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아이들

 


  하룻밤 바깥마실 다녀온 아버지가 시골집에 저녁 아홉 시 무렵 돌아온다. 바깥 볼일 보는 사이 집에 전화를 하면, 여섯 살 큰아이가 집전화 받으면서 “아버지 집에 없어서 울었어요.” 하고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잘 지내려나. 하룻밤 사이에 돌아오자니 몹시 벅차지만, 몸이 고단하면 시골집에서 여러 날 쉬면 다 풀리리라 생각한다. 바쁜 걸음으로 시골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아이들을 부른다. 두 아이 모두 저녁 아홉 시가 넘고 열 시가 되도록 좀처럼 잠자리에 들려 하지 않는다. 두 눈은 틀림없이 졸린 눈이다. 아니, 졸음이 넘치고 넘쳐 어찌할 바 모르는 눈이다. 여느 날은 작은아이부터 안아서 재우나, 오늘은 큰아이부터 안아서 재운다. 아버지 품에 안긴 큰아이는 말도 투정도 떼도 없이 몸을 맡기고 고개를 파묻는다. 잠자리에 반듯하게 눕히자마자 곯아떨어진다. 하룻밤이라지만, 그끄제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가 그제 늦은 저녁 돌아왔으니, 너희한테는 거의 이틀 동안 아버지 얼굴 못 본 셈일 테지. 기다려 주어 고맙다. 아버지도 너희를 생각하며 한결 씩씩하고 즐겁게 살아갈 다짐을 한다. 4346.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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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시간

 


  이오덕 선생님이 마흔 해 남짓 쓴 일기가 올 2013년 4∼5월 사이에 책으로 나온다. 곧 나올 놀라운 책 하나가 잘 나올 수 있도록 일손을 거들려고,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이오덕학교로 찾아간다. 이듬날에는 서울로 찾아간다. 먼저, 전남 고흥에서 버스와 버스와 기차와 버스와 버스와 버스를 갈아타는 여덟 시간 십육 분 걸리는 다리품을 팔아 충북 충주 이오덕학교로 갔고, 시외버스와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가서 하룻밤 묵은 다음, 이듬날 아침에 전철을 타고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 들러 일기책 내는 이야기를 나눈 뒤, 서울부터 고흥까지 어마어마하게 내달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잠은 네 시간. 이틀에 걸쳐 열일곱 시간을 버스와 기차와 전철에서 보낸다. 몸이 부서질 듯 보낸 하룻밤인데, 이번 마실길은 생각보다 몸이 그리 힘들지 않다. 아름다운 책 하나 그야말로 아름답게 태어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으로 여러 생각을 기울였기 때문일까. 스스로 좋은 생각만 품고 좋은 생각을 북돋우며 바지런히 움직였기 때문일까. 버스와 기차와 전철로 움직인 시간을 수첩에 낱낱이 적은 뒤 덧셈을 하며 나 스스로 놀라지만, 앞으로 즐거운 일이 새록새록 일어나기를 비니, 몸이나 마음이 퍽 홀가분하다.


  생각이 삶을 어떻게 살찌우는가를 몸소 겪었구나 싶다. 마음이 몸을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기쁘게 누렸구나 싶다. 지난 열일곱 시간 동안 종이책을 일곱 권 읽었다. 4346.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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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 읽히고 싶은가

 


  2400쪽 넘는 고흥군지를 쓰는 분이 우리 집에 찾아온다. 이녁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고흥군지에 깃드는 낱말과 말투가 너무 딱딱하거나 어렵구나 싶어, 이 낱말과 말투를 가다듬을 수 있을까 싶어 이런저런 대목을 여쭌다. 말씀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한다. 역사나 문화나 정치나 사회를 가리킨다고 하면서 오늘날 쓰는 ‘전문 낱말’이란 온통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 한자말’이다. 여느 사람들이 쓰던 낱말이 아니고,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낱말이 아니다. 학문을 하거나 학술을 하는 사람은 모두 이런 ‘전문 낱말’을 쓰니까, 학문가와 학술가 울타리 안쪽에서만 고흥군지를 읽히거나 나누려 하면, 굳이 낱말이나 말투를 가다듬지 않아도 된다. 외려, 학문가와 학술가라면, 가다듬은 낱말이나 말투를 낯설어 하거나 힘들게 여길 테니까.


  적잖은 돈과 품을 들여 내놓을 ‘지역 역사책’일 고흥군지인 만큼, 지역 푸름이와 교사와 마을 어르신 모두 이 책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학문을 하거나 학술을 하는 사람들이 주고받거나 쓰는 낱말이나 말투가 아닌, ‘열다섯 살 푸름이’ 눈높이에 맞추는 낱말이나 말투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열두 살 어린이’가 읽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낱말이나 말투가 되면 더 좋으리라.


  그런데, 오늘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은 어떤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나눌까. 오늘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학교에서 듣는 낱말과 말투, 또 교과서에 적힌 낱말과 말투, 동화책이나 문학책이나 인문책 같은 데에 적힌 낱말과 말투,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낱말과 말투, 인터넷에서 떠도는 낱말과 말투 …… 들을 찬찬히 헤아려 본다. ‘열두 살 어린이’ 말투나 ‘열다섯 살 푸름이’ 말투라 할 만한, 맑고 바르며 아름다운 한겨레 말투가 있을까.


  눈높이는 학자들 눈높이가 아닌, 푸름이와 어린이 눈높이로 맞추어야 즐거운 책을 엮을 수 있기는 하지만, 푸름이와 어린이가 맑거나 바르거나 아름답게 말하거나 글쓰도록 북돋우지 못하는 오늘날 모습을 떠올리면, 차마 어떻게 우리 말글을 써야 좋겠는가 하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 슬기롭게 쓰는 길’을 못 배운다. 어른들이 ‘한국사람으로 한국말 슬기롭게 쓰는 길’을 안 걷는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물려주거나 가르치지 못한다. 아이들 또한 스스로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생각하고 찾고 캐내고 보살피고 살찌우려는 꿈을 키우지 않는다. 고흥군지에 깃든 낱말과 말투를 몽땅 뜯어고치지 않고서야 책다운 책이 될 수 없고, 글다운 글이 될 수 없다.


  누구나 말을 하며 살아가지만, 말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참 없다. 공무원이든 학자이든 교사이든 여느 어버이이든, 글을 써야 할 자리가 반드시 있는데, 정작 글이란 무엇이고 글로 옮기는 말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한국사람은 아직 ‘밥을 먹으면서도 이 밥이 어떤 밥인가’조차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늘 숨을 쉬지만 ‘늘 쉬는 숨이 어떤 바람인가’조차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마시는 물이 ‘얼마나 맑거나 몸을 살리는 물인가’조차 깨닫지 않는다. 밥과 숨과 물을 모르는 이 나라 이 겨레인데, 넋과 얼과 꿈과 사랑을 빛내는 말이랑 글을 느끼거나 알려면, 너무 머나먼 일인가. 밥과 숨과 물을 알아채거나 느끼면, 말이랑 글은 저절로 알아채거나 느낄 텐데, 이 나라 이 겨레가 참삶을 찾기를 바라는 일이란, 아주 아득한 노릇인가. 4346.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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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섬

 


고즈넉한 시골 면소재지
작은 가게에
잘 익은 벼빛 머리
러시아 아저씨 아주머니
깡통맥주 두 꾸러미
과자 몇 점 산다.

 

서울서도 순천서도 광주서도
시골 읍·면 구경
안 오는데
웬 러시아 손님들
갸우뚱하고 보니,

 

고흥 끝자락
다도해 국립공원 한복판
나로섬에 세운
시멘트 벌판에서
뭘 쏜다는구나.

 

마음 열어 눈 뜨면
달 별 미리내
폭 안을 텐데
10조인지 100조인지

 

바다를 흔들고
숲을 흔들고
들을 흔들고
마을까지 흔들어
뭘 쏘는구나.

하늘이 갈라진다.


새들이 놀라 숨는다.
물고기가 떼로 죽는다.
고기잡이배가 사라진다.
김밭 매생이밭 굴밭
덜덜덜 떤다.

 

아버지는 1500원
나는 800원
군내버스 타고
읍내에서 동백마을로 돌아온다.
별이 쏟아지는 밤이네.

 


4346.1.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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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해에 충청북도 음성에 살 적부터

동시를 하나둘 썼어요.

그러고 나서 2012년에는 '어른시'를 썼고,

이제 2013년으로 접어들어 다시 '동시'를 씁니다.

 

'동시'란 어른이 써서 어린이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시입니다.

우리는 그냥 '시'라고 하는데,

그냥 시라고 할 때에는 동시와 '어른시'를 아울러요.

 

그래서 이곳에서도

'시-어른시'와 '시-동시' 두 갈래 게시판으로 나눕니다.

'시-어른시' 자리는

2014년이 되어서야 새 글이 올라오겠지요.

2013년 한 해는,

또 2014년 1월이나 2월까지는 동시만 올릴게요.

 

즐겁게 읽고

아름다운 생각 북돋아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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