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태우스님의 "진보의 안티공지영, 어떻게 봐야 할까?"

 

이제 댓글 달 일은 없을 듯합니다.

 

취향이 본질보다 앞선다고

마태우스 님 스스로 밝히시니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스스로 취향을 존중한다고 말하려면,

'사람들 삶에서 본질이 되는 대목'도 존중해야 할 텐데,

이웃(본질)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을까 저로서는 조금도 모르겠습니다.

 

쌍용 노동자한테 4억을 기부한 유명작가가

쌍용 노동자와 함께 여러 해를 싸우고 40만 원을 기부한 '무명(?)작가'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고 하는 이야기하고

마태우스 님 이야기는 한줄기가 되는구나 싶습니다.

(비유입니다)

 

무명작가가 '쌍용 현장을 스스로 떠나는' 게 아니라,

'유명작가가 쌍용에 큰돈을 기부하고 나서는

유명작가와 무명작가가 한 곳에 함께 있는 일을

유명작가 측근과 돈을 받은 단체에서 거북하게 여겨'서

무명작가는 이제 그 '현장에 더는 머물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본질입니다.

 

마태우스 님 취향을 아무리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본질하고 어긋난 말을 자꾸 이러한 글에 퍼뜨린다면

스스로를 갉아먹거나 무너뜨리는 셈이 될 뿐입니다.

 

해고노동자한테는 '돈'만 주면 도와주는 일이 될까요.

 

그럼, 부디 평화롭게 살아가며 글을 쓰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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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어 - 물고기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삽니다
김수우 지음 / 심지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마음으로 읽는 책
 [책읽기 삶읽기 117] 김수우·윤석정, 《百年魚》(심지,2009)

 


  부산 중구 동광동4가 5-2번지 2층에 〈백년어서원〉이라 하는 책쉼터가 있습니다. 인터넷에도 작은 방(http://cafe.daum.net/100fish)이 있어요. 서울 못지않게 커다란 도시인 부산에는 사람도 많고 집도 많고 자동차도 많습니다. 어디를 가도 북적거리고, 어디를 가도 밤하늘 하얀 별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큰길에 서면 자동차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골목에 서도 싱싱 달리는 자동차가 많아 아슬아슬합니다. 나뭇잎을 간질이는 바람결을 느끼면서 햇살을 누릴 만한 땅뙈기가 매우 모자라요. 풀잎을 춤추게 하는 바람무늬를 바라보면서 햇볕을 쬘 만한 터가 아주 작아요.


  책쉼터 〈백년어서원〉은 도시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마음을 쉬고 몸을 달래면서 스스로 삶을 북돋우도록 돕는 자그마한 둥지 구실을 하지 싶어요. 이곳을 지키는 김수우 시인은 윤석정 님이 나무에 새긴 ‘나무물고기’마다 한 가지씩 이야기를 달아 《百年魚》(심지,2009)라 하는 책을 내놓았어요. 이 책은 여느 책방에서는 구경할 수 없습니다. 인터넷책방에서도 품절이라고만 뜰 뿐, 장만하기 퍽 힘들어요. 그러나, 즐거이 다리품을 팔아 〈백년어서원〉에 찾아가면 이 책을 기쁘게 만나 읽을 수 있어요.


.. 하늘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배경입니다. 가장 아득하고 가장 가깝습니다. 누구에게나 높이이면서도 깊이이고 동시에 넓이로 열립니다 … 참 지혜는 삶은 공평하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 아닌지 … 진실한 사람에겐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제값을 지니고 반짝입니다 ..  (13, 23쪽)


  〈백년어서원〉에서는 따순 차를 마실 수 있고, 책꽂이에 가득한 여러 책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책이야 도서관에도 있고 새책방에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곳곳에 북카페가 많이 생겨서, 북카페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어요. 그러나 〈백년어서원〉이 갖춘 책은 다른 북카페하고 사뭇 다릅니다. 제법 큰 출판사에서 차리는 북카페하고도 퍽 다릅니다. 하나하나 알뜰히 사서 읽으며 그러모은 책들이 있는 〈백년어서원〉이기에, 이 책들을 건사한 사람 눈길을 함께 읽을 수 있어요. 시를 쓰는 김수우 님이라서 시집을 꽤 널리 살필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김수우 님이라서 사진 담긴 책을 여러모로 쏠쏠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숨가쁜 도시에서 숨을 돌리도록 이끌고, 앞만 보느라 바쁜 도시에서 옆을 보도록 돕습니다.


  더없이 마땅한데, 밭에서 김을 맬 적에 앞만 보며 김을 맬 수 없어요. 앞 뒤 옆을 골고루 살피며 알뜰히 김을 매야 합니다. 한쪽만 바라보면서는 흙일을 하지 못해요. 이곳저곳 골고루 돌아보는 눈썰미와 손길이 되어야 흙을 만질 수 있어요.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이들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멧골에서 나무나 풀을 만지는 이들도 이와 같아요.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셔요. 내 눈길 테두리에서만 별을 바라보지 않아요. 고개를 빙 돌리면서 온 하늘을 두루 살피며 별을 바라봐요. 한낮에 하늘을 올려다보셔요. 나는 내 눈으로 바라보이는 곳만 바라보지 않아요. 고개를 빙 돌리면서 온 하늘 구름을 보고, 저 먼 끝자락 파란빛까지 즐겁게 바라봐요.


.. 선행은 자연을 따르는 까닭에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음입니다. 그러나 선한 인연을 열매를 맺기 마련 … 주는 자는 늘 넉넉하고 제 것을 챙기는 자는 늘 모자라기 마련 .. (49, 57쪽)


  오늘날은 새책방도 헌책방도 인터넷에 목록 띄운 가게가 많아, 집이나 일터에서도 손쉽게 책을 살 수 있어요. 머잖아 도서관에서도 인터넷으로 ‘빌릴 책’을 신청해서 집에서 받도록 할는지 몰라요. 아니, 종이책을 몽땅 전자책으로 바꿔서 집에서 셈틀을 켜면 느긋하게 화면으로 책을 읽도록 할는지 몰라요.


  그런데 말예요, 사람들이 집이나 일터에서 셈틀을 켜며 ‘살피거나 찾는’ 눈길이랑 손길로 어떤 책을 살피거나 찾을 수 있을까요. 목록에 30만 권이나 50만 권이나 100만 권이 올랐다고 하는 인터넷책방에서 1만 권이나 10만 권쯤 목록을 죽 훑을 수 있나요. 다문 1000권이라도 훑고 나서 책을 사는가요.


  몸을 움직이고 다리품을 팔아 책방으로 나들이를 가면, 그야말로 수많은 책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살피거나 찾을 수 있어요. 목록만 뒤져서는 만날 수 없는 책을 골고루 만나면서 내 마음을 북돋아요. 목록으로 볼 때에는 알기 어렵던 책을 가만히 어루만지면서 줄거리를 훑을 수 있어요.


  값을 치러 책을 삽니다. 책방에 서서 넋이 사로잡히도록 읽은 책을 삽니다. 안 읽은 책을 살 수 없습니다. 책방에 나들이를 가서 ‘읽은’ 책을 사고, 읽은 책을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금 읽으며, 집에 닿아 새롭게 읽습니다.


  한 번 읽고 덮은 뒤 다시는 안 들출 책이라면 살 까닭이 없습니다.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라야 살 까닭이 있습니다. 두고두고 읽을 뿐 아니라 아이들한테 곱게 물려주고픈 마음이 드는 책이라야 살 만합니다. 나무를 베어 얻은 종이로 책을 짓는 까닭은 ‘더 많이 팔아치워 더 많이 돈을 벌자’는 뜻이 아니에요. 오래도록 알차게 건사해서 뒷사람한테 슬기롭게 물려주자는 뜻입니다.


.. 천천히 가면 얼마나 무수한 것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요 … 이름이 우리의 본질은 아니지만 이름을 통해 만나므로 내 이름도 당신 이름도 꽃잎보다 눈부십니다. 이름을 불러 관계하니, 이름은 곧 마음입니다 ..  (93, 171쪽)


  이야기책 《百年魚》를 읽습니다. 백 가지 나무물고기는 저마다 어떤 빛과 꿈과 사랑을 담았는가 곰곰이 생각합니다. 물고기 모양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저마다 어떤 이야기를 품에 안았는가 생각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맑은 숨을 들이마시며 목숨을 잇는 나는 날마다 어떤 생각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가 생각합니다.


  내 어버이는 나한테 어떤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요. 나는 나한테 어떤 이름을 스스로 붙여 주었나요. 나도 내 어버이처럼 어버이가 된 뒤,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이름을 붙여 주었나요.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어떤 어버이가 되어 어떤 아이들한테 어떤 이름을 붙여 줄 만할까요.


.. 나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인 것을 ..  (213쪽)


  누구나 하늘이요 누구나 땅입니다. 누구나 바다요 누구나 냇물입니다. 누구나 꽃이며 누구나 숲입니다.


  마음을 열면 스스로 하늘이 되고 숲이 됩니다. 마음을 펼치면 누구나 서로를 넉넉히 끌어안는 바다가 되고 냇물이 됩니다. 시원한 바람이 됩니다. 해맑은 잎사귀가 됩니다. 어여쁜 노래 들려주는 풀벌레와 멧새가 됩니다.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요. 슬기로운 마음을 아리따운 생각으로 돌보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요. 두 다리로 이 땅을 씩씩하게 밟을 수 있기를 빌어요. 두 손으로 이웃과 동무하고 살가이 어깨를 겯고 걸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1.10.흙.ㅎㄲㅅㄱ)

 


― 百年魚 (김수우 글,윤석정 깎음,심지 펴냄,2009.3.31./110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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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와 보수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는 어버이일 뿐, 진보도 보수도 아닙니다. 진보라서 젖을 물리고 보수라서 가루젖을 먹일까요. 어버이는 늘 사랑을 먹입니다.


  빨래하는 나는 진보인가요, 보수인가요? 나는 기계 안 쓰고 손으로 빨래한 지 열아홉 해째인데, 나는 진보인가요, 보수인가요? 나는 그저 빨래하는 살림꾼일 뿐입니다. 식구들 옷을 아끼고 보듬으려는 아버지일 뿐입니다. 기계빨래를 하는 사람은 보수일까요, 진보일까요?


  삶을 즐겁게 짓고 사랑스레 누릴 때에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들은 삶을 빛낼 때에 그야말로 환히 빛나는 사람일 뿐, 진보이기에 빛나거나 보수이기에 어둡지 않습니다.


  진보와 보수로 사람을 가르거나 금그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무개가 진보이면 어떻고, 저무개가 보수이면 어떻습니까.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 들판 나락은 진보도 먹고 보수도 먹습니다. 유기농 곡식이든 화학농 과일이든, 진보와 보수 똑같이 누구나 먹습니다.


  숲이 뿜는 푸른 바람과 햇살이 드리우는 따순 햇살은 진보와 보수를 가르지 않습니다. 바람도 햇살도 비도 눈도 모두 사람이나 짐승이나 푸나무를 가르지 않습니다.


  금을 그을 때에는 바로 이때부터 사랑과 믿음과 꿈을 잃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사람을 금긋지 않으려 하는 당신이라면, 정규·비정규직으로 사람을 가를 생각이 없는 당신이라면, 진보도 보수도 아닌 ‘한 사람’이 되길 빕니다. (4345.1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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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demian 2012-11-09 19: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서재에 처음 글 남깁니다^^ 삶을 즐겁게 짓고 사랑스레 누릴 때에 아름다운 사람이라 느껴집니다. 라는 구절이 정말 좋습니다..
그렇지만, 보수형 인간과 진보형 인간은 성향이 분명 나뉘어지고 있는 거 같아요. 글쎄요, 제대로 된 '보수'의 의미라면 또 모르겠지만..우리 나라에선 협애한 울타리의 이익만 고려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그 분들이 '보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 거 같습니다만..

파란놀 2012-11-09 20:13   좋아요 0 | URL
'진보'와 '보수'가 무엇일는지 잘 생각해 보셔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에 '어느 정당 누구'를 찍느냐로 진보와 보수를 가를 수 있을까요?

삶을 어떻게 누리는가를 바라볼 때에는 '진보'와 '보수'를 어떻게 가를 수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을 적에는 '새누리당 사람을 안 뽑는다'고 하지만, 막상 집에서 아무 집일을 안 하고 남성 가부장 권력을 누리는 사람을 두고도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해요. 요리도 빨래도 육아도 하지 못하는 '진보정치인'들이나 '진보지식인'도 참말 '진보'라는 이름이 걸맞을까요? 스스로 농사지을 줄 모를 뿐 아니라, 손에 흙이나 물을 안 묻히고 자가용을 모는 도시사람도 진보라고 해야 할까요?

참말 진보란 무엇일까요. '협애한 울타리의 이익'이라고 하지만, 그 '협애한 울타리의 이익'을 그분(보수)들이 제대로 알고나 그 울타리 이익을 붙잡을지도 생각해 볼 일이에요. 진보도 보수도 실질로 보면, 모두 헛꿈이거나 모래알조차도 안 되지 싶습니다.

jeandemian 2012-11-10 15:33   좋아요 0 | URL
칼로 두동강 낼듯이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도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엔 진보라 이름붙일수도 제대로 된 앎도 아니겠지요. 아는것과 행동사이에도 의지와 체화라는 깊은 벽이 있는 것 같습니다..

파란놀 2012-11-10 20:21   좋아요 0 | URL
언론이나 여러 곳에서 '진보-보수 논쟁'을 만들어 자꾸 퍼뜨리는 까닭이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런 논쟁에 휩쓸리면 '스스로 내 삶을 어떻게 가꾸고 사랑할까' 하는 생각에서 멀어지거든요.

이런 논쟁에 휩쓸리면서 '네 편 내 편 나누기'에 길들어져요. 그래서, 누구보다 진보 쪽이라 하는 사람들이 '분열'이 많이 생기는 까닭이, 스스로 논쟁을 해야 발전을 이룬다고 잘못 여기기 때문이에요.

논쟁이 아니라 '이야기'를 해야 하고, 무엇보다 스스로 삶을 일구어야 진보이든 무엇이든 이루어질 수 있어요. 곧, 내 삶부터 바꾸지 않고 논쟁만 해 본들, 아무 얻는 것 없고 달라질 것 없답니다.

누가 옳고 그르니 하고 따져서 뭐 하겠어요. 내가 내 삶을 '옳고' 아름답게 가꾸면 될 뿐인걸요. (방관자 소리가 아니라, 주체자 소리인데, 이를 잘 알아들으실 수 있기를 빕니다)
 


 ‘쌍용’ 이야기를 쓰면 진보인가?

 


  ㅈㅈㄷ신문도 ‘쌍용’ 이야기를 노동자 눈높이에서 쓸 수 있다. 그러면 ㅈㅈㄷ신문 기자는 진보인가? ㅇㅁㅂ 대통령은 ㅈㅈㄷ신문에서도 까거나 헐뜯거나 나무랄 수 있다. 그러면 ㅈㅈㄷ신문 기자는 진보인가? ㅇㅁㅂ 대통령을 손가락질한대서 진보가 될 수 없다. 옛 독재자를 꾸짖는대서 진보가 될 수 없다. ‘쌍용’ 이야기를 글로 쓴 사람은, “쌍용 이야기를 글로 썼을” 뿐이다. ㅇㅁㅂ 대통령을 손가락질한 사람은, “ㅇㅁㅂ 대통령을 손가락질했을” 뿐이다. 옛 독재자를 꾸짖은 사람은, “옛 독재자를 꾸짖었을” 뿐이다.


  이른바 ‘프레임 선점 논쟁’이라든지 ‘진보 논쟁’이란 모두 덧없다. 진보란 ‘목소리 내기’가 아니요, ‘네 편 내 편 금긋기’가 아니다. 스스로 삶을 아름답고 사랑스레 북돋우면서 올바르고 슬기롭게 가다듬는 모습이 곧 ‘진보’이다. 진보는 목소리가 아닌 삶이다. 보수 또한 목소리가 아닌 삶이다. 사람은 누구나 제 목숨을 튼튼히 건사하면서 날마다 새롭게 나아가려고 한다. 한 사람 몸은 보수와 진보가 얼크러지면서 씩씩하거나 튼튼할 수 있다. 한 사람 마음은 진보와 보수가 어우러지면서 예쁘거나 아름다울 수 있다.


  북녘땅에서 굶주리다가 남녘땅으로 어렵사리 건너온 사람을 돕는 사람은 진보인가 보수인가?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오직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 동냥그릇을 들고 우리 집에 동냥을 한다 할 적에, 이이한테 “여보게, 당신 진보요? 보수요?” 하고 물을 까닭이 없다. 동냥하는 이가 굶지 않도록 밥술 나누어 주면 된다.


  꽃은 꽃일 뿐, 진보 꽃도 보수 꽃도 없다. 꽃 이야기를 쓰면 되지, 진보 눈길로 바라보거나 보수 눈썰미로 들여다볼 까닭이 없다. 삶을 쓸 수 있을 때에 삶쓰기가 되면서 삶을 빛낸다. 삶을 쓰지 못할 적에는 겉치레나 껍데기로 진보인 척할는지 모르나, 껍데기 진보나 겉치레 진보는 머잖아 시들시들 사라지고 만다.


  ‘쌍용’ 이야기를 다룬 책은 진보 목소리인가? ‘삼성 반도체’ 이야기를 다룬 책은 진보 목소리인가? 진보도 보수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쌍용’ 이야기를 다룬 책 가운데 하나요, ‘삼성 반도체’ 이야기를 적바림한 책 가운데 하나이다. 제대로 쓴 책은 제대로 쓴 책이고, 겉만 훑는 책은 겉만 훑는 책이다. ‘줄거리(소재)’가 노동자 이야기라서 더 아름다울 까닭이 없다. 줄거리만 가난하거나 여린 이 삶을 다룬대서 더 읽혀야 하지는 않다. (4345.1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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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태우스님의 "진보의 안티공지영, 어떻게 봐야 할까?"

 

 

공지영 작가가 '진보 편'인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공지영 작가 스스로 '나는 진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보 쪽'이 될 수는 없어요. 스스로 삶이 진보이면 누가 금을 긋지 않아도 진보일 테니까요.

 

하종강 님은 언제나 '노동운동'만 하고, 노동운동을 글로 쓸 때에도 '인터뷰 받는 사람'과 하나하나 주고받고 살피면서 책이나 기사로 내놓습니다. '원문 왜곡이나 훼손'을 하지 않아요.

 

마태우스 님도 본질하고는 다른 쪽을 바라보시는 듯한데, 어느 쪽을 바라보든 저마다 자유예요. 그런데 이번에 <의자놀이>라는 책에서 하종강 님을 비롯해 노동 쪽 사람들이 공지영 작가를 비판하는 까닭은 바로 '원문 왜곡과 훼손'이에요.

 

책을 많이 팔아서 몇 억에 이르는 돈을 기부해 준다 해서 '노동운동'이 이루어질까요? 그러면 다른 사업장과 파업현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베스트셀러 한 권으로 어떤 사람을 얼마나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노동운동을 돕는다든지, 이를테면 농민운동을 돕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시골 농사꾼하고 직거래로 유기농 곡식을 사 주면, '도시사람으로서 농민운동을 함께 하는' 셈이 될까요? 유기농 곡식이기에 못생기거나 자그맣거나 벌레먹은 것도 '제값을 치르며 기꺼이 맛나게' 먹을 뿐 아니라, 틈틈이 '농활'을 가서 농사짓기와 거름내기를 비롯한 모든 시골살이를 하나하나 몸으로 겪으면서 '농민운동'이나 '농민돕기'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쌍용 문제는 공지영 작가 아니더라도 여러 사람이 기록했어요. '공지영 작가가 선정'된 것이 아니라, '출판사와 작가가 이것을 쓰자'고 했을 뿐이에요.

 

출판사와 작가가 서로 '이것을 글로 쓰자'고 한 대목을 높이 사는 일이란 개인 자유이지만, '쌍용 노동자'나 '노동운동 기록하던 사람'들은 공지영 작가더러 이 이야기를 써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마태우스 님이 궁금해 하는 것은 마태우스 님 스스로 찾아서 풀면 돼요. 그러나, 본질과 얽힌 대목은 옳고 바르게 바라볼 줄 안다면, 스스로 궁금함을 풀어야 한다고 느껴요. 본질을 옳고 바르게 바라보지 않고서 어떤 궁금함을 풀 수 있을까요?

 

개인 취향으로 공지영 작가를 좋아하든 말든, 본질과 사실과 거짓을 옳고 바르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떠한 문제도 풀리지 않을 뿐 아니라, '진보 쪽에 있다는 사람들이 공지영 작가를 달가이 여기지 않는 수수께끼' 또한 풀 길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1102160558
(이 글을 읽어 보시면 '참과 거짓'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나마 짚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817171522
(덧붙여 이러한 글도 있으니 함께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본질'을 읽지 않으시는 분하고는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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