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하다’와 ‘틀림없다’
[말사랑·글꽃·삶빛 13] 겹말을 못 느끼는 가슴

 


  오늘날에는 초등학생도 인터넷을 켜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찾아봅니다. 초등학생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집안에 국어사전이 없더라도 찾기창에 낱말 하나 넣으면 아주 빨리 말풀이를 살필 수 있습니다. 애써 컴퓨터를 안 켜더라도 손전화를 누르면 말풀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날처럼 가방에 두툼한 국어사전을 들고 다닐 일이 없습니다. 집안에 두툼한 국어사전 안 갖추어도 될 만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척 궁금합니다. 이제 오늘날에는 따로 국어사전을 챙기지 않아도 낱말뜻과 쓰임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는데, 참말 오늘날 사람들은 컴퓨터나 손전화로 ‘한국말 낱말뜻’을 찬찬히 살피거나 헤아릴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한국말 낱말뜻’을 알아보려고 애쓸까요.


  점글 읽는 아이 이야기가 나오는 일본문학 《덴코짱》(양철북,2011)을 읽다가 115쪽에서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다. 틀림없다.”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나는 이 글월에서 몇 가지 아쉽다고 느낍니다. 먼저 ‘것’과 ‘게’를 잇달아 넣어 아쉽습니다. 다음으로 ‘느끼고 있는’처럼 적은 글투가 아쉽다고 느낍니다. 두 말투 모두 알맞거나 바르게 쓰는 한국 말투가 아닙니다. ‘곁에 있다는 것을’은 ‘곁에 있는 줄’로 손질해야 알맞아요. ‘느끼고 있는’는 ‘느끼는’으로 바로잡아야 올발라요. ‘현재진행형’ 꼴은 영어에 있지, 한국말에 없어요. 이 대목에 나오는 ‘느끼고 있는’ 같은 말투는, 영어에 있는 현재진행형을 일본사람이 ‘-하는 中’처럼 옮긴 말투를 다시 한국사람이 ‘-하는 중’으로 잘못 옮기다가, ‘-하는 가운데’나 ‘-하고 있는’처럼 잘못 옮긴 꼴이에요.


  이 다음으로 또 한 군데 아쉽다고 느껴요. 글월 끝에 나오는 “분명하다. 틀림없다.”가 아쉬워요.


  왜 아쉬울까요. 왜 나는 이 대목이 아쉽다고 느낄까요.


  한번 생각해 보셔요. 이 대목은 거리끼지 않고 쓸 만한 말투일까요. 이 같은 글월은 알맞거나 바르거나 좋다 할 만할까요. 누구나 이처럼 쓸 만한가요. 이렇게 쓰든 저렇게 쓰든 아랑곳할 까닭이 없을까요. 사람들마다 달리 쓰는 말투 가운데 하나이니까, 개성으로 여겨야 하나요.


  나는 국어사전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먼저, 한자말 ‘분명(分明)’ 말뜻을 찾아봅니다. ‘분명’은 “틀림없이 확실하게”를 뜻한다 합니다. 이 말풀이에 나오는 다른 한자말 ‘확실(確實)’도 찾아봅니다. ‘확실’은 “틀림없이 그러함”을 뜻한다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말 ‘틀림없다’를 찾아봅니다. 이 낱말은 “조금도 어긋나는 일이 없다”를 뜻한다 해요.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으니 찬찬히 갈무리해 봅니다. ‘분명 = 틀림없이 확실하게’라 했으니, ‘분명 = 틀림없이 틀림없이 그러하게’인 셈입니다. 곧, 한자말 ‘분명’과 ‘확실’은 한국말이 아닌 한자말이라는 소리예요. 한국사람이 굳이 안 써도 될 한자말이라는 얘기예요. 한국사람이 쓸 낱말은 오직 하나 ‘틀림없다’라는 뜻이에요. 일본문학 《덴코짱》에 “분명하다. 틀림없다.” 하고 나왔으면, 이 대목은 잘못되었다 할 수 있어요. 말놀이를 한다면 모르되, 말놀이라 하더라도 퍽 어설프거나 어리석은 말놀이인 꼴이에요. 마치, “고마워. 땡큐.”라 말하는 꼴이거든요. “잘 가. 바이바이.”라 말하는 꼴이요, “좋아. 굿.”이라 말하는 꼴이에요.


  뜻이 같은 여러 나라 말을 한 자리에 잇달아 쓰는 일은 ‘겹말’이에요. 한국말로는 ‘겹말’이고, 한자말로 나타내면 ‘중복표현(重複表現)’이에요. 사람들은 “역전 앞” 같은 말투만 겹말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이지만, “분명하다. 틀림없다.” 또한 겹말이에요. 알맞고 바르게 다듬어 본다면, “틀림없다. 그렇다.”라든지 “틀림없다. 바로 그렇다.”라든지 “틀림없다. 참말 틀림없다.”처럼 적을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하며 말하지 않으면 겹말인지 아닌지 느끼지 못하고 말아요. 스스로 생각하며 말할 때에는 겹말이 나타날 일이 없어요.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지 않는다면 아름답거나 알차거나 상큼하게 말하지 못해요. 스스로 생각을 북돋울 때에 비로소 사랑스럽거나 어여쁘거나 해맑게 말할 수 있어요.


  말빛은 내 삶빛이에요. 삶빛이란 나 스스로 일구는 넋빛이에요. 내 넋을 가꾸는 손길에 따라 내 삶은 한결 빛날 수 있고, 슬프게 헤매거나 어지러이 떠돌 수 있어요. 슬기롭게 가꾸는 넋빛이 삶빛으로 깊어지도록 이끌며 내 말빛을 빛내요. 어리석게 내팽개치는 넋이라면 삶도 말도 꿈도 사랑도 모두 어영부영 흩어지며 빛을 잃어요. (4345.6.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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