아리송합니다.

 5월을 앞둔 4월 끝자락입니다. 벼락이 내리치며 비가 퍼붓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 전투기나 군함이나 탱크가 하나도 없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전투기 한 대를 사들여 전투기에 기름 먹이고 전투기를 몰 군인을 키우며 전투기를 건사하느라 수백 억원을 쓰기보다는, 도시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시골자락 작은 집과 텃밭과 다랭이논을 조금씩 나누어 주면서 조용하면서 호젓하게 홀로서기를 하도록 해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꿈을 꿉니다. 군함 한 척 만든다며 수천 억원을 쓸 뿐 아니라, 군함 한 척을 몰거나 건사하거나 다루느라 수많은 군인을 키우고 먹이며 돌봐야 하는 데에도 수백 억원이 드는데, 이 수천 수백 억원을 아껴, 도시에서 조촐히 텃밭을 일구는 이들을 도울 뿐 아니라,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에서도 도심지 한켠에서 논밭을 마련해서 도시사람도 도시에서 내 먹을거리를 손수 일굴 수 있게끔 사랑을 나누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꿈을 꿉니다. 탱크 한 대를 만드는 데에 드는 돈과 품에다가 탱크 한 대를 모느라 들일 돈이라면, 이 나라 모든 집에 ‘퍽 좋은 자전거’를 한 대씩 거저로 줄 만한 돈이 될 테니까, 부디 이 나라에 탱크를 키우는 군산복합체보다 자연사랑·사람사랑·삶사랑이라는 사랑꽃이 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해마다 4월 끝무렵이면 아이 새끼손톱보다 훨씬 작지만 귀여우며 사랑스러운 느티꽃과 단풍꽃이 흐드러질 ‘단풍나무 언덕 농장’ 사람들은 언제나 귀여우며 사랑스레 살아가겠지요. (4344.4.30.흙.ㅎㄲㅅㄱ)


―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 (앨리스 프로벤슨,마틴 프로벤슨 글·그림,김서정 옮김,북뱅크 펴냄,2008.3.15./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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