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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 한 잔과 책 한 권


 어제까지 여드레 동안 천막농성터에서 하루를 보냈더니 몸이 파김치가 됩니다. 그러나 농성터를 떠날 수 없어서 온몸이 찌뿌둥하고 쑤셔도 꾹 참고 버티었습니다. 천막농성 아흐레가 되는 오늘은 잠깐 숨을 돌립니다. 앞으로 싸워야 할 날도 긴데, 벌써부터 나가떨어지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다른 분들이 좀더 애써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늦잠도 자고 머리도 감고 책도 읽고 글도 끄적입니다. 천막농성에 앞서도 집일은 돌볼 수 없었기에 집안은 온통 어지럽고 먼지가 소복히 앉았습니다. 모처럼 하루 얻은 말미에 마루를 쓸고 행주를 빨아 몇 군데나마 닦고 치우고 합니다. 아직 손이 시리니 빨래는 한 점만 해서 볕바른 마당에 내어겁니다. 고뿔 걸린 옆지기 먹을거리를 마련해 준 다음 제 먹을거리를 챙기고,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일손을 잡습니다. 일하다 쉬고 또 일하다 쉬니 어느덧 저녁 아홉 시. 오늘은 아직 땅을 못 밟았구나 싶어서 장바구니 하나 들고 길거리로 나옵니다. 어기적어기적 걷습니다. 동네 한복판 꿰뚫으려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천막농성터는 불빛이 환합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복닥복닥.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군요. 살짝 들어가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인사 한 번에 끌려들어가 한참 앉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마음으로만 꾸벅 절을 하고 스쳐 지나갑니다.

 천막농성터에서 15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구멍가게에 갑니다. 구멍가게 할배는 누군가와 전화를 나눕니다. 할배 자리 옆으로 맥주병이 셋 놓여 있습니다. 가게 앞에 늙수그레 아저씨 둘이 담배를 태웁니다. 세 분이서 느즈막한 때에 술 한잔 걸치시는군요. 그러면 나도 한잔 걸칠까? 맥주 한 병, 우유 작은 것 하나, 과자 하나, 라면 하나, 이렇게 해서 3300원. 구멍가게 할배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두리번두리번 가게를 둘러봅니다. 종합선물세트가 보여서 요새는 이렇게 나오는구나 싶어 만지작거립니다. “그래, 손님이 있어서.” 하면서 구멍가게 할배는 전화를 끊습니다. “그거 사시게? 그거 가져가면 칠천 원에 줄게. 본전치기로. 원래 만 원인데.” 하고 말씀합니다. 살 마음이 없고, 지금은 주머니에 돈도 없습니다. “아니요, 그냥 어떤 건가 구경해 보려고요.”

 주머니에 돈이 조금 있었다면, “아이구 할아버지, 본전치기 하면 뭐가 남는다고요. 그냥 만 원 받으시면 되지요.” 하고 말하면서 사들었을지 모릅니다. 요것 하나 사들고 천막에 살짝 들러서, “애 많이 쓰십니다. 종합선물세트 하나 가져왔습니다!” 하고 내놓았겠지요.

 주머니에는 돈 오천 원. 1700원이 남습니다. 맥주 한 병이 1600원이고 소주 한 병이 1100원, 막걸리는 1000원인데, 한 병 더 살까? 이래저래 망설입니다. 아니다, 한 병만 하자. 내가 술꾼도 아니고. 벌이도 없는 형편에 무슨 두 병까지. 두 병을 마시면 석 병을 마시고 싶어지고, 석 병을 마시면 넉 병 닷 병을 마시고 싶어지지 않겠나. 딱 한 병으로 끝내야지. 가볍게, 아쉬움이 남게.

 “거기, 바구니에 담으시게?” “네, 여기에 담으면 돼요.” 이렇게 값을 치르고 물건을 바구니에 넣습니다. 밖에서 담배 태우던 어르신들은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습니다. 오늘 세 분은 무슨 일로 모였을까 모릅니다만, 틈틈이 만나는 옛동무일 수 있을 테지요. 집으로 와서야 떠오르는 생각인데, 그 어르신들한테도 인사를 하면서(서로 동네 이웃일 수 있으니), “몸 튼튼히 잘 지내셔요. 올해도 복 많이 받으시구요!” 하고 인사를 건넬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오늘은 쉬어 주어야 하는 날입니다. 내일 새벽에 천막농성터에 다시 나가 보려면. 또 내일뿐 아니라 모레도 있어요. 모레뿐 아니라 글피도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날은 깁니다. 우리라고 해 보아야, 이곳, 조그마한 동네입니다만, 젊은이는 거의 없고 거의 모두 할매와 할배 투성이인 이곳 조그맣고 조용한 동네를 앞으로도 이 모습 이대로 간직하면서 서로 어깨동무하고 즐겁게 살아갈 터전으로 가꾸고 싶은 마음으로 싸우자면, 오늘 하루 말미에는 푹 쉬고 힘을 다시 채워야 합니다. 우리 동네에는 너비 50∼70미터짜리 산업도로도 들어설 까닭이 없고, 이런 산업도로가 아닌 간선도로라도 들어설 일이 없습니다. 들어서야 한다면, 오순도순 어울릴 이웃집입니다. 이웃과 동무가 느긋하게 모여앉아서 이야기도 나누고 느긋하게 쉴 수 있는 터전입니다. 때로는 술 한 잔이 아닌 책 한 권으로 저녁나절을 보낼 수 있도록, 동네 도서관을 조촐하게 마련해야 합니다. 동네 한복판에 ‘산업도로 아닌 간선도로’가 나더라도 동네는 두 동강이 납니다. 찻길은 24시간 뻥 뚫려 있고, 건널목 신호등은 이곳과 저곳을 남남이 되도록 합니다. 여태껏 걱정없이 걸어다니던 길을 자동차에 치이고 밀리면서 다녀야 하겠습니까. 이제껏 자전거로 넉넉히 다니던 길을 배기가스 맡으며 빵빵빵 경적질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골목길에서도 자동차는 다닙니다. 그러나 골목길에서는 누구보다도 사람이 임자입니다. 자전거가 임자입니다. 어린이와 할배 할매가 임자입니다. 그렇지만 이 골목길이 찻길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640미리 보리술 한 병 값 1600원. 헌책방에서 사들이는 조그마한 책 하나 값 1500원, 또는 2000원. 조금 도톰한 책은 3000원, 또는 4000원. 하루 한 병 마음을 풀고 머리를 식히면서 마시는 술. 하루 한 권 마음을 덥히고 머리를 채우면서 읽는 책. 마음을 풀고 머리를 식히는 데에는 1600원짜리 보리술 하나도 좋고 1100원짜리 소주도 좋고 1000원짜리 막걸리도 좋습니다. 마음을 덥히고 머리를 채우는 데에는 1500원짜리 헌책 하나도 좋고, 2000원짜리 헌책 하나도 좋으며, 5000원짜리 손바닥책 새것 하나도 좋아요. 맥주 두어 병 값이면 새책 한 권 값. 맥주 한병 값이면 헌책 한 권 값. 다만, 제법 값이 나가는 헌책도 있고, 요사이(나온 지 몇 해 안 되는 책) 나온 헌책은 6000원도 하고 7000원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루에 술 한 병으로 흥얼흥얼 마음이 풀어지고, 하루에 책 한 권으로 우썩우썩 마음이 자란다면, 이 하나만으로도 하루 마무리는 쏠쏠하지 않습니까? (4341.3.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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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테러리스트 - 앙굴리말라 이야기
사티쉬 쿠마르 지음, 이한중 옮김 / 달팽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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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부처와 테러리스트
- 글 : 사티쉬 쿠마르
- 옮긴이 : 이한중
- 펴낸곳 : 달팽이(2005.1.27.)
- 책값 : 6500원



 이 책 하나 35 ― 바보 기자와 어리석은 공무원한테 책 선물
 : 사티쉬 쿠마르, 《부처와 테러리스트》를 읽고



 (1) 기자와 공무원


 월요일인 어제, 2월 25일 아침 아홉 시 사십팔 분, 연합뉴스 인천지사에서 일하는 기자한테서 전화가 옵니다. 이분이 쓴 ‘배다리 산업도로 공사재개’ 기사가 오로지 인천시에서 보도자료로 돌린 글에 바탕을 두고 쓰느라, 주민들 목소리를 하나도 담지 않기도 했으나, 이보다도 사실관계를 찬찬히 살피지 않고 썼기에 인터넷편지로 ‘정정보도 요청’을 했어요. 기자는 자기가 주민 목소리를 담지 않은 대목과, 자기가 쓴 기사와는 달리 ‘인천시가 주민하고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않은 한편, 이야기를 나누려 애쓰지도 않았다’는 대목, 또 공사진행율을 수치로 따져서 말할 때 당신들로서는 그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대목 들을 말합니다.

 그분으로서는 고침 기사를 쓸 수는 없구나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전화 한 통 넣어 주니 고맙습니다. 우리 동네 한복판, 아니 인천이라는 곳이 지금 모습으로 자리잡는 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온 오래된 서민 동네 한복판에 너비 50∼7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를 우격다짐으로 뚫어내겠다고 하는 인천시 공무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우리 동네 사람들하고 ‘그래, 무엇이 문제냐?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안다, 안다. 그대가 누군지 안다. 하지만 그대는 내가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죽어 줄 수 있다는 걸 모르는가?” 부처는 잠시 한숨을 돌리더니 말했다. “난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죽는 것은 아무도 해롭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이는 건? 남들을 죽이니 어떤 기분이 들지, 앙굴리말라? 죽이는 것에 관해 자신의 감정을 깊이 한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  (25쪽)


 공무원은 누구 때문에 일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공무원은 어디에서 일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공무원은 왜 일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봅니다. 공무원이 되면 ‘먹고살기 힘든 요즘 세상에 안정된 일자리와 넉넉한 노후보장’이 되니 좋은가요. 위에서 내려보낸 일을 말없이 따르기만 하면 되는가요.

 관청 어느 곳마다 ‘민원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민원실’에서는 어떤 ‘주민 목소리’를 듣고 고치려고 하는지요. 주민들이 살기 팍팍하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한테 있어야 할 것은 수천 억이나 수 조에 이르는 돈을 쏟아부으며 새로 닦는 찻길이 아닌데, 그 어마어마한 돈을 우리 주머니에서 뽑아낸 세금으로 닦을 까닭이 없는데, 그 엄청난 돈으로는 지역 문화를 북돋우고 지역 사회를 가꾸고 지역 복지와 교육을 일으키는 데에 써야 할 텐데, 이런 목소리는 ‘민원’이 아니라고 여겨서 입 닫고 귀 막고 눈 감고 있어도 되는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보다 찻길이 더 많은 세상이 되어 버리면, 사람이 걱정없이 걸어다닐 길이 아니라 주차장만 잔뜩잔뜩 만들어 버리면, 우리들이 이 땅에 목숨붙이 하나로 태어난 보람과 기쁨은 어디에서 어떻게 맛볼 수 있을는지요.


.. “사랑의 힘을 발휘해 보라. 본성의 힘은 칼의 힘보다 강하다. 사랑의 힘은 그대 안에서 자라는 것인 반면, 칼의 힘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 칼의 힘은 남들의 나약함과 굴종과 무기력에 의존한다. 그러나 사랑의 힘은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주지.” ..  (32∼33쪽)


 어제 아침 연합뉴스 기자한테 전화를 받은 뒤, 부지런히 짐을 챙겨 인천시청으로 갑니다. 아침 11시에 시청 기자실에서 ‘산업도로 강행하려는 인천시를 규탄하며, 다시금 인천시장 면담을 요청’ 하는 기자회견을 하기에. 동네사람 가운데 하나이면서,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시민기자인 하나로 찾아갑니다.

 인천시청은 퍽 뻘쭘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무렵, 인천 중구에서 지금 자리로 옮겨 왔는데, 그때에나 이제에나 교통 편이 아주 나쁩니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아요. 더욱이 버스는 시청 뒷문에 멈출 뿐입니다. 시청으로 찾아갈 때 앞이 아닌 뒤에서 버스를 내려서 찾아가도록 하는 곳이 인천 말고 다른 데에 또 있을까요?

 옆지기가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하기에 인천지하철을 타고 갑니다. 돌고 돌아 인천시청역에서 내리니 우람하게 지은 땅밑 건물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인천지하철에는 짐칸이 없어, 타고 오면서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고 투덜투덜거렸는데, 전철에서 내려 높직한 계단을 하염없이 밟고 오르면서, ‘지하철역 안에 이렇게 대리석으로 꾸미는 데 들어간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데?’ 하는 푸념이 끊이지 않습니다. 앉아서 다리쉼 할 자리도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 그예 큼직큼직하게 이것 꾸미고 저것 꾸미고 …… 누구한테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 건물인지.

 버스와 마찬가지로 시청 뒷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인천지하철. 시청 앞은 오로지 자가용만 몰고 가서 내리도록 짜 놓았습니다. 예전에 한 번 버스를 타고 시청 앞으로 오며 이십 분 가까이 걸었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버스정류장부터 시청 앞문까지 얼마나 멀든지.


.. “그렇다면, 지금 현재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데 어찌 미래에 행복해질 생각을 한단 말인가? 어찌 엉겅퀴 씨앗을 뿌리고 장미를 기대할 수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언전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순간이다.” ..  (42쪽)


 시청으로 들어갑니다. 가운데문은 닫혀 있습니다. 수위실과 맞닿은 왼쪽 쪽문 하나만 열립니다. 가운데에 버젓이 있는 큰문이 왜 닫혀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시청 경찰 여러 사람이 가운데에 우뚝 서서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을 샅샅이 훑어봅니다.

 기자실은 2층. 기자실로 올라가는 계단은 왼쪽으로 돌아서 가라고 합니다. 나중에 보니 가운데 계단도 있어요. 그런데 이 가운데 계단은 ‘인천시장 전용 계단’으로 느껴집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시장실에 들르려고 하니 시청 경찰 대여섯이 우리를 막아서며 ‘어디를 가느냐? 시장은 지금 밥먹으러 가고 없다’면서 붙잡습니다. 다른 경찰 하나는 ‘내려가는 계단은 저기에 있다. 저쪽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가운데에 널찍하고 좋은 계단이 있는데, 왜 구석진 곳에 조그맣게 있는 꽉 막힌 계단으로 가야 하나요?

 오늘도 지난달처럼, 또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인천시장 얼굴은 못 봅니다. 시장 비서 얼굴조차도 구경하지 못합니다. 시청 경찰 얼굴만 잔뜩 보고는 돌아서야 합니다.


.. “연꽃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연꽃은 화를 낼 줄도 모릅니다. 연꽃은 누구를 기쁘게 할지, 누구를 불쾌하게 할지 모릅니다. 연꽃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연꽃은 성인에게도 죄인에게도 기쁨을 줍니다. 인간은 왜 연꽃처럼 될 수 없을까요?” ..  (59쪽)


 기자회견 자리를 물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지기가 말합니다. ‘기자라는 사람이 다들 저런가?’ 하고. 당신도 아까 한 마디를 하려다가 참았다는데, 인천에서 인천 이야기를 쓰는 기자들이 인천 이야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태껏 배다리 산업도로 이야기가 한두 번 나오지 않았는데, 올 때마다 똑같은 대답을 해 주어야 한다’면서, 어쩜 이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씁쓸하게 웃습니다. 한 마디 대꾸합니다. “인천시장도, 인천시 공무원도 배다리에 한 번도 안 와 보지만, 기자들도 배다리에 한 번도 안 와 보잖아요. 공무원도 주민하고 만나려고 안 하지만, 기자도 주민하고 만나려 안 하잖아요.”

 허허허. 허전하고 텅 비어 가는 마음 따라 눈물이 살그머니 맺힙니다.


.. “꿀벌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며 한 번에 조금씩만 꽃 속의 꿀을 얻는다. 꿀벌이 해를 끼친다고 불평하는 꽃은 없다.” ..  (68쪽)


 기자로 일하는 분들 가운데 대학교 안 나온 사람 하나 없으리라 봅니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분들 가운데 대학교 안 나온 사람 하나 없으리라 봅니다. 선배 공무원도, 선배 기자도 학교교육 튼튼히 받고, 여러 가지 지식과 상식이 많으리라 봅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왜 이렇게밖에 일을 못할까요.

 기자든 공무원이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쉽게 일해서는 안 되는 자리일 텐데요. 책상머리에서 일해서는 안 되는 기자이자 공무원 아닌가요. 전화통만 붙들면서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기자이자 공무원 아닌가요. 어떤 정책을 꾸려나가면서, 간담회든 공청회든 설명회든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차례 이어나가면서, 또 몸소 주민을 찾아다니며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잘잘못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나요. 기사 한 줄에 자기 목숨을 걸듯 꼼꼼히 살피고, 바로 그 한 줄을 올바르게 적어내려가려는 매무새로 바삐 뛰고 움직이고 돌아다녀야 하지 않나요.

 그러나 기자와 공무원 탓만 할 수 없습니다. 이분들이 학교 다니며 배우는 동안, 이분들을 가르친 또다른 분(교사, 교수)들이 이분들을 올곧게 이끌지 못했거든요. 지식보다 삶을, 지위나 계급보다는 사람을, 돈보다는 사랑을, 권력보다는 믿음과 나눔을 섬기라는 뜻을 몸으로 곰삭이도록 다스리지 못했잖아요.


 (2) 사람과 살면서 사람을 못 보면


 새벽 한 시 오십 분에 잠에서 깹니다. 일어나서 오줌을 누고 바깥을 바라보니 온통 하얗습니다. 하얀 밤입니다. 이 하얀 밤, 언손을 녹이며 신문을 돌리고 우유를 돌리고 골목길을 비질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될까요. 소복소복 내리는 눈에 첫 발자국을 남기거나 두 번째나 세 번째 발자국을 남길 이들 얼굴은 얼마나 꽁꽁 얼어붙어서 바알갈까요.

 창가에 기대어 골목길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몇 장 찍습니다. 이 깊어가는 밤, 발자국을 하나하나 만들면서 돌아다녀 볼까. 기자들이 이 동네를 손수 밟지 않는다고 안쓰러워하지 말고 내가 이 동네를 밟으면 되니까. 공무원들이 정작 자기가 일하는 동네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기만 할 뿐 아니라 알려고도 안 하는 몸가짐을 슬퍼하지 말고 내가 이 동네를 더 알아가면 되니까.


.. “전하, 폭력은 폭력을 낳습니다. 복수와 정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어디선가 폭력이 일으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정의보다 위대합니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자비는 야만적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용서해 줄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  (57쪽)


 사흘 춥고 나흘 따뜻하다던 옛날씨는 말 그대로 옛날씨이고, 내내 춥다가 살포시 풀리려던 날씨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쌀쌀해지더니 비가 한 차례, 눈이 한 차례.

 온도가 떨어진 이 밤, 방온도는 1∼2도를 오락가락. 보일러를 돌리고 싶으나 기름이 바닥나고 있어서 살짝 한 번 돌린 뒤 끄고. 집에 도시가스가 들어온다면 보일러를 돌렸을지 모르겠다고 생각. 어쩌면, 도시가스로 불을 때는 집은 ‘기름이며 가스며 얼마나 쓰이는가를 살갗으로 못 느끼는 채 돈만 벌어서 불값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다고 자기가 잡아먹는 자원이 얼마나 되는가를 살갗으로 못 느끼지는 않을 터이나, 깊이깊이 느끼기는 어렵지 않을까. 주머니 걱정에 앞서 자원 걱정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들은 따숩게 겨울나기를 한다지만, 바로 우리들이 낳아서 기를 다음세대는 어찌하지? 기름이 바닥나고 가스도 모자랄 스무 해 뒤는, 쉰 해 뒤는 어찌하지? 우리가 낳을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은 어찌하지? 우리는 다음세대뿐 아니라 다음다음세대한테 아무런 책임을 안 지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대로도 좋고 즐겁다고 생각하며 살아도 되는지?


.. “그대의 마부가 화살에 맞았는데 그대는 누가 활을 쐈느냐고 알아보겠느냐?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어느 대장간에서 만든 것인지, 누가 만들었는지, 화살촉이 쇠로 만든 것인지 구리로 만든 것인지를 먼저 알아보겠느냐?” ..  (87쪽)


 기자회견 자리에서, 주민대책위 부위원장 아저씨와 헌책방 아주머니 한 분이 거의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에 길을 낸다고 들인 800억(이 돈은 시에서 밝힌 돈이지만, 800억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느냐 하는 내역을 공개하지 않습니다.)이 큰 돈이고 조금만 더 하면 공사가 끝나는데 왜 반대하느냐고도 말하는데, 앞으로 길게 내다보면 훌륭한 투자를 한 셈이 됩니다. 지금은 이만큼이지만, 지금 잘못된 결정을 내려서 밀어붙이면 앞으로는 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져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돈을 들여서 어떻게 보면 도심지 퍽 넓은 자리에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이 빈 자리는, 인천을 인천시장이 명품도시를 바라는 그 뜻대로 참으로 인천다운 인천 모습을 가꾸며, 인천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숲을 가꿀 수 있으며, 인천이라는 곳 역사와 문화를 살리는 데에 아름답고 훌륭하게 되쓸 수 있습니다’ 하고.

 저도 잠깐 말미를 얻어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이 산업도로 공사 예산으로 수천 억이 잡혀 있는데, 앞으로 몇 천 억을 더 들여서 세금을 더 내버리기보다는, 그 돈으로 배다리를 비롯해 이 동네 살림집을 조금만 손질하면 서울 인사동보다 멋진 문화마을로 가꿀 수 있어요. 이곳에 와서 영화를 찍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파이란〉이라든지 〈고양이를 부탁해〉라든지, 이곳은 50∼60년대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편, 인천상륙작전 때 폭탄 안 맞고 살아남은 30년대 건물도 제법 있어요. 동인천역 앞에는 옛날 양조장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 문화유산이 지금은 노래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 건물은 아파트 짓겠다고 허물면 그냥 사라져요. 다시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화유산을 그냥 노래방 건물로 있게만 해도 될까요? 인천에서 앞으로 2014년에 아시안경기를 치르며 숙소가 모자라서 아파트를 새로 지어야만 한다고 하는데, 배다리 둘레 창영동 금곡동 송림동 송현동 율목동 숭의동 도원동 화수동 화평동 들 해서, 이곳에 있는 집을 살짝살짝 고치면 얼마든지 민박으로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은 이 집 그대로 귀중한 근현대 문화유적지 터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지금 사는 대로 보람을 느끼게 하고, 이 동네는 동네대로 아시안경기 때 숙소로 쓰도록 하면서 나라밖, 인천 바깥 사람한테 인천이라는 곳이 어떠한 곳인가를 말하도록 할 수 있어요. 우리는 그런 넓고 큰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겁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굴리말라의 말이 진심이라 하더라도 카스트제도와 그의 극악무도한 행동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왜 앙굴리말라가 카스트제도를 비난해야 하는지, 그것을 왜 자기 범죄에 대한 변명거리로 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대부분의 ‘돔’ 사람들과 불가촉천민들은 법을 잘 따르지 않는가.” ..  (119∼120쪽)


 밤 두 시 반, ‘배다리를 지키는 인천시민모임’ 인터넷방에 들어가 봅니다. 어제 기자회견 자리에 와 준 기자들이 올린 기사가 너덧 올려져 있습니다. 이 깊은 밤에 잠을 쫓아가며 애쓰는 분이 있군요. 기사를 하나하나 살핍니다. 허허. 거참. 이거야 원. 기자회견문이라고 나눠 준 종이에 적힌 말을 제대로 옮겨적지도 못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뜻도 담지 못하고, 산업도로라는 길이 어떻게 주민 삶과 삶터를 무너뜨리는지를 짚어내지 못하고. 그래도 기사를 써 주기라도 했으니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하는지. 길게 한숨을 쉽니다. 찬방에 입김이 길게 뻗습니다.

 사람을 마주하며 사람을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인데. 잘못 생각했나요? 잘못 보았나요? 서로 보는 눈이 다른가요? 우리한테는 보이는 사람이, 누군가한테는 돈으로 보이나요? 우리한테는 보이는 골목집이 누구한테는 재개발 이익으로 보이나요?


 (3) 《부처와 테러리스트》라는 책


 처음 나왔을 때는 읽지 않고 지나쳤던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사티쉬 쿠마르. 요 몇 해 사이에 한국땅에서 부쩍 이름값을 높이는 인도사람. 꽤 많은 이들이 사티쉬 쿠마르를 읽습니다만, 《부처와 테러리스트》는 그다지 안 읽히는 듯합니다. 이분 사티쉬 쿠마르는 입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사는 사람이고, 지식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닙니다. 더 많은 돈이나 적은 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자기 몸뚱이로 사는 사람입니다. 돈이 아닌 온몸 부대낌과 온마음 쏟아부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먹고살자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지만, 돈이 쓰이는 곳을 살피면, ‘물건을 사는 일’입니다. 돈으로 사는 물건이 아닌 우리 손으로 만드는 물건이 된다면, 또 돈으로 사는 먹을거리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일구는 먹을거리가 된다면, 또 돈으로 사는 집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짓고 돌보는 집이 된다면, 우리한테는 ‘적은 돈’조차 아닌, ‘한푼 없어도’ 넉넉한 삶이 됩니다.


..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앙굴리말라, 내가 그걸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  (34쪽)


 국민학교였나 중학교였나, 자연인가 과학 시간인데, 아, 중학교 1학년 때로 떠오릅니다. 그때 과학(물상 시간이었지 싶습니다)을 배우는데, 첫머리에 ‘체험’ 이야기가 나왔어요. ‘과학은 실험을 거쳐 알아내는 체험’이라고. 이론으로만 따져서는 과학이 되지 못하고, 반드시 실험을 거쳐서 현실에서 이루어내야 비로소 과학으로 자리를 잡는다고.

 따지고 보면, 과학만 실험과 체험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인문학도 실험과 체험이 뒤따라야 합니다. 여성학은 어떻습니까. 환경학은 어떻습니까. 교육학과 사회학은, 예술학은 어떠한가요. 어느 학문이 실험과 체험 없이 바탕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실험과 체험, 온몸 부대낌 없이 신문기사 하나 나올 수 있습니까. 온마음 쏟아부음 없이 서민을 헤아리는 정책 하나 나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이하여 야무지게 살아가는 사람을 알아보고 이들 이야기를 기사로 다루지 못하는가요. 우리는 어찌하여 낮은자리 사람들을 헤아리며 이들이 어깨동무하고 잘살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지 못하는가요.


.. “난디니야, 나를 그저 따르기만 하지는 말아라.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말을 그냥 받아들이지는 말아라. 그것을 직접 자기 삶 속에서 시도해 보아라. 내가 말한 것이 그대의 경험, 그대만의 진실과 공명할 때에 비로소 받아들여라.” ..  (89쪽)


 이야기책 《부처와 테러리스트》는 저마다 다 다른 땅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무엇이 참으로 소중하며 가장 마음을 기울이면 좋은가 하는 물음 하나 내놓습니다. 다만, 풀이법은 내놓지 않습니다. ‘이런 길도 있느니라’ 할 뿐 ‘이 길로 가야 하지는 않느니라’ 하고 넌지시 옷소매를 잡습니다. ‘내가 간 이 길이 나한테는 좋았다고 당신도 무턱대고 이 길을 가지 말라’고 합니다. 길찾기는 저마다 다 다른 자기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 새롭게 가꾸고 일구어야 오래오래 싱그럽고 반갑고 단단할 테니까. (4341.2.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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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따뷔랭 - 작은책
장자끄 상뻬 지음,최영선 옮김 / 열린책들 / 199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이름 :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
- 글ㆍ그림 : 장 자끄 상뻬
- 옮긴이 : 최영선
- 펴낸곳 : 열린책들(1998.7.25.)
- 책값 : 6500원



 이 책 하나 37 ― 자전거를 못 타는, 또는 안 타는 당신
 : 장 자끄 상뻬,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



 (1) 자전거를 타요?


 엊그제 서울 나들이를 하며 하룻밤을 묵은 집에서, ‘서울 시내 자전거도로 안내 지도’를 보았습니다. ‘자전거길’을 알려주는 서울 시내 길그림인데, 자전거길이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진 데는 한강 한 곳뿐입니다. 다른 데에서는 자전거길이 얼마쯤 있다가도 툭툭 끊어집니다.

 ‘자전거길 길그림’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끊어지는’ 자전거길을 그려 놓은 이 길그림은 누구한테 쓸모가 있을까 하고. 자전거길이 끊임없이 끊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걱정없이 즐겁게 자전거를 타고다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 영 가시지 않는 침울함을 달래려고 따뷔랭은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는 단순한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때때로 입이 근질근질한 것을 참아 가며 그 일을 성공적으로 비밀에 붙여 왔다는 사실이 가져온 이로운 점들을 열거해 보았다. 그러나 이 방법은 효과가 없었다 ..  (91쪽)


 여러 해 앞서부터 요즈음까지, 해마다 ‘자전거 문화를 북돋운다’는 정책이 쏟아집니다. 새로운 자전거길을 닦는다며 수십 억에서 수백 억에 이르는 돈을 들인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지자체마다 ‘우리 지자체가 자전거길을 몇 km나 늘렸는가’ 하는 이야기를 자랑삼아서 내놓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로 학교나 일터를 오가는 사람들 숫자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습니다.

 값나가고 잘나가는 자전거를 장만하는 분들 숫자가 늘어납니다. 해마다 부쩍부쩍 늘어납니다. 나라밖 좋은 자전거를 수입대행 하는 분도 늘고, 몸소 나라밖에서 자전거를 사들이는 사람도 늡니다. 그러나, 자전거로 학교와 일터를 오가는 사람들 숫자 또한 그다지 안 늘어납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며, 서울로 가서 열 해 가까이 살면서, 충주로 가서 네 해쯤 살면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내처 지내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걸쳐 어떤 사람이 어떤 자전거를 타고다니는가를 살펴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철 동안 고루 자전거를 타는 분은 늘 탑니다. 비가 와도 타고 눈이 와도 탑니다. 추워도 타고 더워도 탑니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안 타는 분은 비가 와도 안 타고 눈이 와도 안 탑니다. 따뜻해도 안 타고 시원해도 안 탑니다. 다만, 운동을 삼아서 타는 분이 있습니다. 취미를 삼아서 산을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 봄이 되자 《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이라는 겸손한 제목을 단 예의 사진집과 병원에 있던 따뷔랭이 동시에 나왔다. 한 번 골절을 당해 본 팔다리가 더욱 튼튼해지듯이 따뷔랭과 피구뉴의 우정도 더욱 돈독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무의식과 오만, 영웅심리가 밑바탕에 깔린 이 영광으로 인해 기술자 양반은 영 거북했기 때문이다 ..  (80쪽)


 서울에서 충주로, 또 충주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동안 밉살맞은 자동차꾼을 꾸준히 만났습니다.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뺑소니를 하는 자동차꾼도 서너 차례 만났습니다. 이리하여 제 어깨와 팔꿈치는 여느 때에도 삐걱거리는 반편이가 되었습니다. 1998년 9월 어느 날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마치고 가벼워진 짐자전거를 몰며 신나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뒤쪽에서 자동차 한 대가 저를 와락 들이받아서 하늘에서 빙글빙글 두 바퀴를 돌다가 아스팔트 길바닥에 쿵 찧기도 했습니다. 자전거는 짜부라졌고 제 오른손목은 평생불구가 되었습니다(그래도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서 손목만 깨졌으니 죽다가 살아난 셈입니다). 그러나 저를 친 자동차꾼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 달 내내 아픈 손목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신문을 돌리니 아픔이 좀 가라앉더군요. 망가진 자전거는 신문사 지국장님이 여러 시간에 걸쳐 겨우 고쳐 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뺑소니 사고를 겪을 때마다 ‘그러니까 자전거를 타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런 죽일 놈들이 다 있나? 그래, 못 잡았어?’ 하고 화를 내 주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안 죽고 살았으니 다행이다.’ 하고 토닥여 주는 분이 있습니다. 둘레를 살피면, 자전거를 오래오래 타는 분들치고 크고작은 사고를 안 겪어 본 분이 없습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다치는 사고도 있으나, 자동차가 친 사고가 제법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 교통법은 ‘힘없는 걷는이와 자전거꾼을 지키는 쪽’으로 고쳐지거나 나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교통 얼거리는 오로지 자동차가 막히지 않고 빨리빨리 오갈 수 있는 데에만 맞춰져 있을 뿐입니다. 버스만 다니는 길은 생기지만, 자전거만 다니는 길은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걸어다녀야 하는 길을 반으로 뚝 잘라서 ‘여기에서 자전거와 사람이 함께 다니라’고 할 뿐입니다.

 그런데 거님길(인도)을 뚝 잘라서 마련한 자전거길에는 턱이 많습니다. 깨진 길이 많습니다. 가게에서 내놓은 선간판이 있고 버스정류장이 있으며 구청이나 시청 따위에서 마련해 둔 모래상자나 염화나트륨통이나 배전반이나 가로등이나 전봇대나 교통표지판 기둥이나 거리나무나 …… 자전거가 아늑하게 달릴 수 없도록 걸림돌을 잔뜩 올려놓고 있습니다.


.. “자 이제 달려 봐요!” 그러자 따뷔랭이 말했다. “어디를요?” 그리고 그는 꺼벙하게 웃기 시작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심정으로 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나, 자전거 탈 줄 몰라요!” 점점 더 화가 난 피구뉴는 그에게 소리쳤다. “그 농담 되게 웃기네요! 그러나저러나 뭘 걱정하고 그래요? 간호사와 결혼까지 한 양반이!” ..  (70쪽)


 인천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으면서 시내 구석구석을 자전거로 돌아다녀 보기도 합니다. 가까운 부천이나 서울까지 자전거로 오가기도 했습니다. 이러는 동안 찻길 형편을 헤아리니, 길마다 무단주차를 해 놓은 자동차가 가득가득입니다. 하염없이 서 있는 차를 단속하거나 치우도록 하는 교통경찰은 구경을 못합니다. 함부로 세워 놓은 차가 없는 길을 달리든, 함부로 세워 놓은 차 때문에 왼쪽으로 빙글 돌아서 가야 하든, 뒤따르는 다른 자동차들은 신나게 빵빵빵 울려댑니다. 때로는 자전거 쪽으로 큰 덩치를 밀어붙이며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다만, 자동차 100대가 자전거 옆으로 지나가면 이 가운데 10대쯤 이렇습니다. 다른 90대는 얌전히 지나가 주거나 널리 마음을 기울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그 10대 때문에 자전거로 다니기 아슬아슬하며, 목숨이 간당간당하기도 합니다. 자동차들이 자전거를 앞질러 씽하고 지나간다 한들, 도심지에서는 얼마 못 가서 신호에 걸리거나 밀려 있는 차에 막혀서 ‘저(자전거)’하고 다시 만납니다. 그러면 저는 막힌 자동차 사이로 느긋하게 앞질러 가고, 자전거한테 신나게 빵빵이를 먹인 자동차가 다시 자전거 옆으로 다가올 때 또 윽박질을 하다가 차에 막히고…….


.. 요즈음처럼 자동차들로 빽빽하지 않았던 골목이나 한길에서 따뷔랭은 시험의 종류를 늘려 갔지만, 그 불굴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하지는 못했다 ..  (29쪽)


 이마부터 눈을 거쳐 입술로 흐르는 땀을 후후 불어 떨구어 내면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 딱한 자동차꾼, 지가 나를 윽박지르고 앞질러 간다고 해 보아야 몇 초나 더 빨리 간다고, 몇 초 더 빨리 가 보았자 지 앞은 꽉 막힌 자동차뿐인데.’ 그래도 자동차를 모는 분들로서는 그 몇 초 더 빨리 달릴 수 있기 때문에 당신 삶이 더욱 살찌거나 아름답게 되거나 잘살 수 있게 되나요.


 (2) 몸으로 타는 자전거


 요사이는 오래도록 자전거를 쉽니다. 지난날 여러 차례 뺑소니 사고를 입으며 다쳤던 왼어깨와 오른팔꿈치와 왼무릎까지 몹시 쑤시고 저려서 그렇습니다. 자전거를 안 타고 날마다 틈틈이 주물러 주고 몸풀이를 하고 있으나 영 나아질 낌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아프면 아픈 대로 자전거를 탈까 싶기도 한데, 자전거에 몸을 실은 지 십 분이 지나면 이를 앙다물게 되고 눈에서는 눈물이 찔끔찔끔 흐릅니다. 어깨와 팔꿈치와 무릎이 너무 아파서.

 아픈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오른어깨에 자전거를 메고 계단을 터덜터덜 밟고 올라와서 도서관 귀퉁이 한쪽에 자전거를 세워 놓습니다. 히유 한숨을 쉽니다. 어떡하나. 어떡하긴. 어쩌겠나. 또다른 내 몸뚱이로 여긴 자전거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내 몸뚱이처럼 함께하기 어려우니 떠나보내야지. 그래도 모두 떠나보낼 수는 없어서 석 대를 남기고 두 대는 아는 분한테 ‘제 몸이 나으면 돌려받을게요’ 하는 말과 함께 빌려 드립니다. 남은 석 대 가운데 한 대는 부속이 다 닳고 낡아서 못 타게 되었기에 바퀴 바람을 살짝 뺀 채 장식품처럼 세워 둡니다. 옆지기와 함께 탈 일을 생각해서 두 대만 집에 남겨 놓습니다.


.. 포르똥 영감님은 마음을 낚시 쪽으로 완전히 굳히고 가게의 경영권을 라울 따뷔랭에게 넘겨 버렸다. 따뷔랭은 잘 다린 푸른 작업복이 좋았고, 훌륭한 간호사이자 집에서는 좋은 아내인 마들렌이 준비해 주는 도시락이 좋았다. 마들렌은 남편이 걸어서 출근하는 것을 자기를 사랑하는 증거로 여겼다. (그녀는 자동차 교통량 증가로 인해 자전거가 당하는 사고가 증가한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이 불안해 하던 터였다.) ..  (49쪽)


 자전거를 못 타게 되니 자전거 모임에 얼굴 디밀기 힘들어집니다. 그래도 자전거를 아끼거나 즐겨타는 사람들은 마음이 넉넉하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바깥모임이 있으면 술이라도 한잔 함께 하고픈 마음입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이 자동차를 몰면 무턱대고 쓩쓩쓩 달리지 않고 좀더 느긋하게 차를 몰면서 자전거꾼한테 눈길 한 번 따숩게 보낼 수 있으리라 믿는 마음입니다. 골목길을 차로 몰 때에도 걷는이가 아슬아슬하지 않도록 살펴볼 줄 알겠지 하고 믿는 마음입니다. 아는 분들 자동차를 얻어타게 되면, 일부러 자전거 이야기를 꺼냅니다. 멀리 나다니지 않으신다면 접을 수 있으면서 값도 눅은 자전거 한 대를 마련해서 짐칸에 싣고 다니시면 더 좋다고, 일터나 학교까지 자전거로만 다니기 수월하지 않으면 자동차나 대중교통으로 어느 만큼 움직인 뒤, 자전거르 마무리를 지어도 좋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때로는 아침에 좀더 일찍 일어나서 느긋하게 자전거로 일터나 학교로 가노라면, 그동안 오가던 길에서 미처 못 보았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실 수 있고 느끼실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날이 풀려 따땃한 봄이 되면, 싱그러운 바람에 꽃내음을 느껴 보시라고, 잠깐 다리를 멈추고 길가 풀섶에 앉아서 풀기운과 흙기운을 맛보시라고, 그러면 일하면서 새힘이 솟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문을 걸어 봅니다.


.. 왜냐하면, 따뷔랭은 자신의 실패의 비밀을 밝혀내 보려는 희망을 가지고 자전거의 모든 부분들을 방법론적으로, 줄기차게 연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수리를 맡기기 시작했다 ..  (34쪽)


 자동차를 몰자면, 차를 새것으로든 헌것으로든 사야 합니다.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기름값이 나갑니다. 따지고 보면, 자동차를 몰기보다 날마다 택시만 타고다녀도 외려 찻삯이 남을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굳이 좋은 녀석으로 장만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만, 지금 바로 자동차와 ‘잘 가렴, 다음에는 보지 말자!’ 하고 헤어진다면, 석 달치 ‘굳는 자동차 유지삯’으로 대단히 훌륭한 자전거를 한두 대 장만할 수 있어요. 차값으로 들였던 돈은 사회에 내놓거나 시민단체에 기부를 하거나 지역도서관에 책을 사줄 수 있을 테지요.

 편도 30킬로미터 안쪽이라면, 자전거로 오가는 시간과 자동차로 오가는 시간은 그다지 벌어지지 않아요. 게다가 몸은 한결 튼튼해지지요, 찻삯이 어마어마하게 굳지요, 몸이 튼튼해지니 밥도 잘 먹고 똥도 잘 누고 얼굴에 핏기가 돌지요. 봄이면 봄을 여름이면 여름을 가을이면 가을을 겨울이면 겨울을 느끼니, 살아 있는 목숨붙이라는 느낌을 짙게 받을 수 있어요. 비기운을 눈기운을 구름기운을 바람기운을 느끼며 날마다 다른 느낌에 세상을 더 널리 껴안기도 하고요.

 몸으로 타는 자전거이니, 우리 몸에 좋은 여러 가지가 돌아옵니다. 마음으로 타는 자전거라면, 우리 마음에 좋은 여러 가지가 깃듭니다. 돈을 생각하며 타는 자전거라고 해도, 우리 살림을 아끼고 여밀 수 있으니, 이런 생각이더라도 반갑습니다.


 (3)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이라는 책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책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을 덮습니다. 여러 번 읽고 난 뒤에도 책상맡에 고이 꽂아두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책상맡에서 끄집어내 ‘자전거 갈래’ 책꽂이로 옮겨놓을 참입니다. 자리를 옮기기 앞서 한 번 더 죽 읽어 봅니다.


.. 사람들이 웃기는 사람들을 정말 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젓한 어스레함이 주는 무게를 갑자기 깨 버릴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이 웃기는 사람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둔다. 자신에게도 가슴이 있으며 이 가슴에는 영혼이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혼은 때로는 남과 함께 나누고픈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내놓고 말하고 싶어지는, 낭만이 과하게 들린 사람들이 자주 당하는 유혹을 따뷔랭도 느끼곤 했다 ..  (39쪽)


 이야기책 《자전거포 아저씨 라울 따뷔랭》에 나오는 자전거집 아저씨 ‘라울 따뷔랭’은 자전거를 못 타는 분입니다. 온힘을 다해 자전거를 타 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자전거를 못 타는 분입니다. 마지막에는 자전거를 다 뜯으며 연구를 했으나 그예 자전거를 못 타고 만 분입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깊이깊이 살피고 공부를 하는 동안 ‘자전거 수리 박사’가 되었습니다. 자전거는 못 타는 신세이지만, 누구보다도 자전거를 잘 알고 자전거를 사랑하고 자전거를 아끼고 자전거와 함께 살아가는 몸이 되었습니다.

 글쓰는 재주가 없으나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훌륭히 하는 분이 있습니다. 책 지식은 없으나 새책방이나 헌책방에서 좋은 책을 아낌없이 알아보고 두루두루 사고파는 분이 있습니다. 그림 그리고 사진 찍는 재주는 없어도 늘 그림과 사진을 곁에 두며 즐기는 분이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하셨어도 아이들을 훌륭히 가르치고 이끈 어버이가 있습니다.

 성서를 100만 번 읽었다고 하여 하느님 사랑을 고루 받을 수 있지는 않아요. 배워서 얻은 앎(지식)이 바다처럼 넓지만 남들한테 두루 베풀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동안 벌어들인 돈이 어마어마하지만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보다 세고 큰 힘(권력)을 누리지만 사랑스럽고 애틋하게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나라를 쥐고 흔드는 무기(펜, 신문, 방송, 인터넷 따위)를 가지고 있으나 더 즐겁고 아름답고 살갑고 푸진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자전거집 아저씨 ‘라울 따뷔랭’ 씨는 자전거를 탈 줄 몰라도 ‘자전거 타는 모든 이를 아끼고 사랑하며 돌보는’ 일을 자기 보람으로 여기며 웃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4341.2.24.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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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만세발가락 - 마음으로 보는 그림 같은 이야기
리타 페르스휘르 지음, 유혜자 옮김 / 두레아이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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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아빠의 만세발가락
- 글 : 리타 페르스휘르
- 옮긴이 : 유혜자
- 펴낸곳 : 두레아이들(2007.9.21.)
- 책값 : 8300원



 이 책 하나 36 ― ‘골목도시’ 인천과 ‘피카소’ 그림
 : 리타 페르스휘르, 《아빠의 만세발가락》을 읽고


 (1) 골목도시 인천과 그림


 우리 동네에 미술전시터가 한 곳 있습니다. 예전에는 부평에 자리하고 있던 곳인데, 인천 배다리 골목집을 꿰뚫으려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뜻에다가, 일흔 해 역사가 깃든 양조장 건물에 전시터를 꾸미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옮겨 온 곳입니다. 동네에 이런 전시터가 들어오니, 어슬렁어슬렁 골목길 마실을 하다가 슬그머니 들를 수 있습니다. 전시터에서는 따로 구경값을 받지 않으니 걱정없이 드나들 수 있습니다. 우리 집으로 놀러오는 손님이 있으면 ‘이럴 때 그림 예술도 맛보아야지’ 하면서 팔짱 끼고 찾아가곤 합니다.

 예전에는 인천으로 놀러오는 사람이 있으면, 배다리 헌책방골목에서 잠깐 책을 둘러보았다가 월미도를 간다든지 연안부두를 간다든지, 그냥 인하대 뒷문 쪽으로 가서 술이나 마신다든지 했습니다. 그때는 서울에도 골목길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 인천 골목길 마실을 굳이 함께하지 않았습니다만, 딱히 다른 동네 사람들한테 보여줄 만한 모습이 없다고 느꼈어요.

 번듯한(?) 건물이 있나, 바닷가 갯벌을 밟을 수 있나(지금도 갯벌은 밟을 수 없습니다. 군사철책 때문에), 널찍한 공원이나 쉼터라도 있나(이제는 인천대공원이 생겼으나 대중교통으로는 찾아가기 아주 어렵습니다).

 ‘인천 맛’이나 ‘인천 멋’을 함께 느끼고 함께 즐기고 함께 부대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을 만한 어떤 꺼리가 없었어요.






.. 리타가 말했다. “너도 대회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맛있는 소시지를 만들 수 있잖아, 안 그래?” “우리가 가는 정육점 주인은 소시지의 품질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거야.” 내가 말했다. “상장 때문에.” ..  (26쪽)


 요즈음이라고 해서 그다지 달라지거나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몇 가지 남다른 대목은 있습니다. 경제개발과는 늘 머나먼 쪽에 있던 인천이기에, 오래된 골목길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재개발이나 재건축이란 거의 없었거든요. 공장만 잔뜩 지어서 서울로 올려보내는 노릇, 또 공장 노동자로 있는 사람들이 값싸게 묵을 달동네 판자집은 숱하게 두는 노릇으로 있던 인천입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억지로 항구문을 열면서 지었던 집이 제법 남아 있기도 합니다. 1950∼60년대 자취도 두루두루 찾아볼 수 있어요. 이제는 서울 둘레 새도시 재개발이 거의 꽉 차다시피 하니, 인천까지 손을 뻗습니다만.

 한편에서는 영화를 찍기도 합니다(〈고양이를 부탁해〉, 〈파이란〉). 뮤직비디오를 찍는 무대가 되기도 합니다(〈아프고 아파도〉). 퍽 넓은 자리에(인천 중구와 동구와 남구에 걸쳐) 마흔 해나 쉰 해는 묵은 골목길과 골목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편, 서른 해 넘긴 예전 간판까지 손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지나온 우리 삶을 되짚는 영상’을 바라는 분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곳입니다. 그러나, 땅장사를 해서 목돈을 움켜쥐고 싶은 이들한테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싶은이들한테는, 유행이 아닌 물질문명 대명사가 되어버린 아파트로 숲을 이루어야 참된 도시라고 느끼는 이들한테는, 이런 옛 골목길과 골목집은 하루빨리 걷어내야 할 ‘낡고 지저분한’ 모습일 뿐입니다.


.. 다 완성된 그림을 뒤집어 공책들이 쌓여 있는 제일 아래 칸 서랍 밑에 넣었다. 그 그림은 엄마에게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면 무엇이 못생겼다는 둥,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둥,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그렸다는 둥 엄마의 따가운 질타를 듣지 않아도 된다 ..  (30쪽)


 문득, 국민학교 다닐 적 사회 시간에 배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은, 서울과 인천 교통그물이 어떠한가를 견주면서 “인천은 거미줄 가운데에서도 아주 촘촘한 거미줄과 같은 곳이야. 진짜 골목이 많거든. 아무리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인천에 와서 차를 몰면 길을 헤매지. 인천 택시기사가 서울에 가서 택시를 몰 수 있어도, 서울 택시기사가 인천에 오면 택시를 못 몰아.” 하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을 안 해도 우리들은 몸으로 느끼며 알고 있었습니다. 인천에는 마땅히 너른 터가 없고 놀이동산도 없었지만, 그다지 좁지 않으면서 잘 발돋움해 있는 골목길은 우리 모두한테는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풀과 나무와 숲은 드물었지만, 바닷가에서 배를 보거나 타고, 기찻길가에서 철길놀이를 하거나 쇠돈 납짝꿍 만들기를 하고, 늦은밤까지 숨바꼭질을 하면서 박쥐들 날갯짓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면서 살았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천이라는 도시는 지금 시장이 외치고 있는 ‘명품도시’가 아닌 ‘골목도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부터 골목도시였고 지금도 골목도시이며, 앞으로도 골목도시로 나아갈 때, 인천이라는 곳이 인천다움을 지키거나 가꾸면서 한껏 키돋움을 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처음부터 골목도시는 아니었으리라 봅니다. 개항기에는 ‘한국에서 빼앗은 물자를 일본으로 빼내는 들머리’ 구실을 해야 했고, 해방 뒤에는 ‘일제가 지은 공장과 여러 시설을 바탕으로 서울을 개발하도록 물자를 올려보내는 들머리’ 구실을 해야 했습니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싼 일삯으로 묶어 두는 ‘서울 변두리 공장 도시’로 인천이 뿌리를 내리게 되고, 이러는 가운데 ‘하꼬방’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게딱집집이 잔뜩 들어서게 되었을 테지요. 그리고 이런 역사가 한두 해도 아니고 열 해나 스무 해도 아닌 서른 해 마흔 해를 거치며, 이제는 자연스러운 인천 문화로 인천 삶으로 자리를 잡았으리라 봅니다. 이리하여 인천 옛 달동네 한켠을 쓸어내고 아파트를 올려세우면서도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이라는 곳이 서는구나 싶어요.


.. 베르트는 창문이 나 있는 머리 같은 것은 잘 그리지 못한다. 아니, 잘 그릴 수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심사위원들은 베르트가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다고 말할 것이다. 피카소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을 내면, 전에 그린 내 그림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  (49∼50쪽)


 먼 옛날에는 조용조용 사는 터전이었다가 비류백제가 뿌리를 내린 곳이었습니다(미추홀). 온조백제한테 무너지면서 흐지부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듯 했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 순사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은 뒤 숨어지내던 곳이었습니다. 이제는 권리를 되찾은 조봉암 선생이, 일제한테 짓눌렸던 우리 나라를 올곧게 일으키려고 동지를 모으고 후배를 북돋우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류백제가 무너지듯 백범 선생도 조봉암 선생도 역사에서 이슬로 스러집니다.





.. “아니, 유명한 화가의 기법으로 그린 거야.” “그렇다면 그 사람은 칼라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죠.” 내가 말했다. “그 애는 내가 말해 준 대로만 그렸으니까요. 그 사람은 스스로 생각한 것들을 더구나 유명한 화가의 기법으로 직접 그렸잖아요. 그렇게 하려면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똑같이 멋진 작품을 만들기가 어려웠을 테니까요. 사람들은 그 그림이 진짜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몰려오지 않았나요?” “거장의 ‘이름’이 적혀 있으니까 믿었던 거야.” 엄마가 말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써 있었다면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인가요?” “당연히 그렇지.” “사람들은 무엇을 감상했나요? ‘그림’이었나요, 아니면 그림 밑에 써 있는 ‘서명’이었나요?” ..  (84쪽)



 지난 토요일, 옆지기 동생과 옛동무하고 동네 미술전시터(스페이스 빔) 나들이를 갔습니다. 올해 미술대학을 마치는 인천 그림꾼들 ‘신진작가 초대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그림 보는 눈이 없고, 그림 즐길 줄 모르는 저입니다. 이번 그림잔치를 보면서도, ‘음, 음.’만 나올 뿐, 딱히 어떠한 느낌을 받지는 못합니다.

 무엇보다 제 눈높이가 낮고 눈길이 얕아서일 테지요. 어쩌면 새내기 그림꾼들 그림 눈썰미나 깊이가 조금씩 채워지고 있는 터라, 살짝 아쉬울 수 있습니다. 그저, 오즈음 그림꾼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느낌은 조금 받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저마다 자기가 발딛고 살아가는 곳에서 부대끼는 사람들 삶이 그림이나 사진이나 글로 나타나거든요.


.. 실로 뜬 테이블 보, 피아노 덮개, 양복 등에는 왜 만든 사람의 이름이 없을까?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든 이름을 쓸 자리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  (90쪽)


 지난날 이오덕 선생님이 가르치던 아이들이 그렸던 그림을 떠올려 봅니다. 연필로도 그리고 크레파스로도 그린 1960∼70년대 산골마을 아이들 그림을 떠올려 봅니다. 이 아이들 그림에는 이 아이들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습니다. 또, 저는 이 아이들과 같은 삶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예전 아이들 그림을 보며 눈물이 핑 돌곤 했어요. 동네 미술전시터에 내걸린 새내기 그림꾼들 그림에도 이 그림꾼들 삶과 생각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시에서 살고는 있어도 도시 삶을 그닥 달가워하지 않고 반기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탓에 이분들 그림이 제 마음 깊은 자리까지 못 파고들지 않나 싶습니다.


.. 난 사람들이 기도를 올려 신을 귀찮게 하는 일을 될수록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들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신도 이해해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한다면 신은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그가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를 먼저 도와줄 것이다 ..  (114쪽)


 하긴. 그러겠네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볼 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어떤 마음이겠네’ 하고 느낍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왜 그렸을까?’ 하고 묻게 됩니다.





 한 세월 두 세월 겹겹이 쌓인 인천이라는 곳은, 인천에서 뿌리를 내리며 골목도시 문화를 이루어 낸 사람들 삶이 진득하게 배어 있습니다. 이런 골목도시 문화를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이라면, 인천에 발을 디디면서 ‘이야, 참말 재미난 곳이네. 하늘나라가 따로 없어.’ 하고 웃음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목길을 도시문화나 도시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전국에서 공기와 물이 가장 더러운 곳이라더니, 영판 글러먹었군’ 하고 되뇌이지 싶습니다.

 제가 깃든 배다리 골목집 한복판에 너비 50미터짜리 산업도로를 밀어붙이려고 하는 종합건설본부 공무원 분들은 골목을 모르거나 골목을 느끼려 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2009년 도시엑스포와 2014년 아시안게임으로 이름값을 높여 뒷날 대통령 출마까지도 노리는 ㅇ 시장님은 언제나 자가용으로만 아파트에서 아파트 사이로, 큰 건물에서 다른 큰 건물 사이로만 움직이실 테니, 골목집과 골목길로 가득한 인천 삶터를 있는 그대로 돌보거나 가꾸면서 ‘참다운 명품이란 무엇이며, 인천에만 있는 명품은 무엇이고, 인천에서 돋보이도록 하면서, 사람들이 인천으로 찾아오도록 이끌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에서는 크게 놓칠 수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2) 그림 그리는 즐거움


 저도 가끔 그림을 그립니다. 그야말로 가끔 그립니다. 저는 스스로 ‘참 못 그린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좋아하니까’ 그립니다. 헌책방을 그려 보고도 싶지만, 지금은 사진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느껴서 헌책방 그림은 그리지 않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두 눈으로 더 많이 들여다보고 온몸으로 더 많이 부대끼는 가운데, ‘빈 방에 고요히 앉아서 머리속에 떠오르는 대로’ 뒷날 언젠가 헌책방 그림을 그려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 피 카 소. 엄마는 전에 그 화가가 훨씬 정상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많이 그렸었는데, 다른 기법을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미친 사람 같아요.” 내가 말했다. …… 어떻게 죽은 새 옆에 있는 소녀의 조각상은 형편없는 졸작이라고 하고, 물고기 모자를 쓴 여자의 그림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은 그런 그림을 미술관에 버젓이 걸어 두고, 할아버지 집을 지나갈 때 혹시 조각상을 살 수 없겠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 지나칠 수 있을까? ..  (43∼44쪽)






 서너 해 앞서였나, 중국 연길시 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아주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석 점. 연길시 골목길을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다니다가 꽤 살갑다고 느껴진 어느 집 한 채를 그리고, 짐자전거를 둘 그렸습니다. 한 시간 남짓 자리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자니, 중국사람 몇몇이 뒤에 서서 멀거니 들여다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더군요. 사진을 찍을 때는 싫어하거나 공안이 달려오기도 했는데, 그림을 그릴 때에는 모두들 군말이 없었습니다.


.. 월등한 1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엄마는 그렇게 말한다. 특히 ‘월등하다’는 말을 강조한다. 엄마는 그런 식으로 나를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렇지만 내가 별 관심이 없는 분야에 대해 엄마가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난 공부를 특별히 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 사실 나는 공부로 1등 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최고가 되고 싶다 ..  (60, 62쪽)


 예전에는 헌책방 찾아가는 길그림을 손으로 그려 보기도 했습니다. 요사이는 안 그립니다만. 셈틀 그림풀그림을 다룰 줄 몰라서 손으로 그리기도 했는데, 연필과 볼펜을 써 가며 손으로 종이에 그리는 그림이 한결 좋았어요. 느낌도 나고요. 제가 두 다리로 골목골목을 죄다 헤집고 다니면서 몸으로 느낀 다음, 1:5000 길그림책을 펼쳐 놓고, 어느 길로 어떻게 다녔는가를 떠올립니다. 그러고 나서 길 하나까지 샅샅이 따지면서 그렸습니다.


.. 엄마가 집을 떠난 뒤 난 그 사이 나이를 네 살이나 더 먹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내 정신적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엄마를 자주 보지 못했고, 어쩌다 만나도 난 마음속에 있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강당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내 친엄마가 누구인지 모른다 ..  (123쪽)


 글을 쓸 때는 글맛이 있어 좋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맛이 있어서 신납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림맛이 있어 즐거워요. 사랑을 나눌 때에는 사랑맛이, 밥을 먹을 때는 밥맛이, 잠을 잘 때는 잠맛이, 골목길을 거닐 때에는 길맛이 느껴지니 반갑습니다. 일을 할 때에는 땀맛이 싱그럽습니다. 일을 마치고 술 한 잔 걸칠 때에는 술맛이 짜릿합니다. 오랜 너나들이를 만나면 사람맛이 기쁩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맛은 얼마나 속을 시원하게 비워 주는지요.




 (3) 《아빠의 만세발가락》이라는 책


 지난날 《피카소는 미쳤다》는 이름으로 나왔다가 사라져 버렸던 책이 《아빠의 만세발가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책이름 때문에 사랑을 못 받았는지, 우리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책이었는지 모릅니다만, 이 책이 나온 네덜란드에서는 크게 사랑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 아빠는 기진맥진하게 겨우 발걸음을 옮기며 구두코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빠의 구두코는 하늘을 향해 들려 있다. 아빠의 발가락이 만세를 부르듯 하늘을 향해 뻗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아빠의 발가락을 ‘만세발가락’이라고 부른다 ..  (8쪽)


 옮긴이께서 마음을 야무지게 먹고 책이름을 고쳐서 새로 냈는데, 글쎄, 어찌 될는지 모릅니다. 책을 두 번 읽고 나서 책꽂이에 얌전하게 꽂아 놓은 저로서는, 처음 나왔던 《피카소는 미쳤다》라는 이름이 한결 마음에 드는데.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가도 잘 와닿고.


.. 내가 여러 가지 다양한 눈이 있는 얼굴을 그려 놓고 피카소처럼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일이 피카소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좋게 아니면 나쁘게? ..  (85∼86쪽)


 아이들이 자기 마음을 한껏 드러내면서 신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이야기를 건네는 책이라면, 우리 어른들이 ‘껍데기 이름값’에 파묻힌 채 ‘그림을 그림 그대로 느끼고 즐기지 못하는’ 형편을 슬그머니 꼬집기도 하는 책이라면, 아이들 마음자리와 생각자리를 고이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거품과 다를 바 없는 숫자(성적 따위)’에만 매달리는 교육 얼거리를 알게 모르게 나무라는 책이라면, ……. (4341.2.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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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우리 급료 시스템이 바뀌어서 점수제가 됐단 말이야! 점수를 따면 월급이 자꾸자꾸 올라가는 시스템이라고. 지금 그 포인트를 열심히 버는 중이야.” “점수제?” “즉, 좋은 교사가 된단 말야!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몸가짐을 단정히 하거나…… 아무튼 지금 열심히 버는 중이야! 전에는 등교거부하는 놈을 등교시켜 100포인트를 벌었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꼭…….”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당연 빠따지! 전에도 왕따 문제를 해결했다니까? 이대로 가면 다음 월급은 꼭 올라갈 거야!” “헤에,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면 월급이 올라간다? 그것 참 편리하구나.” “그치? 이건 진짜 천재 문제 해결사라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니까.” “너 정말 썩었구나.” “응?” “뭐가 포인트야, 점수에 놀아나면서? 너 언제부터 그런 월급쟁이 교사가 됐어? 그런 선생들은 우리가 옛날에 제일 싫어하던 것 아니었어?” “뭐?” “돌아가. 다신 오지 마. 너같이 썩은 녀석하고는 오늘로 절교다!” ..  《후지사와 토루/서현아 옮김-반항하지 마 (21)》(학산문화사,2002) 62∼64쪽


 만화책 《반항하지 마》를 보다가 속이 싸합니다. 주인공 영길이가 오랜 동무 용이한테 한소리 듣고 쫓겨나면서 들은 말 “너 정말 썩었구나.”에서 가슴이 찌릿합니다. 거짓부렁 교사가 아닌 참된 교사가 되겠다던 동무녀석이 점수(숫자와 돈)에 눈이 멀어서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하는 교사’와 마찬가지가 되는 꼴을 못 봐주겠다며 내뱉은 말 한 마디, 이 말마디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습니다.

 나는 얼마나 책다운 책에 내 마음과 몸을 바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책 만드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합니다. 책 하나에 얽힌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 되새깁니다.

 책 하나를 만들 때에는 여러 사람 땀방울이 스며듭니다. 맨 먼저, 책에 담긴 속살인 줄거리를 이루어내는 사람 땀방울이 스며듭니다. 이들은 글을 쓰는 사람일 수 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일 수 있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들 글꾼-그림꾼-사진꾼 이야기를 잘 추스르고 매만지고 다듬고 보듬어서 종이에 담아내도록 엮어내는 사람 땀방울이 스며듭니다. 이들을 가리켜 출판편집자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 글-그림-사진(원고)을 찍어낼 종이를 알아보는 사람(출판제작자)이 있고, 출판제작자한테 종이를 파는 지업사가 있습니다. 지업사에서 넘긴 종이를 받아서 찍는 인쇄업자가 있고, 책겉이 좀더 단단하도록 꾸미는 코팅업자와 제본업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은 배본회사 일꾼 손을 거쳐 나누어지고, 운송업자가 짐차에 실어서 책방으로 하나하나 나릅니다. 그러면 책방 일꾼은 갈래에 따라 책꽂이에 꽂아 놓고 손님을 맞이합니다.

 여기에, 알게 모르게 땀을 쏟는 이들이 더 있습니다. 책 몸글이나 겉그림을 꾸미는 사람(디자이너)이 있습니다. 몸글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는가 돌아보는 사람(교정/교열)이 있습니다. 주문을 받아서 책방으로 보내는 몫을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출판사 살림을 꾸리는 사람(경리)이 있습니다. 책방에 진열이 잘되어 있는가 살피고, 책방에서 책을 판 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영업)이 있습니다. 새책 소식을 알리려고 바쁜 사람(홍보)이 있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글꾼-그림꾼-사진꾼이 자기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도록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이를 만드는 사람, 볼펜을 만드는 사람, 붓과 물감을 만드는 사람, 사진기와 필름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들 글꾼-그림꾼-사진꾼과 책마을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차를 몰아 주는 사람(버스기사, 전철기사, 택시기사, 기차기사)이 있습니다. 늘 밥을 해먹을 수 없으니, 밥때 되면 밥을 해 주는 사람(밥집 일꾼)이 있어요. 밥집 일꾼은 농사꾼과 고기잡이가 거두어들인 곡식과 물고기 들을 사들여서 밥을 할 테지요. 이들 모두가 입을 옷을 만드는 일꾼이 있습니다. 이들이 마음과 몸을 쉬도록 해 주는 사람(술집이나 찻집 일꾼)이 있습니다. 이들이 손수 집을 지을 수 있으나, 이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는 일꾼도 있습니다. 겨울에는 춥지 않도록 불을 때야 하니 석탄이나 석유를 캐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 하나가 나오면, 맨앞이나 맨뒤 자리 한쪽에 ‘판권’이라는 이름으로, 책 엮어내느라 애쓴 사람들 이름 몇이 함께 찍힙니다. 앞쪽 겉그림에는 글꾼-그림꾼-사진꾼 이름이 적힙니다. 틀림없이 이들은 누구보다 땀을 많이 흘렸고 품과 시간을 많이 들였습니다. 다만, 이들이 이렇게 땀을 흘리며 자기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애쓴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꾼-그림꾼-사진꾼으로 있는 분들이, 또 책마을사람으로 있는 분들이 이런 애씀이들 얼과 넋을 고이 헤아려 줄 때, 고이고이 읽을 책이 우리 앞에 나옵니다. 세월이 갈수록 빛을 더하는 책이 우리 앞에 놓입니다.

 그렇지만 글꾼부터 해서 책마을사람들이 애씀이들 얼과 넋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아예 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으로서는 불티나게 팔리거나 엄청나게 사랑받는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고 해도 언젠가 뽀록이 납니다. 볼장을 보지요. 좋은 책 하나 아닌 돈으로, 이름값으로, 권력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이들 껍데기에는 생명이 없거든요. 사람을 살릴 수 없고, 사람한테 빛을 줄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하루에 열두 끼나 이백 끼를 먹을 수 없어요. 비싼 밥을 먹는다고 몸에 더 좋지만은 않으며 병원 진료를 많이 받는다고 더 오래 살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과 매무새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지에 따라 갈립니다.

 조금 덜 팔리면 얼마나 안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더 팔리면 얼마나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덜 알려지면 얼마나 안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더 알려지면 얼마나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덜 읽히면 얼마나 안 좋은 책일까요. 조금 더 읽히면 얼마나 좋은 책일까요.

 책쓰기, 책엮기, 책팔기 모두 사람 사는 일입니다. 돈(숫자)을 안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책 하나 쓰고 엮고 팔면서 얼마나 ‘책’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인지요. 책 하나 사서 읽으며 얼마나 ‘책’을 돌아보고 있는 우리들인지요.

 1969년에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된 《카프카와의 대화》라는 책을 책꽂이에서 끄집어내 봅니다. 이때 뒤로 두 번 다시 나왔습니다. 요새는 제대로 읽히고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1977년에 처음 소개된 뒤로는 다시 못 나오는 《폴 란돌미-슈베르트》라는 책을 책상맡에서 잠깐 집어들어 넘겨 봅니다. 앞으로도 다시 나올 일이란 없을는지. 2006년에 나온 《하라다 마사즈미-미나마타병》(한울,2006)이라는 책을 책꽂이에서 잠깐 뽑아서 읽습니다. 이 책을 사 준 사람은 몇이나 될까나. 요새 사티쉬 쿠마르 님 책이 곧잘 읽히는데 《부처와 테러리스트》 같은 책도 읽히고 있나? 《아레오파지티카》라는 책을 아는 언론인은 얼마쯤 있으려나. 《항일유적답사기》 같은 책은 두루 사랑받기 힘들까. 맛집이나 멋집 따위를 이야기했다면 잘 팔릴 텐데 왜 구태여 ‘항일유적’ 같은 데를 돌아본다고. 무교회를 말하건 예배당을 말하건, 똑같이 하느님을 모시고 우리 스스로 올곧게 살자는 소리일 텐데, 어이하여 우리네 종교인들은 우찌무라 간조를 안 읽고 김교신을 못 읽을까. 글쎄.

 그러나 남 말할 형편이 아니지. 나부터 내 삶을 다스리고 내 자신을 돌아보도록 이끌어 주는 책을 얼마나 허물과 거리낌이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나. 스스로도 참 좋다고 한 책을 읽어낸 뒤 내 삶을 내 스스로 얼마나 가꾸거나 갈고닦거나 다스리고 있었나. 나는 남들을 보며 “너 참말 썩었구나.” 하고 읊는 입은 있되, 나를 돌아보며 “난 참말 썩었구나.” 하고 무릎꿇거나 뉘우치는 입까지 있었는지. (4341.2.1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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