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한테 읽히고 싶은가

 


  2400쪽 넘는 고흥군지를 쓰는 분이 우리 집에 찾아온다. 이녁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고흥군지에 깃드는 낱말과 말투가 너무 딱딱하거나 어렵구나 싶어, 이 낱말과 말투를 가다듬을 수 있을까 싶어 이런저런 대목을 여쭌다. 말씀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한다. 역사나 문화나 정치나 사회를 가리킨다고 하면서 오늘날 쓰는 ‘전문 낱말’이란 온통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 한자말’이다. 여느 사람들이 쓰던 낱말이 아니고,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낱말이 아니다. 학문을 하거나 학술을 하는 사람은 모두 이런 ‘전문 낱말’을 쓰니까, 학문가와 학술가 울타리 안쪽에서만 고흥군지를 읽히거나 나누려 하면, 굳이 낱말이나 말투를 가다듬지 않아도 된다. 외려, 학문가와 학술가라면, 가다듬은 낱말이나 말투를 낯설어 하거나 힘들게 여길 테니까.


  적잖은 돈과 품을 들여 내놓을 ‘지역 역사책’일 고흥군지인 만큼, 지역 푸름이와 교사와 마을 어르신 모두 이 책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학문을 하거나 학술을 하는 사람들이 주고받거나 쓰는 낱말이나 말투가 아닌, ‘열다섯 살 푸름이’ 눈높이에 맞추는 낱말이나 말투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열두 살 어린이’가 읽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낱말이나 말투가 되면 더 좋으리라.


  그런데, 오늘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은 어떤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나눌까. 오늘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학교에서 듣는 낱말과 말투, 또 교과서에 적힌 낱말과 말투, 동화책이나 문학책이나 인문책 같은 데에 적힌 낱말과 말투,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낱말과 말투, 인터넷에서 떠도는 낱말과 말투 …… 들을 찬찬히 헤아려 본다. ‘열두 살 어린이’ 말투나 ‘열다섯 살 푸름이’ 말투라 할 만한, 맑고 바르며 아름다운 한겨레 말투가 있을까.


  눈높이는 학자들 눈높이가 아닌, 푸름이와 어린이 눈높이로 맞추어야 즐거운 책을 엮을 수 있기는 하지만, 푸름이와 어린이가 맑거나 바르거나 아름답게 말하거나 글쓰도록 북돋우지 못하는 오늘날 모습을 떠올리면, 차마 어떻게 우리 말글을 써야 좋겠는가 하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아이들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 슬기롭게 쓰는 길’을 못 배운다. 어른들이 ‘한국사람으로 한국말 슬기롭게 쓰는 길’을 안 걷는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물려주거나 가르치지 못한다. 아이들 또한 스스로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생각하고 찾고 캐내고 보살피고 살찌우려는 꿈을 키우지 않는다. 고흥군지에 깃든 낱말과 말투를 몽땅 뜯어고치지 않고서야 책다운 책이 될 수 없고, 글다운 글이 될 수 없다.


  누구나 말을 하며 살아가지만, 말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참 없다. 공무원이든 학자이든 교사이든 여느 어버이이든, 글을 써야 할 자리가 반드시 있는데, 정작 글이란 무엇이고 글로 옮기는 말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한국사람은 아직 ‘밥을 먹으면서도 이 밥이 어떤 밥인가’조차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늘 숨을 쉬지만 ‘늘 쉬는 숨이 어떤 바람인가’조차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마시는 물이 ‘얼마나 맑거나 몸을 살리는 물인가’조차 깨닫지 않는다. 밥과 숨과 물을 모르는 이 나라 이 겨레인데, 넋과 얼과 꿈과 사랑을 빛내는 말이랑 글을 느끼거나 알려면, 너무 머나먼 일인가. 밥과 숨과 물을 알아채거나 느끼면, 말이랑 글은 저절로 알아채거나 느낄 텐데, 이 나라 이 겨레가 참삶을 찾기를 바라는 일이란, 아주 아득한 노릇인가. 4346.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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