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사람 병원 안 가기

 


  나는 도시에서 살 적에도 병원을 가지 않았다. 왜 안 갔느냐. 병원을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았으니까. 나는 내 삶을 꾸릴 뿐이지, 이렇거나 저런대서 병원에 갈 일이란 없다고 받아들였다. 도시를 벗어나 외진 두멧자락 시골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왜 안 가느냐. 병원이란 내 삶자락 가까이 없기도 하고, 생각할 까닭이 없기도 하며, 하루하루 새롭게 맞아들이는 삶이 기쁘니까.


  병원을 드나드는 누군가를 떠올려 본다. 왜 병원을 드나들까. 병원을 드나들며 ‘아픔’이나 ‘슬픔’이나 ‘생채기’나 ‘멍’이 아물까. 병원을 드나들며 ‘무언가 되겠지’ 하는 생각뿐 아닐까.


  너무 모르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한다. 시골에는 병원이 없으니 ‘아플 때에 어떡하느냐’ 하고 걱정하는데, 시골에는 아플 일이 없고 아픈 사람이 없으니 병원이 있을 까닭이 없다. 숲과 멧자락과 냇물과 들이 있으니, 사람 아플 일이 없다. 먼 옛날 사람을 죽이던 돌림병이란 무엇인가. 모두 도시에서 비롯한 죽음이다. 모두 도시에서 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삶자락을 거칠게 짓밟거나 끔찍하게 억누르면서 생겨난 죽음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정쟁을 벌이면서 ‘시골 숲사람 삶’을 마구 어지럽혔다. 무거운 세금과 피말리는 소작료를 잔뜩 얹으니, 숲사람이던 시골사람 누구나 시름시름 앓다가 쓰러질밖에 없었다. 병원이 없어서 쓰러진 사람은 없다. 모진 미움과 끔찍한 전쟁이 사람 스스로 사람 죽이는 꼴이었다.


  도시에 살던 사람이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간다든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그예 시골에서 살아간다든지, 시골에서 삶자리 마련해서 뿌리내리려는 사람은 ‘병원에 갈 마음’이 없다. 몸이 아프면 내 몸이 의사요 내 손이 약손이다. 몸이 아프도록 일할 까닭이 없다. 몸이 즐거울 만큼 일한다. 마음이 흐뭇하도록 삶을 일군다. 몸이 가볍고 마음이 곱다면, 어느 누구라도 아플 일이 없다. 몸이 가볍지 않고 마음이 곱지 않으니, 자꾸자꾸 몸이 처지거나 힘들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병원을 곁에 둘밖에 없다. 스스로 톱니바퀴 구실을 하느라 몸이 메마르고 지친다. 스스로 쳇바퀴 구르는 삶에 얽매이면서 마음이 허물어지거나 다친다. 도시사람 아픈 몸은 시골에서 여러 날 조용히 지내면 나을 수 있지만, 좀처럼 톱니바퀴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도시사람 아픈 마음은 시골에서 푹 쉬며 숲바람을 쐬고 들햇살을 쬐면 달랠 수 있는데, 참말 쳇바퀴 수렁에서 헤어나지 않는다.


  아픈 사람들아, 부디 병원 말고 시골로 오렴. 시골로 와서 몸도 마음도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을 마시렴. 싱그러운 물과 고운 밥을 맞아들이렴. 약 아닌 사랑을 먹고, 처방전 아닌 믿음을 가슴속에 새기렴. (4345.10.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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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 눈길

 


  나는 내가 입을 옷을 입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어라 하건 아랑곳할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쳐다본대서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먹을 밥을 먹지, 다른 사람이 바라본대서 내가 못 먹는 밥을 먹을 수 없고, 내가 즐기는 밥을 안 먹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쳐다본대서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옆지기를 내동댕이치거나 걷어찰 수 없어요. 다른 사람이 쳐다보니까 논밭에서 김매기를 안 해도 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부엌에서 밥을 짓고 밥상을 행주로 닦으며 밥그릇과 수저를 놓습니다.


  누가 쳐다보건 말건 바람을 마십니다. 누가 들여다보건 말건 햇살을 쬡니다. 누가 마주보건 말건 가만히 들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누가 떠들건 말건 나는 나대로 가을녘 풀벌레 노랫소리 차참 이우는 결을 느낍니다. 겨울 앞둔 가을녘, 이제 풀벌레 노랫소리는 거의 잠들고 바람소리 가득한 사이사이 멧새 몇 마리 가늘게 밤노래를 불러 줍니다.


  다른 사람이 쳐다본대서 ‘내키지 않는 책’을 장만해서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많이 읽었대서 나도 ‘다른 사람이 많이 읽었다는 책’을 장만해서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했건 말건, 다른 사람이 깎아내렸건 말건, 나는 내가 읽을 책을 읽을 뿐입니다. 나는 내 길을 걷고, 내 삶을 사랑하며, 내 꿈을 돌보고, 내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나는 내 가슴속에서 환하게 영그는 빛줄기를 바라봅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꽃송이를 마주합니다. 나는 내 넋과 얼이 즐거이 노래하는 춤사위를 기쁘게 지켜봅니다. (4345.10.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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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 물맛 느끼는 책읽기

 


  나는 처음부터 막걸리 물맛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도시인 인천에서 살다가 시골인 충청북도 음성으로 깃들어 한 해를 살며 조금씩 물맛을 달리 느꼈고, 더 외진 시골인 전라남도 고흥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비로소 물맛을 느낍니다. 냇물과 수도물과 정수기물이 어떻게 다른가를 혀로도 알고 눈으로도 알며 마음과 몸으로도 압니다. 페트병에 담아서 파는 먹는샘물 맛 또한 냇물 맛하고 사뭇 다른 줄 몸으로 느낍니다. 제아무리 맑고 싱그러운 냇물이라 하더라도 페트병에 담은 채 여러 날 여러 달 지내고 나면 맑거나 싱그러운 기운이 송두리째 사라지는구나 하고 느껴요.


  사람이 마실 물은 ‘흐르는 물’입니다. 가둔 물을 플라스틱병에 가두어 놓고 마실 때에는 사람 몸뚱이 또한 ‘갇힌 몸’처럼 된다고 느낍니다. 정수기로 거른다거나 주전자로 끓인다거나 해서는 물맛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물 한 방울이 고운 목숨으로 나한테 스며들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맑게 숨쉬는 물을 마시면서 맑게 숨쉬는 넋으로 살아갈 나예요. 싱그러이 빛나는 물을 마시면서 싱그러이 빛나는 얼로 살아갈 나예요.


  시골 막걸리는 시골마을 냇물로 빚습니다. 도시 막걸리는 수도물이나 정수기물로 빚겠지요. 시골 막걸리는 시골마을 쌀로 빚습니다. 도시 막걸리는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데에서 사들인 쌀로 빚습니다. 오늘날 한국 시골에서 농약 안 쓰는 데는 아주 드물지만,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는 훨씬 어마어마하게 농약을 칩니다. 농약을 쳐서 지은 쌀을 배로 실어 한국으로 올 적에는 또 어떤 농약이나 방부제를 뿌릴까요. 벌레 먹지 않도록 갖가지 농약과 방부제를 뿌리잖아요.


  이제 도시로 마실을 가서 도시사람 즐긴다는 막걸리 한 잔을 콸콸 부어 받을 적에는, ‘아, 이 막걸리 물빛과 물내음과 물맛 모두 사람 숨결을 살리기는 힘드네.’ 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꿉니다. 구정물이건 비눗물이건 내 몸을 살찌우는 고마우며 반가운 밥이로구나 하고 여기며 막걸리잔을 들이켭니다. 스스로 내 마음을 씻고 고운 물 한 방울 입에 털어넣습니다.


  도시에서 볼일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맨 먼저 시골집 냇물을 꿀꺽꿀꺽 들이켭니다. 크아, 좋구나. 나는 이 맛을 느끼고 이 내음을 맡으며 이 빛깔을 바라보면서 내 몸과 마음을 사랑해야지. 내가 사랑하며 살아갈 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지. 내가 아끼며 보살피고 북돋울 믿음이 무엇인가를 헤아려야지. 내가 즐기며 누리고 나눌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지. (4345.10.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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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서는 아이들

 


  우리 시골집에 놀러온 네 살 아이가 저보다 한 살 위인 우리 집 큰아이더러 꼬박꼬박 ‘언니’라 부르는 말을 들으며 깜짝 놀랍니다. 다섯 살 우리 집 큰아이는 ‘나이에 따라 달리 가리키는 부름말’을 아직 모릅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오래도록 ‘나이가 한 살 더 많대서 언니’라느니 ‘나이가 한 살 더 적대서 동생’이라느니 하고 나눌 줄 모를 수 있어요. 큰아이더러 ‘너는 언니’라고 말해 주면, 큰아이는 으레 “나는 벼리야, 사름벼리.” 하고 말합니다. 작은아이는 큰아이한테 ‘동생이야’ 하고 말해 줄 때에도 큰아이는 으레 “아니야 보라야, 산들보라.” 하고 말하곤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입니다. 사람은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한테 형이나 오빠라 한다면, 어떻게 해서 형이나 오빠가 될까요. 나이가 더 있거나 계급이 더 있다는 틀거리란 무엇일까요. 이 나라 어른들은 왜 아이들을 일찍부터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에 집어넣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나이에 따라 금긋기’를 하도록 몰아세울까요. 왜 아이들은 나이에 따라 줄을 서야 할까요. 모두들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누릴 빛나는 숨결일 텐데요. (4345.10.3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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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함께 생각을 북돋울 말
[말사랑·글꽃·삶빛 31] 그림책은 어떻게 쓰는가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즐길 그림책을 읽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안 읽으며 아이들한테만 읽히는 그림책은 없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먼저 찬찬히 안 살피고 나서 아이들한테 쥐어 주는 그림책은 없습니다. 어느 그림책을 아이한테 내밀며 읽으라고 하더라도 어버이인 내가 먼저 그림책을 가만가만 읽습니다.


  그림책은 아이들만 읽는 책이 아닙니다. 그림책은 아이들부터 누구나 읽는 책입니다. 그림책은 아이들 눈높이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책입니다. 그림책은 지식인이나 지성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림책은 울타리를 세우지 않습니다. 한글을 깨친 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읽고 쉽게 생각하며 쉽게 삶으로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를 담아서 그림책 하나 태어납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다가, 책에 적힌 글월을 죽죽 긋고는 아래나 위에 다른 말을 적어 넣습니다. 아이들이 나중에 한글을 깨쳐 스스로 읽을 적에 썩 안 좋다 싶은 글월이라면 죽죽 긋고 새 말을 적어 넣습니다. 우리 집에 놀러온 다른 어른들이 이 그림책을 펼쳐 읽어 준다 할 적에 ‘책에 적힌 대로만 읽지 않기’를 바라며 죽죽 긋습니다.


  그림책은 그림으로만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림과 글이 어울리기도 하며, 글이 퍽 많이 실리기도 합니다. 그림책이 어떤 모양새로 태어나더라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넣는 이들은 ‘말’을 나누려고 합니다. 생각을 말에 담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책을 그리거나 쓰기 앞서, 이 그림책을 그리거나 쓰는 어른들은 여느 때에 스스로 생각하던 삶을 여느 때에 즐겁게 쓰던 말에 담아서 이야기를 빚습니다.


  그림책 《꽃섬》(웅진주니어,2012)을 읽다가 “도시는 빠르게 커지고 복잡해졌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같은 글월을 봅니다. 어른들이 흔히 쓰는 말투이니 어린이와 함께 읽는 그림책에도 이 같은 글월이 실릴 수 있겠지요. 그러면 ‘복잡(複雜)하다’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일이나 감정 따위가 갈피를 잡기 어려울 만큼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로 풀이합니다. 한국말 ‘얽히다’를 가리키는 한자말 ‘복잡하다’요, 다른 한국말로 나타내자면 ‘어수선하다’나 ‘어지럽다’입니다. ‘점점(漸漸)’이란 또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보면, “조금씩 더하거나 덜하여지는 모양”을 가리킨다 하는데, 국어사전 말풀이에 나오듯, 한국말은 ‘조금씩’입니다. 다른 한국말로 나타내자면 ‘차츰’이나 ‘자꾸’나 ‘꾸준히’라 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복잡하다’와 ‘점점’이라는 한자말도 쓰고, ‘어지럽다’와 ‘차츰’이라는 한국말도 씁니다. 아이들은 어떤 말을 들을 때에 즐거울까 헤아려 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어떤 말을 쓸 때에 아름다울까 헤아려 봅니다.


  그림책 《일 년은 열두 달》(시공주니어,2006)을 읽다가 “동장군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자작나무 가지에 움튼 새싹이 봄소식을 전해 줄 거야” 같은 글월을 봅니다. 아이들 앞에서 ‘춘하추동(春夏秋冬)’이라 말하는 어른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으레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 말합니다. ‘동장군(冬將軍)’도 이와 같은 흐름이에요. 아이들하고 나눌 그림책에 적어 넣을 낱말이라 한다면 ‘겨울장군’처럼 적을 수 있어요. “전(傳)해 줄거야” 같은 글월이라면 “알려주겠지”라든지 “들려줄 테지”처럼 손볼 수 있어요.


  한 가지를 더 살핍니다. ‘봄소식(-消息)’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한자말 ‘소식’ 뜻풀이를 찾아보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사정을 알리는 말이나 글. ‘알림’으로 순화”처럼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자말 ‘소식’은 한국사람이 안 써야 알맞다 여기는 낱말입니다. 다만, 국어사전에서 ‘소식’ 같은 한자말을 찾아보는 어른은 거의 없어요.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한들 이러한 한자말을 씻거나 털려고 애쓰는 어른 또한 거의 없어요.


  곰곰이 생각할 일입니다. 한자말 ‘소식’을 씻거나 털려 한다면, 어떤 한국말을 쓸 때에 알맞으면서 즐거울까요.


  나는 아이들한테 ‘봄소식’ 같은 말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봄노래’라든지 ‘봄얘기’라든지 ‘봄바람’ 같은 말을 들려줍니다. 겨울장군이 차츰 물러나면 자작나무 가지에 움튼 새싹이 봄노래를 부르겠지요. 봄얘기를 속삭이겠지요.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봄꿈을 꾸겠지요.


  그림책 《엄마가 좋아》(한림출판사,1988)를 읽다가 “준비, 시작”이라는 글월을 보고 살며시 책을 덮습니다. 서너 살 어린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 《엄마가 좋아》인데, 일본사람이 쓴 이 그림책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일본말 “요이, 땅(ようい, どん)”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준비, 시작”으로 옮긴 셈이에요. 자, 생각해 봅니다. ‘준비(準備)’와 ‘시작(始作)’은 한국사람이 얼마나 쓸 만한 한자말일까요. 일본사람이 한자로 적은 낱말을 한국사람이 한글로 옮기면 그림책에든 소설책에든 쓸 만하다 여겨도 될는지요.


  우리 집 아이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을 때에 즐거운가 하고 헤아리기 앞서, 나 스스로 퍽 어린 나날 어떤 말을 썼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1970∼80년대에 어린 나날을 보내면서, 나와 동무들은 “요이, 땅”을 비롯해서 “준비, 시작”과 “준비, 출발”과 “준비, 탕”까지 갖가지 말을 썼어요. 이런 말을 써야 한다거나 저런 말은 안 써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우리 둘레 어른 가운데 우리들이 즐겁게 쓸 만한 말투와 낱말을 알려주는 어른도 없었어요. 이때에 이런 여러 가지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말투를 껍데기만 한글로 옮겨 적은 말투’ 말고, 먼먼 옛날부터 한겨레가 쓰던 말투도 몇 가지 썼습니다. 이를테면, “자, 가자”라든지 “하나, 둘, 셋”이라든지 “자, 하자” 같은 말을 아울러 썼어요.


  이제 그림책을 덮습니다. 어린이와 함께 생각을 북돋울 말이란 무엇일까 하고 하나하나 짚어 봅니다. 더 깨끗하다 싶은 말이라든지, 더 아름답다 싶은 말이라든지, 따로 있을까 되새겨 봅니다. 말은 정갈하게 하더라도 삶이 정갈하지 못하거나 넋이 정갈하지 못하다면, 나 스스로 어떤 삶과 넋을 어떤 말에 담아서 나타내는 셈일까 곱씹어 봅니다.


  그림책을 쓰는 어른들은 아주 마땅히 어린이 눈높이를 살펴야 알맞습니다. 어린이가 알아들을 만한 낱말을 고르고 어린이한테 걸맞을 말투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알아듣기만 한다면 어떤 낱말과 말투라도 다 쓸 만하지는 않겠지요.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한 낱말과 말투이면서, 어른 스스로 삶을 아끼고 생각을 살찌우는 낱말과 말투가 되어야겠지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사람이 러시아말을 흉내낼 까닭이 없어요. 네덜란드사람이 벨기에말을 따라할 까닭이 없어요. 베트남사람은 베트남말을 하면 돼요. 라오스사람은 라오스말을 해야지요.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하고,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하면 됩니다. 곧,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할 때에 가장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그림책을 쓰는 어른들은 ‘무늬만 한글인 한국말’이 아니라 ‘알맹이가 알차고 어여쁘며 튼튼한 한국말’을 스스로 슬기롭게 찾으면서 갈고닦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4345.10.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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