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우비

 


  한가을로 접어든 뒤 처음으로 비가 내린다. 가을비가 찾아온다. 그런데, 하늘 저쪽과 이쪽은 해가 환하게 비춘다. 아침햇살 노랗게 빛나는데, 요 한쪽에서는 빗줄기 쏴아 퍼붓는다.


  뭔 일이니. 봄도 여름도 아닌 가을에 여우비라니. 그러나 겨울에도 여우비는 올 수 있겠지. 때로는 여우눈도 있는걸. 틀림없이 하늘에서는 밝게 따순 햇살이 노래하더라도 한쪽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기도 하잖아.


  엊저녁 자정이 되도록 마을 한켠에서 벼베는 기계 구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오늘 가을비 쏟아질 줄 알고 밤새도록 벼를 베었구나 싶다. 가을걷이 바쁜 일손 하루쯤 쉬라는 비일까. 아무리 가을이라 하더라도 너무 가물지 말라며 살그마니 숲과 들을 적시는 비일까. 아이들은 빗소리를 듣고는 마당에서 긴신 신고 우산 들며 논다. (4345.10.2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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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111] 맛있는 밥상

 


  ㅇ시에 있는 고등학교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퍽 머나먼 길을 고속버스를 타고 찾아갔습니다. 네 시간에 걸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버스를 타는데, 버스에 타기 앞서 밥 먹을 데를 살핍니다. 길가에서 맨 먼저 보이는 밥집으로 들어갑니다. 무엇을 시킬까 따로 생각하지 않고 ‘맛있는 밥상’이라고 적힌 밥이 무엇인가 여쭈어 두 그릇 시킵니다. 이른바 여느 밥집에서 ‘백반(白飯)’이라 이름을 붙여 내놓는 밥이 이곳에서는 ‘맛있는 밥상’입니다. 조금 기다리니 국과 반찬 몇 가지를 내옵니다. 살짝 허술하구나 느끼면서도 이름은 ‘맛있는 밥상’인 만큼 맛있게 먹자고 생각하며 맛있게 먹습니다. 어찌 되든 고맙게 받아서 먹는 밥이기에, ‘고마운 밥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맛은 있지 않더라도 ‘즐거운 밥상’이나 ‘반가운 밥상’이 될 수 있겠지요. 밥집마다 그날그날 새 국과 반찬을 내놓기도 하니까, 이때에는 ‘오늘 밥상’이나 ‘오늘밥’처럼 이름을 붙여도 어울려요. 때로는 가장 수수하면서 투박하게 ‘밥 한 그릇’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더 단출하게 ‘밥’이라고만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4345.10.2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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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er Evans: American Photographs (Hardcover)
Evans, Walker / Distributed Art Pub Inc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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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이 사진책은 다시 살 수 없겠지만, 새로 나온 이 워커 에반스 책이면 넉넉히 즐길 만하리라 느낍니다.

 

..

 

 

 

 

 


 사진이야기를 연 밑바탕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63]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Photographs for the Farm Security Administration 1935-1938》(Da Capo press,1973)

 


  한국 사진밭에도 두루 알려진 ‘워커 에반스’나 ‘도로디어 랭’ 같은 사진쟁이는 미국에서 ‘농업안정국(FSA,Farm Security Administration)’ 사진을 찍으면서 ‘다큐사진 새길을 열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먼저, 1930년대 미국에서 워커 에반스 님이나 도로디어 랭 님 같은 이들이 ‘농업안정국한테서 돈을 받으며 일감을 얻지 않’았더라도, ‘대공황이며 여러 가지 어려운 가시밭길 한복판에서 고단하게 지내는 시골사람 모습과 이야기’를 이녁 스스로 사진으로 옮기려 했을까요. 다음으로는, 농업안정국이 생기고 농업안정국에서 미국 시골마을 삶자락을 낱낱이 살피며 어떤 정책을 꾀할 뜻이 있었기에, 농업정책을 꾀할 공무원부터 시골마을 삶자락을 제대로 살피거나 알아보고자 여러 사진쟁이를 불러 ‘기록사진을 찍도록 일을 맡겼’기에, 비로소 ‘워커 에반스’라는 이름이나 ‘도로디어 랭’ 같은 이름이 사진밭에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할까요.


  두 가지 모두 옳다고 할 수 있고, 두 가지보다 다른 테두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 여러 가지가 맞물리면서 ‘다큐사진 새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농업안정국이나 워커 에반스·도로디어 랭이 아닌 ‘세계 사진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은 수많은 이들이 지구별 곳곳에서 그야말로 ‘다큐사진 새길’을 씩씩하게 걸었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어느 쪽을 옳거나 맞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책을 읽을 때에는 사진책에 담긴 사진을 읽고, 사진에 서린 이야기를 읽을 뿐, 이 사진이 찍히도록 이끌거나 돕거나 애쓴 흐름은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느껴요. 어느 밑바탕이 있으니 이러저러한 사진이 태어날 만하지만, 밑바탕을 캐자고 사진을 읽지는 않아요. 사진을 읽으려고 사진을 바라볼 뿐이에요. 이를테면, 우리 집 아이들이 올해(2012년)에 다섯 살·두 살인데, 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예쁘거나 사랑스럽다고 느낀다면 그야말로 아이들 스스로 맑고 환하게 빛나는 숨결이 있어서 예쁘거나 사랑스럽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이 아이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저귀를 몇 장 빨래하고 밥을 얼마나 지어 먹이며 밤마다 자장노래를 얼마나 애틋하게 불러 주었느니 하는 ‘뒤치다꺼리’는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들을 보살핀 어버이 손길은 따스하거나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아이들을 바라볼 때에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바라볼 뿐이에요.


  사진책 《Photographs for the Farm Security Administration 1935-1938》(Da Capo press,1973)을 읽습니다. 사진책에 붙은 이름을 살피면 ‘사진들’은 사진들이로되, ‘농업안정국에서 1935년부터 1938년 사이에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미국 시골 참모습을 밝힌다거나 가난한 시골사람 삶을 파헤친다거나 ‘새로운 다큐사진 이야기’를 선보인다거나 하는 느낌은 조금도 안 담습니다. 이 사진책을 펼치면,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님이 어떠한 원판(어떤 크기 어떤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느냐를 찬찬히 밝히고, ‘농업안정국에서 바라는 대로 찍은 사진’을 목록처럼 죽 실어 줍니다. 이러면서 ‘농업안정국에서 바라는 대로 찍은 사진 가운데 따로 추린 사진’을 앞자리에서 큼직하게 보여줍니다.


  사진책 앞자리에 실린 ‘추린 사진(Selected Photographs)’을 보면, 세계 사진 역사에 널리 알려진 작품이 파노라마처럼 죽 나옵니다. ‘추린 사진’을 지나 ‘목록 사진’을 보면, 워커 에반스 님이 어떤 흐름으로 ‘기록사진’을 찍었는가를 살필 수 있습니다. ‘목록 사진’은 바깥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할 사진인데, 이 ‘목록 사진’을 보면 워커 에반스 님이 ‘기록사진’만 찍지 않고 이녁 나름대로 ‘빛을 만지’거나 ‘사진틀을 새롭게 엮어’ 보려 한 자국이 드러납니다.

 

 

 

 

 


  미국 농업안정국은 사진예술을 뽐낸다든지 사진문화를 펼친다든지 하는 일을 맡지 않습니다. 1930년대 미국 시골마을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아(기록) 농업정책을 꾀하는 밑자료로 삼으려 했습니다. 농업안정국에서 워커 에반스 님을 비롯한 사진쟁이들한테 일삯을 얼마나 주고 필름값은 얼마나 치러 주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록 사진’이 있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이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모두 농업안정국에 내놓았을 텐데, 농업안정국에서는 이 ‘목록 사진’을 받으면서 어느 한편으로는 썩 달갑지 않았겠다 싶기도 합니다. 워커 에반스 님은 ‘한 곳에서 이렇게도 찍고 저렇게도 찍’어요. 아이들 사진이나 한식구 사진에서도 ‘이런 모습으로도 찍고 저런 모습으로도 찍’어요.


  그러니까, 농업안정국 공무원이 바라보자면, 아무리 ‘사진을 찍어 밑자료로 삼는 기록으로 다루려고 사진 일감을 사진쟁이한테 맡겼다’ 하더라도, ‘한 자리에서 한 장’만 찍으면 되지, 왜 이런 얼굴 저런 모습까지 여러 장 찍느냐고 투덜거릴 수 있겠다 싶어요. 건물 하나를 찍어도 ‘이런 빛살 저런 빛느낌’을 달리 하면서 찍기도 했으니, ‘워커 에반스 이놈이 필름을 함부로 쓰지 않나’ 하고 골을 부릴 수 있구나 싶어요. 농업안정국은 사진쟁이한테 ‘사진을 찍어서 달라’고 했지 ‘예술사진을 찍’는다거나 ‘다큐사진을 찍’어 달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농업안정국은 미국 시골이 어떤 모습인가를 낱낱이 담는 사진을 바랐지, ‘다큐사진 새길을 연다 할 만’한 사진을 바라지 않았어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농업안정국은 여러 사진쟁이한테 사진을 맡기며 이곳에서 쓸 사진을 얻습니다. 투덜거리거나 골을 부릴 만하지만, 바라는 사진을 여러모로 얻습니다. 홀가분하게 사진을 찍을 수는 없고, ‘일감 맡긴 이가 바라는 사진’을 찍어야 하던 워커 에반스 님이었을 텐데, 농업안정국이 바라는 대로 사진을 찍으면서도, 워커 에반스 님은 당신 나름대로 당신 눈썰미와 눈길과 눈빛이 담기는 사진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아니, 누가 어떤 사진 찍어 달라 바란다 하더라도, 사진기를 농업안정국 공무원 아닌 워커 에반스 님이 쥐었으면 아주 마땅히 ‘워커 에반스 사진’이 나오겠지요. 그리고, 농업안정국이 바라는 대로 미국 여러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워커 에반스 님은 ‘수많은 사람들 다 다른 삶터’에 눈을 뜨고 ‘수많은 사람들 다 다른 삶자락’에 눈을 밝혔으리라 느껴요.


  사진이란 이러하다, 하고 말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사진은 사진을 읽거나 찍는 사람마다 다 다른 삶이에요. ‘사랑이란 이러하다, 삶이란 이러하다, 꿈이란 이러하다.’ 같은 말도 이와 같아요. 함부로 어떻다 하고 말할 수 없어요. 다 다른 사람들마다 다 다른 사랑이요 삶이며 꿈이에요. 워커 에반스 님은 스스로 바랐든 누군가 시켰든, 숱한 사람을 마주하고 온갖 삶터를 돌면서 ‘사진 찍는 길’을 새롭게 헤아릴밖에 없습니다. 이제껏 다른 사진쟁이들 스스로 즐겁고 힘차게 보여주지 못하던 사진길을 살필밖에 없습니다.


  1930년대를 지나 2010년대를 맞이한 오늘날을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고향나라 골골샅샅 누비는 사진쟁이도 많고, 고향나라를 떠나 지구별 여러 나라를 누비는 사진쟁이도 많습니다. 꼭 ‘다큐사진’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갖은 곳을 누빕니다. 광고사진이나 패션사진이라 하더라도 스튜디오에 짱박혀서 찍지는 않아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도 찍고 브라질 정글에서도 찍어요. ‘사진 찍는 길’은 한 갈래가 아니요 ‘사진 읽는 눈’ 또한 한 가지가 아니에요. 워커 에반스 님이 남다르게 ‘다큐사진 새길’을 열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만, 워커 에반스 님은 오직 하나, ‘사진 찍는 길’과 ‘사진 읽는 눈’은 수없이 많구나 하는 이야기를 농업안정국한테서 일감을 받아 찍은 사진으로 찬찬히 보여주는구나 싶습니다.


  사진이야기를 여는 밑바탕은 바로 나한테 있습니다. 누가 일감을 맡긴대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에요. 논문이나 보고서로 내는 비평글이라 해서 사진읽기가 새롭게 태어나지 않아요. 스스로 삶을 새롭게 일굴 때에 사진찍기가 새롭게 거듭납니다. 스스로 삶을 새롭게 사랑할 적에 사진읽기가 새삼스레 빛납니다. (4345.10.22.다.ㅎㄲㅅㄱ)

 

(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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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살 먹는 나무가 죽는 삶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이야기한다. 참말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 그런데, 사람도 누구나 아주 오래 살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 스스로 ‘백 살을 채 못 산다’고 생각하면서, 또 이러한 생각을 퍼뜨리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제 목숨을 백 살 언저리에서 마감하지 않았으랴 싶다. 그러니까,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여기기에, 나무도 스스로 이처럼 생각하고, 나무는 이러한 삶 그대로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셈이라고 느낀다. 다른 목숨들도 이와 같겠지. 사람들 스스로 밝은 생각 아닌 어리석은 생각을 품으면서 지구별 목숨들 삶과 죽음이 엇갈렸으리라 느낀다. 가만히 살피면, 사람들 때문에 숱한 목숨이 아예 똑 끊어지듯 지구별에서 사라진다. 하나하나 따지면, 사람들 때문에 어느 목숨은 갑작스레 끔찍하게 늘어난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스스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걷기만 할 뿐, 하늘을 날지 못하고 물위를 걷지 못할까. 사람은 왜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꿈이 있는 한편, 사랑과 믿음이 있을까.


  요 며칠 나무를 깊디깊이 헤아려 본다. 호젓한 시골마을에서만 지내다가 퍽 먼길을 달려 도시 고등학교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찾아가다가, 나무 한 그루 싱그럽게 자라기 힘든 그 도시에서 이틀을 보내니, 내 몸과 마음이 그리 홀가분하지 못해 자꾸 나무를 헤아려 본다. 이동안 ‘이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 삶을 떠올린다. 때로는 천오백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고, 어느 때에는 삼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지.


  나무들은 더 오래 살아갈 수 있을까. 나무들은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 할까. 나무들 스스로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에, 이녁이 그동안 뿌린 씨앗이 무럭무럭 자란 어린나무가 힘차게 솟아오를 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까.


  유럽 나라는 모르겠지만, 중남미와 북미와 아시아와 호주와 아프리카에는, 또 아시아에서도 중국이나 일본까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먹고는 어느 날 문득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으리라 느낀다. 그렇지만, 남녘이나 북녘에는 천 살을 먹은 나무조차 마주하기 힘들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남녘이나 북녘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살아오며 스스로 북돋우고 살찌운 슬기를 둘레에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삶을 마감하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나무를 만날 수 없다는 소리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슬기를 빛내는 나무를 꾸준히 마주하면서 사람들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지만, 남녘과 북녘은 스스로 슬기를 키우지 못하고, 스스로 슬기를 밝히지 못하며, 스스로 슬기를 누리지 못하는 나날이라고 느낀다.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죽는 삶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밝히지 못하곤 한다. 고작 도시에서 톱니바퀴 같은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될 뿐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월급봉투를 은행계좌로 받아서 ‘소비 쳇바퀴’를 돌 뿐이다. 이러는 동안 아이들한테도 똑같은 ‘대학입시 쳇바퀴’를 물려줄 뿐, 저마다 삶을 밝히는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남북녘 두멧자락까지 폭탄과 미사일을 뿌려대며 잿더미로 만들었을까.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이 나라 골골샅샅 민둥산이 되도록 모든 숲과 마을을 깡그리 망가뜨렸을까.


  사람들은 ‘수목원’에 가면 마음이 탁 트이고 머리가 환히 열리다가는 생각이 곱게 빛난다고까지 말한다. 과학자 아닌 누구나 이처럼 말한다. 그러면, 수목원이란 무엇인가. ‘숲’이 수목원이다. 숲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다. 농약을 치는 숲이 아닌, 숲결 그대로 흐르는 숲이다. 벌레가 살고 새가 노래하며 짐승들 보금자리가 있는 숲이 바로 ‘수목원’이다.


  나무가 나무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사람들한테 마음과 머리와 생각을 열어 준다면, 가끔 자가용 몰고 찾아가는 수목원 아닌 집 둘레에서 언제나 누리는 숲이 있어야 마땅하다. 고속도로를 내거나 고속철도를 낸다며 멧자락에 구멍을 내거나 아스팔트길을 함부로 늘려서는 안 된다. 고속도로는 더 없어도 된다. 새로운 찻길은 더 없어도 된다. 숲이 있어야 하고, 나무와 풀이 자라야 한다. 발전소를 더 지어서 전기를 늘려야 한다지만, 발전소는 더 없어도 된다. 나무가 설 땅이 있어야 한다. 전자파 일으키는 송전탑이 멧줄기 따라 길게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송전탑이 들판 한복판에 우뚝 서서는 안 된다. 송전탑을 세우지 말고, 천 살 이천 살 먹는 나무가 자라도록 해야 한다. 자가용을 몰지 말고 두 다리로 숲길을 걸어야 한다. 버스도 전철도 타지 말고 자전거를 몰며 숲 사이를 달려야 한다.


  미군기지가 떠난 넓은 터에 무슨무슨 시멘트건물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그저 풀과 나무가 스스럼없이 자랄 숲을 일구어야 한다. 우리 삶터 곳곳에 빈터를 마련하고, 빈터가 바야흐로 숲이 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마을 어디나 ‘수목원’처럼 ‘숲’이 되어야 한다. 집집마다 나무를 보살펴야 한다. 어느 집이나 나무그늘을 누려야 한다. 학교도 관공서도 회사도, 무슨무슨 예술쟁이 작품을 건물 앞에 세울 일이 아니라, 씨앗 한 알에서 비롯하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몇 천만 원이나 몇 억 원 한다는 소나무를 나무젓가락처럼 박지 말고, 나무다운 나무로 조그맣게 숲을 일구어야 한다.


  사람은 숲사람이다. 새는 숲새이고, 벌레는 숲벌레이다. 짐승은 숲짐승이다. 모든 목숨은 숲에서 비롯하기에 숲목숨이다.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려는 이들은 도끼로 나무를 찍기 앞서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지을 재료’ 아닌 ‘맑은 넋 깃든 숨결’을 얻기 때문에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을 지으려고 삼백 살이나 오백 살 먹은 나무를 벨 적에 누구라도 절을 했다면, 천 살이나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며 쓰러질 적에는 어떤 기운과 넋과 사랑과 숨결이 흘러나와서 우리한테 드리울까. 오늘 내가 씨앗 한 알 심으면 이천 해 뒤를 살아갈 내 뒷사람은 이 나무가 드리울 사랑과 꿈을 누릴 수 있을까. (4345.10.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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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2000살 먹은 나무'가 죽는 삶을 곰곰이 생각했는데, 뜻밖에 야마오 산세이 님 책이 새로 나왔구나. 숲속에서 살아가며 숲기운을 글로 나누어 주는 야마오 산세이 님 이야기책이 널리 사랑받으면서, 사람들마다 고운 숲내음 물씬 누릴 수 있기를 빈다.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애니미즘이라는 희망- 삼라만상에게 길을 묻다
야마오 산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12년 9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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