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5) -의 : 말의 바탕
이것은 자기 나라 글자인 ‘가나’와 우리 나라 글자 ‘한글’이 전혀 다른 말의 바탕에서 생겨난 글자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고, 남의 나라 말글에 철없는 입놀림을 하는 짓이라고 본다
《이오덕-우리 문장 쓰기》(한길사,1992) 426쪽
“자기(自己) 나라”는 “제 나라”로 손보고, ‘전(全)혀’는 ‘아주’나 ‘무척’이나 ‘매우’로 손봅니다. “글자임을 모르고”는 “글자인 줄 모르고”로 손질합니다. “남의 나라 말글”은 “다른 나라 말글”로 손질하면 됩니다. 찬찬히 손보고 손질하면서, 글과 말을 한껏 빛낼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말의 바탕에서 생겨난
→ 아주 다른 말에서 생겨난
→ 몹시 다른 바탕에서 생겨난
→ 매우 다른 말바탕에서 생겨난
…
1980년대부터 우리 말글 바르게 쓰는 길을 꾸준하게 밝힌 이오덕 님은 2003년에 숨을 거두기까지 바지런히 당신 넋을 북돋았습니다. 이오덕 님이 쓴 글을 찬찬히 읽은 분들은 1980년대 글투와 1990년대 글투와 2000년대 글투가 얼마나 다른가를 환하게 헤아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더 깊이 살피는 분들은 1970년대 글투와 1960년대 글투와 1950년대 글투까지 견주며 톺아볼 수 있어요. 다만, 서른 해나 쉰 해에 걸친 글투를 살핀다 하더라도, 일부러 눈여겨보며 살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으레 ‘책에 실린 줄거리’만 좇는데 바빠, 이오덕 님이 ‘우리 말글을 알맞고 바르게 쓰자’고 외치면서 ‘이오덕 님 스스로 얼마나 당신 글을 갈고닦으며 북돋우려 힘썼는가’ 하는 대목은 놓치곤 합니다.
서른 해나 쉰 해에 걸친 글투를 곰곰이 돌아보면, 이오덕 님은 “우리 글 바로쓰기”를 외치기 앞서, 당신 스스로 당신 글을 아주 힘을 들이고 사랑을 쏟아 가다듬거나 고쳤어요. 당신 스스로 미처 모르고 쓴 잘못되거나 아쉬운 글투는, 다음에 새 글을 쓰며 고쳤고, 당신이 쓴 글 또한 책을 새로 찍을 적마다 고쳐서 실으려고 했어요. 글은 ‘한 번 배우며 끝나’지 않거든요. 글은 태어나서 숨을 거둘 때까지 날마다 새롭게 배우거든요. 이오덕 님은 당신 스스로 예순 살이나 일흔 살에도 언제나 새롭게 배워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삶매무새를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더러 당신 글 바로잡으라고만 외치지 않았어요. 누구보다 이오덕 님 스스로 당신 글을 바로잡으면서 깨달은 빛을 이웃사람과 뒷사람한테 나누어 주려고 했어요.
1992년에 나온 《우리 문장 쓰기》라는 책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첫머리까지 쓴 글을 싣습니다. 이때에는 이오덕 님 글에도 군데군데 ‘-의’이 끼어듭니다. 아니, 이무렵에는 이오덕 님 스스로 ‘-의라는 토씨도 쓸 만한 자리에는 쓴다’고 여겼습니다. 때로는 아주 오래도록 쓰던 버릇이 고스란히 남기도 해요. 이를테면 “남의 나라 말글” 같은 대목인데요, 이오덕 님은 “다른 나라”라고 말하기보다 “남의 나라”처럼 말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러면 “나의 나라”라고도 쓰셨을까요? 아니에요. 이오덕 님은 ‘나의’처럼 쓰는 글투가 참 어리석다고 거듭 밝히셨어요. 그런데, ‘나’와 한짝을 이루는 ‘남’이라는 낱말에서는 조금 더 슬기롭지 못하셨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남의 나라 말글”을 벗어나 “다른 나라 말글”처럼 적거나 “이웃 나라 말글”처럼 적으면 됩니다. 더 생각을 기울이면 “이웃나라”처럼 적을 만해요. “이웃집”은 한 낱말이에요. 흔히 쓰고 널리 쓰는 ‘이웃-’은 앞가지로 삼으면 됩니다. 그러나, 국어사전을 살피면 “이웃사랑”이나 “이웃사람”을 한 낱말로 안 삼아요. 국어학자 밑생각이 깊지 못한 탓이라 할 텐데, 국어사전에 안 실린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스스로 생각을 빛내면서 “이웃돕기”라든지 “이웃나눔”이라든지 “이웃가게”라든지 “이웃노래” 같은 새 낱말을 빚으면 됩니다. “이웃땅”, “이웃밭”, “이웃마을”처럼 새 낱말을 빚을 수 있어요. 스스로 일구는 삶을 스스로 일구는 말로 꽃피우면 즐겁습니다.
서로 다른 말뿌리에서 생겨난
저마다 다른 말삶에서 생겨난
사뭇 다른 말밑에서 생겨난
이오덕 님은 “전혀 다른 말의 바탕에서 생겨난 글자”처럼 글을 쓰셨습니다. 1980년대 글투인데요, 2000년대에도 이렇게 글을 쓰셨을까 하고 생각을 기울이며 《우리 문장 쓰기》를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오덕 님 넋을 고맙게 얻을 수 있는 한편, 내 깜냥껏 내 말삶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내 말은 내가 가꾸거든요. 내 삶은 내가 가꾸거든요. 내 일도, 내 놀이도, 내 꿈도, 내 사랑도, 언제나 내가 가꿉니다. 곧, 이런 책을 읽거나 저런 강의를 듣는대서 내 지식을 살찌우지 못해요. 나 스스로 나를 가꾸려는 넋이요 몸가짐일 때에 내 삶을 가꿀 수 있어요.
“말의 바탕”처럼 글을 쓴 까닭은 ‘말’과 ‘바탕’ 두 가지 뜻을 밝히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보기글을 살피면, ‘말’만 쓰거나 ‘바탕’만 써도 돼요. 둘 가운데 하나만 써도 이야기흐름은 살아나요. 꼭 두 낱말을 다 쓰고 싶으면 ‘두 낱말을 다 쓰면서 말흐름을 살찌울 새 모습’을 찾으면 됩니다.
‘말바탕’이라고 하면 돼요. 말뿌리나 말밑이라 하면 돼요. 말자취나 말흐름이나 말줄기라 할 수 있어요. 바탕이나 뿌리나 밑이나 자취나 흐름이나 줄기가 무엇인가 하고 돌아보면 ‘삶’으로 이어져요. 그래서 ‘말삶’이라는 낱말이 태어나요. 또한 ‘말사랑’이나 ‘말생각’이나 ‘말넋’이라는 낱말을 빚을 수 있겠지요.
이오덕 님이 쓴 《우리 문장 쓰기》 같은 책을 읽는 까닭은 하나입니다. 이 책에 담긴 살가운 넋을 받아먹으면서, 나 스스로 내 넋을 북돋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오덕 님이 외친 이야기라서 무턱대고 따라야 하지 않아요. 아무리 아름다운 생각이라 하더라도 무턱대고 따를 때에는 아름다울 수 없어요. 생각을 하면서 즐겨야 아름답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외치셨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내 슬기를 빛내어 서로 아름다울 길을 찾을 때에 즐겁습니다. 4345.12.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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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제 나라 글인 ‘가나’와 우리 나라 글 ‘한글’이 사뭇 다른 말삶에서 생겨난 줄 모르고 하는 소리이고, 이웃나라 말글에 철없이 입놀림을 하는 짓이라고 본다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