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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 집 ㅣ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4
고제순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12월
평점 :
고운 숨결 사랑하는 집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7] 길담서원 청소년 인문학교실 4,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철수와영희,2012)
- 책이름 :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 글 : 고제순·서윤영·노은주·이재성·조광제·손낙구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2.12.10.)
- 책값 : 13000원
언제나 한밤에 이듬날 아침에 먹을 밥을 헤아립니다. 이른새벽이 되면 아침에 끓일 국을 생각합니다.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집에서 먹는 밥을 마련합니다. 아침 낮 저녁 세 끼니를 먹든, 아침 저녁 두 끼니를 먹든, 때로는 낮에 한 끼니를 먹든, 내 몸을 살리는 밥을 돌아봅니다.
밥을 먹어 몸 움직일 기운을 얻습니다. 몸뚱이는 밥을 먹으며 새롭게 기운을 내어 하루를 누립니다. 그러면 마음은? 마음도 밥을 먹어야 기운을 얻을까요. 마음은 밥을 먹지 않아도 한결같이 기운이 넘칠까요. 마음은 몸이 지칠 때에 나란히 지치고, 마음은 몸이 씩씩할 때에 나란히 씩씩할까요.
.. 고등학교 때 저는 제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입시 위주의 공부만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대학에 가야 하지?’ 학교에서는 밤늦도록 우리를 잡아 놓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그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 막상 대학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크게 실망했어요. 대학이 제가 그리던 이상적인 상아탑이랄까, 그런 곳이 아니었던 거예요. 학교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갈등과 방황이 깊었죠. 그러면서 얻은 결론이 뭐냐 하면, 공부라는 것은 교수나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게 진짜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18∼19쪽/고제순)
누가 가르치거나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몸과 마음이 서로 어떻게 얽히는가를 살펴봅니다. 교과서 같은 데에는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고, 중학교에서 도덕 배우거나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밭에서는 몸과 마음이 얽히고 맺으며 꾸리는 삶을 곱씹습니다.
여러 끼니를 굶거나 여러 날 굶어 봅니다. 이때에 마음이 배고픔을 느끼거나 힘들다고 느끼거나 지친다고 느낄까요. 무언가 먹지 않을 적에 마음이 괴롭거나 슬프거나 어딘가 막힌다고 느낄까요.
배불리 먹으면 마음이 느긋할까요. 넉넉히 먹으면 마음이 한갓질까요. 따순 밥을 먹으면 마음도 따사롭게 거듭날까요.
밥은 틀림없이 몸을 살찌웁니다. 밥은 참말 몸이 새롭게 움직일 기운을 북돋웁니다. 그러나, 끼니에 맞추어 무언가 먹어야 비로소 ‘살아간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어떤 마음이 되느냐에 따라 내가 먹는 밥이 달라진다고 느껴요. 스스로 기쁜 마음일 때에는 어떤 밥을 먹든 기쁜 기운이 스며들고, 스스로 서운하거나 힘들거나 지친 마음일 때에는 어떤 밥을 먹더라도 서운하거나 힘들거나 지친 기운이 찾아드는구나 싶어요.
밥과 함께 떠올리는 옷이랑 집도 이와 같아요. 대단한 옷을 입거나 놀라운 집에서 살아야 하지 않아요. 마음을 홀가분하게 건사하면서 즐겁고 맑게 누릴 수 있는 옷을 입으며 집을 얻어야 해요. 값진 옷이나 집은 덧없어요. 예쁜 옷이나 집은 부질없어요. 사랑스러운 옷이나 집일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즐거운 이야기 꽃피우도록 마음을 보드라이 어루만지는 옷이나 집일 때에 즐겁습니다.
.. 지금 우리가 사는 집들은 대부분 규격화된 건물입니다. 옷으로 치면 기성복 같은 거죠. 예전엔 달랐습니다. 내 몸에 맞는 옷을 지어서 입었죠. 한복도 그렇고 양복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옷 가게에 가서 얼추 비슷한 치수에 맞춰 입잖아요. 그러다 보면 정확히 내 몸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 몸이 다 다르잖아요 .. (86쪽/노은주)
오늘날 학교에서는 밥도 집도 옷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린이집이나 보육원부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사 구실을 하는 어른들은 학생 노릇을 하는 아이들한테 밥이며 집이며 옷을 가르치지 못해요. 고운 숨결 사랑하는 밥과 집과 옷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너무 쉬운 얘기일 텐데, 교사들은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교에서 ‘교과서 지식 잘 가르치는 길’만 익힐 뿐, ‘아이들이 삶을 바라보고 누리며 사랑하는 길’은 익히지 않아요. 교육학과 수업에서는 아이들 삶을 헤아리지 않아요. 언제나 ‘교과서 지식 잘 가르치는 길’만 다뤄요. 교사자격증이란 ‘교과서 지식 잘 가르치는 길’을 알뜰히 해내는 사람한테 주지, 아이들 삶을 헤아리는 어른한테는 주지 않아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며 시험공부만 할 수 있다고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에 오래오래 붙들리면서, 정작 밥이랑 집이랑 옷하고는 동떨어진다고 할까요. 게다가, 오늘날 학교는 초·중·고등학교 모두 급식을 해요. 대학생이 되는 아이들 가운데 도시락을 손수 싸서 먹는 아이는 아주 드물어요. 고등학생 때까지는 학교와 집에서 아무렇지 않게 얻어먹기만 하고, 대학생 때부터는 학교 안팎에서 돈을 주고 사다 먹기만 해요.
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생각할 겨를이나 구석 하나 없는 오늘날 아이들이에요. 아이들한테 밥삶과 밥틀과 밥바탕과 밥결을 보여주거나 가르치거나 나누지 못하는 어른들이에요. 이리하여, 집 이야기랑 옷 이야기도 옳게 보여주지 못해요. 옳게 보여주지 못하니 옳게 가르칠 수 없겠지요. 옳게 가르치지 못하는데 옳게 나눌 수 없어요.
.. 당시 지붕의 재료로 쓰인 슬레이트가 1급 발암물질인 석면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래서 요즘 지자체에서는 슬레이트 지붕을 철거하고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지붕을 바꾸고 마을길을 넓히면서 우리 삶의 흔적을 지웠을 뿐 아니라, 신화라든지 설화, 전래 민요, 민담 등 예부터 입으로 전해 오던 전통적인 구비 문화, 즉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우리 문화의 근거를 지웠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신 개조 운동이기도 했어요 .. (138쪽/이재성)
모든 밥은 흙에서 얻습니다. 모든 흙은 햇살과 바람과 물이 살찌웁니다. 햇살과 바람과 물은 사람 스스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빛납니다. 곧, 햇살과 바람과 물은 흙을 살리고, 흙은 사람을 살리며, 사람은 햇살과 바람과 물을 살려요.
사람 스스로 슬기로울 때에는 햇살과 바람과 물을 살립니다. 사람 스스로 어리석을 때에는 햇살과 바람과 물을 죽여요.
잘 살펴보셔요. 오늘날 물질문명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햇살과 바람과 물을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짓밟거나 무너뜨리거나 죽이는가를 잘 살펴보셔요. 대통령 한 사람이랑 공무원 여럿이랑 개발업자 몇몇이랑 똘똘 뭉쳐 밀어붙이는 4대강사업 하나만 햇살과 바람과 물을 짓밟지 않아요. 아무 생각 없이 어디로든 자가용 몰고 다니는 여느 사람들도 햇살과 바람과 물을 무너뜨려요. 흙을 안 밟고 흙을 안 만지며 흙을 안 쳐다보는 곳에서 시멘트랑 이웃되어 살아가는 도시사람 누구나 햇살과 바람과 물을 죽여요.
수도물 놓는다며 댐을 짓고 땅을 파헤치며 온갖 쇠붙이와 플라스틱을 골골샅샅 파묻습니다. 우리가 왜 수도물을 마셔야 하지요? 우리가 왜 먹는샘물을 사다 마셔야 하지요? 흐르는 냇물이 가장 맑고 시원할 텐데요. 골짝물을 마시고 시냇물이랑 도랑물을 마실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온누리 물줄기를 죄 더럽히고 나서 화학약품으로 못물을 걸러 수도물을 마시도록 해야 사람 숨결이 곱게 빛날까요. 모든 들판과 갯벌과 바다와 숲을 깡그리 더럽히고 나서 방부제와 첨가물과 항생제를 쓴 가공식품을 먹도록 해야 사람 숨결이 환하게 빛날까요.
모든 밥이 흙에서 나오듯, 모든 집과 옷 또한 흙에서 나옵니다. 하늘에서 똑 떨어지는 집이나 옷은 없습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밥이요 집이며 옷입니다. 석유이든 석탄이든 가스이든, 흙에서 비롯하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화학방정식으로 짜서 만들지 못해요. 화학방정식으로 짜더라도, 흙에서 얻는 화학조합물이지 어디에서 짠 하고 나타나지 않아요.
.. 이사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직장이나 학교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유는 바로 집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평균 이사 횟수에 차이가 납니다 .. (212쪽/손낙구)
서울 어느 골목 한켠에 깃든 〈길담서원〉에서 마련한 ‘청소년 인문학교실’ 열매 가운데 하나인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철수와영희,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나라 푸름이한테 ‘집’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는 어른들 마음이 반갑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며 시골을 모를 뿐더러, 막상 서울이라는 터전조차 옳게 모르는 푸름이한테, ‘학교에서는 도무지 가르치지도 보여주지도 얘기하지도 않는’ 집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자리를 마련하니 더없이 예뻐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학교에서는 국어이니 수학이니 영어이니 과학이니 하는 과목을 지식으로 아이들 머릿속에 집어넣을 일이 아니에요. 이런저런 과목이란 다 쓸데없어요. 아이들한테는 맨 첫째로 ‘사랑’을 가르칠 일이요, 다음으로 ‘삶’을 가르칠 일이며, 이동안 ‘말’을 나란히 가르칠 일입니다. 사랑과 삶과 말을 가르친 뒤, ‘꿈’과 ‘이야기’와 ‘숨결’을 가르칠 수 있어야겠지요. 이 다음에는, 사람이 살아가며 누리는 ‘밥’과 ‘집’과 ‘옷’을 가르쳐야 할 테고요.
아이들한테 가르칠 것을 놓고 따로 교과서나 책을 엮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살아내는 모습이 곧바로 교과서나 책이에요. 두 말이나 세 말을 안 해도 돼요. 어른들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면 돼요. 어른들이 무언가 먹는 모습이 ‘밥’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어른들이 어디엔가 깃들어 지내는 모습이 ‘집’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어른들이 스스로 챙겨 입는 모습이 ‘옷’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 모든 자연에 있는 스스로 해결합니다. 새들은 스스로 둥지를 짓고 먹이를 찾아요. 우리처럼 먹이 구하는 새, 먹는 새, 따로 있지 않아요.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해요? 스스로 치유합니다 …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움직이는 집이에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몸이 수많은 생명체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 콘크리트는 생명을 죽이고,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그 안에선 어떤 생명체도 숨쉬기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인간은 콘크리트에 의존합니다. 콘크리트가 발명된 이래 인간은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로 생명을 덮어 버렸어요 .. (23, 32, 34쪽/고제순)
눈치 있는 분은 무슨 소리인가 하고 느끼시리라 생각해요. 간추려 말하자면, 아이들을 오늘날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어떻든 학교라는 이름이 붙은 울타리에 집어넣으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는 소리예요. 아이들은 저희를 낳아 돌보는 어른(또는 어버이)하고 함께 살아가면 넉넉해요. 아이들은 저희를 아끼고 사랑하는 어른(또는 어버이)하고 날마다 복닥이고 부대끼며 얼크러질 때에 모든 것을 골고루 배워요.
수업 50분 쉼 10분, 이렇게 틀을 짜거나 나누어서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삶은 없어요. 언제나 모든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면서 가르쳐요.
말 한 마디가 국어요 산수입니다. 밥짓는 몸짓이 과학이요 문학입니다. 못질을 하거나 빨래를 하는 매무새가 역사요 사회입니다. 들길을 걷거나 밭자락에서 풀을 뜯는 손길이 고스란히 영어요 철학입니다.
책으로 지은 집이라 할 〈길담서원〉 같은 보금자리에서 알뜰살뜰 꾸리는 ‘청소년 인문학교실’을 때때로 서울에서 한참 벗어난 고즈넉한 시골마을 들판이나 바닷가나 숲에서도 열면 한결 푸르게 빛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아니, 시골마을, 그러니까, 우리 식구들 지내는 고흥군이라든지 이웃 보성군이나 장흥군 같은 시골마을 같은 데에서, 교사와 공무원들이 생각을 그러모으며 예쁜 ‘인문학교실’을 꾸려, 이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즐거이 누리도록 힘쓰면 참 예쁘겠구나 싶습니다. 4345.12.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