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들 누런빛 책읽기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살찌우지 않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한국말이 한국말답게 국어사전에 제대로 안 실리곤 한다. 그런데, ‘노란빛’도 ‘누런빛’도 국어사전에 실린다. 뜻밖이라 하거나 놀랍다 할 만하다. 그렇지만, 두 빛깔말이 국어사전에 실린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 국어사전에 이런 빛깔말이 실리고 안 실리고를 떠나, 노란빛과 누런빛이 얼마나 다르고 어떻게 환하거나 해맑은가를 살결 깊숙이 가슴으로 느끼거나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내지 않으니 스스로 겪지 못한다. 스스로 겪지 못하니 스스로 알지 못한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데 깨닫거나 빛내지 못하고, 스스로 깨닫거나 빛내지 못하기에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노란빛과 누런빛 이야기를 글로 쓴다든지 그림으로 그린다든지 사진으로 찍는다든지, 아니 무엇보다 말로 들려주지 못한다.


  스스로 살아낼 때에 알 수 있다. 스스로 살아낼 때에 비로소 알아보고 느끼며 말할 수 있다. ‘황금빛 물결’이란 너무 안 맞는다. 시골사람은 어느 누구도 ‘황금빛 물결’이라 말하지 않는다. 시골서 살며 ‘금’을 보거나 ‘금빛’을 생각할 일이 없는걸. 도시에서 금덩이나 돈을 주무르는 사람들 눈썰미로 생각하자니 ‘황금빛 물결’이라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튀어나올 뿐 아니라 널리 퍼진다.


  가을들은 ‘가을들빛’이다. 가을들빛은 누런빛이다. 누런빛은 나락빛이다. 나락빛은 사람들을 살찌우고 먹여살리는 밥빛이다. 밥빛은 삶빛이요, 여름부터 가을까지 곱다시 드리운 햇빛이다. 햇살이 살찌우고 돌본 벼빛이다. 흙일꾼이 구슬땀을 흘리며 사랑한 흙빛이면서 손빛이고 사랑빛이다. (4345.1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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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자는 유자빛 책읽기

 


  유자 열매 노랗게 익는다. 멀리서 바라보면 유자랑 탱자랑 엇비슷하다. 가까이서 보면 유자는 크고 탱자는 작은데, 멀리서 바라보면 엇비슷하다. 유자는 무슨 빛깔이라고 할 만할까. 탱자는 무슨 빛깔이라고 할 만할까. 귤은? 감귤은?


  사람은 모두 달라 저마다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큰 테두리에서는 ‘사람’이고, 사람 테두리에서는 ‘이름’이 있다. 유자도 큰 테두리에서는 저마다 달라 ‘유자빛’ 한 마디로는 뭉뚱그릴 수 없다. 크게 얽어 ‘유자빛’이라 하지만, 유자 열매마다 빛깔과 빛결과 빛무늬가 조금씩 다르다. 똑같은 모양이나 크기나 무게나 맛이나 멋인 유자 열매는 한 가지조차 없다. 그런데 유자나무에 달린 유자잎도 모두 다르다.


  어느 나무이건 다 다른 가지가 자라서 다 다른 잎이 돋는다. 다 다른 꽃이 피고 다른 열매를 맺으며 다 다른 씨앗을 키운다. 다 다른 씨앗은 다 다른 땅으로 떨어져 다 달리 뿌리를 내리며 다 다른 나무로 새삼스레 자란다. 얼마나 아름다운 숲이요 마을이며 지구별인가. (4345.1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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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나락 말리기

 


  나락을 말린다. 자동차 뜸하게 다니는 시골마을이기에 길가에 나락을 말린다. 예부터 나락은 햇살이 키우고 햇볕이 말려 주었다. 사람들은 나락을 먹는다기보다 해를 먹고 살았다. 해님이 아이들한테 방긋 웃어 주고, 어른들한테 빙긋 웃어 준다. 온 식구 힘을 모아 나락을 길가에 널고, 다시금 온 식구 기운을 내어 나락을 푸대에 담는다. 몇 천 해 몇 만 해를 이렇게 살아왔을까. 다 함께 먹는 밥을 다 함께 거두고 돌보며 갈무리하던 삶이 참말 얼마나 오래 이어졌을까. 이제, 한 살이라도 젊거나 어린 사람은 몽땅 도시로 나아가는 판이라지만, 한 살 어리든 두 살 많든, 누구라도 밥을 먹고 해를 바라보며 물이랑 바람을 마셔야 숨결을 잇는다. (4345.1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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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따라 하지 마! - 언어 능력이 쑥쑥 크는 즐거운 그림책
차오쥔옌 글.그림, 유엔제이 옮김 / 거북이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즐거운 삶을 배우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04] 차오쥔옌, 《나 따라 하지 마!》(거북이북스,2012)

 


  따라 하지 말라고 해도 동생은 누나나 오빠나 형이나 언니를 따라 합니다. 따라 하지 말라고 해도 아이들은 어버이나 둘레 어른을 따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따라쟁이’일까요. ‘따라놀이’를 즐기는 셈일까요.


  돌이켜보면, 오늘 이곳에서는 어버이나 어른이라는 모습으로 서서 살아가지만, 나 또한 나어린 아이로 살아왔고, 나 또한 갓난쟁이로 으앙 울음을 터뜨렸으며, 어머니젖을 신나게 먹으며 무럭무럭 컸습니다. 나 또한 내 형이나 둘레 누나와 다른 형을 바라보며 ‘따라놀이’를 하는 동안 몸이랑 마음이 자랐어요.


  아이들은 개구진 짓이건 못난 짓이건 따로 가리지 않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따지지 않으니, 그저 따라 합니다. 마음으로 살포시 와닿으니 따라 합니다. 재미나거나 기쁜 웃음 터뜨릴 만하기에 따라 합니다.


  웃는 사람들 둘레에서 아기가 웃고 아이들이 웃습니다. 찡그린 사람들 둘레에서 아기가 울고 아이들이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활짝 열린 시원스런 들판과 마당에서 어른이고 아이이고 신나게 뛰어놉니다. 꽁꽁 닫힌 시멘트 교실에서 꽉 짓눌리거나 억눌린 채 시험공부에 매달리는 아이들 얼굴이 파리합니다. 교사도 학생도 대학바라기에 얽매이고 말아 핏기 가시고 웃음기 없는 낯빛입니다.


  무엇을 할 때에 즐거운 삶일까요. 어디에 있을 때에 기쁜 하루일까요. 누구와 어깨동무하면서 해맑게 웃는 나날일까요.


.. 내가 뭐 하게? 뭐든지 따라 하는 내 동생. 내 동생은 따라 하기 대장 ..  (2쪽)

 


  놀이하는 언니 누나 오빠 형 곁에서 놀이를 구경하며 끼어드는 퍽 어린 아이들입니다. 처음에는 군동무처럼 붙지만, 차츰 몸놀림이 거듭나며 깍뚜기가 됩니다. 깍뚜기로 이렁저렁 흐르던 어느 날, 이제 어엿하게 놀이동무로 거듭납니다. 놀이동무로 까르르 웃음보따리 터뜨리며 놀더니, 바야흐로 저보다 어린 동생을 아끼거나 보살피는 언니 누나 오빠 형 자리에 섭니다.


  아이들은 서로 얼크러져 놀 때에 삶을 배웁니다. 똑같은 나이에 맞추어 줄세우기를 하듯 유치원·어린이집·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를 보내면, 다 다른 아이들 다 다른 삶과 몸과 마음이 예쁘게 어울리지 못해요. 서로 돕고 서로 가꾸며 서로 이끄는 아이들로 나아가지 못해요. 게다가, 이 나라 학교는 온통 대학바라기로 흐를 뿐, 삶바라기나 사랑바라기하고는 동떨어져요. 언니는 씩씩하게 앞장서고, 동생은 기운내어 뒤따르는 흐름을 학교에서 찾을 수 없어요. 오빠는 힘으로 우악스레 내리누르고, 동생은 어서 커서 나이를 먹자는 생각에 사로잡혀요.


  가만히 헤아려 보셔요. 어른들 누구나 나이를 따져요. 밥그릇을 재요. 나이 한 살 더 먹었다며 함부로 ‘말을 까’잖아요. 나이 한 살 더 먹었기에 더 너그러운 마음그릇이 되지 못해요. 나이 한 살 더 먹은 만큼 더 사랑스럽고 따스하며 보드라운 눈길이 되지 못해요.


.. 나 책 볼 거야. 나 따라 하지 마! 누나는 쫑알쫑알 작은 책. 나는 와글와글 큰 책. 나 따라 하는 거 아니야 ..  (4∼5쪽)

 


  비가 옵니다. 바람이 붑니다. 달이 뜹니다. 햇살이 비칩니다. 멧새가 새벽을 새롭게 열며 노래를 부릅니다. 나뭇잎이 한들거리다가 똑 떨어져 가랑잎이 됩니다. 철 따라 새로운 꽃이 피고 새로운 풀이 돋습니다.


  형아는 동생보다 한두 해쯤 또는 서너 해쯤 때로는 너덧 해쯤 먼저 이 땅에 나왔습니다. 형아는 동생보다 여러 해쯤 봄꽃과 여름풀과 가을나무와 겨울들을 누렸습니다. 형아는 동생한테 철철이 숲을 보여줍니다. 철마다 어떤 숲 어떤 빛 어떤 내음인가를 하나하나 보여줍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을 이끌고 바람을 쐽니다. 철 따라 조금씩 다른 바람을 함께 쐽니다. 바람결에 실리는 햇내음을 맡습니다. 봄해는 봄내음 겨울해는 겨울내음입니다. 어른들은 더 커다란 몸이니 더 크게 쓰는 힘이요, 더 기운차게 빨래를 해서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옷가지를 빨래줄에 줄줄이 넙니다. 아이들은 빨래 사이를 뛰어다니며 놉니다. 햇볕에 말리는 이불 사이로 숨어서 숨바꼭질을 합니다. 맨발로 마당을 달리고, 맨발로 고샅을 뛰며, 맨발로 집안으로 들어와 온갖 곳에 발자국을 남깁니다.


  놀이하는 삶이자, 놀이하는 하루입니다. 놀이로 맞이한 다음, 놀이로 마무리짓는 나날입니다. 놀면서 크는 아이들은 서로 뒤죽박죽입니다. 누나는 동생을 이끌고, 오빠는 동생을 업습니다. 동생은 누나를 바라보고, 동생은 오빠한테 기댑니다. 한 살씩 더 먹으며 아이들은 스스로 씩씩하고 튼튼한 몸과 마음으로 거듭납니다. 머리속에 이런 지식 저런 영어 집어넣지 않아도 즐겁습니다. 아니, 머리속에 이런 지식 저런 영어를 안 집어넣으니 개구지게 뛰놀고 신나게 뒹굴 수 있습니다.

 


.. 나 연날리기 할 거야. 나 따라 하지 마! 누나는 네모 네모 네모 연. 나는 세모 세모 세모 연. 나 따라 하는 거 아니야 ..  (18∼19쪽)


  차오쥔옌 님이 빚은 그림책 《나 따라 하지 마!》(거북이북스,2012)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동생은 제 누나를 따라 하며 놉니다. 누나는 동생더러 나 좀 따라 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동생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따라쟁이 동생을 바라보는 누나는 동생이 안 밉습니다. 따라쟁이 동생이 귀찮거나 번거롭거나 성가시지 않습니다. 외려, 누나 저를 따르는 동생이 귀엽거나 사랑스럽거나 예쁘다고 여길 테지요. 요 귀여운 것, 요 사랑스러운 것, 요 예쁜 것, 참 앙증맞게 노는구나 하고 생각할 테지요.


  어느 어버이라도 이 같은 마음이리라 느껴요. 어머니나 아버지 몸짓을 따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아버지가 활짝 웃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말투를 배우며 따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대견하구나 여깁니다.


  그런데 참말 동생이 누나를 따라 했을까요. 참말 아이들이 제 어버이를 따라 할까요. 여러모로 닮거나 비슷하다 하니까 ‘따라쟁이’나 ‘따라놀이’라 할 텐데, 더 깊이 헤아리며 들여다보면 ‘꼭 같지’는 않아요. 아이들은 저희 나름대로 저희 몸과 마음에 맞추어 살짝살짝 바꾸며 저희 가락에 맞추는 놀이를 즐겨요.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빛나는 숨결이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빛나는 숨결이에요.

 


.. 요 녀석, 잡았다! 난 동생을 좋아하는데, 그럼 이것도 따라 할 거야? 킥! 킥! 킥! 내 말 들어 봐 ..  (24∼25쪽)


  가을비 지나간 시골마을 밤하늘은 매우 까맣습니다. 반달이 빛나는 곁으로 수많은 별이 반짝반짝 해맑게 빛납니다. 바람은 자고 둘레는 조용합니다. 밤에 노래하는 밤새마저 아무런 소리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모두 잠든 아주 깊은 밤이로구나 싶습니다.


  지구에서 바라보는 저 별은 저처럼 빛날 텐데, 저 멀디먼 별에서 지구 쪽을 바라보면 지구 둘레 다른 별과 똑같이 조그마한 빛으로, 숱한 별 가운데 하나로 보이리라 생각해요. 지구는 지구라는 별대로 반짝이고, 온누리 뭇별은 이녁 별대로 반짝이겠지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즐거운 삶을 배웁니다. 둘째는 첫째한테서 즐거운 삶을 배웁니다. 셋째는 둘째한테서 배울 테고, 넷째는 셋째한테서 배울 테지요.


  아이들을 줄세우지 않는 이 겨레 이 나라 이 마을이라면 더없이 예쁘리라 생각해요. 아이들이 저마다 즐거이 배우고 어울리며 어깨동무하도록 어른들 모두 기쁘게 새로 배우고 함께 어울리며 나란히 어깨동무한다면 그지없이 어여쁘리라 생각해요. 자, 이제 어른들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해맑게 빛나는 눈망울로 활짝 웃어 봐요. (4345.11.5.달.ㅎㄲㅅㄱ)

 


― 나 따라 하지 마! (차오쥔옌 글·그림,유엔제이 옮김,거북이북스 펴냄,2012.8.28./98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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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책 <원예가의 열두 달>을 읽으며 카렐 차페크 이름을 처음으로 되새긴다. 알고 보니, 이런저런 다른 작품을 드문드문 읽은 적 있구나 싶다. 예쁘게 쓴 책이 널리 사랑받으며, 이 이야기에 깃든 깊은 생각이 사람들 삶으로 찬찬히 스며들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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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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