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함께 앉는 어린이

 


  읍내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군내버스에서, 사름벼리는 혼자 앉아 가겠다 한다. 저녁이라 사람이 북적일 듯한데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가지? 읍내 벗어나기 앞서 버스는 꽉 차고, 사름벼리더러 엉덩이 나누어 함께 앉자 말하는 분이 있다. 사름벼리는 엉덩이를 창가로 붙이며 함께 앉아 준다. 그래, 너는 너답게 살면서 네 마음을 나누면 되겠지. 그런데 말야,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 무릎을 마치 네 걸상처럼 여기면서, 버스에서는 왜 아버지 무릎을 걸상으로 안 삼는데? 4346.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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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2013-01-03 15:0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이들도 한자리 차지하고픈 마음이 있나봅니다. 저희딸애도 어릴때 곧잘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파란놀 2013-01-04 05:35   좋아요 0 | URL
네, 그런가 봐요~
 
스시 걸 1
야스다 히로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203

 


마음을 기울여서
― 스시 걸 1
 야스다 히로유키 글·그림,김진수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2013.1.15./7500원

 


  새벽 세 시, 작은아이가 끄응 소리를 내며 엎드리다가는 슬며시 눈을 뜹니다. 무언가 말이 안 된다 싶은 꿈을 꾸며 허덕이다가, 작은아이 잠 깬 소리를 듣고는 나도 게슴츠레 눈을 뜹니다. 눈을 뜨면서 작은아이 바지를 만집니다. 안 젖었습니다. 작은아이를 일으켜서 품에 안습니다. 마루에 놓은 오줌그릇에 앉힙니다. 작은아이 밤오줌을 누입니다. 밤에 오줌이 마려울 적에 그냥 기저귀에 싸기도 하지만, 바지나 기저귀에 오줌을 싸기 앞서 으레 한두 차례 ‘오줌 마려운 티’를 냅니다. 이때 잘 알아채면서 쉬를 누이면 바지도 기저귀도 버리지 않고, 작은아이도 오줌을 잘 가릴 수 있습니다. 이때를 놓치면 작은아이는 바지나 기저귀에 오줌을 싸고는, 축축한 아랫도리가 못마땅해 밤에 으앵 하고 웁니다.


  쉬를 눈 작은아이는 이제 개운한지 다시 새근새근 잠듭니다. 고맙네, 잘 되었네, 하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나도 더 잘까, 새벽 글쓰기를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눈꺼풀이 무거우니 다시 잠자리에 들까 싶지만, 작은아이 밤오줌 누이기 앞서까지 꾼 꿈이 뒤숭숭해서 다시 눕고 싶지 않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뒤숭숭한 꿈이 찾아왔을까 곰곰이 돌아봅니다.


  자꾸 이불 걷어차며 뒹구는 큰아이를 바르게 눕힙니다. 이불을 여밉니다. 큰아이는 자꾸 이불 걷어차며 이리저리 뒹굽니다. 잠든 작은아이도 작은아이대로 이쪽저쪽 뒹굽니다. 두 아이를 옆에 나란히 누여 잠자리에 들면, 둘 모두 착 달라붙는다든지, 둘 모두 저리 구른다든지, 둘 모두 이불 걷어찬다든지, 여러모로 마음을 쓰도록 합니다. 잠을 못 자게 한다기보다, 잠자는 동안에도 여러모로 마음을 쓰게 합니다.


- “으음,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 잠깐 잠깐, 손뼉 치지 마. 낳으려면 일도 그만둬야 하고, 돈도 없고, 술이랑 담배를 끊을 자신도 없는데다, 아마 그 녀석도 엄청 화낼 거야. 뭐? 얼굴이 웃고 있다고?” (16∼17쪽)
- “결국 끝까지 함께해 줬구나. 5년이었나?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는데. 왠지 즐거웠던 건 어째서일까.” (21∼22쪽)


  밥을 끓이고 나물을 헹구며 찬거리를 마련합니다. 밥상을 차리며 아이들을 부릅니다. 아직 두 아이 모두 밥상 앞에 얌전히 앉아 밥그릇 말끔히 비우지 않습니다. 밥 한두 술 뜨고는 딴짓을 하고, 또 한두 술 뜨고는 딴 놀이를 합니다. 밥 한 끼니 차려서 먹자면 온몸 기운을 쪽 빼야 합니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먹으며 자랄까요. 이 아이들은 어떤 기운으로 하루를 맞아들이면서 놀까요. 이 아이들은 몸으로는 밥을 먹고, 마음으로는 사랑을 먹을까요. 밥 한 그릇만 먹을 아이들이 아니라 사랑을 함께 먹을 아이들이라, 내 기운을 몽땅 쓰도록 하는 셈일까요.


  아침에든 저녁에든, 밥을 차려서 다 먹이기까지 기운을 많이 쓰다 보니, 밥을 다 먹이고 나면 살짝 방바닥에 드러눕습니다. 허리를 펴고 한숨을 돌립니다. 아이들은 둘이 이런 놀이 저런 놀이를 합니다. 밥을 먹은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한테 달라붙지 않고 이모저모 저희끼리 잘 놀아서 고맙기도 합니다. 마당에서도 뒹굴고, 마루나 방에서도 뒹굽니다.


  누워 허리를 펴면서 아이들 노는 양을 바라봅니다. 서로 아끼며 노는 양을 보고, 서로 악악거리며 다투는 양을 봅니다.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은 얼음조각을 주워 오독오독 씹어먹곤 합니다. 눈덩이이건 얼음조각이건 뭔가 주전부리처럼 보이니? 얼음조각 씹으니 맛나니?


  씩씩하달지, 개구지달지, 철없달지, 아이들은 아이들 생각대로 하루를 누립니다. 저희 좋을 대로 생각하고, 저희 좋을 대로 마음을 기울입니다. 저희 하고픈 대로 움직이고 싶으며, 저희 가고픈 대로 가고 싶어요.


- “이 접시 위에 작은 여왕님이 서 있어. 보여?” “…….” “유령 같은 존재네요. 당신도, 나도.” (52쪽)
- “반성할 생각은 없다. 후회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찮은 인생이었다는 생각은 든다.” (75쪽)


  따로 무언가 더 해 주어야 즐거울 아이들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더 예쁘장한 옷을 사다 주어야 즐거워 하지 않습니다. 더 맛나다는 밥을 사다 주어야 즐거워 하지 않습니다. 더 놀랍다는 놀잇감을 사다 주어야 즐거워 하지 않습니다. 택시를 불러 어딘가 나들이를 다녀야 더 즐거워 하지 않습니다.


  작은 조개껍데기 하나로도 즐겁습니다. 작은 돌멩이 하나로도 즐겁습니다. 모래 한 줌으로도 즐겁습니다. 나무막대기 하나로도 즐겁습니다. 빈손으로 손가락 깔딱이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해바라기를 하며 노래 한 가락 불러도 즐겁습니다. 놀이노래 하나 부르며 손가락 슥슥 움직여도 즐겁습니다. 서로 두 손을 맞잡고 부웅 하늘을 날아도 즐겁습니다.


  삶이란, 함께 지내는 하루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하루인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꿈이란, 다 같이 어우러지는 하루인가 하고 되새겨 봅니다.


  이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한다면 왜 학교에 가야 하는지 생각을 기울여 봅니다. 이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나누거나 얻을 수 있을는지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교과서에 따라 익히거나 받아들일 지식은 아이들 삶과 사랑과 꿈을 얼마나 북돋울 만한지요. 이런 교과서 지식과 저런 학과목 지식은 아이들 삶과 사랑과 꿈을 어느 만큼 살찌울 만한지요.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사람으로 자라날 아이들한테 아름다울 교과서 지식이 될까요.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가 학교를 다니며 교과서 지식을 얻으면, 시골에서 씩씩하고 튼튼하며 아름다운 어른으로 지낼 만할는지요.


- ‘나를 만들어 준 사람은 아직 신참이었다. 서툴러서 늘 혼나기만 했지만, 소중하게 마음을 담아서 나를 만들어 줬다.’ (91쪽)
- ‘그 여자아이는 가끔 이곳을 찾아온다. 초밥 하나를 사 먹을 수 있는 동전을 움켜쥐고.’ “광어?” “오. 입맛이 어른스럽구나, 꼬마 아가씨. 대장의 출혈 적자 대서비스.” “쉿. 야마이 씨. 맛에 집중하고 있잖아요.” (117쪽)


  먹고 입으며 자기, 사람들은 오래디오랜 나날, 이 세 가지를 하며 살았습니다. 먹으며 몸에 기운을 불어넣고, 입으며 몸을 돌보고, 자거나 쉬면서 몸을 추스릅니다. 먹을거리 찾고 마련하는 데에 온마음 기울이고, 옷 한 벌 짓기까지 옷감 마르고 실 얻는 데에 온넋 쏟으며, 살림집 지어 건사하는 데에 온힘 바칩니다.


  바구니를 끼고 나물을 캐며 노래를 부릅니다. 들에서 곡식을 거두며 노래를 부릅니다. 밥을 지으며 노래를 부르고, 밥을 먹고 나서 노래를 부릅니다. 쉬거나 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잠자리에 들며 노래를 부릅니다. 들일을 나서며 해바라기를 하고 하늘바라기를 합니다. 흙을 만지고 물을 만지면서 꽃바라기를 하고 나무바라기를 합니다. 쉬거나 놀면서 살붙이를 따사로이 바라봅니다. 잠자리에 들면서 서로서로 살가이 바라봅니다.


  문학이라는 이름은 따로 없더라도, 누구나 문학을 누린 삶이라고 느낍니다. 문화라는 이름은 따로 안 붙이지만, 누구나 문화를 빚은 삶이라고 느낍니다. 오늘날처럼 애써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책을 엮어야 문학이 되지 않아요. 오늘날처럼 방송을 찍고 영화를 찍어 커다란 화면으로 들여다보아야 문화가 되지 않아요. 어떤 무대공연을 해야 문화가 되지 않아요. 예술학교 같은 데를 세워서 어떤 예술쟁이를 따로 길러야 예술이 피어나지 않아요.


  삶이 바로 문학이고, 삶이 바로 문화이며, 삶이 바로 예술이에요. 삶을 누리는 사람은 문학을 누리는 사람이고, 삶을 즐기는 사람은 문화를 즐기는 사람이며, 삶을 나누는 사람은 예술을 나누는 사람이에요.


- ‘어린아이라고 우습게 보는 건 아니겠지? 맛을 보면 다 들통날걸.’ (127쪽)
- “오, 완전 탱글탱글해졌는걸. 잘됐네.” “네 덕분이야.” “궁녀님이 탱글탱글한 건 좋지만, 내 일정은 엉망진창이라니까!” “탱글탱글하다는 건 네 얘기야.” “뭐?” (148쪽)


  부산스레 집살림 꾸리다가 만화책 《스시 걸》(대원씨아이,2013) 첫째 권을 읽습니다. 아이들 밥을 먹이며 조금 읽고, 아이들 누여 자장노래 부르다가 조금 읽습니다. 아이들 밥을 다 먹이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허리를 펴면서 조금 읽습니다. 뒷간에서 똥을 누며 조금 읽습니다. 마당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 바라보며 조금 읽습니다. 밥물 끓이면서 조금 읽습니다. 밥상 앞에서 아이들 기다리며 조금 읽습니다.


  《스시 걸》을 그린 야스다 히로유키 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을 기울입니다. 이녁은 어떤 사랑을 나누고 싶어 이 만화를 그렸을까 궁금합니다.


  내 이웃과 동무는 저마다 스스로 활짝 웃는 하루를 누릴 때에 가장 빛나는 사랑을 누린다 하겠지요. 나 또한 나 스스로 활짝 웃는 하루를 누려야 비로소 가장 빛나는 사랑을 키운다 하겠지요.


  곁에서 코코 자는 두 아이는 끝없이 이리 구르고 저리 뒹굽니다. 아이들 곁에서 끝없이 바로 누이고 이불깃 여밉니다. 밤새 이렇게 뒤치닥거리를 하니까 늘 잠이 모자란 듯 지내는가 싶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아이들 곁에서 이리 추스르고 저리 보듬으니까 으레 허리 톡톡 두들기며 지내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 삶을 좋아하니 이렇게 지내겠지요. 이 삶을 즐기니 이처럼 아이들 곁에서 하루를 보내겠지요. 네 식구 살을 부비며 잠드는 작은 방이 재미나고, 서로서로 뒤엉키며 까만 밤 호젓하게 보내니, 이 조그마한 기쁨을 언제나 맛보고 싶겠지요. 참말,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 할 만한 일이란, 삶을 사랑하는 꿈, 이 한 가지로구나 생각합니다. 4346.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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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교육’과 ‘영어교육’
[말사랑·글꽃·삶빛 42] 아이들한테 가르칠 말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소리를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고는, 하나하나 따라서 합니다. 좋은 말이거나 나쁜 말이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 저희 말을 가다듬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차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자동차 소리가 익숙합니다. 전철 소리나 버스 소리가 익숙합니다. 층을 이룬 높은 집을 오르내리는 기계 소리에 익숙하고, 손전화 울리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시골에서 지내는 아이라면, 무엇보다 바람 부는 소리가 익숙합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바람이 들판을 누비는 소리, 바람이 나뭇가지와 지붕을 흔드는 소리, 바람이 물결을 일렁이는 소리가 익숙합니다. 다음으로, 멧새와 들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호미질 하는 소리, 괭이질 하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논밭에서 하루 내내 지내다 보면, 푸성귀 자라고 잎사귀 퍼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그러나, 시골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에는 드나드는 자동차가 제법 많으니, 시골 아이들 또한 자동차 소리를 차츰 익숙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도시와 시골을 어떻게 일구어, 아이들한테 어떤 소리를 들려주는가요. 어른들은 이 나라 삶자락을 어떻게 가꾸어, 아이들한테 어떤 빛깔과 모습을 보여주는가요. 어른들은 서로서로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들한테 어떤 사람살이를 물려주는가요.


  살아가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합니다. 살아가는 결이 어떠한가에 따라 말하는 결이 바뀝니다. 생각하는 무늬가 어떠한가에 따라 말하는 무늬가 달라집니다. 곧, 착한 삶일 때에는 착한 말이 샘솟고, 고운 생각일 때에는 고운 말이 솟아나요. 슬픈 삶일 적에는 슬픈 말이 샘솟겠지요. 어두운 생각일 적에는 어두운 말이 솟아날 테고요.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들길 걷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손을 맞잡는 느낌’과 ‘들길을 걷는 느낌’을 물려줍니다.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자동차 타는 느낌’과 ‘고속도로 달리는 느낌’을 물려줘요. 학교에서 입시교육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거치며, 입시교육에 얽힌 말을 받아먹습니다. 생각과 마음과 넋과 얼 모두 입시교육 틀에 갇혀요. 입시교육을 마치고 대학교에 간 아이들은 이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는 길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틀에 갇힙니다. 이른바 ‘영어 더 잘 해야 한다’는 울타리에 갇혀요.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조차 아이들한테 영어노래를 가르치는데, 이렇게 영어를 가르쳐도 모자란지, 아니 스무 살 될 때까지 영어를 가르쳐도 영어를 옳게 말하지 못하는지, 대학생 된 아이들은 학원을 더 다니며 영어를 배우려 합니다.


  그러면, 회사나 공공기관에서는 영어를 얼마나 쓸까요. 회사나 공공기관은 영어를 얼마나 써야 할까요.


  요즈음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한자 급수 자격’을 따도록 북돋웁니다. 천자문이건 한자 학습만화이건 바지런히 읽혀 한자를 외우도록 몰아세웁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나중에 한자를 어느 자리에 얼마나 써야 할까요. 예전에는 ‘신문에 적힌 한자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면서 한자를 가르쳤어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ㅈㅈㄷ이라는 신문조차 신문이름에나 한자를 적을 뿐, 신문글에 한자 쓰는 일은 아주 없다 할 만해요. 때로는 신문이름을 그저 한글로 적고, 때로는 신문이름을 알파벳으로 적습니다. 이제 ‘한자 몰라 신문 못 읽을 한국사람’ 없습니다.


  한자는 왜 가르쳐야 하고, ‘한자 급수 자격’은 왜 따야 할까요. 관공서나 회사에서는 서류에 왜 어려운 한자말을 굳이 넣어야 할까요. 또는, 왜 영어를 곁들여 서류를 꾸미거나 여러 이름을 지어야 할까요.


  한국사람이 한자를 배워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배울 말은 첫째로 한국말입니다. 무엇보다 한국말을 가장 옳고 바르며 알맞게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말을 가르칠 때에는, 글솜씨나 글재주 부리는 한국말 아닌, 한겨레 삶과 꿈과 사랑을 북돋우며 ‘내 삶을 스스로 글로 쓸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쓴 글, 이른바 ‘문학’을 즐겁게 읽으며 누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겠지요.


  둘째로 외국말을 가르칠 노릇입니다. 외국말로 영어를 배울 노릇이고, 또 다른 외국말로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배울 만하겠지요. 학교에서 가르칠 외국말은 ‘외국사람과 서로 생각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말을 가르칠 적에 ‘내 마음과 생각과 뜻을 슬기롭게 드러내어 서로 즐거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가르쳐야 알맞듯, 외국말을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외국사람과 즐거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가르치는 한편, ‘외국문학을 즐거이 읽고 누릴 수 있’도록 가르칠 노릇이에요.


  한자는 왜 가르쳐야 할까 생각해 봐요. 한자를 가르치면 어디에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헤아려 봐요. 참말, 한자는 어디에도 쓸 자리가 없습니다. 한자는 어느 누구도 쓸 일이 없습니다. 한자는 한국글이 아니고 한자말은 한국말이 아니에요.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면, 한자 아닌 ‘한문’을 가르쳐야 합니다. 한겨레 옛사람이 한문으로 쓴 글을 읽을 수 있게끔 한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한문을 읽어내도록 가르치자면, 중·고등학교 여섯 해로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한문을 더 가르친들 옛사람 한문을 읽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옛사람 한문 읽는 일이란, 이 일을 하고픈 꿈을 품는 학자한테 맡길 일이에요.


  생각해 봐요. 모든 사람이 영어를 익혀 모든 영문학 책을 영어로 읽어야 하지 않아요. 영어 잘 하는 이가 한국말로 곱게 옮긴 책으로 읽으면 돼요. 일본말을 모든 사람이 배워서 일본책을 읽거나 일본영화를 봐야 하지 않아요. 일본말 깊고 넓게 즐거이 익힌 이가 한국말로 예쁘게 옮긴 책과 영화를 누리면 되지요.


  학교에서는 시험공부 아닌 삶공부를 이끌어야 옳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시험공부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배우면서, 삶을 북돋우는 길을 익혀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울 말은 ‘서로 생각을 아름답게 나눌 말’입니다.


  《어린이병원에서 만난 작은 천사들》(한울림,2005)이라는 책을 읽다가 13쪽에서 “마지막까지 인간미 넘치는 병원의 따뜻한 온정을 느끼면서, 마사미의 아버지는 지난 일주일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같은 대목을 봅니다. 이 글월을 살피면 “따뜻한 온정”이라고 나오는데, ‘온정(溫情)’은 “따뜻한 사랑”을 뜻해요. “따뜻한 온정”처럼 적으면 겹말이에요. 이렇게 쓰는 글은 엉터리예요. 그러나, 전문 지식인이라는 분들은 이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하고, 여느 사람들은 이런 글을 읽거나 말을 들어도 ‘잘못된’ 줄 못 깨달아요. 잘못된 말이 자꾸 퍼져요. 엉터리 글이 자꾸 늘어요. 학교부터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고, 학교를 마친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탓입니다.


  이 보기글에는 ‘인간미(人間味)’라는 한자말도 나와요. 이 한자말은 “인간다운 따뜻한 맛”을 뜻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따스함’을 가리킨다 할 테고, “인간미 넘치는 …… 따뜻한 온정”은 세 낱말이 겹치기가 되는 셈입니다. “마사미의 아버지”라는 글월은 어떨까요. 이제 한국사람은 일본사람이 ‘の’를 아무 데나 붙이듯 아무 데나 ‘의’를 집어넣어요. 한겨레는 오랜 옛날부터 “마사미 아버지”나 “마사미네 아버지”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한 줄 까맣게 잊고 말아요. 또 ‘일주일’ 같은 낱말도 살펴봐요. 이제 이런 한자말쯤 누구나 흔히 쓴다지만, 한국사람은 ‘한 주’와 ‘한 달’과 ‘한 해’처럼 말해 버릇했어요.


  지구별이 지구마을처럼 한동아리 된다는 오늘날이기에 영어를 더 잘 배워야 한다면, 더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지구별이 지구마을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더라도, 다 다른 나라와 다 다른 겨레는 서로서로 다른 삶을 누려요. 한국에서도 전라도말과 경상도말이 달라요. 전라도에서도 전주말과 고흥말이 달라요. 자그마한 시골 고흥에서도 읍내와 면내 말이 다르고, 고흥 작은 면에서도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 말이 달라요. 왜냐하면, 삶터가 다르면서 살림살이가 다르고, 더 깊이 파고들면 모든 사람은 낱낱이 다 다르거든요. 같은 서울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말씨와 말결과 말투가 달라요. 저마다 말느낌이 다르고, 말마디에 담는 꿈과 사랑이 달라요.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한국말부터 옳고 바르며 슬기롭게 가르칠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한국말부터 아름답고 착하며 참답게 가르치면서, 한국사람이 이웃 여러 나라 사람들과 사이좋게 어울리도록 북돋우는 외국말을 알맞고 바르게 가르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지식이나 시험공부로 가르치는 외국말은 이제 그칠 수 있기를 빌어요. 삶을 살찌우면서 마음을 보살피는 참다운 말을 따스한 목소리로 가르칠 수 있기를 빌어요. 4346.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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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놀이 2

 


  눈뭉치는 맨손으로 뭉쳐야 단단해지지. 그런데 한참 맨손으로 눈 뭉치며 노느라 손이 꽁꽁 얼지 않았니? 이제 그만 놀자. 네 빨간 손 좀 보렴. 놀더라도 손을 녹이고 나서 다시 놀아라. 이리 오렴. 아버지 손에 네 손을 대고 녹이자. 아이는 조금 더, 한 번 더, 이런 말을 남기며 더 논다. 그래 더 놀아라. 그러나 얼른 와서 네 손 좀 녹이라니까. 4346.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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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되는 꽃

 


  꽃이 피어야 씨앗을 맺는다. 아니, 꽃이 피고 난 다음 꽃가루받이를 해서 꽃이 천천히 시들고 져야 비로소 씨앗을 맺는다. 씨앗을 맺어야 이듬해에 새로 심어서 거둘 수 있다. 꽃이 없다면 씨앗도 열매도 없으며, 씨앗도 열매도 없으면, 우리들 먹을거리는 똑 끊긴다. 씨앗 한 톨에서 싹이 트고 뿌리가 내려 줄기가 오르는데, 이 씨앗이 다시금 꽃으로 피어나고 즐겁게 시들어야, 새로운 씨앗 한 톨과 우리 밥상에 오를 먹을거리가 된다.


  식구들 먹을 밥을 차린다. 고구마랑 당근이랑 감자를 조금 굵게 숭숭 썬다. 세 가지 네모조각 놓인 도마 빛깔이 퍽 예쁘네. 밥 차리는 일손이 바쁘지만, 사진 한 장 찍어 남긴다. 나 혼자만 보기 아까우니까, 나중에 우리 아이들 커서 저희 손으로 이렇게 밥을 차리며 이 빛깔을 새롭게 보기를 바라면서, 또 그때 너희 아버지가 이런 빛깔을 참 좋아하며 사진 한 장 남겼다는 이야기를 슬며시 남기면서. 4346.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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