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 - 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권산 글.사진 / 반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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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31

 


옛집, 옛사람, 옛나무, 옛들
― 아버지의 집, 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권산 사진·글
 반비 펴냄,20122.11.25./25000원

 


  삼백 해를 머금은 옛집이라는 ‘송석헌’을 사진과 글로 담아 보여주는 《아버지의 집》(반비,2012)을 읽습니다. 전라도 구례에서 ‘지리산닷컴’을 꾸리는 권산 님이 사진과 글로 빚은 사진책으로, 옛집에서 삶을 잇고 꾸린 권헌조라고 하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살그마니 곁들입니다.


  권산 님은 “그 PD 역시 그랬다. 나는 그 ‘흔하디흔한 감나무 잎’을 쫓는, 은퇴를 앞둔 소년 같은 PD가 흥미로웠고, 그는 내 사진과 글의 어떤 대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10쪽).” 하는 말로, 이 사진책 엮은 까닭을 밝힙니다. 방송국에서 옛집을 찍어 보여주려 하면서 권산 님하고 끈이 닿고, 권산 님은 방송에 나갈 사진을 찍으며 경상도 봉화에 있는 옛집을 찾아갔다고 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스스로 좋아서 찾아간 옛집은 아니요, 스스로 천천히 찾아간 옛사람이 아니며, 스스로 느긋하게 찾아가며 마주하는 옛나무나 옛들은 아닌 셈입니다. 사진을 찍는 권산 님은 자꾸 혼잣말을 합니다. 이를테면, “바람을 찍는 것도 아닌데 연사모드로 설정했다. 이른 아침 고택에서 셔터 소리는 유난했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48쪽).” 하는. 또는, “노인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쥔 저 손을 찍어야 한다고 머리는 판단했지만 나의 호흡은 너무 거칠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55쪽).”와 같은.


  사진을 찍는 이라면 누구나 느낄는지 모르고, 또 누구나 안 느낄는지 모르는데, 어떤 모습을 찍더라도 ‘바로 오늘 이곳’일 때에 찍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 아닌 모습은 못 찍습니다.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을 찍더라도 스스로 골짜기 냇물 곁에 서서 ‘바로 오늘 이곳’인 줄 느껴야 찍어요.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적에도 아이들 곁에 서서 아이들 노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며 ‘바로 오늘 이곳’이 아이들 곁인 줄 느껴야 찍습니다.

 

 


  봄꽃을 사진으로 찍으려면 봄이 오기까지 기다려요. 그리고, 봄이 지나면 봄꽃은 못 찍어요. 마땅한 노릇인데, 여름에는 여름꽃을 찍지, 봄꽃을 못 찍습니다. 곧, 봄에는 ‘바로 오늘 이곳’이 봄이기에 봄꽃을 찍고, 여름에는 ‘바로 오늘 이곳’이 여름이라서 여름꽃을 찍어요. 오직 봄꽃 한 가지만 사진으로 찍고 싶다면, 여름 가을 겨울 지나 봄이 오기를 기다릴 노릇이요, 봄이 지나가면 다시 봄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노릇입니다.


  권산 님은 경상도 봉화 옛집에 세 차례 찾아가서 사진을 담습니다. 고작 세 번뿐이라 할 수 있지만, 자그마치 세 번이라 할 수 있어요. 송석헌 권헌조 할아버지가 옛어른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 200장 안팎 사진을 찍었다 하는 만큼, 스스로 사진을 찍고 싶으면 얼마든지 사진을 찍어요. 다시 말하자면, 권산 님 스스로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참말 권산 님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찍을 사진보다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사진만 찍습니다.


  어떠한 사진을 찍더라도 나쁠 구석 없으며, 더 좋을 대목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모습’을 찍는 사진이라면 이러한 사진대로 재미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어울리며 사진을 찍겠다면, 이러한 사진은 이러한 사진대로 재미있습니다.

 

 


  권산 님은 권헌조 할아버지 새벽마실(옛어른 무덤 찾아뵙기)을 그날 아니면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일이라 여겼지만, 권헌조 할아버지는 누가 지켜보거나 말거나 스스로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누리려는 일을 누립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날이 궂든 맑든, 스스럼없이 옛어른 무덤을 찾아뵈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모습’이 아니라, ‘권산 님 스스로 경상도 봉화 옛집에 다시 찾아와서 이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해야 옳습니다. 권산 님 스스로 더 마음을 기울인다면, 경상도 봉화에서 여러 날 느긋하게 머물면서 여러 날 새벽에 권헌조 할아버지하고 함께 무덤마실을 즐기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어느 날은 사진기 안 들고 무덤마실을 즐기고, 어느 날은 사진만 신나게 찍으며 무덤마실을 즐깁니다. 어느 날은 두런두런 말씀을 여쭙고 들으며 무덤마실 즐길 수 있고, 어느 날은 하루 내내 무덤 곁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어요.

  스스로 즐기는 삶만큼 스스로 찍는 사진입니다.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에 따라 스스로 바라봅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이 아닐 때에는 느끼지 못하기에 바라보지 못해요. 이를테면, 시골길 천천히 걷기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시골길 언저리에 돋는 조그마한 풀과 꽃을 못 느끼며 자가용을 내몰아요. 시골길 천천히 걷기를 즐길 때에는 시골길 언저리 조그마한 풀과 꽃을 느끼는 한편, 시골 멧자락을 감도는 구름을 느끼고, 시골숲에서 노니는 멧새가 지저귀는 노랫가락을 느낍니다. 이렇게 느낄 때에는 이렇게 느끼는 여러 가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사진 하나로 새롭게 빚습니다. 이렇게 느끼지 못할 때에는 이런 여러 가지가 내 사진에 스며들지 못합니다.


  권산 님은 옛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전라도 구례에서 겪은 ‘중앙정부 옛집 되살리기’를 떠올립니다. “국가는 집을 보호한다고 한다. 몇 억, 몇 십억 원의 예산을 고택 수리에 투여한다. 그들에게는 건축물인 집만 보일 뿐 그 집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12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중앙정부는 옛집이라 하는 ‘문화재’를 바라볼 뿐, 옛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을 바라보지 못해요. 아니, 못 느끼니 못 바라봅니다. 못 느끼기에 모르고, 모르기에 바라보지 못하며, 못 느끼고 못 바라보기에 모르면서 ‘옛집에 깃드는 사람들 삶’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길을 찾지 못해요.

 

 


  고속도로를 왜 내야 하고, 공장과 골프장을 왜 지어야 하며, 발전소나 관광단지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공무원과 개발업자는 왜 시골자락 갈아엎어 무언가 뚝딱뚝딱 시멘트와 쇠붙이와 아스팔트와 플라스틱을 들이부으려 할까 하고 돌아볼 노릇입니다. 참말, 이들 공무원과 개발업자는 삶을 느끼지 않기에 삶을 바라보지 못할 테지요. 시골자락 시골살이를 느끼지 않으니 시골마을 시골사람을 바라보거나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할 테지요.


  그런데, 권산 님도 경상도 봉화 옛집을 조금 더 살가이 바라보지 못합니다. 권산 님 스스로 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만 “나는 짧은 시간에 미션을 완료하는 이 일에 나의 진정성이 얼마나 투여되는 것인지 스스로 가늠하지 못한다(204쪽).” 하고 털어놓습니다.


  짧은 겨를에 바삐 찍는 사진이니 참말 권산 님 말마따나 ‘참다움(진정성)’을 제대로 못 담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사흘 동안 찍는 사진 아닌 엿새 동안 찍는 사진이라면, 또는 서른 날이나 삼백 날 찍는 사진이라면, 또는 세 해나 서른 해 찍는 사진이라면, 조금 더 참다움을 담을 만할까 궁금해요. 사흘 나들이로 찍는 사진이라면, 사흘 나들이대로 홀가분하게 즐기면서 사진을 찍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사흘이든 이틀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꼭 하루 동안 찍는 사진이어도 되고, 한 시간 사이에 찍는 사진이어도 됩니다.

 


  즐겁게 찍으면 즐거움을 나눕니다. 사랑스레 찍으면 사랑스러움을 나눕니다. 사진책 《아버지의 집》에서 권산 님은 즐거움으로도 사랑스러움으로도 송석헌 옛집을 마주하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권산 님 삶과 일이 너무 바쁘면 어때요. 바쁘다 하지만 사흘이나 짬을 내고 다른 일을 미루면서 봉화마실을 했어요. 다른 일을 젖히고 봉화마실을 하면서 권헌조 할아버지를 뵙고 권헌조 할아버지 ‘늙은 아들’도 뵈었어요. 방송에 나가야 하는 무언가 그럴듯한 그림을 못 찍으면 어때요. 그저 즐겁게 찍으면 돼요. 새벽녘에도 바라보고, 환한 낮에도 바라보며, 어두운 밤에도 바라보면 돼요. 안채에 이런저런 어수선한 것들이 있으면 어수선한 대로 바라보면 되고, 어수선한 모습 사이에 살가이 깃든 ‘예쁜 삶’과 ‘고운 삶’과 ‘따순 삶’을 느끼면 돼요.


  옛집을 보고, 옛사람을 봅니다. 옛나무를 보고, 옛들을 봅니다. 집 한 채 삼백 해 먹었다는데, 멧자락 하나 삼만 해나 삼억 해를 묵습니다. 옛나무 한 그루 삼백 해나 삼천 해 즈음 먹을 수 있고, 옛나무에서 옛나무로 이어오는 숲은 삼십만 해나 삼십억 해를 묵을 수 있어요. 오래된 들판에 한해살이풀이나 두해살이풀이 돋는다지만, 이 풀은 먼먼 옛날부터 씨앗과 씨앗으로 이어졌어요. 만해살이풀이나 억해살이풀일 수 있어요.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빌어요. ‘옛집을 지킨다는 중앙정부가 여러 억 들여 뚝딱뚝딱거리는 모습’이 달갑지 않다면, 중앙정부 일꾼 스스로 삶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중앙정부 일꾼 누구나 삶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부터 스스로 삶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사진을 즐겁게 찍을 수 있기를 빌어요. 멋들어진 모습으로 찍는 사진이 아닌, 즐겁게 찍는 사진으로, 즐겁게 삶을 잇고 지은 옛집 옛삶을 마주할 수 있기를 빌어요. 사진책 하나에 즐거운 웃음 물씬 드러나는 이야기 한자락 살포시 실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6.2.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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