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싹 글쓰기

 


  풀싹이 돋는다. 봄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온 들에 풀싹이 돋는다. 뒷밭에도 앞밭에도 옆밭에도 풀싹이 돋는다. 흙으로 된 땅바닥 어디에나 풀싹이 돋는다. 풀싹은 따스한 바람과 햇살을 먹으면서 씩씩하게 돋는다.


  기지개를 켠다. 싱그러운 바람과 상큼한 햇살을 나도 냠냠 하고 받아먹는다. 바람결에는 어떤 기운이 서렸을까. 햇살자락에는 어떤 넋이 담겼을까. 풀싹은 빗물과 햇살과 바람이 있으면, 여기에 고운 흙이 있으면 고 조그마한 씨앗에서 아주 커다란 줄기와 잎사귀를 올리면서 자란다. 어쩌면, 먼먼 옛날 슬기로운 사람들은 바람과 햇살과 빗물과 흙, 이렇게 네 가지로 목숨 잇는 숨결을 얻지 않았을까.


  풀싹이 돋듯 글을 쓴다. 따스한 기운 받는 풀싹이 씩씩하게 돋듯, 나 또한 마음밭에 따스한 사랑을 담아 글을 쓴다. 마음이 따사로운 사랑으로 가득할 때에는 즐거운 이야기 담는 글이 태어난다. 마음이 차가움이나 메마름이나 매몰참이나 슬픔으로 넘실거릴 적에는 무겁거나 딱딱한 글이 태어난다. 슬픈 이야기도 글이요 기쁜 이야기도 글일 테지. 눈물 젖은 밥도 먹을 수 있을 테고, 웃음 피어나는 밥도 먹을 수 있을 테지. 그런데, 곰곰이 돌아보면, 밥을 먹는 까닭은 살고 싶기 때문이다. 살아도 아무렇게나 살고 싶어 먹는 밥이 아니라, 즐겁게 살고 싶어 먹는 밥이요, 기쁨과 웃음을 누리고 싶어 먹는 밥이다. 웃으려고 먹는 밥이고, 따뜻하게 살고 싶어 먹는 밥이며, 사랑을 꽃피우려는 넋으로 먹는 밥이다. 글을 쓴다고 한다면, 이런 글도 쓰고 저런 글도 쓸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풀싹처럼 씩씩하게 살아가며 푸르게 빛나는 삶을 꽃피우려고 쓰는 글이지 싶다.


  싱그러운 바람을 들이켜면서 싱그러운 글을 쓰자고 생각한다. 상큼한 햇살을 받아먹으면서 상큼한 글을 쓰자고 다짐한다. 봄을 부르는 비가 찾아들며 별빛이 살짝 숨는다. 바람이 조용하다. 아침저녁으로 멧새 노랫소리가 짙다. 이제 두 달 뒤면 새봄 새날 맞이하는 씩씩한 제비들 우리 집 처마 밑에 들겠구나. 4346.2.1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버지의 집 - 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권산 글.사진 / 반비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31

 


옛집, 옛사람, 옛나무, 옛들
― 아버지의 집, 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권산 사진·글
 반비 펴냄,20122.11.25./25000원

 


  삼백 해를 머금은 옛집이라는 ‘송석헌’을 사진과 글로 담아 보여주는 《아버지의 집》(반비,2012)을 읽습니다. 전라도 구례에서 ‘지리산닷컴’을 꾸리는 권산 님이 사진과 글로 빚은 사진책으로, 옛집에서 삶을 잇고 꾸린 권헌조라고 하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살그마니 곁들입니다.


  권산 님은 “그 PD 역시 그랬다. 나는 그 ‘흔하디흔한 감나무 잎’을 쫓는, 은퇴를 앞둔 소년 같은 PD가 흥미로웠고, 그는 내 사진과 글의 어떤 대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10쪽).” 하는 말로, 이 사진책 엮은 까닭을 밝힙니다. 방송국에서 옛집을 찍어 보여주려 하면서 권산 님하고 끈이 닿고, 권산 님은 방송에 나갈 사진을 찍으며 경상도 봉화에 있는 옛집을 찾아갔다고 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스스로 좋아서 찾아간 옛집은 아니요, 스스로 천천히 찾아간 옛사람이 아니며, 스스로 느긋하게 찾아가며 마주하는 옛나무나 옛들은 아닌 셈입니다. 사진을 찍는 권산 님은 자꾸 혼잣말을 합니다. 이를테면, “바람을 찍는 것도 아닌데 연사모드로 설정했다. 이른 아침 고택에서 셔터 소리는 유난했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48쪽).” 하는. 또는, “노인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쥔 저 손을 찍어야 한다고 머리는 판단했지만 나의 호흡은 너무 거칠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55쪽).”와 같은.


  사진을 찍는 이라면 누구나 느낄는지 모르고, 또 누구나 안 느낄는지 모르는데, 어떤 모습을 찍더라도 ‘바로 오늘 이곳’일 때에 찍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 아닌 모습은 못 찍습니다.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을 찍더라도 스스로 골짜기 냇물 곁에 서서 ‘바로 오늘 이곳’인 줄 느껴야 찍어요.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적에도 아이들 곁에 서서 아이들 노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며 ‘바로 오늘 이곳’이 아이들 곁인 줄 느껴야 찍습니다.

 

 


  봄꽃을 사진으로 찍으려면 봄이 오기까지 기다려요. 그리고, 봄이 지나면 봄꽃은 못 찍어요. 마땅한 노릇인데, 여름에는 여름꽃을 찍지, 봄꽃을 못 찍습니다. 곧, 봄에는 ‘바로 오늘 이곳’이 봄이기에 봄꽃을 찍고, 여름에는 ‘바로 오늘 이곳’이 여름이라서 여름꽃을 찍어요. 오직 봄꽃 한 가지만 사진으로 찍고 싶다면, 여름 가을 겨울 지나 봄이 오기를 기다릴 노릇이요, 봄이 지나가면 다시 봄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노릇입니다.


  권산 님은 경상도 봉화 옛집에 세 차례 찾아가서 사진을 담습니다. 고작 세 번뿐이라 할 수 있지만, 자그마치 세 번이라 할 수 있어요. 송석헌 권헌조 할아버지가 옛어른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 200장 안팎 사진을 찍었다 하는 만큼, 스스로 사진을 찍고 싶으면 얼마든지 사진을 찍어요. 다시 말하자면, 권산 님 스스로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참말 권산 님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찍을 사진보다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사진만 찍습니다.


  어떠한 사진을 찍더라도 나쁠 구석 없으며, 더 좋을 대목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모습’을 찍는 사진이라면 이러한 사진대로 재미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어울리며 사진을 찍겠다면, 이러한 사진은 이러한 사진대로 재미있습니다.

 

 


  권산 님은 권헌조 할아버지 새벽마실(옛어른 무덤 찾아뵙기)을 그날 아니면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일이라 여겼지만, 권헌조 할아버지는 누가 지켜보거나 말거나 스스로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누리려는 일을 누립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날이 궂든 맑든, 스스럼없이 옛어른 무덤을 찾아뵈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모습’이 아니라, ‘권산 님 스스로 경상도 봉화 옛집에 다시 찾아와서 이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해야 옳습니다. 권산 님 스스로 더 마음을 기울인다면, 경상도 봉화에서 여러 날 느긋하게 머물면서 여러 날 새벽에 권헌조 할아버지하고 함께 무덤마실을 즐기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어느 날은 사진기 안 들고 무덤마실을 즐기고, 어느 날은 사진만 신나게 찍으며 무덤마실을 즐깁니다. 어느 날은 두런두런 말씀을 여쭙고 들으며 무덤마실 즐길 수 있고, 어느 날은 하루 내내 무덤 곁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어요.

  스스로 즐기는 삶만큼 스스로 찍는 사진입니다.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에 따라 스스로 바라봅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이 아닐 때에는 느끼지 못하기에 바라보지 못해요. 이를테면, 시골길 천천히 걷기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시골길 언저리에 돋는 조그마한 풀과 꽃을 못 느끼며 자가용을 내몰아요. 시골길 천천히 걷기를 즐길 때에는 시골길 언저리 조그마한 풀과 꽃을 느끼는 한편, 시골 멧자락을 감도는 구름을 느끼고, 시골숲에서 노니는 멧새가 지저귀는 노랫가락을 느낍니다. 이렇게 느낄 때에는 이렇게 느끼는 여러 가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사진 하나로 새롭게 빚습니다. 이렇게 느끼지 못할 때에는 이런 여러 가지가 내 사진에 스며들지 못합니다.


  권산 님은 옛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전라도 구례에서 겪은 ‘중앙정부 옛집 되살리기’를 떠올립니다. “국가는 집을 보호한다고 한다. 몇 억, 몇 십억 원의 예산을 고택 수리에 투여한다. 그들에게는 건축물인 집만 보일 뿐 그 집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12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중앙정부는 옛집이라 하는 ‘문화재’를 바라볼 뿐, 옛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을 바라보지 못해요. 아니, 못 느끼니 못 바라봅니다. 못 느끼기에 모르고, 모르기에 바라보지 못하며, 못 느끼고 못 바라보기에 모르면서 ‘옛집에 깃드는 사람들 삶’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길을 찾지 못해요.

 

 


  고속도로를 왜 내야 하고, 공장과 골프장을 왜 지어야 하며, 발전소나 관광단지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공무원과 개발업자는 왜 시골자락 갈아엎어 무언가 뚝딱뚝딱 시멘트와 쇠붙이와 아스팔트와 플라스틱을 들이부으려 할까 하고 돌아볼 노릇입니다. 참말, 이들 공무원과 개발업자는 삶을 느끼지 않기에 삶을 바라보지 못할 테지요. 시골자락 시골살이를 느끼지 않으니 시골마을 시골사람을 바라보거나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할 테지요.


  그런데, 권산 님도 경상도 봉화 옛집을 조금 더 살가이 바라보지 못합니다. 권산 님 스스로 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만 “나는 짧은 시간에 미션을 완료하는 이 일에 나의 진정성이 얼마나 투여되는 것인지 스스로 가늠하지 못한다(204쪽).” 하고 털어놓습니다.


  짧은 겨를에 바삐 찍는 사진이니 참말 권산 님 말마따나 ‘참다움(진정성)’을 제대로 못 담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사흘 동안 찍는 사진 아닌 엿새 동안 찍는 사진이라면, 또는 서른 날이나 삼백 날 찍는 사진이라면, 또는 세 해나 서른 해 찍는 사진이라면, 조금 더 참다움을 담을 만할까 궁금해요. 사흘 나들이로 찍는 사진이라면, 사흘 나들이대로 홀가분하게 즐기면서 사진을 찍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사흘이든 이틀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꼭 하루 동안 찍는 사진이어도 되고, 한 시간 사이에 찍는 사진이어도 됩니다.

 


  즐겁게 찍으면 즐거움을 나눕니다. 사랑스레 찍으면 사랑스러움을 나눕니다. 사진책 《아버지의 집》에서 권산 님은 즐거움으로도 사랑스러움으로도 송석헌 옛집을 마주하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권산 님 삶과 일이 너무 바쁘면 어때요. 바쁘다 하지만 사흘이나 짬을 내고 다른 일을 미루면서 봉화마실을 했어요. 다른 일을 젖히고 봉화마실을 하면서 권헌조 할아버지를 뵙고 권헌조 할아버지 ‘늙은 아들’도 뵈었어요. 방송에 나가야 하는 무언가 그럴듯한 그림을 못 찍으면 어때요. 그저 즐겁게 찍으면 돼요. 새벽녘에도 바라보고, 환한 낮에도 바라보며, 어두운 밤에도 바라보면 돼요. 안채에 이런저런 어수선한 것들이 있으면 어수선한 대로 바라보면 되고, 어수선한 모습 사이에 살가이 깃든 ‘예쁜 삶’과 ‘고운 삶’과 ‘따순 삶’을 느끼면 돼요.


  옛집을 보고, 옛사람을 봅니다. 옛나무를 보고, 옛들을 봅니다. 집 한 채 삼백 해 먹었다는데, 멧자락 하나 삼만 해나 삼억 해를 묵습니다. 옛나무 한 그루 삼백 해나 삼천 해 즈음 먹을 수 있고, 옛나무에서 옛나무로 이어오는 숲은 삼십만 해나 삼십억 해를 묵을 수 있어요. 오래된 들판에 한해살이풀이나 두해살이풀이 돋는다지만, 이 풀은 먼먼 옛날부터 씨앗과 씨앗으로 이어졌어요. 만해살이풀이나 억해살이풀일 수 있어요.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빌어요. ‘옛집을 지킨다는 중앙정부가 여러 억 들여 뚝딱뚝딱거리는 모습’이 달갑지 않다면, 중앙정부 일꾼 스스로 삶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중앙정부 일꾼 누구나 삶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부터 스스로 삶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사진을 즐겁게 찍을 수 있기를 빌어요. 멋들어진 모습으로 찍는 사진이 아닌, 즐겁게 찍는 사진으로, 즐겁게 삶을 잇고 지은 옛집 옛삶을 마주할 수 있기를 빌어요. 사진책 하나에 즐거운 웃음 물씬 드러나는 이야기 한자락 살포시 실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6.2.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엊저녁, 사진비평 원고 한 권을 마무리지었다. 지난해에 나오기로 하고 아직 안 나오는 내 사진비평책 하나, 그 뒤 꾸린 사진비평 원고 두 뭉치, 여기에 새 사진비평 원고 한 뭉치...... 나라밖 사진비평 원고도 책으로 나오기 쉽지 않지만, 한국에서 한국사진을 이야기하는 책이 여러 사람 여러 눈길로도 나올 수 있기를 빌어 본다.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지음, 한유주 옮김 / 사흘 / 2013년 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13년 02월 17일에 저장
절판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방을 밝히는 책

 


  책시렁을 환하게 밝히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책시렁에 수십 권이나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이 꽂히는데, 여기에 어느 책 하나 살포시 깃들며 다른 책들 모두 환하게 밝히는 남다른 책 하나 있습니다.


  마을을 환하게 밝히는 책방이 하나 있습니다. 수백 수천 군데 가게가 줄줄이 늘어선 마을인데, 여기에 어느 책방 하나 조용히 깃들며 다른 가게를 모두 눈부시게 밝히는 남다른 책방 하나 있습니다.


  도서관이 마을에 수십 군데 있지 않아도 됩니다. 책방이 마을에 열 몇 군데씩 있지 않아도 됩니다. 책방거리나 책방골목이 없어도 됩니다. 꼭 한 군데 조그마한 책방이 있어도 넉넉하고, 꼭 한 군데 조그마한 책방에 책 하나 있어도 즐겁습니다.

 

  내 보금자리에 책이 십만 권이나 백만 권 있을 때에 뿌듯하지 않습니다. 내 보금자리에는 책이 한 권조차 없어도 됩니다. 내 보금자리에 책 하나 있기를 바란다면, 나와 살붙이 눈길을 틔우고 마음을 열도록 북돋우는 아름다운 이야기 깃든 책 하나이면 넉넉합니다. 수십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이 삶을 빛내지 않아요.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는 손길로 살그마니 집어들어 기쁘게 웃음짓도록 돕는 책 하나라면 즐겁습니다.


  햇살 한 조각이 따스합니다. 바람 한 닢이 시원합니다. 물 한 모금이 상큼합니다. 꽃 한 송이가 어여쁩니다. 말 한 마디가 반갑습니다. 돈 한 푼이 고맙습니다. 노래 한 가락이 신납니다. 춤 한 사위가 멋집니다. 이야기 한 꾸러미가 소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책 한 권이 해맑습니다. 4346.2.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읽기와 책쓰기

 


  곰곰이 따지면, 책읽기란 ‘남이 차려 놓은 이야기 읽기’입니다. 스스로 찾아서 챙겨 살피는 이야기 아닌, ‘남이 힘껏 찾아서 챙겨 살핀 이야기를 읽는’ 일이 책읽기입니다.


  예부터 고이 이어온 말을 돌아봅니다. 무엇이든 배우려면 스스로 배우지, 남한테서 배울 수 없다 했습니다. 스승이 있대서 배우지 않습니다. 책이 있대서 배우지 않아요. 언제나 내 맨주먹과 맨몸으로 부대끼면서 배워요. 모든 삶은 스스로 부딪히면서 깨닫고 배우지, 누가 일깨우거나 가르치지 못해요. 곧, 누가 일깨우거나 가르친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 알아차리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때에는 하나도 못 배워요.


  책을 아무리 많이 읽는다 하더라도, ‘권수로 치면 많이 읽지’만, 마음가짐이 넓거나 트이거나 열리지 않으면, 아무런 줄거리나 고갱이를 못 받아들여요. 다시 말하자면, 마음가짐이 넓거나 트이거나 열린 채로 있다면,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책 백만 권 읽는 사람보다 깊고 넓으며 환하게 깨우칩니다. 스스로 마음가짐을 넓히거나 트거나 열면, 종이책 한 권조차 안 읽더라도 삶을 깨닫고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책읽기를 하자면 책쓰기를 함께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남이 차린 밥상을 받아서 먹듯, 나도 밥상을 차려 남한테 베풀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스스로 책쓰기를 하다 보면, 남이 차린 밥상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느낄 뿐 아니라, 밥상을 차려서 베풀기까지 어떤 삶을 치르거나 겪거나 복닥였는가를 살갗으로 헤아릴 수 있어요. 이러는 동안, 서로서로 이야기꽃 피울 수 있지요. 나는 내가 겪은 삶을 이웃한테 들려주고, 이웃은 이웃이 겪은 삶을 나한테 들려줍니다.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됩니다. 함께 나누는 삶이 됩니다.


  책은 누구나 씁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이녁 깜냥껏 삶을 누리거나 즐기거나 빚기 때문입니다. 책은 누구나 읽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이녁 슬기를 빛내어 하루하루 누리고 즐기며 빚으니까요. 삶을 다루는 책인 만큼, 내 삶을 들여 읽고 내 삶을 바쳐 씁니다. 4346.2.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