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즐겨읽기 211

 


생각하는 대로 짓는 이야기
― 지금은 없는 이야기
 최규석 글·그림
 사계절 펴냄,2011.11.25./13000원

 


  겨울날 기름으로 보일러를 돌려 방을 덥히고, 가스로 보일러를 움직여 집을 덥힙니다. 그런데, 기름이나 가스를 쓰며 방이랑 집을 덥힌 지 고작 백 해도 쉰 해도 안 됩니다. 천 해 만 해, 또는 십만 해 백만 해에 걸쳐, 사람들은 몸뚱이에 털을 길게 기른다든지 불을 피운다든지 짐승가죽을 입는다든지 하면서 겨울날 추위를 견디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불을 쓰기 앞서나 짐승가죽을 입기 앞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먼먼 옛날에 겨울이 따로 있었을까요. 먼먼 옛날에는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 어떠했을까요. 철마다 다른 빛이 사람들 보금자리에 드리우면서,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누리려 했을까요. 아주 먼먼 옛날에는 추위가 따로 없는 삶을 누렸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역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임금 이름이나 학자 이름이나 전쟁 영웅 이름은 가르치지만, 정작 지난 어느 날 사람들이 어떤 삶을 일구었는가 하는 참다운 역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옷을 어떻게 짓고 집을 어떻게 지으며 밥을 어떻게 지었는가 하는, 참다운 문화와 예술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임금이 입던 옷이나 임금이 머리에 쓰던 금관은 역사가 될 수 없습니다. 성곽이나 도자기는 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노래가 역사입니다. 몸에서 몸으로 물려주는 이야기가 문화입니다. 씨앗을 갈무리하고 흙을 보듬으며 나무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사회입니다. 풀포기에서 실을 얻어 나무로 베틀을 짜고 한 땀 두 땀 옷을 짓는 몸짓이 정치입니다. 천 해를 살아온 나무를 베어 천 해를 잇는 집을 짓는 넋이 경제입니다.


- 불행한 소년은 천사의 말이 잘 납득되지 않았지만, 천사의 따뜻한 목소리에 조금 행복해졌습니다. (24쪽)

 


  사람들은 학교를 다닙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어쩐지 더 바보스럽게 바뀌는구나 싶습니다. 슬기롭게 거듭나라며 보내는 학교라기보다, 졸업장과 자격증을 거머쥐어 돈을 더 잘 벌도록 이끄는 학교로구나 싶습니다. 또래동무와 살가이 어깨동무하는 길을 익히는 학교라기보다, 이웃을 밟고 올라서며 홀로 1등 되도록 내모는 학교로구나 싶어요.


  어린이집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초등학교에서는 무엇을 보여주는가요. 중·고등학교에서는 무엇을 하는가요. 대학교에서는 무엇을 나누는가요. 대학원에서는 무엇을 베푸는가요.


  어느 교육과정에서도 삶을 밝히지 않습니다. 어느 배움터에서도 사랑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어느 교과서도 꿈을 일깨우지 않습니다.

  사람을 톱니바퀴로 길들이는 교육 얼거리입니다. 사람을 쳇바퀴 돌도록 내모는 사회 틀거리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은 사건과 사고 이야기로 얼룩지면서, 사람들 생각을 사건과 사고 이야기에 가둡니다. 마음이 한결같이 아름답도록 북돋우는 책은 파묻히고, 그때그때 잘 팔리는 책만 도드라집니다. 우리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누리는 삶일까요.


- 그러나 그는 금방 잊었다. 날짜에 맞춰 완성해야 할 칼들이 아직도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71쪽)

 


  핵발전소가 아슬아슬하다 하니, 이제 화력발전소를 잔뜩 짓는다고 하는 정부 정책입니다. 그러면, 화력발전소는 안 아슬아슬할까요. 학교 교과서조차 지구자원이 메마른다고 말하는데, 화석에너지로 전기를 뽑아내려는 화력발전소는 얼마나 쓸모있는 정책이 될까요. 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끔찍한 매연과 공해를 일으키는 발전소를 지으려 할까요. 왜 무한동력 에너지를 안 만들고, 정부나 기업은 더 많은 세금을 긁어모으는 길로 나아가려 할까요. 사람들은 왜 도시로 더 몰려들고, 왜 도시를 더 키우려 하며, 왜 도시 울타리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 품을까요.


  네 식구 먹을 쌀이나 푸성귀나 열매를 얻자면, 그리 넓지 않은 땅이어도 넉넉합니다. 임금이나 관료가 세금을 모질게 거두어서 옛사람 등허리가 휘었지, 땅에서 얻는 곡식이나 열매나 푸성귀가 적어서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씨앗을 갈무리하지 않는 권력자와 흙을 보듬지 않는 관료와 지식인이 넘치는 바람에 흙일꾼 등허리가 휘었지, 흙일꾼이 게으르거나 바보스러워서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예부터 한국에는 멧자락 많고 들은 그리 안 넓었다고 합니다. 들이 안 넓으니 먹고살기 팍팍한 듯 잘못 여길 수 있지만, 멧자락이란 숲입니다. 숲은 온통 먹을거리입니다. 숲이 있기에 집을 짓는 나무를 얻고, 불을 지필 땔감을 얻습니다. 숲이 있기에 열매를 얻고, 숲이 드리우기에 나물을 캐며 버섯을 땁니다. 곡식 얻을 들은 조금만 있으면 되니, 손으로 조금조금 땅을 갈아 씨를 뿌리면 됩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라를 세우고 정치권력을 부리면서, 정갈하고 조용하던 시골과 숲과 들이 무너집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성곽을 쌓으며 궁궐을 짓는다면서 젊은 사내를 몽땅 긁어모읍니다. 평화와 평등하고는 동떨어진 권력자는 정갈하고 조용한 시골과 숲과 들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지난날에는 권력자 아이들만 ‘가르치’고 나머지 사람은 노예처럼 부리며 나라를 굴렸다면, 오늘날에는 노예처럼 부려 톱니바퀴가 되도록 내몰 여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쳇바퀴를 굴리도록 꾀합니다.


- 더 이상 그를 놀리는 원숭이는 없었고, 어떤 원숭이는 그를 존경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른 팔 없는 원숭이들은 놀림에 더해 게으르다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192∼193쪽)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정치권력이지만, 자유도 민주도 여느 사람하고는 참 동떨어집니다. 정치권력한테는 자유와 민주가 있되, 여느 사람한테는 자유와 민주가 없습니다. 기나긴 새마을운동과 독재정권과 도시화와 경제개발을 밀어붙여 온 시골마을에 관행농사(농약과 비료와 항생제 쓰는 농사)가 뿌리내리도록 한 이 나라 정치권력입니다. 뜻을 품고 시골에 깃들어 농약도 비료도 항생제도 안 쓰면서 흙을 보듬으려고 하면, 시골마을에서 쫓겨나거나 따돌림받거나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 합니다. 유전자 건드린 씨앗이 아니라, 예부터 이어온 씨앗을 심고 싶다 하더라도, 유전자 건드린 씨앗 아니고는 찾을 길이 까마득합니다. 요즈음 한국 식품회사에서 만드는 가공식품을 보면 ‘국산 콩’이라느니 ‘국산 밀’이라느니 ‘국산 쌀’이라고 내다 붙이지만, 뿌려서 거둔 땅이 한국일 뿐, 모든 씨앗은 다국적기업 씨앗회사에서 유전자를 건드린 녀석입니다.


  굴레는 스스로 뒤집어씁니다. 굴레는 내 목에 내가 채웁니다. 굴레를 쓰는 사람도 나요, 굴레를 벗는 사람도 나입니다. 내가 스스로 깨어날 때에 내 몸에서 굴레가 사라지고, 내가 스스로 깨어나지 않을 때에 내 몸은 굴레투성이가 됩니다.


  이야기는 늘 스스로 빚습니다. 삶은 늘 스스로 일굽니다. 사랑은 늘 내 마음속에서 길어올립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바뀝니다. 내가 일어서지 않으면 어느 것도 안 달라집니다.


  최규석 님은 《지금은 없는 이야기》(사계절,2011)라는 만화책에서 “이 이야기들 중 몇 개만이라도 살아남아 다른 많은 우화들처럼 작자 미상의 이야기로 세상에 떠돌다 적절한 상황에 적절하게 쓰이기를, 그리하여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7쪽).” 하고 말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우리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 일굴 수 있어야 합니다. 신문에 기대거나 방송에 기대거나 책에 기댈 우리들이 아닙니다. 신문을 보고 싶으면 신문을 우리 손으로 엮어야 합니다. 방송을 보고 싶으면 방송을 우리 손으로 엮어야 합니다. 책을 보고 싶으면 책을 우리 손으로 엮어야 합니다.


  밥을 먹고 싶으면, 내 손으로 흙을 일구고, 내 손으로 방아를 찧으며, 내 손으로 보글보글 끓여야 합니다. 내 손으로 나락을 말리고, 내 손으로 나락을 베며, 내 손으로 쭉정이를 까부를 노릇입니다. 내 손으로 씨앗을 건사하고, 내 손으로 풀을 뽑으며, 내 손으로 하늘 흐름을 읽어 날씨를 깨달아야 합니다.


  정치를 알고 싶으면 신문 정치 기사가 아닌, 내 눈길과 넋으로 알아낼 노릇입니다. 무엇 한 가지 배우고 싶으면, 학교에 들어가지 말고 스스로 찾고 캐내면서 익힐 노릇입니다.


  스스로 해야지요. 이제껏 아직 없는 이야기인걸요. 누구도 가르칠 수 없고, 누구한테서도 배울 수 없는 이야기인걸요. 생각하는 대로 짓는 이야기입니다. ‘학교를 안 다니면 안 돼.’ 하고 생각하기에 학교를 다니고 맙니다. ‘선거 때 아무개를 안 찍으면 안 돼.’ 하고 생각하기에 새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으로 사랑을 생각할 일입니다. 누구나 가슴속으로 꿈을 생각할 일입니다. 사랑과 꿈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움과 다툼을 생각하는 흐름을 끊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앞으로도 정치권력자가 주름잡는 슬픈 굴레를 뒤집어쓸 테지요. 4346.1.2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