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을 선물하는 책읽기

 


  고흥을 나서면서 감 한 꾸러미를 장만한다. 지난해를 헤아리면 올해 감값은 살짝 올랐다 할 텐데, 서울에서 사람들이 사다 먹을 감값을 헤아리면 아주 싸다. 게다가 마을 감나무에서 딴 감이니,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길러서 딴’ 감인지 또렷하게 알 수 있기도 하다. 흔한 말로 ‘그냥 국내산’이 아니라 ‘우리 마을 예쁜 감’이다. 지난해에는 유자나 석류나 참다래를 들고 나와서 다른 고을 이웃한테 선물해 보곤 했는데, 유자나 석류나 참다래를 받은 분들 낯빛이 그닥 ‘반갑다’고 느끼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차를 달여 마시도록 잘게 썰어 말려서 달게 재운 유자가 아닌, 돌멩이처럼 단단한 울퉁불퉁 유자 열매일 때에는, ‘나더러 이를 어쩌라구?’ 하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면, 참다래쯤은 사람들이 가끔 사다 먹는다 하더라도, 석류를 애써 사다 먹는 사람은 드물다. 가게에서 ‘석류 이름을 갖다 붙인 어설픈 음료수’를 사다 마시는 사람은 있지만, 정작 ‘참 석류’를 사다가 손수 짜서 ‘참 석류맛’을 느끼려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고흥을 나서는 길에 감 한 꾸러미를 낑낑 짊어지면서 생각에 잠긴다. 내가 고흥으로 들어와 살기 앞서, 아직 인천에서 살던 때, 또 충북 음성에서 살던 때, 따로 ‘감을 사다 먹은’ 일은 드물다. 음성에서는 집 언저리 감나무에서 감을 따다 먹기는 했지만, 굳이 감을 틈틈이 한 꾸러미씩 사다가 섬돌에 올려놓고는 하루에 몇 알씩 우걱우걱 껍질째 씹어먹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인천에서든 음성에서든 바나나를 꽤 자주 사다 먹었고, 능금이라든지 배라든지 귤을 곧잘 사다 먹었구나 싶다.


  문득 돌아보면, 도시사람은 감을 잘 안 사다 먹는다. 마당을 두어 감나무를 키워 먹는 이도 아주 적다. 도시사람 가운데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프다 생각하는 사람이 가끔 있기는 있되, ‘마당 있는 집’을 장만해서 살자면 어떻게 해야 즐거울는지 찬찬히 살피며 이 삶길을 씩씩하게 걷는 사람은 참으로 적다. 그러니까, 집에 열매나무 한두 그루 심어서, 열매나무를 손수 거두는 사랑과 꿈을 키우지 못한다. 언제나 열매를 가게나 길거리에서 사다가 먹을 뿐이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일군 열매나무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시골에서 어떤 햇살과 바람과 빗물을 먹으면서 자란 열매나무에 맺힌 꽃이 지면서 돋는 열매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내 얘기부터 하자면, 나는 인천에서 살던 때, 석류꽃이든 감꽃이든 배꽃이든 능금꽃이든 거의 못 보았다. 골목마실을 하면서 이웃집 마당 한켠에서 자라나며 피는 석류꽃이랑 감꽃이랑 배꽃이랑 능금꽃이랑 호두꽃이랑 밤꽃이랑 탱자꽃이랑 대추꽃이랑 …… 애써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찍기는 했지만, 내 삶으로 살포시 스며들기는 못했다. 옆지기가 꿈꾸는 결을 살펴서 시골로 삶터를 옮겨 아이들과 시골살이를 누리는 동안 천천히 깨닫는다. 나 또한 마음속 깊이 시골살이를 바랐고, 시골에서 살아가며 내 넋이랑 눈이랑 빛이 차츰 환하게 트는구나 싶다. 이러면서 들꽃과 나무꽃을 예쁘게 들여다보는 눈썰미를 키운다. 들꽃과 나무꽃을 예쁘게 들여다보는 아버지 곁에서 아이들도 들꽃이랑 나무꽃을 예쁘게 들여다본다. 그래, 그렇구나, 아버지부터 스스로 예쁘게 살면, 아이들은 스스로 야물딱지게 예쁜 손길을 북돋우는구나. 예쁜 어버이와 예쁜 아이이지, 어버이는 못난 길을 거닐면서 아이들만 예쁘라 바랄 수 없구나.


  인천에서 지내는 이웃들을 한 사람씩 만나며 감을 열 알씩 선물한다. 감알 열을 찬찬히 내려놓으며 내 가방은 가벼워진다. 헌책방 일꾼들한테, 마을사진관 지기한테, 옛 단골 튀김닭집 아저씨한테, 우리 형한테, 감 열 알씩 선물한다. 우리 형은 감을 무척 좋아하고 잘 먹는단다. 그랬나? 그렇구나. 형과 동생 사이인데, 어쩜 처음 알았네. 고흥으로 돌아가면 형네 집에 감 한 꾸러미를 부쳐야겠네. 이제 스무 알 남은 감을 몇 사람한테 더 선물할 수 있을까. 그래, 화평동 그림할머니한테 찾아가 열 알을 드려야지. 그리고 열 알은? 음, 열 알은 고흥으로 돌아가기까지 마주칠 분들한테 한 알씩 나누어 줄까. 달콤한 감맛과 상큼한 감내음과 맑은 감빛을 두루 즐길 수 있기를 빈다. 4345.12.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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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지리산

 


  겨울이 되어도 영 도 밑으로 내려갈 일이 아주 드문 고흥땅에서는, 눈발이 날린다 하더라도 내리자마자 녹는다. 다른 곳에서는 펑펑 쏟아지는 눈 때문에 길이 막힌다느니 어쩐다느니 하지만, 참말 고흥에서는 눈 구경조차 힘들고, 쌓인 눈마저 볼 수 없다. 그런 고흥에서 지내다가 오랜만에 고흥을 벗어나 인천으로 오는 길에 다른 시골을 바라보는데, 구례를 지나면서 지리산을 보고는, 아, 소리가 절로 터져나온다. 그렇구나, 눈이 소복히 쌓여 하얀 산이 되는구나. 지리산이 저렇게 새하얀 겨울산이구나. 참 예쁘네. 구례나 하동이나 곡성이나 남원 사람들은 춥다고, 겨울에 덜덜 떨린다고 할 테지만, 이 어여쁜 새하얀 멧자락을 바라보며 가슴속에 새하얀 사랑이 찬찬히 피어나겠지. 4345.12.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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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12-11 00:28   좋아요 0 | URL
추워서 그렇지 겨울산이 참 멋있지요^^

파란놀 2012-12-11 07:26   좋아요 0 | URL
네, 산은
겨울에도 여름에도 봄에도 가을에도
참 아름다운 숨결을 들려주는구나 싶어요
 

인천으로 온 글쓰기

 


  갑작스레 고흥에서 인천까지 날 듯 찾아온다. 옆지기 여동생 시집잔치에 찾아가려고 일산으로 마실을 하며 이레를 보낸 뒤, 장인어른이 우리 식구를 일산부터 고흥까지 눈길을 열 시간 달려 데려다주었는데, 장인어른이 고흥에서 닷새를 묵고 일산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길이라, 먼길 홀로 가시면 힘드리라 여긴 옆지기가 나더러 서울이나 인천에 볼일을 만들라 해서 바지런히 머리를 굴려 ‘그래 맞아, 내 사진기가 망가졌지? 사진가 맡기러 가자! 게다가 형을 본 지 오래되었잖아. 형 얼굴도 보러 가자!’ 하고 볼일을 만든다. 그러고는 바삐 짐을 꾸려 장인어른과 짐차에 타고 고흥부터 인천까지 여섯 시간을 달린다.


  눈이 걷힌 길이기에 여섯 시간만에 고흥서 인천까지 닿는다. 장인어른은 인천서 일산으로 삼십 분만 달리면 된다. 나는 인천에 닿아 여러 어른들한테 들러 인사를 하고, 신포동 닭집 어른한테는 튀김닭 한 마리를 선물로 얻어 송월동 형네 집으로 찾아온다. 형은 오븐을 집에 들여 빵을 굽는다. 빵이 될는지 과자가 될는지 모르지만, 나는 오븐을 장만해서 무언가 굽는다는 생각까지 해 보지 못했는데, 우리 형은 혼자 살림을 꾸리면서 이것저것 재미나게 즐기는구나.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 해 보았을까. 아이들은 옆지기랑 시골집에서 알콩달콩 복닥이면서 재미난 하루를 누리다가 새근새근 잠들려나.


  모두들 사랑스러운 저녁을 맞이하면서 어여쁜 밤을 고요히 잠들 수 있기를 빈다. 나도 형도 옆지기도 아이들도 인천 이웃님들도, 또 시골과 서울서 살아가는 이 땅 모든 사람들도. 4345.12.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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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놀이 1

 


  과자놀이를 할 적에 손가락에 하나씩 끼우기는 하는데, 길쭉한 녀석을 콧구멍에 끼다니. 콧구멍 안 아프니? 하기는, 네 아버지도 어릴 적에 막대기처럼 길쭉한 과자를 너처럼 콧구멍에 끼워 놀았구나 싶다. 네 모습을 보니 환하게 떠오른다. 맛있게 먹으며 놀아라. 4345.12.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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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 집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4
고제순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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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 숨결 사랑하는 집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7] 길담서원 청소년 인문학교실 4,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철수와영희,2012)

 


- 책이름 :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 글 : 고제순·서윤영·노은주·이재성·조광제·손낙구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12.10.)
- 책값 : 13000원

 


  언제나 한밤에 이듬날 아침에 먹을 밥을 헤아립니다. 이른새벽이 되면 아침에 끓일 국을 생각합니다.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집에서 먹는 밥을 마련합니다. 아침 낮 저녁 세 끼니를 먹든, 아침 저녁 두 끼니를 먹든, 때로는 낮에 한 끼니를 먹든, 내 몸을 살리는 밥을 돌아봅니다.


  밥을 먹어 몸 움직일 기운을 얻습니다. 몸뚱이는 밥을 먹으며 새롭게 기운을 내어 하루를 누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마음도 밥을 먹어야 기운을 얻을까요. 마음은 밥을 먹지 않아도 한결같이 기운이 넘칠까요. 마음은 몸이 지칠 때에 나란히 지치고, 마음은 몸이 씩씩할 때에 나란히 씩씩할까요.


.. 고등학교 때 저는 제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입시 위주의 공부만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대학에 가야 하지?’ 학교에서는 밤늦도록 우리를 잡아 놓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그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 막상 대학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크게 실망했어요. 대학이 제가 그리던 이상적인 상아탑이랄까, 그런 곳이 아니었던 거예요. 학교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갈등과 방황이 깊었죠. 그러면서 얻은 결론이 뭐냐 하면, 공부라는 것은 교수나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게 진짜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18∼19쪽/고제순)


  누가 가르치거나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몸과 마음이 서로 어떻게 얽히는가를 살펴봅니다. 교과서 같은 데에는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고, 중학교에서 도덕 배우거나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밭에서는 몸과 마음이 얽히고 맺으며 꾸리는 삶을 곱씹습니다.


  여러 끼니를 굶거나 여러 날 굶어 봅니다. 이때에 마음이 배고픔을 느끼거나 힘들다고 느끼거나 지친다고 느낄까요. 무언가 먹지 않을 적에 마음이 괴롭거나 슬프거나 어딘가 막힌다고 느낄까요.


  배불리 먹으면 마음이 느긋할까요. 넉넉히 먹으면 마음이 한갓질까요. 따순 밥을 먹으면 마음도 따사롭게 거듭날까요.


  밥은 틀림없이 몸을 살찌웁니다. 밥은 참말 몸이 새롭게 움직일 기운을 북돋웁니다. 그러나, 끼니에 맞추어 무언가 먹어야 비로소 ‘살아간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어떤 마음이 되느냐에 따라 내가 먹는 밥이 달라진다고 느껴요. 스스로 기쁜 마음일 때에는 어떤 밥을 먹든 기쁜 기운이 스며들고, 스스로 서운하거나 힘들거나 지친 마음일 때에는 어떤 밥을 먹더라도 서운하거나 힘들거나 지친 기운이 찾아드는구나 싶어요.


  밥과 함께 떠올리는 옷이랑 집도 이와 같아요. 대단한 옷을 입거나 놀라운 집에서 살아야 하지 않아요. 마음을 홀가분하게 건사하면서 즐겁고 맑게 누릴 수 있는 옷을 입으며 집을 얻어야 해요. 값진 옷이나 집은 덧없어요. 예쁜 옷이나 집은 부질없어요. 사랑스러운 옷이나 집일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즐거운 이야기 꽃피우도록 마음을 보드라이 어루만지는 옷이나 집일 때에 즐겁습니다.


.. 지금 우리가 사는 집들은 대부분 규격화된 건물입니다. 옷으로 치면 기성복 같은 거죠. 예전엔 달랐습니다. 내 몸에 맞는 옷을 지어서 입었죠. 한복도 그렇고 양복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옷 가게에 가서 얼추 비슷한 치수에 맞춰 입잖아요. 그러다 보면 정확히 내 몸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 몸이 다 다르잖아요 ..  (86쪽/노은주)


  오늘날 학교에서는 밥도 집도 옷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린이집이나 보육원부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사 구실을 하는 어른들은 학생 노릇을 하는 아이들한테 밥이며 집이며 옷을 가르치지 못해요. 고운 숨결 사랑하는 밥과 집과 옷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너무 쉬운 얘기일 텐데, 교사들은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교에서 ‘교과서 지식 잘 가르치는 길’만 익힐 뿐, ‘아이들이 삶을 바라보고 누리며 사랑하는 길’은 익히지 않아요. 교육학과 수업에서는 아이들 삶을 헤아리지 않아요. 언제나 ‘교과서 지식 잘 가르치는 길’만 다뤄요. 교사자격증이란 ‘교과서 지식 잘 가르치는 길’을 알뜰히 해내는 사람한테 주지, 아이들 삶을 헤아리는 어른한테는 주지 않아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며 시험공부만 할 수 있다고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에 오래오래 붙들리면서, 정작 밥이랑 집이랑 옷하고는 동떨어진다고 할까요. 게다가, 오늘날 학교는 초·중·고등학교 모두 급식을 해요. 대학생이 되는 아이들 가운데 도시락을 손수 싸서 먹는 아이는 아주 드물어요. 고등학생 때까지는 학교와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얻어먹기만 하고, 대학생 때부터는 학교 안팎에서 돈을 주고 사다 먹기만 해요.


  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생각할 겨를이나 구석 하나 없는 오늘날 아이들이에요. 아이들한테 밥삶과 밥틀과 밥바탕과 밥결을 보여주거나 가르치거나 나누지 못하는 어른들이에요. 이리하여, 집 이야기랑 옷 이야기도 옳게 보여주지 못해요. 옳게 보여주지 못하니 옳게 가르칠 수 없겠지요. 옳게 가르치지 못하는데 옳게 나눌 수 없어요.


.. 당시 지붕의 재료로 쓰인 슬레이트가 1급 발암물질인 석면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래서 요즘 지자체에서는 슬레이트 지붕을 철거하고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지붕을 바꾸고 마을길을 넓히면서 우리 삶의 흔적을 지웠을 뿐 아니라, 신화라든지 설화, 전래 민요, 민담 등 예부터 입으로 전해 오던 전통적인 구비 문화, 즉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우리 문화의 근거를 지웠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 개조 운동이기도 했어요 ..  (138쪽/이재성)


  모든 밥은 흙에서 얻습니다. 모든 흙은 햇살과 바람과 물이 살찌웁니다. 햇살과 바람과 물은 사람 스스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빛납니다. 곧, 햇살과 바람과 물은 흙을 살리고, 흙은 사람을 살리며, 사람은 햇살과 바람과 물을 살려요.


  사람 스스로 슬기로울 때에는 햇살과 바람과 물을 살립니다. 사람 스스로 어리석을 때에는 햇살과 바람과 물을 죽여요.


  잘 살펴보셔요. 오늘날 물질문명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햇살과 바람과 물을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짓밟거나 무너뜨리거나 죽이는가를 잘 살펴보셔요. 대통령 한 사람이랑 공무원 여럿이랑 개발업자 몇몇이랑 똘똘 뭉쳐 밀어붙이는 4대강사업 하나만 햇살과 바람과 물을 짓밟지 않아요. 아무 생각 없이 어디로든 자가용 몰고 다니는 여느 사람들도 햇살과 바람과 물을 무너뜨려요. 흙을 안 밟고 흙을 안 만지며 흙을 안 쳐다보는 곳에서 시멘트랑 이웃되어 살아가는 도시사람 누구나 햇살과 바람과 물을 죽여요.


  수도물 놓는다며 댐을 짓고 땅을 파헤치며 온갖 쇠붙이와 플라스틱을 골골샅샅 파묻습니다. 우리가 왜 수도물을 마셔야 하지요? 우리가 왜 먹는샘물을 사다 마셔야 하지요? 흐르는 냇물이 가장 맑고 시원할 텐데요. 골짝물을 마시고 시냇물이랑 도랑물을 마실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온누리 물줄기를 죄 더럽히고 나서 화학약품으로 못물을 걸러 수도물을 마시도록 해야 사람 숨결이 곱게 빛날까요. 모든 들판과 갯벌과 바다와 숲을 깡그리 더럽히고 나서 방부제와 첨가물과 항생제를 쓴 가공식품을 먹도록 해야 사람 숨결이 환하게 빛날까요.


  모든 밥이 흙에서 나오듯, 모든 집과 옷 또한 흙에서 나옵니다. 하늘에서 똑 떨어지는 집이나 옷은 없습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밥이요 집이며 옷입니다. 석유이든 석탄이든 가스이든, 흙에서 비롯하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화학방정식으로 짜서 만들지 못해요. 화학방정식으로 짜더라도, 흙에서 얻는 화학조합물이지 어디에서 짠 하고 나타나지 않아요.


.. 이사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직장이나 학교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유는 바로 집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평균 이사 횟수에 차이가 납니다 ..  (212쪽/손낙구)


  서울 어느 골목 한켠에 깃든 〈길담서원〉에서 마련한 ‘청소년 인문학교실’ 열매 가운데 하나인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철수와영희,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나라 푸름이한테 ‘집’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는 어른들 마음이 반갑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며 시골을 모를 뿐더러, 막상 서울이라는 터전조차 옳게 모르는 푸름이한테, ‘학교에서는 도무지 가르치지도 보여주지도 얘기하지도 않는’ 집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자리를 마련하니 더없이 예뻐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학교에서는 국어이니 수학이니 영어이니 과학이니 하는 과목을 지식으로 아이들 머릿속에 집어넣을 일이 아니에요. 이런저런 과목이란 다 쓸데없어요. 아이들한테는 맨 첫째로 ‘사랑’을 가르칠 일이요, 다음으로 ‘삶’을 가르칠 일이며, 이동안 ‘말’을 나란히 가르칠 일입니다. 사랑과 삶과 말을 가르친 뒤, ‘꿈’과 ‘이야기’와 ‘숨결’을 가르칠 수 있어야겠지요. 이 다음에는, 사람이 살아가며 누리는 ‘밥’과 ‘집’과 ‘옷’을 가르쳐야 할 테고요.


  아이들한테 가르칠 것을 놓고 따로 교과서나 책을 엮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살아내는 모습이 곧바로 교과서나 책이에요. 두 말이나 세 말을 안 해도 돼요. 어른들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면 돼요. 어른들이 무언가 먹는 모습이 ‘밥’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어른들이 어디엔가 깃들어 지내는 모습이 ‘집’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어른들이 스스로 챙겨 입는 모습이 ‘옷’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 모든 자연에 있는 스스로 해결합니다. 새들은 스스로 둥지를 짓고 먹이를 찾아요. 우리처럼 먹이 구하는 새, 먹는 새, 따로 있지 않아요.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해요? 스스로 치유합니다 …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이는 집이에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몸이 수많은 생명체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 콘크리트는 생명을 죽이고,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그 안에선 어떤 생명체도 숨쉬기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인간은 콘크리트에 의존합니다. 콘크리트가 발명된 이래 인간은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로 생명을 덮어 버렸어요 ..  (23, 32, 34쪽/고제순)


  눈치 있는 분은 무슨 소리인가 하고 느끼시리라 생각해요. 간추려 말하자면, 아이들을 오늘날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어떻든 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울타리에 집어넣으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는 소리예요. 아이들은 저희를 낳아 돌보는 어른(또는 어버이)하고 함께 살아가면 넉넉해요. 아이들은 저희를 아끼고 사랑하는 어른(또는 어버이)하고 날마다 복닥이고 부대끼며 얼크러질 때에 모든 것을 골고루 배워요.


  수업 50분 쉼 10분, 이렇게 틀을 짜거나 나누어서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삶은 없어요. 언제나 모든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면서 가르쳐요.


  말 한 마디가 국어요 산수입니다. 밥짓는 몸짓이 과학이요 문학입니다. 못질을 하거나 빨래를 하는 매무새가 역사요 사회입니다. 들길을 걷거나 밭자락에서 풀을 뜯는 손길이 고스란히 영어요 철학입니다.


  책으로 지은 집이라 할 〈길담서원〉 같은 보금자리에서 알뜰살뜰 꾸리는 ‘청소년 인문학교실’을 때때로 서울에서 한참 벗어난 고즈넉한 시골마을 들판이나 바닷가나 숲에서도 열면 한결 푸르게 빛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아니, 시골마을, 그러니까, 우리 식구들 지내는 고흥군이라든지 이웃 보성군이나 장흥군 같은 시골마을 같은 데에서, 교사와 공무원들이 생각을 그러모으며 예쁜 ‘인문학교실’을 꾸려, 이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즐거이 누리도록 힘쓰면 참 예쁘겠구나 싶습니다. 4345.12.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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