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이야기 2011.봄 - 12호
한살림 엮음 / 한살림(월간지)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내 삶은 어디에 어떻게 있습니까
 [책읽기 삶읽기 47] 한살림 펴냄,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



 거룩한 자연이나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있습니다.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사진을 찍건 춤을 추건 노래를 하건 영화를 하건 …… 멀리멀리 돌아다니면서 이야깃거리를 살피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도시 한켠에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습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또 춤이든 노래이든 영화이든, 거의 모두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즐깁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즐기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거의 없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나 도시에서 누리거나 즐긴다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 또한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살아가며 언제나 마주하는 살가운 자연 터전을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았을 때에, 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오롯이 알아채거나 느끼는 도시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 눈길로 쓴 글과 그린 그림과 찍은 사진’을 알아볼 뿐입니다. 도시사람으로서 시골사람이 시골사람 삶에 따라 시골사람 눈길로 일군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알아보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문화나 예술에는 나라나 겨레가 따로 없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문화나 예술에는 나라나 겨레가 따로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있습니다. 문화나 예술에는 삶이 따로 있습니다. 저마다 꾸리는 삶에 따라 문화나 예술이 달라집니다. 저마다 꾸리는 삶에 따라 교육과 정치가 달라집니다. 저마다 꾸리는 삶에 따라 종교와 사회가 달라집니다.


.. 요즈음 우리가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콩은 그 원산지가 만주와 한반도이다. 미국은 1901년부터 1976년 사이에 한국에서 5천 496점이나 되는 재래종 콩을 수집하여 갔다. 그 가운데 미국의 일리노이 대학에만도 남한 재래종 3천 483점 북한 재래종 78점 등 3천 561점이나 된다. 이는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콩 유전자원 1만 8천 905점의 18.8%나 된다 … 우리 나라 콩의 유전자로 미국은 콩 178품종을 육종했다. 이것은 미국이 육종한 466개 콩 품종의 38.2%나 된다. 미국이 콩을 육종하는 데 중국, 한국, 일본에서 가져간 35품종이 95%의 유전인자를 제공했고 … 미국에서 수집해 간 우리 나라의 콩 유전자원들은 1987년 이후에야 농촌진흥청 종자은행에서 대부분 다시 들여와야 했다 ..  (65쪽)


 같은 한국땅에서, 기름값 치솟는 걱정을 안 하면서 까만 자가용을 운전사 딸린 채 싱싱 모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땅에서,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이웃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땅에서, 손가락에 물이나 흙 한 번 안 묻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땅에서 재개발로 헐릴 동네 한켠 빈집 돌을 골라 텃밭을 일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땅이지만, 누군가는 가난한 벌이와 살림에 걸맞게 생협 물건을 알뜰히 즐깁니다. 같은 한국땅이라지만, 누군가는 가난한 벌이와 살림인 나머지 ‘생협은 돈있는 놈들 놀음놀이일 뿐’이라 말하고는 등을 돌립니다.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에서 빚은 문화나 예술이라서 멀리해야 하지 않습니다. 한국과 견주어 나라살림이 조그마한 베트남이나 네팔이나 라오스라 해서 한국과 견주어 문화나 예술이 덜 떨어지거나 어리숙할 수 없습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요, 한국한테는 문화선진국 같다는 미국이니까, 문화이든 예술이든 한껏 거룩하거나 드높거나 대단하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이 빚든 중국사람이 빚든 네팔사람이 빚든, 아름다운 문화는 아름답습니다. 영국사람이 일구든 덴마크사람이 일구든 나우루사람이 일구든, 사랑스러운 예술은 사랑스럽습니다.


.. 캘리포니아에서 사는 동안 사시사철 흔하게 서는 직거래 장터에 동네 마실 가듯 드나들었다. 여름이 되어 토마토 철이 시작되면 ‘가보(heirloom)’ 토마토가 장에 나온다.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초록색, 검붉은 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색깔에 모양도 울퉁불퉁, 크기도 제각각인 토마토를 보면서 처음에는 말뜻 그대로 저게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보도 아닌데 토마토에 무슨 저런 이름을 붙였을까 싶었다. 알고 보니 이들이 재래종이었다. 여러 가지를 먹어 보니 맛도 조금씩 다 달랐다. 일반 토마토가 공장에서 찍어낸 듯 작고 동그란 것과 크고 둥글넓적한 것과 계란처럼 갸름한 것, 대충 이렇게 세 종류뿐이고 색은 다 똑같은 ‘토마토’색인 것에 비해 이 다양한 토마토들은 제각각 오묘한 매력으로 음식 만드는 재미, 먹는 재미를 주었다. 조금만 생각을 기울여 봐도 토마토뿐 아니라 작물들의 획일화는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  (101쪽)


 잡지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한살림에서 철에 한 번 내는 잡지인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는 모두 열두 권째 나왔고, 열두 권째에서는 ‘씨앗, 콩 심은 데 콩 났으면’을 특집으로 삼습니다. 특집으로 삼은 만큼 150쪽이 살짝 넘는 살짝 얇다 싶은 잡지 1/3을 ‘씨앗 이야기’로 가득 채웁니다. 생각해 보면, 잡지에서는 ‘특집 기획’으로만 한 권을 다 채워도 됩니다. 특집으로 삼는 기획 꼭지를 더 많이 다루거나 담을수록 잡지 알맹이가 한결 돋보이거나 빛나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생태와 환경을 다루는 잡지로 《녹색평론》이 있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가 있으며 《함께 사는 길》이 있습니다. 《녹색평론》은 생태환경과 정치철학을 둘러싼 지식인들 넋을 다루는 지식 잡지이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녹색연합에서 펴내는 기관지이며, 《함께 사는 길》은 환경운동연합에서 내는 기관지입니다. 《살림이야기》는 한살림에서 내는 기관지입니다. 올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이라는 작은 환경모임에서 《초록숨소리》라는 잡지를 새로 내놓습니다. 책방에서는 다루지 않고 회원한테만 보내는 잡지입니다. 모두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내 삶터가 어떠하고 내 삶은 어떠한가를 찬찬히 돌아보자는 뜻을 다룹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온갖 갈래 갖은 모양이니까, 여러 목소리로 숱한 삶을 다루는 잡지가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다만, 아직까지 몸을 더 낮추거나 마음을 더 다소곳하게 숙이는 잡지는 없다고 느낍니다. 생각뿐 아니라 삶을 함께 가다듬으려 하는 잡지는 좀처럼 태어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지식으로나 생각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을 테지만, 지구별을 사랑하고 한국땅을 아끼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동무나 삶동무가 되도록 나아가는 생태환경 잡지가 있다고 말하기는 퍽 힘듭니다.


.. 산후조리는 어떻게 할 건지, 조리원은 정했는지, 도우미의 도움은 얼마간 받을 건지 등 육아휴직을 맞고 아이를 만날 때까지 별 생각 없이 쉴까 싶었더니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다 ..  (134쪽)


 아이는 환자가 아닌 어머니가 낳습니다. 아이는 어머니 혼자 밸 수 없습니다.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 혼자, 또는 여자가 도맡아서 돌볼 수 없습니다. 아이는 마냥 귀여움만 베풀어 키우는 목숨이 아닙니다. 아이는 ‘작은 어른’이나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는 ‘앞으로 수험생이 될 사람’이 아니고, ‘예비 실업자’나 ‘예비 회사원’ 또한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녹색평론》이든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든 《함께 사는 길》이든, ‘사람이 사랑을 하며 살림터를 일구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가장 크게 돌아보며 아껴야 좋을까’ 하는 대목에서는 살짝 비껴 서는지 모릅니다. 예전 정부이든 오늘 정부이든 끔찍한 막개발과 쇠삽날을 들이미니까, 이런 바보짓을 가로막으려는 일에 소매를 걷어붙이느라 바쁠 수 있습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나 유전자조작 먹을거리라든지 발굽병 같은 굵직굵직한 이야깃거리에 귀가 쫑긋할 만합니다. ‘green’이든 ‘wellbeing’이든 ‘草綠’이든 ‘綠色’이든 ‘eco’이든 ‘생태’이든 ‘환경’이든 하는 자리에만 머물밖에 없는 이 나라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다른 어느 잡지보다 생태환경을 다루는 잡지라면 생각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지식조각을 많이 보여주거나 수많은 수치와 통계와 자료를 들이밀며 ‘왜 환경운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목소리를 외칠 수 있습니다만, 이에 앞서 내 삶이 먼저 튼튼히 서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는 환자가 되어 병원에서 낳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 몸이 너무 나쁘거나 힘들면 환자 대접을 받으며 병원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이를 밴 어머니는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살림집에서 따스한 사랑과 너른 믿음을 받으며’ 태어나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산후조리를 하는 까닭은 아이를 낳은 어머니 몸을 빨리 추스르는 데에도 뜻이 있지만, 오직 사랑을 받으며 홀로서기를 할 아이와 함께 살아갈 집식구로서 제 몸과 삶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산후조리이든 아이키우기이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고, 어버이뿐 아니라 집식구가 다 같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집에서 식구들이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면, 조리원이든 도움이이든 부질없습니다. 아이한테는 돈으로 사랑을 사서 줄 수 없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바깥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일찍부터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길 수 없습니다.

 육아휴직이라 한다면 서너 달이나 대여섯 달이나 한두 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육아휴직이란 대여섯 해쯤 되어야 비로소 육아휴직이라 할 만합니다. 어머니 혼자만 할 육아휴직이 아니라 아버지가 함께 해야 할 육아휴직입니다.

 이쯤 되면 ‘둘 다 돈을 안 벌고 집에 붙으면 어떻게 먹고사는가?’ 하고 걱정스러워 하겠지요. 그래요,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고 사랑하면서 살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돈을 벌어 돈을 써서 집살림을 일구는 나날이 아니라, 돈을 벌지 않더라도 집살림을 일구면서 아이와 집식구를 나란히 사랑하는 나날이 되자는 뜻에서 생태환경 잡지를 냅니다.

 아이는 꼭 집에서 낳아야 하지 않습니다. 정 힘들면 아기가 돌이 안 되었어도 보육원에 맡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하고 살아가더라도, 어버이 사랑이 무엇이요, 어버이 삶이 어떠하며, 어버이가 벌어들이려는 돈을 어떤 일을 누구와 어디에서 어떻게 하면서 벌어들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흙을 일구며 살던 지난날 사람들은 아이를 논밭 둘레에 풀어 놓으면서 어버이 일을 했습니다. 아이한테 어린이집이란 논이나 밭이나 산이나 들이나 냇물이나 바다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린이집이나 어린이책도서관에서 ‘생태환경 지식을 보여주는 그림책’을 읽힙니다.

 누구나 밥을 먹습니다. 누구나 바람을 마십니다. 누구나 물로 이루어진 몸을 물을 들이키면서 목숨을 잇습니다. 밥도 바람도 물도 자연에서 비롯합니다. 도시는 자연이 아닙니다. 도시에서 살아야 하면 도시에서 살아야 하고,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아름답거나 빛나는 삶을 일굴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살든 밥과 바람과 물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하며, 이 모든 목숨을 어루만지는 햇볕은 어떻게 아끼며 받아들여야 좋을까를 깨달아야 합니다. ‘씨앗, 콩 심은 데 콩 났으면’을 특집 기획으로 삼은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는 참 좋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씨앗 한 알을 심어 열매를 맺는 흙일꾼 이야기는 한 꼭지조차 깃들지 못했습니다. 석 달에 한 권 내는 철잡지라 한다면, 씨앗 한 알을 심어 석 달 동안 가만히 바라보면서 ‘씨앗을 심어 거두는 이야기’ 한 꼭지쯤 실을 수 있었을 텐데요. (4344.5.7.흙.ㅎㄲㅅㄱ)


― 잡지 ‘살림이야기’ 2011년 봄호 (한살림 펴냄,2011.3.1./5000원·정기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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