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95 : 손으로 만지는 책

 


  작은 가게가 문을 닫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가게로 찾아드는 손님이 줄기 때문입니다. 작은 가게에 가기보다 커다란 가게에 가서 더 값싸게 살 수 있다고 여기기도 하고, 큰 가게에 한 번 찾아가면 여러 갈래 가게가 두루 있으니, 다리품을 적게 들일 만하다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작은 가게가 문을 닫는 참된 까닭이라면, 큰 가게가 다루는 물건하고 똑같은 물건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큰 가게는 돈을 벌 생각으로 판을 더 크게 벌리는데, 작은 가게 또한 돈만 바라보는 얼거리에 스스로를 가둔 채 거듭날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예 문을 닫을밖에 없습니다.


  가게가 많지 않을 때에는 가게에 물건만 갖다 두면 이럭저럭 팔리겠지요. 이를테면 깊은 멧골짝에 가게 하나 있다 하면, 이 가게에 물건을 이럭저럭 두거나 물건값을 꽤 비싸게 매기더라도 이럭저럭 팔리기 마련입니다. 두멧시골에 작은 가게 하나 달랑 있으면, 이 작은 가게는 이럭저럭 장사가 되기 마련입니다.


  작은 책방이 문을 닫습니다. 어쩔 수 없는지 모르나, 작은 책방으로 찾아드는 책손이 줄기 때문입니다. 작은 책방보다 큰 책방으로 갑니다. 큰 책방에 ‘책 가짓수가 더 많다’고들 말하는데, 정작 큰 책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큰 책방에서 장만하는 책은 ‘더 많은 가짓수’가 아닌 ‘잘 팔리는 책’, 곧 작은 책방에도 어엿하게 놓인 책입니다. 이제 퍽 많은 사람들이 큰 책방으로도 잘 안 가고 인터넷책방에서 책을 사곤 합니다. 큰 책방은 따로 인터넷책방을 엽니다. 처음부터 인터넷으로만 책을 다루는 책방도 있습니다. 이들 큰 책방이랑 인터넷책방이라 해서 ‘책 가짓수’가 더 많지 않습니다. 나는 두멧시골에서 살아가니까 여느 때에는 인터넷책방에 책을 주문해서 받지만, 내가 바라는 책치고 ‘하루 만에’ 오거나 ‘한 주 안에’ 오는 책은 드뭅니다. 어느 책은 보름이 지나서야 오고, 어느 책은 달포쯤 기다려야 받습니다. 큰 책방이건 인터넷책방이건 ‘모든 책을 갖추어 곧장 팔’ 수는 없습니다. 책시렁에 안 갖춘 책은 그때그때 출판사에 말해서 받은 다음 보내니, 내가 작은 책방에 전화를 걸어 주문한 다음 받거나 큰 책방이나 인터넷책방에 주문을 넣어 받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책방이 자꾸 문을 닫는 까닭이란, 사람들이 사서 읽는 책이 외곬로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큰 책방에 잔뜩 놓이고, 인터넷책방에서 그날그날 보내 줄 수 있는 ‘잘 팔리는 책’에 사람들 눈길이 더 기울어지기 때문이에요.


  한 나라가 아름답자면 서울이나 부산 같은 데에 사람들이 끔찍하게 몰려들지 않아야 합니다. 도시와 시골이 서로 알맞게 살림을 꾸려야 하고, 도시에도 숲과 논밭이 있어야 합니다. 책방과 책손과 출판사가 나란히 아름답게 어깨동무하자면, 삶과 사랑과 꿈을 살찌우는 책을 서로 아끼면서 북돋울 줄 알아야 하며, 책손 스스로 어떤 책으로 이녁 삶과 사랑과 꿈을 가꿀 때에 즐거운가 하고 새롭게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책은 손으로 만져서 읽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읽더라도 손가락 움직여 읽습니다. 컴퓨터도 손으로 움직이고, 종이책도 손으로 넘깁니다. 손이 하는 일을 느끼고, 몸이 움직이는 결을 헤아리며, 마음이 자라는 흐름을 알아챌 때에, 비로소 책읽기이고 삶읽기이며 사랑읽기가 됩니다. 4346.1.2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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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24 15:10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의 글 속에 들어 있는 '어깨동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정겹고도 절실하게 들립니다.ㅎㅎ

파란놀 2013-01-25 04:11   좋아요 0 | URL
책을 읽는 사람들 가슴속에서 좋은 사랑이 싹틀 수 있기를 빌어요
 


 ‘1인 단행본’ 6호 《시집 고흥》 (도서관일기 2013.1.22.)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인천에서 도서관을 열고 충청북도 음성으로 옮겨 꾸리는 동안 ‘1인 잡지’를 만들었다.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1인 잡지는 모두 11호까지 냈다. 도서관살림과 집살림을 전남 고흥으로 옮긴 뒤부터 1인 잡지는 마감하고 ‘1인 단행본’을 만드는 한편, ‘도서관 이야기책’을 만든다. 이제 1인 단행본 6호를 내놓는다. 도서관 지킴이가 되는 분한테 책을 부치려고 봉투에 주소와 이름을 적고, 책을 한 권씩 넣어 테이프를 바른다. 혼자서 모든 일을 손으로 다 해야 하는 만큼, 한 번에 책을 다 부치지 못한다. 오늘은 이만큼 다음날은 저만큼, 조금씩 나눈다. 다 꾸린 소포는 자전거수레 뒤칸에 담는다. 큰아이만 자전거수레에 태워 우체국으로 달린다. 우체국에서 책을 부치면서, 시골 면소재지 우체국장 아주머니한테 1인 단행본 6호인 《시집 고흥》 한 권을 드린다.


  이번 1인 단행본 《시집 고흥》은 우리 네 식구 전남 고흥에서 살아가며 느낀 이야기를 갈무리한 싯노래 110꼭지를 그러모았다. 나는 시까지 쓸 생각은 딱히 없었으나, 이래저래 여러 시집을 읽으면서 ‘시가 이렇게 어지럽다면 나는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누리는 예쁜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담고 싶다’고 느꼈다. 한편, 내가 좋아하는 이웃이나 동무를 만날 적마다 ‘이녁을 마주하는 즐거움’을 짤막짤막 쪽글로 쓰곤 했는데, 이 쪽글을 슬쩍 내밀다가 ‘이런 쪽글이 시라는 옷을 입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 《시집 고흥》에 실은 싯노래 110꼭지는 거의 모두 내 이웃이나 동무한테 선물한 쪽글이다. 곧, 내 고운 이웃이나 동무가 나한테 ‘싯노래라 하는 선물’을 베풀었다고 할까. 쓰기는 내가 쓰지만,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맑은 생각을 북돋운 님들은 모두 내 곁에 있다.


  그러고 보면, 싯노래를 쓸 때만이 아니라, 책 이야기를 쓰든 헌책방 이야기를 쓰든 우리 말글 이야기를 쓰든, 늘 내 곁 고운 벗님이 슬기로운 이야기샘이 되는구나 싶다. 저마다 내 마음속에 이야기씨앗을 뿌려 이야기싹이 트고 이야기꽃이 피어나도록 도와준다. (ㅎㄲㅅㄱ);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 보태 주셔요 *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1인 단행본을 받아보고 싶은 분은 '도서관 지킴이'가 되면 됩니다.

도서관 지킴이가 되려면~~~~

 

● 어떻게 지킴이가 되는가 : 1평 지킴이나 평생 지킴이 되기
● 1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1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10만 원씩 돕는다
● 2평 지킴이가 되려면 : 다달이 2만 원씩 돕거나, 해마다 20만 원씩 돕는다
● 평생 지킴이가 되려면 : 한꺼번에 200만 원을 돕거나, 더 크게 돕는다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지킴이가 되는 분들한테는 제가 내는 1인잡지와 낱권책을 모두 드립니다. 지킴이가 되어 주실 분들은 주소와 전화번호를 꼭 알려주셔요.


● 돕는 돈은 어디로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손전화 : 011-341-7125 
hbooklove@naver.com
● 누리집 : cafe.naver.com/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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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로 마실을 갈 적에, 청주에 있는 책방에서 이 만화책을 사려고 했는데, 매장에 없을 뿐더러, 일꾼들이 <피아노의 숲>이라는 만화를 모르더라. 음, 그럴 수 있는 일이리라 생각하면서도 퍽 서운하고 아쉬웠다. 할 수 없는 노릇이기는 할 테지만, 만화를 좋아하거나 아낀다는 사람으로서 <피아노의 숲>을 모른다고 한다면, 글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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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22-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양여명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3년 1월
4,800원 → 4,320원(10%할인) / 마일리지 24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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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아저씨 책읽기

 


  시골에 처음부터 책방이 없지 않았습니다. 시골에도 새책방과 헌책방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골에는 새책방도 헌책방도 거의 자취를 감춥니다. 왜냐하면,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몽땅 도시로 가거든요. 게다가, 좀 똑똑하다 싶은 아이는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가까운 도시로 보내고, 꽤 똑똑하거나 집에 돈이 있다 싶은 아이라면 아예 서울에 있는 학교로 보내요.


  책은 어른도 읽지만 어린이도 읽고 푸름이도 읽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읽는 책입니다. 곧, 어른도 읽는 책이라 한다면, ‘어른도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배우는 사람이기에 책을 읽지, 안 배우는 사람이라면 책을 안 읽습니다. 나이 일흔이나 여든에도 꾸준히 책읽기를 하는 분은, 당신 스스로 새 삶과 넋과 사랑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열대여섯 푸름이나 스물대여섯 젊은이가 책을 안 읽는다 한다면, 이녁 스스로 ‘배우고 싶은 삶’이 없이 물질문명에 끄달리거나 돈벌이·이름값에 휘둘린다는 뜻입니다.


  ㅂ씨가 앞장서서 새마을운동을 꾀할 적부터 시골이 왕창 무너지면서 시골마을이 흔들립니다. ㅂ씨가 앞장서지 않았어도 이씨 임금들이 다스린 조선 사회와 제국주의 일본이 다스린 식민지 때에도 시골마을은 무너졌습니다. 다만, 이들 노예 사회와 식민지 사회가 물러난 뒤, 시골사람은 스스로 시골을 아끼면서 일으키려고 애썼는데, 독재정권을 세우는 여러 권력자가 사람들을 바보스럽게 길들이려고 제도권교육을 꾀하며 학교에 등급을 매기고 대학입학시험 굴레를 만드니, 사람들은 이 덫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왜 도시에 가서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어야 할까요. 왜 전문직이라 하는 의사나 판사나 뭣뭣이 되어야 할까요. 왜 시골 흙일꾼이나 고기잡이로 살아가면 안 될까요.


  종이책도 책이지만, 풀과 나무와 새와 구름과 별도 책입니다. 하늘에서 책을 읽고 바람과 책을 읽으며 냇물이랑 책을 읽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아니더라도,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숲에서 이야기를 얻어 종이에 글을 쓴 다음 책을 묶습니다. 숲에서 이야기를 얻기에, 다시금 숲에서 얻은 나무를 다듬어 종이를 빚어 책을 엮습니다.


  이제 시골에는 새책방도 헌책방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기에, 이 같은 모습으로서는 시골에서 책을 장만해서 읽기란 매우 아득합니다. 시골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인터넷책방’을 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골사람인 나는 인터넷책방에서 책을 꽤 장만합니다. 도시에 있는 책방까지 나들이를 할 겨를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때때로 도시로 볼일을 보러 다녀야 하곤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지만 도시에 나갈 일이 아예 없지 않아요. 그래서, 여느 때에 푼푼이 돈을 그러모읍니다. 도시로 볼일을 보러 나갈 적에 책을 잔뜩 장만합니다. 그러고는 택배를 불러 시골집으로 책을 부치지요. 도시로 볼일을 보러 나갈 적에, 도시에 있는 작은 책방에서 오십만 원어치이든 백만 원어치이든 책을 장만합니다. 인터넷목록만 살필 적하고, 몸소 책방마실을 해서 손으로 만질 적은 사뭇 달라요. 인터넷목록을 살피다가도 ‘뒤늦게 알아채는 아름다운 책’이 있습니다만, 손으로 책시렁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살필 때에 ‘제때 알아보지 못한 아름다운 책’을 훨씬 많이 만나요.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즐겁습니다. 종이책을 꼭 읽어야 한다면, 굳이 시골에 남지 말고 도시로 갈 노릇입니다. 이제 종이책 다루는 책방은 거의 도시에만 있으니까요. 그런데, 요즈음은 시골마다 군립도서관을 꽤 예쁘며 알차게 잘 지어 돌봅니다. 시골 군립도서관에 책을 주문해서 빌려 읽으면 돼요. 돈이 적거나 없으면 빌려서 읽으면 되지요. ‘내 것’으로 책을 갖고 싶으면, 돈을 천천히 그러모아서 사면 돼요. ‘내 것’이란, 이야기를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지, 물건은 내 것으로 삼을 수 없어요. 집안에 들인 책꽂이에 천 권 만 권 꽂는대서 ‘내 것’인 책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 깃들 때에 비로소 ‘내 것’인 책입니다.


  시골에서 어린 나날 보내거나 푸른 나날 누리는 예쁜 벗님들은 굳이 ‘물건으로서 바라보는 책’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기를 바라요. ‘물건인 책’은 나중에 얼마든지 장만할 수 있어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 실컷 장만하면 돼요. 어린 시골 벗님과 푸른 시골 벗님은 ‘마음을 살찌우는 이야기’를 읍내 군립도서관이나 면소재지 작은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시골 도서관을 아끼고 사랑하다 보면, 시골마을에도 어여쁘며 해맑은 ‘새책방이나 헌책방’이 씩씩하게 태어날 길이 열릴 테니까요. 4346.1.2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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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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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211

 


생각하는 대로 짓는 이야기
― 지금은 없는 이야기
 최규석 글·그림
 사계절 펴냄,2011.11.25./13000원

 


  겨울날 기름으로 보일러를 돌려 방을 덥히고, 가스로 보일러를 움직여 집을 덥힙니다. 그런데, 기름이나 가스를 쓰며 방이랑 집을 덥힌 지 고작 백 해도 쉰 해도 안 됩니다. 천 해 만 해, 또는 십만 해 백만 해에 걸쳐, 사람들은 몸뚱이에 털을 길게 기른다든지 불을 피운다든지 짐승가죽을 입는다든지 하면서 겨울날 추위를 견디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불을 쓰기 앞서나 짐승가죽을 입기 앞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먼먼 옛날에 겨울이 따로 있었을까요. 먼먼 옛날에는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 어떠했을까요. 철마다 다른 빛이 사람들 보금자리에 드리우면서,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누리려 했을까요. 아주 먼먼 옛날에는 추위가 따로 없는 삶을 누렸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역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임금 이름이나 학자 이름이나 전쟁 영웅 이름은 가르치지만, 정작 지난 어느 날 사람들이 어떤 삶을 일구었는가 하는 참다운 역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옷을 어떻게 짓고 집을 어떻게 지으며 밥을 어떻게 지었는가 하는, 참다운 문화와 예술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임금이 입던 옷이나 임금이 머리에 쓰던 금관은 역사가 될 수 없습니다. 성곽이나 도자기는 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노래가 역사입니다. 몸에서 몸으로 물려주는 이야기가 문화입니다. 씨앗을 갈무리하고 흙을 보듬으며 나무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사회입니다. 풀포기에서 실을 얻어 나무로 베틀을 짜고 한 땀 두 땀 옷을 짓는 몸짓이 정치입니다. 천 해를 살아온 나무를 베어 천 해를 잇는 집을 짓는 넋이 경제입니다.


- 불행한 소년은 천사의 말이 잘 납득되지 않았지만, 천사의 따뜻한 목소리에 조금 행복해졌습니다. (24쪽)

 


  사람들은 학교를 다닙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어쩐지 더 바보스럽게 바뀌는구나 싶습니다. 슬기롭게 거듭나라며 보내는 학교라기보다, 졸업장과 자격증을 거머쥐어 돈을 더 잘 벌도록 이끄는 학교로구나 싶습니다. 또래동무와 살가이 어깨동무하는 길을 익히는 학교라기보다, 이웃을 밟고 올라서며 홀로 1등 되도록 내모는 학교로구나 싶어요.


  어린이집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초등학교에서는 무엇을 보여주는가요. 중·고등학교에서는 무엇을 하는가요. 대학교에서는 무엇을 나누는가요. 대학원에서는 무엇을 베푸는가요.


  어느 교육과정에서도 삶을 밝히지 않습니다. 어느 배움터에서도 사랑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어느 교과서도 꿈을 일깨우지 않습니다.

  사람을 톱니바퀴로 길들이는 교육 얼거리입니다. 사람을 쳇바퀴 돌도록 내모는 사회 틀거리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은 사건과 사고 이야기로 얼룩지면서, 사람들 생각을 사건과 사고 이야기에 가둡니다. 마음이 한결같이 아름답도록 북돋우는 책은 파묻히고, 그때그때 잘 팔리는 책만 도드라집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누리는 삶일까요.


- 그러나 그는 금방 잊었다. 날짜에 맞춰 완성해야 할 칼들이 아직도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71쪽)

 


  핵발전소가 아슬아슬하다 하니, 이제 화력발전소를 잔뜩 짓는다고 하는 정부 정책입니다. 그러면, 화력발전소는 안 아슬아슬할까요. 학교 교과서조차 지구자원이 메마른다고 말하는데, 화석에너지로 전기를 뽑아내려는 화력발전소는 얼마나 쓸모있는 정책이 될까요. 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끔찍한 매연과 공해를 일으키는 발전소를 지으려 할까요. 왜 무한동력 에너지를 안 만들고, 정부나 기업은 더 많은 세금을 긁어모으는 길로 나아가려 할까요. 사람들은 왜 도시로 더 몰려들고, 왜 도시를 더 키우려 하며, 왜 도시 울타리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 품을까요.


  네 식구 먹을 쌀이나 푸성귀나 열매를 얻자면, 그리 넓지 않은 땅이어도 넉넉합니다. 임금이나 관료가 세금을 모질게 거두어서 옛사람 등허리가 휘었지, 땅에서 얻는 곡식이나 열매나 푸성귀가 적어서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씨앗을 갈무리하지 않는 권력자와 흙을 보듬지 않는 관료와 지식인이 넘치는 바람에 흙일꾼 등허리가 휘었지, 흙일꾼이 게으르거나 바보스러워서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예부터 한국에는 멧자락 많고 들은 그리 안 넓었다고 합니다. 들이 안 넓으니 먹고살기 팍팍한 듯 잘못 여길 수 있지만, 멧자락이란 숲입니다. 숲은 온통 먹을거리입니다. 숲이 있기에 집을 짓는 나무를 얻고, 불을 지필 땔감을 얻습니다. 숲이 있기에 열매를 얻고, 숲이 드리우기에 나물을 캐며 버섯을 땁니다. 곡식 얻을 들은 조금만 있으면 되니, 손으로 조금조금 땅을 갈아 씨를 뿌리면 됩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라를 세우고 정치권력을 부리면서, 정갈하고 조용하던 시골과 숲과 들이 무너집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성곽을 쌓으며 궁궐을 짓는다면서 젊은 사내를 몽땅 긁어모읍니다. 평화와 평등하고는 동떨어진 권력자는 정갈하고 조용한 시골과 숲과 들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지난날에는 권력자 아이들만 ‘가르치’고 나머지 사람은 노예처럼 부리며 나라를 굴렸다면, 오늘날에는 노예처럼 부려 톱니바퀴가 되도록 내몰 여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쳇바퀴를 굴리도록 꾀합니다.


- 더 이상 그를 놀리는 원숭이는 없었고, 어떤 원숭이는 그를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른 팔 없는 원숭이들은 놀림에 더해 게으르다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192∼193쪽)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정치권력이지만, 자유도 민주도 여느 사람하고는 참 동떨어집니다. 정치권력한테는 자유와 민주가 있되, 여느 사람한테는 자유와 민주가 없습니다. 기나긴 새마을운동과 독재정권과 도시화와 경제개발을 밀어붙여 온 시골마을에 관행농사(농약과 비료와 항생제 쓰는 농사)가 뿌리내리도록 한 이 나라 정치권력입니다. 뜻을 품고 시골에 깃들어 농약도 비료도 항생제도 안 쓰면서 흙을 보듬으려고 하면, 시골마을에서 쫓겨나거나 따돌림받거나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 합니다. 유전자 건드린 씨앗이 아니라, 예부터 이어온 씨앗을 심고 싶다 하더라도, 유전자 건드린 씨앗 아니고는 찾을 길이 까마득합니다. 요즈음 한국 식품회사에서 만드는 가공식품을 보면 ‘국산 콩’이라느니 ‘국산 밀’이라느니 ‘국산 쌀’이라고 내다 붙이지만, 뿌려서 거둔 땅이 한국일 뿐, 모든 씨앗은 다국적기업 씨앗회사에서 유전자를 건드린 녀석입니다.


  굴레는 스스로 뒤집어씁니다. 굴레는 내 목에 내가 채웁니다. 굴레를 쓰는 사람도 나요, 굴레를 벗는 사람도 나입니다. 내가 스스로 깨어날 때에 내 몸에서 굴레가 사라지고, 내가 스스로 깨어나지 않을 때에 내 몸은 굴레투성이가 됩니다.


  이야기는 늘 스스로 빚습니다. 삶은 늘 스스로 일굽니다. 사랑은 늘 내 마음속에서 길어올립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바뀝니다. 내가 일어서지 않으면 어느 것도 안 달라집니다.


  최규석 님은 《지금은 없는 이야기》(사계절,2011)라는 만화책에서 “이 이야기들 중 몇 개만이라도 살아남아 다른 많은 우화들처럼 작자 미상의 이야기로 세상에 떠돌다 적절한 상황에 적절하게 쓰이기를, 그리하여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7쪽).” 하고 말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우리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 일굴 수 있어야 합니다. 신문에 기대거나 방송에 기대거나 책에 기댈 우리들이 아닙니다. 신문을 보고 싶으면 신문을 우리 손으로 엮어야 합니다. 방송을 보고 싶으면 방송을 우리 손으로 엮어야 합니다. 책을 보고 싶으면 책을 우리 손으로 엮어야 합니다.


  밥을 먹고 싶으면, 내 손으로 흙을 일구고, 내 손으로 방아를 찧으며, 내 손으로 보글보글 끓여야 합니다. 내 손으로 나락을 말리고, 내 손으로 나락을 베며, 내 손으로 쭉정이를 까부를 노릇입니다. 내 손으로 씨앗을 건사하고, 내 손으로 풀을 뽑으며, 내 손으로 하늘 흐름을 읽어 날씨를 깨달아야 합니다.


  정치를 알고 싶으면 신문 정치 기사가 아닌, 내 눈길과 넋으로 알아낼 노릇입니다. 무엇 한 가지 배우고 싶으면, 학교에 들어가지 말고 스스로 찾고 캐내면서 익힐 노릇입니다.


  스스로 해야지요. 이제껏 아직 없는 이야기인걸요. 누구도 가르칠 수 없고, 누구한테서도 배울 수 없는 이야기인걸요. 생각하는 대로 짓는 이야기입니다. ‘학교를 안 다니면 안 돼.’ 하고 생각하기에 학교를 다니고 맙니다. ‘선거 때 아무개를 안 찍으면 안 돼.’ 하고 생각하기에 새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으로 사랑을 생각할 일입니다. 누구나 가슴속으로 꿈을 생각할 일입니다. 사랑과 꿈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움과 다툼을 생각하는 흐름을 끊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앞으로도 정치권력자가 주름잡는 슬픈 굴레를 뒤집어쓸 테지요. 4346.1.2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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