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한테 책이란 (도서관일기 2012.11.7.)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아이들한테 책이란 무엇이 될까. 아이들은 책을 얼마나 읽어야 할까. 우리 아이들 또래 다른 아이들은 진작부터 보육원·유아원·어린이집·유치원을 다닌다. 다른 아이들은 이런저런 곳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영화를 보며 영어노래를 배운다. 어느 아이는 한글을 벌써 떼고 혼자 그림책을 읽기도 하리라. 우리 집 다섯 살 큰아이는 이제 한창 글놀이를 할 뿐, 나도 옆지기도 딱히 큰아이한테 글을 가르치지 않는다. 큰아이는 제 이름을 즐거이 쓰며 놀다가, 이제 누가 제 이름을 따로 적어 주지 않아도 혼자 씩씩하게 쓸 줄 안다. 아버지나 어머니한테 그림책 큰 글씨 읽어 달라 하면서 때때로 하나둘 익히곤 한다.


  작은아이가 아직 안 태어난 지난날, 도시에서 살며 자연그림책이나 생태그림책을 되게 많이 사서 보았다. 자연사진책이나 생태사진책도 꽤나 많이 사서 모았다. 글로 된 환경책도 퍽 많이 사서 읽었다. 그런데 막상 시골로 삶터를 옮겨 보금자리를 이루고 보니, 이런 자연그림책이나 저런 생태사진책이 그닥 쓸모있지 않다. 늘 숲을 보니까 자연그림책이 덧없다. 언제나 숲이 곁에 있으니 생태사진책이 부질없다. 자연그림책이 숲을 더 깊거나 넓게 보여주지 않는다. 자연그림책은 숲하고 동떨어진 채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 ‘숲맛’을 조금이라도 느끼도록 해 주려고 빚는다. 생태사진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시골사람이 시골을 더 살가이 깨닫고 느끼도록 이끄는 자연생태 이야기책은 아직 없다. 아니, 아마 앞으로도 나올 일이 없으리라 본다.


  우리 서재도서관으로 뿌리내리면서 집숲으로도 가꿀 수 있기를 바라는 시골 폐교 자리에 아이들과 놀러온다. 이 터를 교육청한테서 우리보다 먼저 빌려 건물 둘레에 나무를 빼곡히 심고 내팽개친 분들은 한 해 내내 한 차례도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다. ‘나무 심었으니 이제 내 땅이야!’ 하는 듯할 뿐, 조금도 돌보지 않고 건사하지 않는다. 우리 식구는 이 좋은 터에 풀약 하나 안 치고 정갈한 숲과 밭으로 돌보면서 책이 함께 있는 예쁜 마을쉼터를 일구고 싶다.


  우리한테는 마음이 있고 책이 있다. 아직 돈은 없다. 날마다 꿈을 꾼다. 머잖아 우리들 주머니에 돈이 들어와 이 터를 ‘버려진 땅’이 아닌 ‘싱그럽고 푸르게 빛나는 숲과 책밭’이 되도록 보살필 수 있으리라고 즐겁게 바란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아랑곳하지 않는다. 저희 아버지가 책을 몇 만 권 건사하든 말든 대수롭지 않다. 어떤 이가 이 터를 돈으로 거머쥐려고 나무를 잔뜩 심든 말든 대수롭지 않다. 그예 재미난 놀이터요, 그저 마음껏 노래하고 뛰거나 구르는 좋은 앞마당이다. 겨울 지나고 새봄 찾아오면 곳곳에서 딸기꽃 피고 들딸 먹는다며 아이들 날마다 마실을 하자고 조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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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0) -의 치유 : 상실감의 치유

 

아이가 느낄지도 모르는 상실감의 치유를 위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웬디 이월드·알렉산드라 라이트풋/정경열 옮김-내 사진을 찍고 싶어요》(포토넷,2012) 57쪽

 

  ‘상실감(喪失感)’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후의 느낌이나 감정 상태”를 뜻한다고 해요. 쉽게 말하자면 “잃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 보기글처럼 “아이가 느낄지도 모르는 상실감”처럼 적으면 ‘느끼다’라는 낱말이 겹으로 쓰인 꼴이 되고 말아요. 적어도 “아이의 상실감”처럼은 적어야 올바르고, “치유(治癒)를 위(爲)해”와 묶어서, “아이가 잃어버린 마음을 달래자면”이나 “아이가 무언가 잃은 허전함을 다독이려면”이나 “아이가 무언가 잃어 아픈(슬픈) 마음을 보듬자면”으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최소한(最小限)’은 ‘적어도’로 손보고, ‘부분적(部分的)으로라도’는 ‘조금이라도’로 손봅니다.

 

 상실감의 치유를 위해
→ 상실감을 씻자면
→ (잃은) 아픔을 달래자면
→ (잃어버린) 슬픔을 다독이려면

 

  한자말 ‘상실감’과 ‘치유’를 그대로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상실감을 치유하자면”이나 “상실감을 치유하려면”쯤으로는 적어야 알맞습니다. ‘(무엇)의 치유’처럼 적는 꼴은 일본 말투입니다. 한국 말투로는 이렇게 적지 않아요. 한국 말투로는 ‘(무엇)을 치유한다’처럼 적거나 ‘(무엇)을 씻는다/달랜다/다독인다/다스린다’처럼 적어요.


  깊이 헤아릴 수 있다면 ‘상실’이나 ‘치유’ 같은 한자말부터 안 쓸 만합니다. 이러한 한자말을 자꾸 쓰기 때문에 ‘-의’ 넣는 일본 말투가 한국 말투라도 되는 듯 끝없이 스며들어요. 스스로 낱말부터 알맞게 살피고 고를 때라야, 비로소 말투를 슬기롭고 어여삐 다스릴 수 있어요. 작은 말씨 하나를 헤아리면서 서로 기쁘게 나눌 말빛을 찾아요. 작은 낱말 하나 곱게 영글면서 다 함께 활짝 꽃피울 말삶을 북돋을 수 있어요.


  스스로 잃어버린 한국말을 찾을 수 있기를 빌어요. 한국사람 스스로 잃은 넋과 말과 삶을 아름다이 되찾아 환하게 빛낼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1.11.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아이가 무언가 잃어버려 아픈 마음을 달래자면 적어도 조금이나마 그렇게 해야 한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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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알갛게 물드는 쑥잎

 


  가을은 바알간 단풍잎이나 노오란 은행잎에만 찾아들지 않습니다. 알록달록 숲에도 찾아들고, 끝자락부터 바알갛게 물드는 쑥잎에도 찾아듭니다. 스스로 씨를 내리고 스스로 자라다가 스스로 꽃을 피우는 쑥풀은 겨울이 되면 온 잎사귀가 바알갛게 타들면서 시들시들 흙으로 돌아갈까요. 이듬해에 새롭게 피어날 꿈을 꾸면서 새근새근 깊은 겨울잠을 잘까요. 우리 집 뒷밭 땅뙈기에서 흐드러지는 바알간 쑥풀이 겨우내 어찌 지내며 새롭게 거듭날는지 지켜봅니다. (4345.1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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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쑥꽃 책읽기

 


  바지런히 뜯어서 먹는 쑥풀에서는 꽃대가 나와 꽃잎이 벌어지는 모습을 못 본다. 쑥이 돋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가만히 둔 쑥풀에서는 꽃대가 튼튼히 나오고 꽃잎이 살살 벌어지는 모습을 본다.


  마을 어르신들은 논둑이건 밭둑이건 쑥풀이 자라는 꼴을 지켜보지 않는다. 낫으로 베거나 손으로 뜯거나 기계로 밀거나 약을 뿌려 죽인다. 시골사람이래서 쑥꽃을 보는 일은 만만하지 않으리라 느낀다. 그런데, 쑥풀만 쑥꽃을 보기 힘들지는 않다. 모시풀 모시꽃을 본다든지, 미나리풀 미나리꽃 보기도 만만하지 않다. 따로 꽃씨를 받아 키우는 꽃송이가 아니라 할 적에는 시골 풀섶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호박이나 수세미처럼 열매를 베풀지 않으면, 딸기처럼 열매를 내놓지 않으면, 냉이나 달래처럼 통째로 밥이 되어 주지 않으면, 시골자락이라 하더라도 풀은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얻기 어렵다.


  도시에서는 어떨까. 도시사람은 도시 ‘미관’이나 ‘경관’을 따지니까 쑥풀이 마음껏 흐드러질 데가 드물 테지. 건물지킴이가 뜯을 테고, 어디라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일 테니까 뿌리를 내리거나 줄기를 올릴 틈바구니가 없겠지. 아주 조그마한 틈에 아주 조그마한 씨가 깃들어 푸른 줄기 올라오더라도 도시사람이 쑥풀을 뜯어서 즐기거나 쑥꽃이 어여쁘다면서 바라볼 일이 있을까. 도시에도 곳곳에 푸른 기운이 넘치지만, 도시사람은 스스로 시멘트와 아스팔트 무덤에 사로잡히면서 잿빛 눈길이 되고 만다. (4345.1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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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놀이

 


  아름답게 꿈꾸며 살아가기에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가장 좋은 마음을 품으며 말을 섞고 사랑을 빛내며 뜻을 펼칠 때에 내 하루를 즐거이 누립니다. 스스로 놀이를 즐겁게 생각하기에 언제나 스스로 즐겁게 웃습니다. 누가 이끌거나 시키는 놀이를 한다면 자꾸 누군가한테 기대요. 스스로 삶을 짓기에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고 스스로 꿈을 피울 수 있습니다.


  바람을 마시고 햇살을 먹는 삶은 어느 누구도 따로 배우지 않아요. 갓난쟁이도 아이도 푸름이도 어른도 스스로 바람을 마시고 햇살을 먹어요. 돌이켜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바람·햇살·빗물(또는 냇물), 이렇게 세 가지만 먹고살았을 수 있어요.


  작은아이가 누나 신을 예쁘게 여겨 신고 벗는 놀이를 한참 합니다. 여러 날째 지치지 않고 씩씩하게 신발놀이 즐깁니다. (4345.11.1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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