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글과 읽는 글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쓰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읽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나이가 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녔거나 책을 많이 읽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적게 다니거나 못 다녔거나 책을 조금 읽었거나 못 읽었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린이라면 나중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겠거니 생각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일 때에도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글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알아듣거나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 깃든 마음을 함께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들꽃과 들풀을 바라보면서 받아들이거나 느낍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밥을 먹고 국을 마십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똑같이 밥그릇을 비우지 못합니다. 아이는 어른처럼 젓가락질이나 숟가락질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대로 젓가락질을 하고, 아이는 아이 밥통만큼 밥그릇을 비울 수 있어요.

 아이한테 어른처럼 밥그릇을 비우라거나 젓가락질을 하라고 바라거나 시킬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어른처럼 원고지에 글을 쓰거나 사진기를 손에 쥐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어른한테 나무라듯 아이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는 아이 눈높이로 다가서야 하고, 아이한테는 아이 마음밭에 걸맞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에 맞추지 않았으니까, 이 글을 못 알아듣거나 못 받아들이거나 못 느낀다 할 만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누가 이 글을 읽을까’ 하고 헤아린다면, 글이 사뭇 달리 읽히겠지요. 아니,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가 아니라 삶높이를 곱씹으면서 ‘글을 읽는 사람 삶높이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떻게 있는가’를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돌이키면서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혼자 잘났다고 떠벌이는 글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혼자 똑바로 잘 하면서 살아간다고 내세우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나 언제나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걸림돌이란 너무 무섭습니다. 아니, 슬프다고 해야 할까요. “꽃이 참 예뻐요.”라든지 “밥이 참 맛나요.”라든지 “물이 참 맑아요.”라든지 “하늘이 참 파래요.”라든지 “바람이 참 따스해요.”라든지 “소리가 참 고와요.”라든지 “흙이 참 보드라와요.”라 할 때에 알아듣지 못하는 슬픈 마음밭이라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꽃이 무슨 꽃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입니다. 꽃이나 나무 스스로 내가 어떤 이름이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이기 마련이기에, ‘다른 사람이 붙인 이름’을 모르면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누군가 ‘개불알꽃’이라 하든 말든, 이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괭이불알꽃’이라든지 ‘소불알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누군가 ‘제비꽃’이라 하든 말든,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땅보라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듯 자그맣게 피어나는 보라빛 꽃송이인 만큼,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어떠한 이름이든 내가 느끼며 받아들이는 삶을 내 깜냥껏 슬기로이 곰삭이면서 사랑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떠한 글이든 내가 읽으며 깨달은 삶을 내 손으로 사랑하고 내 마음으로 아끼면서 좋아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았을 때, 누군가는 1억 원이라는 돈을 선뜻 내놓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1만 원을 내놓을 수 있고, 누군가는 마음속으로 비손하면서 부디 아픔과 걱정을 잊으면서 웃고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빨래를 거들 테고, 누군가는 김치 한 접시를 갖다 줄 수 있겠지요.

 만화책 《어시장 삼대째》(대명종,2010) 29권을 읽으면, 205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대째 어시장 가게에서 일하는 ‘마사’라는 사람이 어린 날 당신 아버지한테 “아버지, 왜 같은 전갱인데 저렇게 분류를 하는 거야?” 하고 여쭙니다. 마사네 아버님은 “그건 말이다. 같은 전갱이라도 맛이 다르기 때문이지.”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전갱이일 테지요. 그런데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물고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다른 ‘전쟁이’이고요.

 이오덕 님이 쓴 책을 마흔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송건호 님이 쓴 책을 스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남주 님이 쓴 시집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권정생 님이 쓴 동화책을 열다섯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이 쓴 동화책이나 동시책을 서른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누군가는 한 권만 읽어도 ‘아무개를 다 알았다’고 하겠지요. 누군가는 이오덕이든 송건호이든 리영희이든 김남주이든 권정생이든 이원수이든 다 똑같은 ‘책’이라 하겠지요. 그리고, 누군가한테는 한 사람이 내놓은 책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깃들고, 같은 책 한 권일지라도 이 한 권에 깃든 꼭지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배었다고 느끼겠지요.

 누군가 글을 씁니다. 누군가 글을 읽습니다. 누군가 책을 만듭니다. 누군가 책을 삽니다. 오늘도 해는 뜨고 오늘도 달이 뜨며 오늘도 바람이 불고 오늘도 햇살이 비칩니다. 오늘도 개구리는 알을 깨며 왁왁 울 테며, 오늘도 왜가리는 개구리 먹이를 찾아 이 논 저 논 누빌 테지요.

 아름다운 책은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책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삶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4344.4.30.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