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글쓰기

 


  1925년에 태어나 2003년에 숨을 거둔 이오덕 님은 ‘사람들이 말과 글을 너무 어리석게 쓰는구나’ 하고 느끼며 《우리 글 바로쓰기》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이오덕 님 당신이 쓴 글이 ‘참 어리석었다’고 스스로 느껴서, 바로쓰기를 하셨어요. 이제 우리들은 이 알맹이를 북돋아, 우리 슬기를 빛내는 ‘살려쓰기’를 할 수 있으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이오덕 님이 1980년대에 비로소 “우리 글 바로쓰기”를 외칠 적에는, 일제강점기에서 풀려났어도 사람들 스스로 한겨레 말글을 제대로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했어요. 500년에 걸친 조선 한문 굴레에서 허덕이다가, 서른여섯 해 일본말 수렁에 빠졌고, 다시금 미국 자본주의 물결에 휩쓸리기만 하니, 더군다나 요즈음은 대학입시 쳇바퀴에 사로잡히기까지 해요. 누가 보아도 가녀리며 딱한 겨레입니다. 1980∼1990년대에는 ‘바로쓰기’를 하는 데에 힘을 모을밖에 없다 할 만합니다.


  아직 ‘바로쓰기’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다만, 이제는 ‘바로쓰기’와 아울러 ‘살려쓰기’를 하면서, 우리 깜냥껏 한국말 살찌우는 길을 걸어갈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국어학자라서 한다거나, 국문학과를 다녔기에 한다거나, 말글운동을 하니까 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니까 즐기는 삶입니다. 지식으로 가꾸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가꾸는 말입니다. 학문으로 갈고닦는 글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살피는 글입니다.


  이오덕 님은 숱한 글과 책을 내놓으면서 당신 뒷사람한테 ‘선물’을 남겼습니다. 뒷사람인 우리들은 저마다 ‘이오덕 글’을 받아먹으면서 새로운 열매를 거두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 뜻을 헤아리면 돼요. 기쁜 선물 예쁘게 누리면서 “우리 말 살려쓰기” 밑넋을 깨달으면 돼요. 내 아이하고 사랑스레 나눌 말을 생각하는 하루가 “우리 말 살려쓰기”예요. 국어사전에서 토박이말을 캐낸대서 ‘바로쓰기’나 ‘살려쓰기’가 되지 않아요. 국어사전에서 어설피 캐내는 토박이말은 자칫 ‘똘레랑스’나 ‘럭셔리’라는 낱말처럼 지식자랑이나 겉치레말이 될 수 있어요. 오래된 토박이말은 지난날 ‘여느 사람이 여느 삶에서 빚은 낱말’인 줄 느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늘 내 여느 삶에서 수수한 낱말을 새롭게 빚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면 돼요.


  ‘이오덕 글쓰기’란 누구나 즐겁고 환하며 아름답게 새말 빚고 나누면서 새삶 즐기고 밝힐 수 있다는 넋이요 사랑입니다. 4345.12.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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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5) -의 : 말의 바탕

 

이것은 자기 나라 글자인 ‘가나’와 우리 나라 글자 ‘한글’이 전혀 다른 말의 바탕에서 생겨난 글자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고, 남의 나라 말글에 철없는 입놀림을 하는 짓이라고 본다
《이오덕-우리 문장 쓰기》(한길사,1992) 426쪽

 

  “자기(自己) 나라”는 “제 나라”로 손보고, ‘전(全)혀’는 ‘아주’나 ‘무척’이나 ‘매우’로 손봅니다. “글자임을 모르고”는 “글자인 줄 모르고”로 손질합니다. “남의 나라 말글”은 “다른 나라 말글”로 손질하면 됩니다. 찬찬히 손보고 손질하면서, 글과 말을 한껏 빛낼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말의 바탕에서 생겨난
→ 아주 다른 말에서 생겨난
→ 몹시 다른 바탕에서 생겨난
→ 매우 다른 말바탕에서 생겨난
 …

 

  1980년대부터 우리 말글 바르게 쓰는 길을 꾸준하게 밝힌 이오덕 님은 2003년에 숨을 거두기까지 바지런히 당신 넋을 북돋았습니다. 이오덕 님이 쓴 글을 찬찬히 읽은 분들은 1980년대 글투와 1990년대 글투와 2000년대 글투가 얼마나 다른가를 환하게 헤아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더 깊이 살피는 분들은 1970년대 글투와 1960년대 글투와 1950년대 글투까지 견주며 톺아볼 수 있어요. 다만, 서른 해나 쉰 해에 걸친 글투를 살핀다 하더라도, 일부러 눈여겨보며 살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으레 ‘책에 실린 줄거리’만 좇는데 바빠, 이오덕 님이 ‘우리 말글을 알맞고 바르게 쓰자’고 외치면서 ‘이오덕 님 스스로 얼마나 당신 글을 갈고닦으며 북돋우려 힘썼는가’ 하는 대목은 놓치곤 합니다.


  서른 해나 쉰 해에 걸친 글투를 곰곰이 돌아보면,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를 외치기 앞서, 당신 스스로 당신 글을 아주 힘을 들이고 사랑을 쏟아 가다듬거나 고쳤어요. 당신 스스로 미처 모르고 쓴 잘못되거나 아쉬운 글투는, 다음에 새 글을 쓰며 고쳤고, 당신이 쓴 글 또한 책을 새로 찍을 적마다 고쳐서 실으려고 했어요. 글은 ‘한 번 배우며 끝나’지 않거든요. 글은 태어나서 숨을 거둘 때까지 날마다 새롭게 배우거든요. 이오덕 님은 당신 스스로 예순 살이나 일흔 살에도 언제나 새롭게 배워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삶매무새를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더러 당신 글 바로잡으라고만 외치지 않았어요. 누구보다 이오덕 님 스스로 당신 글을 바로잡으면서 깨달은 빛을 이웃사람과 뒷사람한테 나누어 주려고 했어요.


  1992년에 나온 《우리 문장 쓰기》라는 책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첫머리까지 쓴 글을 싣습니다. 이때에는 이오덕 님 글에도 군데군데 ‘-의’이 끼어듭니다. 아니, 이무렵에는 이오덕 님 스스로 ‘-의라는 토씨도 쓸 만한 자리에는 쓴다’고 여겼습니다. 때로는 아주 오래도록 쓰던 버릇이 고스란히 남기도 해요. 이를테면 “남의 나라 말글” 같은 대목인데요, 이오덕 님은 “다른 나라”라고 말하기보다 “남의 나라”처럼 말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러면 “나의 나라”라고도 쓰셨을까요? 아니에요. 이오덕 님은 ‘나의’처럼 쓰는 글투가 참 어리석다고 거듭 밝히셨어요. 그런데, ‘나’와 한짝을 이루는 ‘남’이라는 낱말에서는 조금 더 슬기롭지 못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남의 나라 말글”을 벗어나 “다른 나라 말글”처럼 적거나 “이웃 나라 말글”처럼 적으면 됩니다. 더 생각을 기울이면 “이웃나라”처럼 적을 만해요. “이웃집”은 한 낱말이에요. 흔히 쓰고 널리 쓰는 ‘이웃-’은 앞가지로 삼으면 됩니다. 그러나, 국어사전을 살피면 “이웃사랑”이나 “이웃사람”을 한 낱말로 안 삼아요. 국어학자 밑생각이 깊지 못한 탓이라 할 텐데, 국어사전에 안 실린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스스로 생각을 빛내면서 “이웃돕기”라든지 “이웃나눔”이라든지 “이웃가게”라든지 “이웃노래” 같은 새 낱말을 빚으면 됩니다. “이웃땅”, “이웃밭”, “이웃마을”처럼 새 낱말을 빚을 수 있어요. 스스로 일구는 삶을 스스로 일구는 말로 꽃피우면 즐겁습니다.

 

 서로 다른 말뿌리에서 생겨난
 저마다 다른 말삶에서 생겨난
 사뭇 다른 말밑에서 생겨난

 

  이오덕 님은 “전혀 다른 말의 바탕에서 생겨난 글자”처럼 글을 쓰셨습니다. 1980년대 글투인데요, 2000년대에도 이렇게 글을 쓰셨을까 하고 생각을 기울이며 《우리 문장 쓰기》를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오덕 님 넋을 고맙게 얻을 수 있는 한편, 내 깜냥껏 내 말삶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내 말은 내가 가꾸거든요. 내 삶은 내가 가꾸거든요. 내 일도, 내 놀이도, 내 꿈도, 내 사랑도, 언제나 내가 가꿉니다. 곧, 이런 책을 읽거나 저런 강의를 듣는대서 내 지식을 살찌우지 못해요. 나 스스로 나를 가꾸려는 넋이요 몸가짐일 때에 내 삶을 가꿀 수 있어요.


  “말의 바탕”처럼 글을 쓴 까닭은 ‘말’과 ‘바탕’ 두 가지 뜻을 밝히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보기글을 살피면, ‘말’만 쓰거나 ‘바탕’만 써도 돼요. 둘 가운데 하나만 써도 이야기흐름은 살아나요. 꼭 두 낱말을 다 쓰고 싶으면 ‘두 낱말을 다 쓰면서 말흐름을 살찌울 새 모습’을 찾으면 됩니다.


  ‘말바탕’이라고 하면 돼요. 말뿌리나 말밑이라 하면 돼요. 말자취나 말흐름이나 말줄기라 할 수 있어요. 바탕이나 뿌리나 밑이나 자취나 흐름이나 줄기가 무엇인가 하고 돌아보면 ‘삶’으로 이어져요. 그래서 ‘말삶’이라는 낱말이 태어나요. 또한 ‘말사랑’이나 ‘말생각’이나 ‘말넋’이라는 낱말을 빚을 수 있겠지요.


  이오덕 님이 쓴 《우리 문장 쓰기》 같은 책을 읽는 까닭은 하나입니다. 이 책에 담긴 살가운 넋을 받아먹으면서, 나 스스로 내 넋을 북돋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오덕 님이 외친 이야기라서 무턱대고 따라야 하지 않아요. 아무리 아름다운 생각이라 하더라도 무턱대고 따를 때에는 아름다울 수 없어요. 생각을 하면서 즐겨야 아름답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외치셨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내 슬기를 빛내어 서로 아름다울 길을 찾을 때에 즐겁습니다. 4345.12.27.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는 제 나라 글인 ‘가나’와 우리 나라 글 ‘한글’이 사뭇 다른 말삶에서 생겨난 줄 모르고 하는 소리이고, 이웃나라 말글에 철없이 입놀림을 하는 짓이라고 본다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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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

 


숲이 있으면
나무가 자라고 풀이 돋아
겨울에도
푸르게 숨쉬고 맑게 빛나는
꽃이 있고,
곁에 가늘가늘 고즈넉히
노래하는 벌레 있다.

 

늦가을
11월 19일에도
고흥 도화 동백마을에는
풀벌레가 노래하고
부전나비 춤춘다.

 

니 우예 겨울잠 안 자노
말을 걸다가
나도 모르게
온 들판 누렇고 푸른 빛을
가만히 바라본다.

 


4345.11.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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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틈

 


  작은아이는 왼쪽에 누여 팔베개를 하고, 큰아이는 오른쪽에 누여 팔베개를 한다. 자장노래를 부른다. 두 아이는 저마다 아버지 쪽으로 돌아눕는다. 내 몸 누인 자리가 차츰 좁아진다. 그러나 나는 두 아이 품을 느껴, 겨울날 한결 따스하다. 여름날이라면? 아마 꽤나 더울 테지.


  노랫가락이 깜깜한 잠자리에 흐르고, 보름달은 대청마루로 보얀 빛을 흩뿌린다. 아이들 틈에서 자면 좁다. 아이들은 좁은 칸에서 함께 자면 서로 복닥이느라 빠듯하다. 그러나, 좁은 칸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잠을 자니, 한결 따스하며 좋다. 먼먼 옛날, 식구들 훨씬 많던 지난날, 풀로 지붕을 잇고 흙으로 벽과 바닥을 빚어 지내는 조그마한 집 조그마한 칸에 숱한 식구 다닥다닥 붙어 잠을 자던 삶이란 서로서로 얼마나 살가우며 좋은 나날이었나 하고 그림을 그린다. 한겨레는 참말 자그마한 집 자그마한 칸에서 사랑을 꽃피웠다. 널따란 궁궐 커다란 기와집이란 덧없다. 살을 부비지 못하는 궁궐이랑 자장노래 나누지 못하는 기와집이라 하면,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보람을 누릴 수 있을까.


  역사는 궁궐 아닌 시골마을 작은 집에 있다. 문화는 기와집 지식인 아닌 흙집 아이들한테 있다. 4345.12.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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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넓이 창비시선 353
김주대 지음 / 창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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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는 눈물 한 방울
[시를 노래하는 시 39] 김주대, 《그리움의 넓이》

 


- 책이름 : 그리움의 넓이
- 글 : 김주대
- 펴낸곳 : 창비 (2012.11.26.)
- 책값 : 8000원

 


  하얗던 달이 노랗게 집니다. 새벽 네 시 오십 분. 아이들은 새근새근 깊이 자고, 나는 문득 잠에서 깹니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라면 늦잠이지만, 겨울이라면 그리 늦잠 아닌 때입니다. 우리한테는 아직 땅이 없어 흙을 일구지 못하기에 마을 다른 집처럼 새벽 들일을 나가지 않으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 누구보다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면 마음을 가다듬어 글쓰기를 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저희랑 노는 어버이를 좋아하지, 저희를 쳐다보지 않고 글판만 두들기는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면 슬슬 아침을 차려야 합니다. 저녁에 불린 누런쌀은 다시 헹구고, 아침에 끓일 국을 찬찬히 건사합니다. 미역이나 다시마는 새벽녘에 끊어서 불리고, 아침에 먹을 푸성귀는 바지런히 흙을 헹궈서 썰어 놓습니다. 밥을 차리며 살짝 비는 틈에 손빨래 몇 점을 하고, 아이들 밥을 다 먹이고는 설거지를 하다가는 나머지 손빨래를 마저 합니다. 겨울은 해가 짧아 설거지보다 빨래를 먼저 마쳐야 하거든요.


  마을 어르신들은 내가 얼마나 일찍 일어나서 글을 붙잡는 줄 모릅니다. 내가 두 시나 세 시에 일어나서 글을 쓰더라도 들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글을 쓰니까요. 아이들 모두 잠든 때에 마음을 모아야 쓸 수 있는 글이니까요.


.. 경비 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건네셔서 죄송한 마음에 나중에는 내가 화장실에서든 어디서든 마주치기만 하면 얼른 고개를 숙인 거라. 그래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우편함 배달물들을 2층 사무실까지 갖다 주기 시작하시데. 나대로는 또 그게 고맙고 해서 비 오는 날 뜨거운 물 부어 컵라면을 하나 갖다 드렸지 뭐. 그랬더니 글쎄 시골서 올라온 거라며 이튿날 자두 한 보따리 갖다 주시는 게 아닌가. 하이고, 참말로 갈수록 태산이시라 ..  (태산泰山이시다)


  밤이 길면 달과 별이 밝습니다. 밤이 짧으면 바람이 포근합니다. 밤이 긴 날에는 이불이 그립습니다. 밤이 짧은 날에는 바람이 그립습니다. 밤이 긴 날은 문을 모두 열어도 밤소리가 아주 고즈넉합니다만, 문을 섣불리 열지 못합니다. 밤이 짧은 날은 문을 몽땅 열면 갖가지 밤소리가 집안으로 스밉니다. 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어우러지는 여름 밤소리는 더운 잠자리를 시원하게 달랩니다. 밤바람이 부는 여름철에는 바람결에 나뭇잎과 풀잎 촤르르 출렁이는 소리까지 덩달아 듣습니다. 구름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별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들꽃 자그마한 봉오리에 내려앉은 달빛 기운을 느낍니다. 처마 밑 둥지에서 조용히 자는 제비 식구들 작은 움직임을 느낍니다.


  나와 함께 내 이웃이 있습니다. 내 이웃과 함께 내가 있습니다. 나는 싱그럽고 씩씩하게 살아서 숨쉽니다. 내 이웃은 맑고 푸르게 살아서 숨쉽니다.


  소리는 마음에서 울려 나옵니다. 빛은 마음에서 퍼져 나옵니다. 꿈은 마음에서 무르익어 나옵니다. 사랑은 마음에서 샘솟아 나옵니다.


  고단하게 드러누워 등허리를 펴던 저녁을 지나고, 아이들 오줌 누이는 밤을 지나며, 차츰 밝는 바깥하늘 느끼는 새벽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어떤 하루 찾아올할까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 누릴까요. 오늘은 어떤 일과 놀이로 삶을 빛낼까요.


.. 꿈을 가진 사람은 / 시간과 공간 이동이 가능한 4차원의 세계로 갈 수 있다 ..  (영혼의 인간)


  잠자리에 들어 가장 보드랍고 맑은 목소리를 뽑아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에 앞서 나 스스로 즐겁고 차분합니다. 밥을 지으며 노래를 부르면, 식구들 함께 먹는 밥그릇마다 노랫결이 스며듭니다. 빨래를 복복 비비며 노래를 부르면, 우리가 늘 입는 옷자락마다 노래무늬 깃듭니다.


  옆지기한테 건네고,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은 모두 노래입니다. 사르르 웃음꽃인 말은 푸르르 빛나는 노래입니다. 까르르 웃음열매인 말은 화르르 따스한 노래입니다. 내 말은 사랑일 수 있고, 내 말은 골부림일 수 있습니다. 내 말은 꿈이 될 수 있고, 내 말은 찡그림이 될 수 있어요.


  겨울 지나 봄이 되어야 비로소 꽃을 보지는 않아요. 한겨울에도 언제나 꽃을 보아요. 꽃은 들에도 있지만, 내 마음속에도 있어요. 내 마음속부터 환한 꽃일 때에, 비로소 꽃을 느껴요. 내 마음속부터 환하지 못하면 꽃잔치는 누리지 못하고,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꽃노래가 없으면, 내 보금자리를 따사로이 돌보지 못해요.


.. 시급 오천원짜리 딸이 퇴근하는 새벽까지 / 졸면서 책상에 앉아 돈 안되는 글을 쓰다가 / 아빠 뭐해? 문자가 오면 벌떡 일어나 / 응 지금 돈 되는 글 쓰고 있어∼ㅎ^^, 라고 답을 보낸다 ..  (먹먹한)


  셈틀을 켜서 글을 씁니다. 연필을 쥐어 종이에 글을 쓰기도 합니다. 셈틀 바탕에는 아이들 사진을 깝니다. 날마다 새로 찍는 아이들 환한 모습을 새로 셈틀 바탕에 깔고는 오래도록 이 모습을 바라봅니다. 연필을 쥐어 종이에 글을 쓰면, 두 아이는 아버지 곁에 달라붙어 연필을 빼앗으려고, 또 종이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너희는 너희 연필과 종이를 쓰면 되잖니? 그러나, 아이들이 가져가려는 것을 다 줍니다. 나는 다른 연필과 종이를 쥡니다. 큰아이는 제법 모양 나게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그립니다. 작은아이는 아직 두 살배기이니 종이에 죽죽 금을 긋는 놀이를 즐깁니다.


  내가 호미를 들면 두 아이는 호미를 들고 싶습니다. 내가 자전거를 타면 두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싶습니다.


  어버이는 어버이요 교사입니다. 어버이가 사랑을 꽃피우리라 생각하면, 아이들도 사랑을 꽃피우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꿈을 펼치리라 생각하면, 아이들도 꿈을 펼치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들풀 한 포기 살며시 쓰다듬고 인사하다가 너희 맛나게 먹을게 하고는 톡톡 끊으면, 아이들도 아버지를 따라합니다. 아버지가 나뭇잎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아이 예쁘구나 노래하면, 아이들도 나뭇잎을 예쁘게 어루만지며 아이 예뻐 하는 눈빛을 밝힙니다.


.. 어머니는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 ..  (어머니)


  예부터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말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삶을 누릴 때에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다만, 아이를 낳는 모든 사람이 어른이 되지는 않아요. 낳기만 해서는 어른이 안 되거든요. 낳는 때는 아주 짧습니다. 낳고 나서 스스로 얼마나 너른 사랑과 꿈이 되는가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다’는 소리는, ‘아이를 내 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아이는 ‘몸으로 낳기’도 하지만, ‘이웃이나 마을 아이를 내가 낳은 아이처럼 여겨 따사로이 보살피기’도 해요.


  짝을 지어 살림을 꾸려서 낳는 아이만 아이가 아니에요. 아이는 어디에나 있어요. 길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으며 마을에도 있어요. ‘어른이 된다’는 말은 내 둘레 어느 아이 앞에서도 ‘따순 사랑’을 나누어 주면서 다 함께 맑은 삶 누리도록 북돋운다는 뜻입니다. 나이 몇 살쯤 먹고 혼인신고를 해야 ‘어른이 되지’ 않아요. 나이가 퍽 적다 하더라도, 둘레 아이들을 믿음으로 품고 사랑으로 안을 수 있으면, 누구나 어른이에요. 이를테면, 권정생 님 이야기책 《몽실 언니》에 나오는 몽실이 또한 ‘아이’이면서 ‘어른’입니다.


.. 양손에 큰 짐을 든 노인이 / 동요를 부르며 걷다가 / 간간이 뒤돌아본다 ..  (반달)


  사랑을 하는 사람일 때에 어른입니다. 사랑이란 사람을 살리는 빛이거든요.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일 때에는 늘 철부지입니다. ‘아이’ 아닌 ‘철부지’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사랑을 하니까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를 사랑합니다. 아이들은 풀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며, 냇물을 사랑합니다. 아이들은 해를 사랑하고, 들을 사랑하며, 무지개를 사랑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살아갈 때에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면, ‘지구별 밝히는 사랑’을 펼치며 즐길 ‘빛’이 한 줄기 새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빛 한 줄기를 몸에 열 달 품어 낳는 일이란 얼마나 거룩하며 아름다운가요. 빛 한 줄기 태어나도록 씨앗을 내놓는 일이란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가요.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을 받아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먹는 한편, 어버이한테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면서 사랑을 느낍니다. 어버이는 아이들과 살아가며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뜹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두 갈래로 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먼저 ‘철부지’인 나를 바라볼 수 있고, ‘사람’인 나를 바라볼 수 있어요. 사랑에 눈을 뜨지 못한 나라면 철부지요, 사랑에 천천히 눈을 뜨며 눈망을 곱다시 북돋운다면 사람입니다.


.. 상을 탄 화사한 미니스커트 여자 곁으로 기자들이 몰려가 시시덕거리며 술잔을 부딪칠 때, 허름한 바지 꾸그러진 잠바의 그는 구석에서 혼자 고개를 숙이고 부지런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  (슬픈 탕수육)


  몸뚱이가 그럴듯하다 해서 사람이 되지 않아요. 껍데기만 사람인 사람이 많으니까요. 몸뚱이가 크대서 어른이 되지 않아요. 껍데기만 어른인 듯 보이는 어른이 많으니까요.


  내 마음을 들여다봐요. 내가 선 곳에서 하늘을 우러러봐요. 내 생각을 열어요. 내가 지내는 터에서 둘레를 살펴봐요. 내 사랑을 느껴요. 나와 살을 부비는 살붙이들 얼굴을 마주하면서 살결을 보드라이 쓰다듬어요.


  시에는 눈물 한 방울 담습니다. 시에는 웃음 한 자락 담습니다. 시에는 노래 한 가락 담습니다. 시에는 빛 한 줄기 담습니다. 시에는 이야기 한 보따리 담습니다. 시에는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꿈을 그윽히 담습니다.


.. 눈물을 본 딸은 이튿날 바로 다시 아이가 되었다. 아빠 정말 죄송해요, 라는 쪽지를 써놓고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바지를 입고 다녔다. 하이힐을 버리고 운동화를 신고 새벽까지 일했다. 돈이 없는 불쌍한 아이다. 차라리 화장을 한 어른이었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집 설거지 문제가 해결된 것도, 딸이 아이가 된 것도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  (딸)


  김주대 님이 빚은 삶말 모인 시집 《그리움의 넓이》(창비,2012)를 읽습니다. 김주대 님은 이 시집에 담은 시에 나오듯 ‘집안이 폭삭 무너졌나’ 봐요. 아마 퍽 어렵거나 가난한 살림인가 봐요. 그런데요, 집안이 폭삭 무너지든 어렵거나 가난한 살림이든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요. 기쁠 일이 아니지만 슬플 일도 아니에요. 즐거울 삶도 아니지만 서글픈 삶도 아니에요. 그저 살림살이요 그예 삶이에요.


  아이들과 함께 먹을 밥을 날마다 차리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식구 먹는 밥은 우리 식구 마음을 살찌우는 사랑입니다. 아이들 입힐 옷을 날마다 바지런히 빨래하고 말리며 개는 동안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들 입는 옷은 저마다 몸을 사랑하고 아끼는 손길입니다. 이 집은, 이 시골마을 집은, 이 시골마을 작은 집은, 이 시골마을 자그마한 보금자리는, 서로 헤아리고 보살피는 쉼터입니다. 이야기를 꽃피우고 생각을 살찌우는 나눔터입니다.


  어머니나 딸한테만 맡기지 말고, 아버지나 아들 된 사람이 손수 밥을 지어 봐요. 찬거리가 없다면 찬거리가 없는 대로 온 사랑 기울여 밥을 지어 봐요. 맛나게 밥을 먹은 뒤에는, 씩씩하게 소매 걷어붙이며 노래노래 구성지게 부르며 설거지를 해요. 설거지를 다 했으면, 웃통을 벗고 기운차게 빨래를 복복 비벼요. 기계힘 빌지 말고 내 손힘을 써서 식구들 옷가지 야무지게 빨아서 물을 짜고 해바라기 할 만한 곳에 하나하나 천천히 널어요. 빨래를 널 적에도 노래를 불러야지요. 빨래가 다 마르면 노래부르면서 걷고, 방바닥에 죽 펼쳐서 하나하나 개되, 이때에도 노래를 불러요.


  노래하는 삶은 노래하는 사랑 되어 노래하는 이야기로 태어나요. 노래하는 목소리는 노래하는 꿈 되어 노래하는 한솥밥으로 녹아들어요. 마음으로 그리는 어여쁜 이야기 한 자락, 너른 그리움 되어 아이들 가슴으로 살포시 스며들겠지요. 4345.12.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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