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이야기 2011.봄 - 12호
한살림 엮음 / 한살림(월간지)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내 삶은 어디에 어떻게 있습니까
 [책읽기 삶읽기 47] 한살림 펴냄,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



 거룩한 자연이나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있습니다.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춤을 추건 노래를 하건 영화를 하건 …… 멀리멀리 돌아다니면서 이야깃거리를 살피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도시 한켠에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습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또 춤이든 노래이든 영화이든, 거의 모두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즐깁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즐기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거의 없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나 도시에서 누리거나 즐긴다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 또한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살아가며 언제나 마주하는 살가운 자연 터전을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았을 때에, 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오롯이 알아채거나 느끼는 도시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 눈길로 쓴 글과 그린 그림과 찍은 사진’을 알아볼 뿐입니다. 도시사람으로서 시골사람이 시골사람 삶에 따라 시골사람 눈길로 일군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알아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문화나 예술에는 나라나 겨레가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문화나 예술에는 나라나 겨레가 따로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있습니다. 문화나 예술에는 삶이 따로 있습니다. 저마다 꾸리는 삶에 따라 문화나 예술이 달라집니다. 저마다 꾸리는 삶에 따라 교육과 정치가 달라집니다. 저마다 꾸리는 삶에 따라 종교와 사회가 달라집니다.


.. 요즈음 우리가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콩은 그 원산지가 만주와 한반도이다. 미국은 1901년부터 1976년 사이에 한국에서 5천 496점이나 되는 재래종 콩을 수집하여 갔다. 그 가운데 미국의 일리노이 대학에만도 남한 재래종 3천 483점 북한 재래종 78점 등 3천 561점이나 된다. 이는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콩 유전자원 1만 8천 905점의 18.8%나 된다 … 우리 나라 콩의 유전자로 미국은 콩 178품종을 육종했다. 이것은 미국이 육종한 466개 콩 품종의 38.2%나 된다. 미국이 콩을 육종하는 데 중국, 한국, 일본에서 가져간 35품종이 95%의 유전인자를 제공했고 … 미국에서 수집해 간 우리 나라의 콩 유전자원들은 1987년 이후에야 농촌진흥청 종자은행에서 대부분 다시 들여와야 했다 ..  (65쪽)


 같은 한국땅에서, 기름값 치솟는 걱정을 안 하면서 까만 자가용을 운전사 딸린 채 싱싱 모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땅에서,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이웃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땅에서, 손가락에 물이나 흙 한 번 안 묻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땅에서 재개발로 헐릴 동네 한켠 빈집 돌을 골라 텃밭을 일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땅이지만, 누군가는 가난한 벌이와 살림에 걸맞게 생협 물건을 알뜰히 즐깁니다. 같은 한국땅이라지만, 누군가는 가난한 벌이와 살림인 나머지 ‘생협은 돈있는 놈들 놀음놀이일 뿐’이라 말하고는 등을 돌립니다.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에서 빚은 문화나 예술이라서 멀리해야 하지 않습니다. 한국과 견주어 나라살림이 조그마한 베트남이나 네팔이나 라오스라 해서 한국과 견주어 문화나 예술이 덜 떨어지거나 어리숙할 수 없습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요, 한국한테는 문화선진국 같다는 미국이니까, 문화이든 예술이든 한껏 거룩하거나 드높거나 대단하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이 빚든 중국사람이 빚든 네팔사람이 빚든, 아름다운 문화는 아름답습니다. 영국사람이 일구든 덴마크사람이 일구든 나우루사람이 일구든, 사랑스러운 예술은 사랑스럽습니다.


.. 캘리포니아에서 사는 동안 사시사철 흔하게 서는 직거래 장터에 동네 마실 가듯 드나들었다. 여름이 되어 토마토 철이 시작되면 ‘가보(heirloom)’ 토마토가 장에 나온다.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초록색, 검붉은 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색깔에 모양도 울퉁불퉁, 크기도 제각각인 토마토를 보면서 처음에는 말뜻 그대로 저게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도 아닌데 토마토에 무슨 저런 이름을 붙였을까 싶었다. 알고 보니 이들이 재래종이었다. 여러 가지를 먹어 보니 맛도 조금씩 다 달랐다. 일반 토마토가 공장에서 찍어낸 듯 작고 동그란 것과 크고 둥글넓적한 것과 계란처럼 갸름한 것, 대충 이렇게 세 종류뿐이고 색은 다 똑같은 ‘토마토’색인 것에 비해 이 다양한 토마토들은 제각각 오묘한 매력으로 음식 만드는 재미, 먹는 재미를 주었다. 조금만 생각을 기울여 봐도 토마토뿐 아니라 작물들의 획일화는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  (101쪽)


 잡지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한살림에서 철에 한 번 내는 잡지인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는 모두 열두 권째 나왔고, 열두 권째에서는 ‘씨앗, 콩 심은 데 콩 났으면’을 특집으로 삼습니다. 특집으로 삼은 만큼 150쪽이 살짝 넘는 살짝 얇다 싶은 잡지 1/3을 ‘씨앗 이야기’로 가득 채웁니다. 생각해 보면, 잡지에서는 ‘특집 기획’으로만 한 권을 다 채워도 됩니다. 특집으로 삼는 기획 꼭지를 더 많이 다루거나 담을수록 잡지 알맹이가 한결 돋보이거나 빛나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생태와 환경을 다루는 잡지로 《녹색평론》이 있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있으며 《함께 사는 길》이 있습니다. 《녹색평론》은 생태환경과 정치철학을 둘러싼 지식인들 넋을 다루는 지식 잡지이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녹색연합에서 펴내는 기관지이며, 《함께 사는 길》은 환경운동연합에서 내는 기관지입니다. 《살림이야기》는 한살림에서 내는 기관지입니다. 올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이라는 작은 환경모임에서 《초록숨소리》라는 잡지를 새로 내놓습니다. 책방에서는 다루지 않고 회원한테만 보내는 잡지입니다. 모두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내 삶터가 어떠하고 내 삶은 어떠한가를 찬찬히 돌아보자는 뜻을 다룹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온갖 갈래 갖은 모양이니까, 여러 목소리로 숱한 삶을 다루는 잡지가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다만, 아직까지 몸을 더 낮추거나 마음을 더 다소곳하게 숙이는 잡지는 없다고 느낍니다. 생각뿐 아니라 삶을 함께 가다듬으려 하는 잡지는 좀처럼 태어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지식으로나 생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을 테지만, 지구별을 사랑하고 한국땅을 아끼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동무나 삶동무가 되도록 나아가는 생태환경 잡지가 있다고 말하기는 퍽 힘듭니다.


.. 산후조리는 어떻게 할 건지, 조리원은 정했는지, 도우미의 도움은 얼마간 받을 건지 등 육아휴직을 맞고 아이를 만날 때까지 별 생각 없이 쉴까 싶었더니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다 ..  (134쪽)


 아이는 환자가 아닌 어머니가 낳습니다. 아이는 어머니 혼자 밸 수 없습니다.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 혼자, 또는 여자가 도맡아서 돌볼 수 없습니다. 아이는 마냥 귀여움만 베풀어 키우는 목숨이 아닙니다. 아이는 ‘작은 어른’이나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는 ‘앞으로 수험생이 될 사람’이 아니고, ‘예비 실업자’나 ‘예비 회사원’ 또한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녹색평론》이든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든 《함께 사는 길》이든, ‘사람이 사랑을 하며 살림터를 일구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가장 크게 돌아보며 아껴야 좋을까’ 하는 대목에서는 살짝 비껴 서는지 모릅니다. 예전 정부이든 오늘 정부이든 끔찍한 막개발과 쇠삽날을 들이미니까, 이런 바보짓을 가로막으려는 일에 소매를 걷어붙이느라 바쁠 수 있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나 유전자조작 먹을거리라든지 발굽병 같은 굵직굵직한 이야깃거리에 귀가 쫑긋할 만합니다. ‘green’이든 ‘wellbeing’이든 ‘草綠’이든 ‘綠色’이든 ‘eco’이든 ‘생태’이든 ‘환경’이든 하는 자리에만 머물밖에 없는 이 나라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다른 어느 잡지보다 생태환경을 다루는 잡지라면 생각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지식조각을 많이 보여주거나 수많은 수치와 통계와 자료를 들이밀며 ‘왜 환경운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목소리를 외칠 수 있습니다만, 이에 앞서 내 삶이 먼저 튼튼히 서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는 환자가 되어 병원에서 낳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 몸이 너무 나쁘거나 힘들면 환자 대접을 받으며 병원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이를 밴 어머니는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살림집에서 따스한 사랑과 너른 믿음을 받으며’ 태어나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산후조리를 하는 까닭은 아이를 낳은 어머니 몸을 빨리 추스르는 데에도 뜻이 있지만, 오직 사랑을 받으며 홀로서기를 할 아이와 함께 살아갈 집식구로서 제 몸과 삶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후조리이든 아이키우기이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고, 어버이뿐 아니라 집식구가 다 같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집에서 식구들이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면, 조리원이든 도움이이든 부질없습니다. 아이한테는 돈으로 사랑을 사서 줄 수 없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바깥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일찍부터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길 수 없습니다.

 육아휴직이라 한다면 서너 달이나 대여섯 달이나 한두 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육아휴직이란 대여섯 해쯤 되어야 비로소 육아휴직이라 할 만합니다. 어머니 혼자만 할 육아휴직이 아니라 아버지가 함께 해야 할 육아휴직입니다.

 이쯤 되면 ‘둘 다 돈을 안 벌고 집에 붙으면 어떻게 먹고사는가?’ 하고 걱정스러워 하겠지요. 그래요,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고 사랑하면서 살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돈을 벌어 돈을 써서 집살림을 일구는 나날이 아니라, 돈을 벌지 않더라도 집살림을 일구면서 아이와 집식구를 나란히 사랑하는 나날이 되자는 뜻에서 생태환경 잡지를 냅니다.

 아이는 꼭 집에서 낳아야 하지 않습니다. 정 힘들면 아기가 돌이 안 되었어도 보육원에 맡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하고 살아가더라도, 어버이 사랑이 무엇이요, 어버이 삶이 어떠하며, 어버이가 벌어들이려는 돈을 어떤 일을 누구와 어디에서 어떻게 하면서 벌어들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흙을 일구며 살던 지난날 사람들은 아이를 논밭 둘레에 풀어 놓으면서 어버이 일을 했습니다. 아이한테 어린이집이란 논이나 밭이나 산이나 들이나 냇물이나 바다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린이집이나 어린이책도서관에서 ‘생태환경 지식을 보여주는 그림책’을 읽힙니다.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누구나 바람을 마십니다. 누구나 물로 이루어진 몸을 물을 들이키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밥도 바람도 물도 자연에서 비롯합니다. 도시는 자연이 아닙니다. 도시에서 살아야 하면 도시에서 살아야 하고,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아름답거나 빛나는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살든 밥과 바람과 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하며, 이 모든 목숨을 어루만지는 햇볕은 어떻게 아끼며 받아들여야 좋을까를 깨달아야 합니다. ‘씨앗, 콩 심은 데 콩 났으면’을 특집 기획으로 삼은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는 참 좋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씨앗 한 알을 심어 열매를 맺는 흙일꾼 이야기는 한 꼭지조차 깃들지 못했습니다. 석 달에 한 권 내는 철잡지라 한다면, 씨앗 한 알을 심어 석 달 동안 가만히 바라보면서 ‘씨앗을 심어 거두는 이야기’ 한 꼭지쯤 실을 수 있었을 텐데요. (4344.5.7.흙.ㅎㄲㅅㄱ)


― 잡지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 (한살림 펴냄,2011.3.1./5000원·정기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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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숲의 아카리 8
이소야 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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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 다른 책, 사뭇 다른 사랑, 서로 다른 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39] 이소야 유키, 《서점 숲의 아카리 (8)》



 봄에는 봄비가 옵니다. 지난주에 내린 봄비는 벼락을 이끌고 쏟아붓던 봄비였는데, 올들어 처음으로 ‘비가 이토록 쏟아지는데 춥지 않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벼락비가 지나간 뒤 참말 날이 퍽 포근합니다.

 여름에는 여름비가 옵니다. 여름비는 시골마다 알뜰히 심은 곡식과 푸성귀가 알차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비입니다. 여름비가 한꺼번에 몰아치지 않고 사나흘에 한 번씩 알맞게 내린다면, 곡식과 푸성귀는 얼마나 싱그러이 잘 자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땅에서는 여름 빗물을 알뜰히 건사해서 가뭄에 고맙게 쓰도록 마련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그저 꼭지를 틀어 수도물을 쓰면 된다고 여깁니다. 가뭄날에도 도시사람은 물을 여느 때하고 똑같이 펑펑 씁니다.

 가을에는 가을비가 옵니다. 가을비는 바야흐로 추위가 닥치니까, 겨울맞이를 잘 하렴 하고 인사를 하는 비라고 느낍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면서 집살림을 다시금 여밉니다.

 겨울비는 이제부터 꽁꽁추위로 얼어붙으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때때로 ‘겨울이라지만 너무 춥기만 하지? 살짝 녹여 볼까?’ 하는 뜻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겨울이 물러서는 겨울비는 비로소 한숨을 놓는 비가 되기도 합니다.

 철 따라 다 다른 비입니다. 철마다 새삼스러운 비예요. 빗물은 와르르 쏟아부으며 지붕을 뚫을 듯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소리없이 흩뿌리기도 합니다. 꾸준히 내리기도 하고 갑자기 퍼붓기도 합니다. 나뭇가지와 풀잎에 맺힌 빗방울은 앙증맞기도 하고 가냘프기도 합니다. 이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졸졸 흐르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이 물을 반가이 맞아들여 얻어 마십니다.


- “테라야마 씨.” “네.” “오늘 뭔가 할 얘기가 있었나요? 글귀에서 그런 느낌이 났거든요.” “예, 저, 나는 그때 아카리 씨에게 말한 것을 이제서야 후회하고 있습니다.” (55쪽)
- ‘왜 이러지? 별로 마시지 않았는데. (콜록콜록) 하아, 그때 난 아카리 씨에게 이런 기분이 들게 했던 걸까.’ (63쪽)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8권째를 읽습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8권째에는 ‘한국 서울에 새끼가게를 차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본에서 일본 책방 이야기를 다루는 《서점 숲의 아카리》인 만큼 굳이 한국에 새끼가게를 차린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책방이면 다 같은 책방이지, 일본이랑 한국이 뭐가 다르냐 할 만하거든요.

 그런데, 책방이면 다 같은 책방이라 할 때에는, 책이면 다 같은 책입니다. 이 책 저 책 따로따로 다룰 까닭이 없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 저 사람 다 같은 사람일 테니까, 숱한 사람들이 맺고 얽히면서 사랑하기도 하지만 미워하기도 하다가는 싫어하기도 하고, 애틋하게 여기기도 하는 온갖 삶을 보여줄 까닭이 없을 테지요.

 《서점 숲의 아카리》가 50권이나 100권까지 나올 수 있다면, 나중에는 중국이나 대만이나 미국이나 프랑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에까지 새끼가게를 차리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으면 어떠하랴 싶기도 합니다. 나라마다 사람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이야기가 다를 테니까요.


- ‘이거, 과연 끝날까. 일본에서는 어떻게 일했지? 나는 벌써 며칠째 제대로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 걸까. 전에는 이렇게 책이 쌓인 장소에 있으면 외롭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87쪽)


 개구리알에서 깬 올챙이가 논물에 가득합니다. 왜가리와 해오라기는 이 올챙이를 잡아먹으려고, 또 일찍 개구리가 된 녀석들을 잡아먹으려고, 논가에 자주 찾아옵니다. 왜가리와 해오라기뿐 아니라 까치나 멧비둘기나 까마귀도 논을 드나듭니다. 장끼와 까투리도 드나듭니다. 올빼미와 뻐꾸기도 드나들 테지요.

 시골자락에서는 시골자락에 깃든 새들답게 시골에서 얻을 먹이를 찾아다니며 숨을 잇고 보금자리를 돌보며 새끼를 까는 멧새입니다. 도시에서라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새들답게 도시에서 얻을 먹이를 찾아다니며 숨을 이을 도시새가 되겠지요.

 어느 쪽이 더 새다운 새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디에서든 새는 새일 테니까요. 어디에 살든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며,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은 다 한동아리 사람입니다. 아무리 매캐한 바람이 부는 도시라 하더라도, 푸나무는 용케 말라죽지 않습니다. 사람이든 새이든 쥐이든 뭐이든, 시끄러우며 어지럽고 시멘트로 흙이 다 덮인 곳에서 용케 살아냅니다.

 가만히 보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책을 읽으면, 책은 그예 지식조각이 될밖에 없겠구나 싶습니다. 책은 종이로 만들고, 종이는 나무를 베어 만듭니다. 도시에는 나무가 없을 뿐더러,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드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도시에는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종이로 만드는 책에 실을 알맹이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 “테라야마 씨, 왜 그렇게 기뻐 보여요?” “예?” “첫날 사람들이 많이 왔을 때는 묘한 표정을 지었으면서.” “아니, 그게. 고객이 서서히 줄어든다는 건 책장 구성에 미진함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아직까지 개성이 부족하다고 할까? 그런 찜찜한 상태에서 계속 손님이 오는 것보다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훨씬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잘 팔릴 만한 책만 모아 둘 것이 아니라, 소규모 서점만의 개성을 표츌하고 싶어요.”  (106∼108쪽)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이야기를 버티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인 테라야마 씨는 점장이 되는 길을 걷지 않다가는, 서울 지점으로 옵니다. 테라야마 씨는 점장이든 부점장이든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책을 아끼며 책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둘레에서 테라야마 씨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테라야마 씨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책을 이만큼 잘 알며 꿰뚫는 사람이 여느 일꾼으로 머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책에 갇힌다 싶게 살아가는 모습은 그닥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책을 아끼고 사랑하되 책에 얽매이지 않아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라 하겠지요. 테라야마 씨는 틀림없이 ‘책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만, 책누리에서 일하며 책 울타리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책이 태어나서 자라는 터전’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책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겠지요.


- “아까 ‘언어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저는 결코 ‘사람을 살피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게 좋아서 어학 공부를 열심히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테라야마 씨와 저는 자라온 환경과 문화가 다르긴 하지만요, 음, 한마디로, 불안한 점이 있으면 분명하게 말로 표현해 주세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가능한 정확하게 다른 직원들에게 전달할게요. 그게 함께 일하는 거라고 전 생각해요.“  (114쪽)


 책을 읽으면서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기에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몸으로 부대끼는 사람이 책에 깃든 모든 지식을 다 알지는 못하겠지요. 나는 나대로 몸으로 부대끼며 내 슬기를 갈고닦는다지만, 내 몸을 갈고닦으면서 아름다운 책을 가까이하다 보면, 내 둘레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알뜰살뜰 갈고닦으며 아름다이 키운 슬기를 기쁘게 마주하면서 내 슬기를 한껏 북돋울 수 있습니다.

 책은 울타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책은 좋은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책은 지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책은 따스하며 넉넉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에 나오는 테라야마 씨이든 아카리 씨이든, 또 카노 씨나 시오리 씨나 모두, 아직은 어느 한쪽에 얽매인 삶에 휘둘립니다. 저마다 어떤 응어리를 안습니다. 이 응어리를 깨닫거나 알아채기는 하지만 좀처럼 풀어내거나 씻어내지 못합니다. 또는 아직 못 깨닫거나 안 알아챕니다. 깨닫기는 했어도 굳이 풀어내려 하지 않는다든지, 알아채기는 했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9권부터는 이제 슬슬 이러한 응어리를 솔솔 푸는 실타래를 조금쯤은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토록 책을 많이 읽고 책하고 둘러싸인 채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못 느낀다면, 또한 둘레에 서로서로 좋은 사람을 많이 마주하면서 하루하루 예쁘게 살아가는 데에도 좀처럼 제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서점 숲의 아카리》는 어영부영 뒤죽박죽이 되다가는 괜히 권수만 더 늘린다든지, 뻔한 사랑열매 맺는 흐름으로 마무리될까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4344.5.7.흙.ㅎㄲㅅㄱ)


― 서점 숲의 아카리 8 (이소야 유키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3.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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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5.5. 

자전거를 아직 잘 못 탄다. 그래도 자전거하고 놀면 좋아한다. 집으로 들어가기 앞서 자전거를 도서관 벽에 붙이자니까, 제가 끌겠다고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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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59 : 도서관


 모두 아홉 권으로 된 《초원의 집》은 2005년에 새롭게 한국말로 옮겨집니다. 2011년이 되어도 꾸준하게 사랑받습니다. 2005년에 새롭게 옮겨진 이 책이 2050년까지 사랑받을 수 있으면 2050년까지 이 땅에서 살아갈 숱한 어린이와 푸름이와 어른은 좋은 넋으로 좋은 터전을 일구려 하던 사람들 땀방울과 마음결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책이 2050년까지 고이 잇지 못하면서 판이 끊어진다면, 이 책을 찾아보려면 헌책방을 누비거나 도서관을 찾아야 할 테지요. 도서관에서 아홉 권 한 질을 갖추었더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많이 찾아 읽는다면, 하루하루 낡고 닳아 더 빌려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 질을 알뜰히 갖추었다지만 사람들이 거의 찾아 읽지 않는다면, ‘도서관 건물을 애써 짓기는 했지만 새로 들여올 책을 넉넉히 꽂을 새 자리를 새로 늘리지 않는 한국 도서관 모습’을 돌아볼 때에, ‘대출실적 적은 책이라는 딱지가 붙으며 버려지’고 맙니다.

 나는 우리 네 식구 살아가는 조그마한 집이 살림집이면서 도서관이라고 여깁니다. 어설프지만 어설픈 대로 살림을 꾸리며 지내는 집이요, 이 집에는 식구들이 서로 아끼거나 좋아하는 책을 얌전히 꽂고는 틈나는 대로 끄집어서 읽습니다. 한 번 읽은 뒤로 오래도록 그냥 꽂히는 책이 있을 테고, 열 번 스무 번 다시 끄집어서 읽는 책이 있을 테지요. 그저 한 번만 읽는 책이든, 수없이 다시 꺼내거나 들추는 책이든, 우리 식구한테는 반가운 책입니다. 고마운 ‘집 도서관 책’입니다.

 이제 갓 네 살을 살아가는 아이는 제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글책을 마음껏 읽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 되는 사람은 글책을 꾸준하게 장만합니다. 아이한테는 그림책을 읽히지만, 아이가 읽을 책 말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읽을 책을 하나둘 갖춥니다. 아이는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책을 읽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무얼 읽느라 이렇게 쏙 빠져들어 저랑 안 노는가 궁금해 할는지 모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떠한 책을 읽는지 저도 알고플 수 있습니다.

 아이는 앞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고 안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 스스로 글을 깨우치고 나서 퍽 여러 해가 흐른 뒤에는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읽던 책을 물려받아 읽을 수 있겠지요.

 아이가 스스로 글책을 신나게 읽을 때라면 적어도 열 해는 흘러야 합니다. 열 해가 흘러야 한다면 올해가 2011년이니 2021년은 되어야 합니다. 2005년에 새롭게 나온 《초원의 집》은 2021년에도 살아남을 만할까요. 2011년 4월 21일에 새로 나온 《성의 패러독스》(수전 핀커 씀,숲속여우비 펴냄) 같은 책은 앞으로 언제까지 사랑받으려나요. 이 나라 도서관 가운데 몇 군데에서 이 책을 살뜰히 사들여 알뜰히 건사하려나요. 국공립 도서관을 비롯해, 지자체 도서관이랑 초·중·고등학교 도서관, 또 대학교 도서관과 시골 작은 도서관에서는 《초원의 집》을 갖출까 궁금합니다. 《성의 패러독스》 같은 책을 갖출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자락 둘레에는 도서관이 없어, 우리는 우리 집을 도서관으로 삼습니다. (4344.5.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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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子 (ペ-パ-バック)
梅 佳代 / リトル·モア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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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만든 남자한테 말을 걸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5] 카요 우메(梅 佳代), 《男子》(Little More,2007)


 우리 집 첫째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어린 나날은 어떠했을까를 가만히 곱씹습니다. 이른아침부터 늦은밤까지 지치지 않으면서 엉겨붙거나 노는 품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은 이렇게 싱싱하거나 기운차게 살아간다고, 무럭무럭 자라는구나 하고 헤아려 봅니다.

 수백 가지 웃음과 눈물을 보여주는 아이입니다. 수천 가지 몸짓과 노래를 선보이는 아이입니다. 수만 가지 이야기와 꿈을 밝히는 아이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어른이 되기 앞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흙으로 일찍 돌아가곤 합니다. 누군가는 새어머니나 새아버지를 맞아들일 테지만,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이는 내 목숨이 이 땅에 설 수 없습니다. 내가 낳아 돌보는 아이 또한 나와 옆지기가 있기에 예쁘게 태어나서 고맙게 살아갑니다.

 누구나 선물덩어리이면서 보배덩어리입니다. 누구나 선물을 듬뿍 물려주면서 보배를 가득 남깁니다. 일찍 혼인해서 일찍 아이를 낳든, 조용히 혼자 살아가며 아이 없이 지내든, 어떠한 사람이더라도 나부터 내 가슴에 펄떡펄떡 뛰는 목숨이 있습니다. 이 목숨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사람과 삶과 사랑이 달라집니다. 일찍 혼인해서 아이를 열씩 낳았다지만 사람과 삶과 사랑하고는 동떨어질 수 있습니다. 짝꿍을 사귀지 않고 홀로 지내다가 앓아누워 조용히 숨을 거두더라도 사람과 삶과 사랑하고는 살가울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온몸을 사랑으로 돌본다면 나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스란히 사랑입니다. 내가 내 온마음을 믿음으로 보듬는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입니다.

 사진이란 ‘하루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습니다. 하루 동안에도 ‘때마다 다르게 살아내는’ 사람들 사랑을 담습니다.

 사진은 수백 가지 웃음과 눈물뿐 아니라 수만 가지 이야기와 꿈을 밝힙니다. 수천 가지 몸짓과 노래 또한 알알이 즐기면서 보여줍니다.

 값진 사진기로 값진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높은 이름값으로 거룩한 글을 이루지 못해요. 어마어마하다는 권력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빚지 못합니다. 사람 목숨 하나이든 사랑스러운 손길 한 번이든 살가운 삶 한 자락이든, 돈이나 이름이나 힘으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살가운 사랑으로 사람을 사귀는 예쁜 삶이란, 살가운 사랑으로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어여쁜 삶으로 마주하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값진 사진기가 아니라 ‘내 온 사랑을 담아 손에 쥔 사진기’로 담는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삶입니다.

 카요 우메(梅 佳代) 님 사진책 《男子》(Little More,2007)를 들여다봅니다. 사진책 이름이 더도 덜도 아닌 ‘남자’입니다.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남자 어린이’ 사진이 펼쳐집니다. 장난꾸러기인지 개구쟁이인지 까불이인지 철부지인지 알 길이 없는 남자 아이들 사진이 가득합니다.

 이 아이들, 이 사내 녀석들은 장난꾸러기라 할 만할까요, 개구쟁이라 할 만할까요. 사진기 앞에서 스스로 바보스러운 몸짓과 얼굴짓을 하는 요 녀석들은 까불이라 할 만한가요, 철부지라 할 만한가요.

 여자 아이라 하면 사진기 앞에서 어떤 모습 어떤 몸짓 어떤 낯빛이 될까 궁금합니다. 여자 아이라 하든 남자 아이라 하든 다 마찬가지가 될는지, 남자 아이는 남자 아이답게 남달라 보이는 모습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남자 아이나 어른은 참 바보스럽습니다. 스스로 얼마나 바보스러운 줄 모르며 바보스레 살아가는 남자 아이나 어른입니다. 무엇 하나 대단하지 않은데, 어리석게도 대단하다 생각하며 얽매이는 남자 아이나 어른입니다. 그러니까, 정치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스포츠라든지 이름값이라든지 얽매이는 남자 아이나 어른입니다. 남자가 얼마나 잘나서 ‘공차기는 남자만 하는 놀이’라고 여깁니까. 여자가 권투를 할 때에 우악스럽다거나 징그럽다고 여긴다면, 남자가 권투를 할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서로서로 신나게 두들겨패서 넋을 잃고 쓰러지면 손뼉을 치며 웃고 떠드는 남자들이란 더없이 바보요 멍텅구리입니다. 참삶을 모르고 참사랑을 모르며 참사람을 모르는 철부지요 꺼벙이입니다.

 축구선수도 밥을 먹고 권투선수도 밥을 먹습니다. 밥을 안 먹어도 될 사람은 없습니다. 축구를 못 하든 안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밥을 못 먹거나 밥을 할 줄 모른다면 큰일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든 말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밥을 못 먹거나 밥을 할 줄 모른다면 살지 못합니다.

 카요 우메 님 사진책 《男子》는 어린아이 모습을 담아 ‘남자’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어린아이 모습으로만 읽을 남자 이야기만은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남 앞에서 제 모습을 돋보이려는 이 바보스러운 남자들은 ‘사진에 찍힌 몇몇 아이만 바보스럽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아이들이 바보스러운 노릇이 아니라, ‘남자’라고 하는 목숨붙이들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짓을 하면서 바보스러운 줄 모르고 바보스러운 꼴을 되풀이하면서 제 삶을 슬프게 잊는가를 들려주는 셈입니다.

 한 마디로든 두 마디로든 세 마디로든 남자는 바보스럽습니다. 이 바보스러운 남자들이 정치 권력이나 사회 권력이나 사진 권력을 움켜쥡니다. 철없고 까부는 남자들이 평론이니 학문이니 무어니를 온통 거머쥡니다. 참말 남자들은 뭔 짓을 하는지 스스로 알기나 하겠습니까. 뭔 짓을 하는지조차 스스로 모르면서 바보짓을 하는 사람들이 곧 남자라는 목숨입니다. 슬프며 가녀린 목숨입니다. 쓸쓸하며 허전한 목숨입니다. 따순 손길과 포근한 눈길을 바라는 애처로운 목숨입니다. (4344.5.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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