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교육’과 ‘영어교육’
[말사랑·글꽃·삶빛 42] 아이들한테 가르칠 말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소리를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고는, 하나하나 따라서 합니다. 좋은 말이거나 나쁜 말이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 저희 말을 가다듬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차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자동차 소리가 익숙합니다. 전철 소리나 버스 소리가 익숙합니다. 층을 이룬 높은 집을 오르내리는 기계 소리에 익숙하고, 손전화 울리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시골에서 지내는 아이라면, 무엇보다 바람 부는 소리가 익숙합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바람이 들판을 누비는 소리, 바람이 나뭇가지와 지붕을 흔드는 소리, 바람이 물결을 일렁이는 소리가 익숙합니다. 다음으로, 멧새와 들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호미질 하는 소리, 괭이질 하는 소리에 익숙합니다. 논밭에서 하루 내내 지내다 보면, 푸성귀 자라고 잎사귀 퍼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그러나, 시골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에는 드나드는 자동차가 제법 많으니, 시골 아이들 또한 자동차 소리를 차츰 익숙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도시와 시골을 어떻게 일구어, 아이들한테 어떤 소리를 들려주는가요. 어른들은 이 나라 삶자락을 어떻게 가꾸어, 아이들한테 어떤 빛깔과 모습을 보여주는가요. 어른들은 서로서로 어떻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들한테 어떤 사람살이를 물려주는가요.
살아가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합니다. 살아가는 결이 어떠한가에 따라 말하는 결이 바뀝니다. 생각하는 무늬가 어떠한가에 따라 말하는 무늬가 달라집니다. 곧, 착한 삶일 때에는 착한 말이 샘솟고, 고운 생각일 때에는 고운 말이 솟아나요. 슬픈 삶일 적에는 슬픈 말이 샘솟겠지요. 어두운 생각일 적에는 어두운 말이 솟아날 테고요.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들길 걷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손을 맞잡는 느낌’과 ‘들길을 걷는 느낌’을 물려줍니다.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자동차 타는 느낌’과 ‘고속도로 달리는 느낌’을 물려줘요. 학교에서 입시교육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거치며, 입시교육에 얽힌 말을 받아먹습니다. 생각과 마음과 넋과 얼 모두 입시교육 틀에 갇혀요. 입시교육을 마치고 대학교에 간 아이들은 이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는 길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틀에 갇힙니다. 이른바 ‘영어 더 잘 해야 한다’는 울타리에 갇혀요.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조차 아이들한테 영어노래를 가르치는데, 이렇게 영어를 가르쳐도 모자란지, 아니 스무 살 될 때까지 영어를 가르쳐도 영어를 옳게 말하지 못하는지, 대학생 된 아이들은 학원을 더 다니며 영어를 배우려 합니다.
그러면, 회사나 공공기관에서는 영어를 얼마나 쓸까요. 회사나 공공기관은 영어를 얼마나 써야 할까요.
요즈음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한자 급수 자격’을 따도록 북돋웁니다. 천자문이건 한자 학습만화이건 바지런히 읽혀 한자를 외우도록 몰아세웁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나중에 한자를 어느 자리에 얼마나 써야 할까요. 예전에는 ‘신문에 적힌 한자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면서 한자를 가르쳤어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ㅈㅈㄷ이라는 신문조차 신문이름에나 한자를 적을 뿐, 신문글에 한자 쓰는 일은 아주 없다 할 만해요. 때로는 신문이름을 그저 한글로 적고, 때로는 신문이름을 알파벳으로 적습니다. 이제 ‘한자 몰라 신문 못 읽을 한국사람’ 없습니다.
한자는 왜 가르쳐야 하고, ‘한자 급수 자격’은 왜 따야 할까요. 관공서나 회사에서는 서류에 왜 어려운 한자말을 굳이 넣어야 할까요. 또는, 왜 영어를 곁들여 서류를 꾸미거나 여러 이름을 지어야 할까요.
한국사람이 한자를 배워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배울 말은 첫째로 한국말입니다. 무엇보다 한국말을 가장 옳고 바르며 알맞게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말을 가르칠 때에는, 글솜씨나 글재주 부리는 한국말 아닌, 한겨레 삶과 꿈과 사랑을 북돋우며 ‘내 삶을 스스로 글로 쓸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쓴 글, 이른바 ‘문학’을 즐겁게 읽으며 누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겠지요.
둘째로 외국말을 가르칠 노릇입니다. 외국말로 영어를 배울 노릇이고, 또 다른 외국말로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배울 만하겠지요. 학교에서 가르칠 외국말은 ‘외국사람과 서로 생각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말을 가르칠 적에 ‘내 마음과 생각과 뜻을 슬기롭게 드러내어 서로 즐거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가르쳐야 알맞듯, 외국말을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외국사람과 즐거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가르치는 한편, ‘외국문학을 즐거이 읽고 누릴 수 있’도록 가르칠 노릇이에요.
한자는 왜 가르쳐야 할까 생각해 봐요. 한자를 가르치면 어디에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헤아려 봐요. 참말, 한자는 어디에도 쓸 자리가 없습니다. 한자는 어느 누구도 쓸 일이 없습니다. 한자는 한국글이 아니고 한자말은 한국말이 아니에요. 무언가 가르쳐야 한다면, 한자 아닌 ‘한문’을 가르쳐야 합니다. 한겨레 옛사람이 한문으로 쓴 글을 읽을 수 있게끔 한문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한문을 읽어내도록 가르치자면, 중·고등학교 여섯 해로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한문을 더 가르친들 옛사람 한문을 읽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옛사람 한문 읽는 일이란, 이 일을 하고픈 꿈을 품는 학자한테 맡길 일이에요.
생각해 봐요. 모든 사람이 영어를 익혀 모든 영문학 책을 영어로 읽어야 하지 않아요. 영어 잘 하는 이가 한국말로 곱게 옮긴 책으로 읽으면 돼요. 일본말을 모든 사람이 배워서 일본책을 읽거나 일본영화를 봐야 하지 않아요. 일본말 깊고 넓게 즐거이 익힌 이가 한국말로 예쁘게 옮긴 책과 영화를 누리면 되지요.
학교에서는 시험공부 아닌 삶공부를 이끌어야 옳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시험공부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배우면서, 삶을 북돋우는 길을 익혀야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울 말은 ‘서로 생각을 아름답게 나눌 말’입니다.
《어린이병원에서 만난 작은 천사들》(한울림,2005)이라는 책을 읽다가 13쪽에서 “마지막까지 인간미 넘치는 병원의 따뜻한 온정을 느끼면서, 마사미의 아버지는 지난 일주일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같은 대목을 봅니다. 이 글월을 살피면 “따뜻한 온정”이라고 나오는데, ‘온정(溫情)’은 “따뜻한 사랑”을 뜻해요. “따뜻한 온정”처럼 적으면 겹말이에요. 이렇게 쓰는 글은 엉터리예요. 그러나, 전문 지식인이라는 분들은 이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하고, 여느 사람들은 이런 글을 읽거나 말을 들어도 ‘잘못된’ 줄 못 깨달아요. 잘못된 말이 자꾸 퍼져요. 엉터리 글이 자꾸 늘어요. 학교부터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고, 학교를 마친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탓입니다.
이 보기글에는 ‘인간미(人間味)’라는 한자말도 나와요. 이 한자말은 “인간다운 따뜻한 맛”을 뜻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따스함’을 가리킨다 할 테고, “인간미 넘치는 …… 따뜻한 온정”은 세 낱말이 겹치기가 되는 셈입니다. “마사미의 아버지”라는 글월은 어떨까요. 이제 한국사람은 일본사람이 ‘の’를 아무 데나 붙이듯 아무 데나 ‘의’를 집어넣어요. 한겨레는 오랜 옛날부터 “마사미 아버지”나 “마사미네 아버지”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한 줄 까맣게 잊고 말아요. 또 ‘일주일’ 같은 낱말도 살펴봐요. 이제 이런 한자말쯤 누구나 흔히 쓴다지만, 한국사람은 ‘한 주’와 ‘한 달’과 ‘한 해’처럼 말해 버릇했어요.
지구별이 지구마을처럼 한동아리 된다는 오늘날이기에 영어를 더 잘 배워야 한다면, 더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지구별이 지구마을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더라도, 다 다른 나라와 다 다른 겨레는 서로서로 다른 삶을 누려요. 한국에서도 전라도말과 경상도말이 달라요. 전라도에서도 전주말과 고흥말이 달라요. 자그마한 시골 고흥에서도 읍내와 면내 말이 다르고, 고흥 작은 면에서도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 말이 달라요. 왜냐하면, 삶터가 다르면서 살림살이가 다르고, 더 깊이 파고들면 모든 사람은 낱낱이 다 다르거든요. 같은 서울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말씨와 말결과 말투가 달라요. 저마다 말느낌이 다르고, 말마디에 담는 꿈과 사랑이 달라요.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한국말부터 옳고 바르며 슬기롭게 가르칠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한국말부터 아름답고 착하며 참답게 가르치면서, 한국사람이 이웃 여러 나라 사람들과 사이좋게 어울리도록 북돋우는 외국말을 알맞고 바르게 가르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지식이나 시험공부로 가르치는 외국말은 이제 그칠 수 있기를 빌어요. 삶을 살찌우면서 마음을 보살피는 참다운 말을 따스한 목소리로 가르칠 수 있기를 빌어요. 4346.1.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국어사전 뒤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