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숲의 아카리 8
이소야 유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다 다른 책, 사뭇 다른 사랑, 서로 다른 사람
 [만화책 즐겨읽기 39] 이소야 유키, 《서점 숲의 아카리 (8)》



 봄에는 봄비가 옵니다. 지난주에 내린 봄비는 벼락을 이끌고 쏟아붓던 봄비였는데, 올들어 처음으로 ‘비가 이토록 쏟아지는데 춥지 않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벼락비가 지나간 뒤 참말 날이 퍽 포근합니다.

 여름에는 여름비가 옵니다. 여름비는 시골마다 알뜰히 심은 곡식과 푸성귀가 알차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비입니다. 여름비가 한꺼번에 몰아치지 않고 사나흘에 한 번씩 알맞게 내린다면, 곡식과 푸성귀는 얼마나 싱그러이 잘 자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땅에서는 여름 빗물을 알뜰히 건사해서 가뭄에 고맙게 쓰도록 마련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그저 꼭지를 틀어 수도물을 쓰면 된다고 여깁니다. 가뭄날에도 도시사람은 물을 여느 때하고 똑같이 펑펑 씁니다.

 가을에는 가을비가 옵니다. 가을비는 바야흐로 추위가 닥치니까, 겨울맞이를 잘 하렴 하고 인사를 하는 비라고 느낍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면서 집살림을 다시금 여밉니다.

 겨울비는 이제부터 꽁꽁추위로 얼어붙으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때때로 ‘겨울이라지만 너무 춥기만 하지? 살짝 녹여 볼까?’ 하는 뜻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겨울이 물러서는 겨울비는 비로소 한숨을 놓는 비가 되기도 합니다.

 철 따라 다 다른 비입니다. 철마다 새삼스러운 비예요. 빗물은 와르르 쏟아부으며 지붕을 뚫을 듯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소리없이 흩뿌리기도 합니다. 꾸준히 내리기도 하고 갑자기 퍼붓기도 합니다. 나뭇가지와 풀잎에 맺힌 빗방울은 앙증맞기도 하고 가냘프기도 합니다. 이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졸졸 흐르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이 물을 반가이 맞아들여 얻어 마십니다.


- “테라야마 씨.” “네.” “오늘 뭔가 할 얘기가 있었나요? 글귀에서 그런 느낌이 났거든요.” “예, 저, 나는 그때 아카리 씨에게 말한 것을 이제서야 후회하고 있습니다.” (55쪽)
- ‘왜 이러지? 별로 마시지 않았는데. (콜록콜록) 하아, 그때 난 아카리 씨에게 이런 기분이 들게 했던 걸까.’ (63쪽)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8권째를 읽습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8권째에는 ‘한국 서울에 새끼가게를 차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본에서 일본 책방 이야기를 다루는 《서점 숲의 아카리》인 만큼 굳이 한국에 새끼가게를 차린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책방이면 다 같은 책방이지, 일본이랑 한국이 뭐가 다르냐 할 만하거든요.

 그런데, 책방이면 다 같은 책방이라 할 때에는, 책이면 다 같은 책입니다. 이 책 저 책 따로따로 다룰 까닭이 없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 저 사람 다 같은 사람일 테니까, 숱한 사람들이 맺고 얽히면서 사랑하기도 하지만 미워하기도 하다가는 싫어하기도 하고, 애틋하게 여기기도 하는 온갖 삶을 보여줄 까닭이 없을 테지요.

 《서점 숲의 아카리》가 50권이나 100권까지 나올 수 있다면, 나중에는 중국이나 대만이나 미국이나 프랑스나 스웨덴 같은 나라에까지 새끼가게를 차리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으면 어떠하랴 싶기도 합니다. 나라마다 사람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이야기가 다를 테니까요.


- ‘이거, 과연 끝날까. 일본에서는 어떻게 일했지? 나는 벌써 며칠째 제대로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 걸까. 전에는 이렇게 책이 쌓인 장소에 있으면 외롭다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87쪽)


 개구리알에서 깬 올챙이가 논물에 가득합니다. 왜가리와 해오라기는 이 올챙이를 잡아먹으려고, 또 일찍 개구리가 된 녀석들을 잡아먹으려고, 논가에 자주 찾아옵니다. 왜가리와 해오라기뿐 아니라 까치나 멧비둘기나 까마귀도 논을 드나듭니다. 장끼와 까투리도 드나듭니다. 올빼미와 뻐꾸기도 드나들 테지요.

 시골자락에서는 시골자락에 깃든 새들답게 시골에서 얻을 먹이를 찾아다니며 숨을 잇고 보금자리를 돌보며 새끼를 까는 멧새입니다. 도시에서라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새들답게 도시에서 얻을 먹이를 찾아다니며 숨을 이을 도시새가 되겠지요.

 어느 쪽이 더 새다운 새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디에서든 새는 새일 테니까요. 어디에 살든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며,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은 다 한동아리 사람입니다. 아무리 매캐한 바람이 부는 도시라 하더라도, 푸나무는 용케 말라죽지 않습니다. 사람이든 새이든 쥐이든 뭐이든, 시끄러우며 어지럽고 시멘트로 흙이 다 덮인 곳에서 용케 살아냅니다.

 가만히 보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동안 책을 읽으면, 책은 그예 지식조각이 될밖에 없겠구나 싶습니다. 책은 종이로 만들고, 종이는 나무를 베어 만듭니다. 도시에는 나무가 없을 뿐더러,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드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도시에는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종이로 만드는 책에 실을 알맹이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 “테라야마 씨, 왜 그렇게 기뻐 보여요?” “예?” “첫날 사람들이 많이 왔을 때는 묘한 표정을 지었으면서.” “아니, 그게. 고객이 서서히 줄어든다는 건 책장 구성에 미진함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아직까지 개성이 부족하다고 할까? 그런 찜찜한 상태에서 계속 손님이 오는 것보다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훨씬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잘 팔릴 만한 책만 모아 둘 것이 아니라, 소규모 서점만의 개성을 표츌하고 싶어요.”  (106∼108쪽)


 만화책 《서점 숲의 아카리》 이야기를 버티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인 테라야마 씨는 점장이 되는 길을 걷지 않다가는, 서울 지점으로 옵니다. 테라야마 씨는 점장이든 부점장이든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책을 아끼며 책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둘레에서 테라야마 씨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테라야마 씨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책을 이만큼 잘 알며 꿰뚫는 사람이 여느 일꾼으로 머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책에 갇힌다 싶게 살아가는 모습은 그닥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책을 아끼고 사랑하되 책에 얽매이지 않아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라 하겠지요. 테라야마 씨는 틀림없이 ‘책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만, 책누리에서 일하며 책 울타리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책이 태어나서 자라는 터전’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책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겠지요.


- “아까 ‘언어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저는 결코 ‘사람을 살피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게 좋아서 어학 공부를 열심히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테라야마 씨와 저는 자라온 환경과 문화가 다르긴 하지만요, 음, 한마디로, 불안한 점이 있으면 분명하게 말로 표현해 주세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가능한 정확하게 다른 직원들에게 전달할게요. 그게 함께 일하는 거라고 전 생각해요.“  (114쪽)


 책을 읽으면서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기에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몸으로 부대끼는 사람이 책에 깃든 모든 지식을 다 알지는 못하겠지요. 나는 나대로 몸으로 부대끼며 내 슬기를 갈고닦는다지만, 내 몸을 갈고닦으면서 아름다운 책을 가까이하다 보면, 내 둘레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알뜰살뜰 갈고닦으며 아름다이 키운 슬기를 기쁘게 마주하면서 내 슬기를 한껏 북돋울 수 있습니다.

 책은 울타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책은 좋은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책은 지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책은 따스하며 넉넉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에 나오는 테라야마 씨이든 아카리 씨이든, 또 카노 씨나 시오리 씨나 모두, 아직은 어느 한쪽에 얽매인 삶에 휘둘립니다. 저마다 어떤 응어리를 안습니다. 이 응어리를 깨닫거나 알아채기는 하지만 좀처럼 풀어내거나 씻어내지 못합니다. 또는 아직 못 깨닫거나 안 알아챕니다. 깨닫기는 했어도 굳이 풀어내려 하지 않는다든지, 알아채기는 했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서점 숲의 아카리》 9권부터는 이제 슬슬 이러한 응어리를 솔솔 푸는 실타래를 조금쯤은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토록 책을 많이 읽고 책하고 둘러싸인 채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못 느낀다면, 또한 둘레에 서로서로 좋은 사람을 많이 마주하면서 하루하루 예쁘게 살아가는 데에도 좀처럼 제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서점 숲의 아카리》는 어영부영 뒤죽박죽이 되다가는 괜히 권수만 더 늘린다든지, 뻔한 사랑열매 맺는 흐름으로 마무리될까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4344.5.7.흙.ㅎㄲㅅㄱ)


― 서점 숲의 아카리 8 (이소야 유키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3.25./42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