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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넓이 ㅣ 창비시선 353
김주대 지음 / 창비 / 2012년 11월
평점 :
시에는 눈물 한 방울
[시를 노래하는 시 39] 김주대, 《그리움의 넓이》
- 책이름 : 그리움의 넓이
- 글 : 김주대
- 펴낸곳 : 창비 (2012.11.26.)
- 책값 : 8000원
하얗던 달이 노랗게 집니다. 새벽 네 시 오십 분. 아이들은 새근새근 깊이 자고, 나는 문득 잠에서 깹니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라면 늦잠이지만, 겨울이라면 그리 늦잠 아닌 때입니다. 우리한테는 아직 땅이 없어 흙을 일구지 못하기에 마을 다른 집처럼 새벽 들일을 나가지 않으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 누구보다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면 마음을 가다듬어 글쓰기를 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저희랑 노는 어버이를 좋아하지, 저희를 쳐다보지 않고 글판만 두들기는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면 슬슬 아침을 차려야 합니다. 저녁에 불린 누런쌀은 다시 헹구고, 아침에 끓일 국을 찬찬히 건사합니다. 미역이나 다시마는 새벽녘에 끊어서 불리고, 아침에 먹을 푸성귀는 바지런히 흙을 헹궈서 썰어 놓습니다. 밥을 차리며 살짝 비는 틈에 손빨래 몇 점을 하고, 아이들 밥을 다 먹이고는 설거지를 하다가는 나머지 손빨래를 마저 합니다. 겨울은 해가 짧아 설거지보다 빨래를 먼저 마쳐야 하거든요.
마을 어르신들은 내가 얼마나 일찍 일어나서 글을 붙잡는 줄 모릅니다. 내가 두 시나 세 시에 일어나서 글을 쓰더라도 들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글을 쓰니까요. 아이들 모두 잠든 때에 마음을 모아야 쓸 수 있는 글이니까요.
.. 경비 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건네셔서 죄송한 마음에 나중에는 내가 화장실에서든 어디서든 마주치기만 하면 얼른 고개를 숙인 거라. 그래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가 우편함 배달물들을 2층 사무실까지 갖다 주기 시작하시데. 나대로는 또 그게 고맙고 해서 비 오는 날 뜨거운 물 부어 컵라면을 하나 갖다 드렸지 뭐. 그랬더니 글쎄 시골서 올라온 거라며 이튿날 자두 한 보따리 갖다 주시는 게 아닌가. 하이고, 참말로 갈수록 태산이시라 .. (태산泰山이시다)
밤이 길면 달과 별이 밝습니다. 밤이 짧으면 바람이 포근합니다. 밤이 긴 날에는 이불이 그립습니다. 밤이 짧은 날에는 바람이 그립습니다. 밤이 긴 날은 문을 모두 열어도 밤소리가 아주 고즈넉합니다만, 문을 섣불리 열지 못합니다. 밤이 짧은 날은 문을 몽땅 열면 갖가지 밤소리가 집안으로 스밉니다. 새와 풀벌레와 개구리가 어우러지는 여름 밤소리는 더운 잠자리를 시원하게 달랩니다. 밤바람이 부는 여름철에는 바람결에 나뭇잎과 풀잎 촤르르 출렁이는 소리까지 덩달아 듣습니다. 구름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별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들꽃 자그마한 봉오리에 내려앉은 달빛 기운을 느낍니다. 처마 밑 둥지에서 조용히 자는 제비 식구들 작은 움직임을 느낍니다.
나와 함께 내 이웃이 있습니다. 내 이웃과 함께 내가 있습니다. 나는 싱그럽고 씩씩하게 살아서 숨쉽니다. 내 이웃은 맑고 푸르게 살아서 숨쉽니다.
소리는 마음에서 울려 나옵니다. 빛은 마음에서 퍼져 나옵니다. 꿈은 마음에서 무르익어 나옵니다. 사랑은 마음에서 샘솟아 나옵니다.
고단하게 드러누워 등허리를 펴던 저녁을 지나고, 아이들 오줌 누이는 밤을 지나며, 차츰 밝는 바깥하늘 느끼는 새벽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어떤 하루 찾아올할까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 누릴까요. 오늘은 어떤 일과 놀이로 삶을 빛낼까요.
.. 꿈을 가진 사람은 / 시간과 공간 이동이 가능한 4차원의 세계로 갈 수 있다 .. (영혼의 인간)
잠자리에 들어 가장 보드랍고 맑은 목소리를 뽑아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에 앞서 나 스스로 즐겁고 차분합니다. 밥을 지으며 노래를 부르면, 식구들 함께 먹는 밥그릇마다 노랫결이 스며듭니다. 빨래를 복복 비비며 노래를 부르면, 우리가 늘 입는 옷자락마다 노래무늬 깃듭니다.
옆지기한테 건네고,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은 모두 노래입니다. 사르르 웃음꽃인 말은 푸르르 빛나는 노래입니다. 까르르 웃음열매인 말은 화르르 따스한 노래입니다. 내 말은 사랑일 수 있고, 내 말은 골부림일 수 있습니다. 내 말은 꿈이 될 수 있고, 내 말은 찡그림이 될 수 있어요.
겨울 지나 봄이 되어야 비로소 꽃을 보지는 않아요. 한겨울에도 언제나 꽃을 보아요. 꽃은 들에도 있지만, 내 마음속에도 있어요. 내 마음속부터 환한 꽃일 때에, 비로소 꽃을 느껴요. 내 마음속부터 환하지 못하면 꽃잔치는 누리지 못하고,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꽃노래가 없으면, 내 보금자리를 따사로이 돌보지 못해요.
.. 시급 오천원짜리 딸이 퇴근하는 새벽까지 / 졸면서 책상에 앉아 돈 안되는 글을 쓰다가 / 아빠 뭐해? 문자가 오면 벌떡 일어나 / 응 지금 돈 되는 글 쓰고 있어∼ㅎ^^, 라고 답을 보낸다 .. (먹먹한)
셈틀을 켜서 글을 씁니다. 연필을 쥐어 종이에 글을 쓰기도 합니다. 셈틀 바탕에는 아이들 사진을 깝니다. 날마다 새로 찍는 아이들 환한 모습을 새로 셈틀 바탕에 깔고는 오래도록 이 모습을 바라봅니다. 연필을 쥐어 종이에 글을 쓰면, 두 아이는 아버지 곁에 달라붙어 연필을 빼앗으려고, 또 종이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너희는 너희 연필과 종이를 쓰면 되잖니? 그러나, 아이들이 가져가려는 것을 다 줍니다. 나는 다른 연필과 종이를 쥡니다. 큰아이는 제법 모양 나게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그립니다. 작은아이는 아직 두 살배기이니 종이에 죽죽 금을 긋는 놀이를 즐깁니다.
내가 호미를 들면 두 아이는 호미를 들고 싶습니다. 내가 자전거를 타면 두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싶습니다.
어버이는 어버이요 교사입니다. 어버이가 사랑을 꽃피우리라 생각하면, 아이들도 사랑을 꽃피우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꿈을 펼치리라 생각하면, 아이들도 꿈을 펼치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들풀 한 포기 살며시 쓰다듬고 인사하다가 너희 맛나게 먹을게 하고는 톡톡 끊으면, 아이들도 아버지를 따라합니다. 아버지가 나뭇잎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아이 예쁘구나 노래하면, 아이들도 나뭇잎을 예쁘게 어루만지며 아이 예뻐 하는 눈빛을 밝힙니다.
.. 어머니는 어머니,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 .. (어머니)
예부터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말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삶을 누릴 때에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다만, 아이를 낳는 모든 사람이 어른이 되지는 않아요. 낳기만 해서는 어른이 안 되거든요. 낳는 때는 아주 짧습니다. 낳고 나서 스스로 얼마나 너른 사랑과 꿈이 되는가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다’는 소리는, ‘아이를 내 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아이는 ‘몸으로 낳기’도 하지만, ‘이웃이나 마을 아이를 내가 낳은 아이처럼 여겨 따사로이 보살피기’도 해요.
짝을 지어 살림을 꾸려서 낳는 아이만 아이가 아니에요. 아이는 어디에나 있어요. 길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으며 마을에도 있어요. ‘어른이 된다’는 말은 내 둘레 어느 아이 앞에서도 ‘따순 사랑’을 나누어 주면서 다 함께 맑은 삶 누리도록 북돋운다는 뜻입니다. 나이 몇 살쯤 먹고 혼인신고를 해야 ‘어른이 되지’ 않아요. 나이가 퍽 적다 하더라도, 둘레 아이들을 믿음으로 품고 사랑으로 안을 수 있으면, 누구나 어른이에요. 이를테면, 권정생 님 이야기책 《몽실 언니》에 나오는 몽실이 또한 ‘아이’이면서 ‘어른’입니다.
.. 양손에 큰 짐을 든 노인이 / 동요를 부르며 걷다가 / 간간이 뒤돌아본다 .. (반달)
사랑을 하는 사람일 때에 어른입니다. 사랑이란 사람을 살리는 빛이거든요.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일 때에는 늘 철부지입니다. ‘아이’ 아닌 ‘철부지’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사랑을 하니까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를 사랑합니다. 아이들은 풀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며, 냇물을 사랑합니다. 아이들은 해를 사랑하고, 들을 사랑하며, 무지개를 사랑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살아갈 때에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면, ‘지구별 밝히는 사랑’을 펼치며 즐길 ‘빛’이 한 줄기 새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빛 한 줄기를 몸에 열 달 품어 낳는 일이란 얼마나 거룩하며 아름다운가요. 빛 한 줄기 태어나도록 씨앗을 내놓는 일이란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가요.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을 받아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아먹는 한편, 어버이한테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면서 사랑을 느낍니다. 어버이는 아이들과 살아가며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뜹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두 갈래로 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먼저 ‘철부지’인 나를 바라볼 수 있고, ‘사람’인 나를 바라볼 수 있어요. 사랑에 눈을 뜨지 못한 나라면 철부지요, 사랑에 천천히 눈을 뜨며 눈망을 곱다시 북돋운다면 사람입니다.
.. 상을 탄 화사한 미니스커트 여자 곁으로 기자들이 몰려가 시시덕거리며 술잔을 부딪칠 때, 허름한 바지 꾸그러진 잠바의 그는 구석에서 혼자 고개를 숙이고 부지런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 (슬픈 탕수육)
몸뚱이가 그럴듯하다 해서 사람이 되지 않아요. 껍데기만 사람인 사람이 많으니까요. 몸뚱이가 크대서 어른이 되지 않아요. 껍데기만 어른인 듯 보이는 어른이 많으니까요.
내 마음을 들여다봐요. 내가 선 곳에서 하늘을 우러러봐요. 내 생각을 열어요. 내가 지내는 터에서 둘레를 살펴봐요. 내 사랑을 느껴요. 나와 살을 부비는 살붙이들 얼굴을 마주하면서 살결을 보드라이 쓰다듬어요.
시에는 눈물 한 방울 담습니다. 시에는 웃음 한 자락 담습니다. 시에는 노래 한 가락 담습니다. 시에는 빛 한 줄기 담습니다. 시에는 이야기 한 보따리 담습니다. 시에는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꿈을 그윽히 담습니다.
.. 눈물을 본 딸은 이튿날 바로 다시 아이가 되었다. 아빠 정말 죄송해요, 라는 쪽지를 써놓고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바지를 입고 다녔다. 하이힐을 버리고 운동화를 신고 새벽까지 일했다. 돈이 없는 불쌍한 아이다. 차라리 화장을 한 어른이었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집 설거지 문제가 해결된 것도, 딸이 아이가 된 것도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 (딸)
김주대 님이 빚은 삶말 모인 시집 《그리움의 넓이》(창비,2012)를 읽습니다. 김주대 님은 이 시집에 담은 시에 나오듯 ‘집안이 폭삭 무너졌나’ 봐요. 아마 퍽 어렵거나 가난한 살림인가 봐요. 그런데요, 집안이 폭삭 무너지든 어렵거나 가난한 살림이든 하나도 대단하지 않아요. 기쁠 일이 아니지만 슬플 일도 아니에요. 즐거울 삶도 아니지만 서글픈 삶도 아니에요. 그저 살림살이요 그예 삶이에요.
아이들과 함께 먹을 밥을 날마다 차리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식구 먹는 밥은 우리 식구 마음을 살찌우는 사랑입니다. 아이들 입힐 옷을 날마다 바지런히 빨래하고 말리며 개는 동안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들 입는 옷은 저마다 몸을 사랑하고 아끼는 손길입니다. 이 집은, 이 시골마을 집은, 이 시골마을 작은 집은, 이 시골마을 자그마한 보금자리는, 서로 헤아리고 보살피는 쉼터입니다. 이야기를 꽃피우고 생각을 살찌우는 나눔터입니다.
어머니나 딸한테만 맡기지 말고, 아버지나 아들 된 사람이 손수 밥을 지어 봐요. 찬거리가 없다면 찬거리가 없는 대로 온 사랑 기울여 밥을 지어 봐요. 맛나게 밥을 먹은 뒤에는, 씩씩하게 소매 걷어붙이며 노래노래 구성지게 부르며 설거지를 해요. 설거지를 다 했으면, 웃통을 벗고 기운차게 빨래를 복복 비벼요. 기계힘 빌지 말고 내 손힘을 써서 식구들 옷가지 야무지게 빨아서 물을 짜고 해바라기 할 만한 곳에 하나하나 천천히 널어요. 빨래를 널 적에도 노래를 불러야지요. 빨래가 다 마르면 노래부르면서 걷고, 방바닥에 죽 펼쳐서 하나하나 개되, 이때에도 노래를 불러요.
노래하는 삶은 노래하는 사랑 되어 노래하는 이야기로 태어나요. 노래하는 목소리는 노래하는 꿈 되어 노래하는 한솥밥으로 녹아들어요. 마음으로 그리는 어여쁜 이야기 한 자락, 너른 그리움 되어 아이들 가슴으로 살포시 스며들겠지요. 4345.12.2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