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경전 - 2010 제4회 시작문학상 수상작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0
이덕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57



손바닥에 새기는 노래

― 밥그릇 경전

 이덕규 글

 실천문학사 펴냄, 2009.2.16.



  시 한 줄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해가 넘어갈 무렵 왁왁거리는 소리가 흘러넘치는 시골집에서 개구리를 떠올리면서 시 한 줄은 어떤 글인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이 깊이 잠든 밤에 홀로 일어나, 어느덧 잦아든 개구리 노래잔치를 가만히 그리면서 시 한 줄은 어떤 글인가 하고 곱씹어 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어디에서 살아갈까요. 시를 쓰는 사람은 날마다 어떤 빛을 볼까요. 시를 쓰는 사람은 마음속에 어떤 꿈을 품을까요. 시를 쓰는 사람은 이웃과 어떤 사랑을 속삭일까요.



..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까지 ..  (머나먼 돌멩이)



  시 한 줄은 손바닥에 새기는 노래이리라 생각합니다. 손바닥에 따사롭게 그리는 노래일 때에 시가 되리라 느낍니다. 손바닥에 고즈넉하게 스며드는 노래인 싯말이리라 생각합니다. 때로는 굳은살로 박히고 때로는 아련한 빛으로 젖어드는 노래가 될 시가 되리라 느낍니다.


  맑게 웃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볼을 살살 어루만집니다. 아이 볼을 어루만진 기운은 오래오래 손바닥에 남습니다. 아이 볼에는 내 손바닥 기운이 두고두고 남습니다. 나는 아이한테서 새로운 숨결을 얻습니다. 아이는 나한테서 새로운 숨결을 받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둘레에서 온갖 숨결을 얻습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한테서 갖은 숨결을 받습니다.



.. 볕 좋은 절집 뜨락에 /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 고요히 반짝입니다 ..  (밥그릇 경전)



  이덕규 님은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2005)이라는 시집을 내놓습니다. 밥그릇을 경전으로 바라보는 눈썰미를 싯말로 풀어놓습니다. 어느 밥그릇이든 경전이 될 수 있다고 느껴 시를 씁니다. 어느 밥그릇이든 삶을 살찌우고 사랑을 북돋우는구나 하고 깨달아 시를 씁니다.



.. 풀을 베다가 낫 끝에 손등을 찍혔다 / 순간, 허옇게 눈뜨는 상처를 / 와락 감싸 쥐고 / 팽개친 낫 앞에 두 무릎 꿇은 채 / 엎드려 여러 번 머리 조아렸다 ..  (낫께서 나를 사랑하사)



  밥그릇이 경전이듯이, 숟가락이 경전입니다. 빨래비누 한 장이 경전이고, 종이 한 장이 경전입니다. 호미 한 자루가 경전이요, 풀 한 포기가 경전입니다.


  온누리 어디를 둘러보아도 경전입니다. 이 땅 어느 곳을 찾아가 보더라도 경전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경전을 만납니다. 누구라도 언제 어디에서 날 경전을 마주하면서 새롭게 빛 한 줄기 받습니다.


  이리하여, 먼먼 옛날부터 책 한 권 없고 글 한 줄 읽지 못한 시골내기 흙일꾼과 고기잡이는 숲과 들과 바다와 마을에서 경전을 만났어요. 숲이 경전이고 바다가 경전입니다. 들과 냇물이 경전입니다. 절구와 베틀이 경전입니다. 낫과 쟁기가 경전입니다. 박꽃과 찔레꽃이 경전입니다.



.. 개똥 무더기 위에 / 분홍빛 복숭아 꽃잎이 / 팔랑팔랑 날아와 찰싹 / 달라붙었습니다 ..  (찰떡궁합)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고단한 사람이라면, 전철이나 버스가 경전이 됩니다. 택시가 경전이 되고, 고속도로가 경전이 돼요. 손전화도 경전이 됩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도 얼마든지 경전이 됩니다.


  스스로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느낍니다. 스스로 바라보아 느끼면서 알아차릴 때에 마음에 담습니다. 마음에 담아 살포시 내려놓을 수 있다면,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와요.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올 때 이야기꽃이 피고, 이야기꽃이 피면 뒤따라 웃음꽃이 핍니다.



..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들판에는 참 많은 꽃들이 피어나지만 그 이름들을 / 낱낱이 아는 이는 우리 동네엔 아무도 없었다 ..  (식물도감을 던지다)



  식물도감에도 꽃은 나와요. 그리고, 식물도감 아닌 들과 숲과 골목과 마을에도 꽃은 피어요. 꽃이름은 무엇일까요. 꽃이름은 누가 붙여야 할까요. 학자가 붙이는 꽃이름을 알아야 할까요, 아니면 한의사가 붙이는 풀이름을 알아야 할까요. 시골마을마다 다 다르게 붙이는 이름을 알면 꽃이나 풀을 잘 아는 셈일까요. 꽃이나 풀마다 나 스스로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옛날 옛적에 꽃마다 풀마다 나무마다 벌레마다 새마다 짐승마다 다 다르게 이름을 붙여 주었듯이, 오늘 나는 내가 발 딛은 이곳에서 모든 꽃과 풀과 나무한테 새롭게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을까요.


  손바닥에 이름을 새깁니다. 손바닥에 사랑을 새깁니다. 손바닥에 빛을 새기고, 손바닥에 노래를 새깁니다. 4347.6.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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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보라는 걸어가며 춤놀이



  산들보라가 누나 가방을 물려받는다. 누나가 메던 ‘빨간 고양이 가방’을 물려받는다. 일곱 살 누나한테 ‘빨간 고양이 가방’이 작다. 누나는 새 가방을 장만하기로 하고, 예쁘장한 가방은 동생 산들보라가 물려받는다. 누나 가방을 메고 첫 바깥마실을 나선 길에, 산들보라는 이 가방을 멜 적마다 하늘을 날듯이 훨훨 걷는다. 나비가 춤추듯이 이리 날고 저리 난다. 이렇게도 기쁘며 좋구나. 부러 산들보라 뒤를 따라 걸어간다. 산들보라가 보여주는 춤을 한껏 누린다. 4347.6.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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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6-07 09:42   좋아요 0 | URL
빨간 고양이 가방을 메고 춤을 추며 걸어가는 산들보라의 뒷모습도 예쁘지만,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사름벼리와 어머니의 뒷모습도 참~ 예쁘네요~
뒷모습,은 늘 참...많은 느낌과 생각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듯 합니다.^^
사진도 가족들의 모습도 참 멋지고 좋네요~*^^*

숲노래 2014-06-07 15:56   좋아요 0 | URL
아, 저 긴치마는 아이들 이모예요.
우리 곁님은 치마를 거의 안 입으니까요 ^^;;;

앞모습도 뒷모습도
모두 우리들 아름다운 빛이 서리는
사랑스러운 삶이지 싶스빈다 ^^
 

산들보라 신나게 코후비기



  아이들이 곧잘 코를 후빈다. 코가 막혔다고 느끼니 코를 후비겠지. 코가 막히지 않았으면 코를 후빌 까닭이 없다. 네살배기 산들보라는 코후비기가 ‘지저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둘레에서 어른들이 ‘지저분하다’고 말할 뿐이다. 코후비기는 지저분할까? 지저분하다면 무엇이 지저분할까? 손가락을 넣어 코가 잘 뚫리니? 코를 흥흥 풀어야 하지 않겠니? 4347.6.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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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192 : 도화桃花



옅은 바람이 불 때마다 / 도화(桃花) 년은 하르르

《이덕규-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2009) 113쪽


 도화(桃花) 년은

→ 복사꽃 년은

→ 복숭아꽃 년은

 …



  한글로 ‘도수’라 적으면 알아차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한자를 잘 안다는 분도 ‘도수’를 못 알아채리라 느낍니다. 한자로 ‘桃樹’라 적으면 얼추 알아차리기는 하겠지요.


  한국말사전을 들추면 ‘도화’뿐 아니라 ‘도수’라는 한자말을 싣습니다. 한국말사전이지만 한자말을 함부로 싣습니다.


  한국사람이 쓸 한국말은 ‘복숭아꽃(복사꽃)’과 ‘복숭아나무(복사나무)’입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 아닌 다른 말을 쓸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문학을 하는 자리라면, 시를 쓰는 자리라면, 말빛을 가꾸려고 이런 말이나 저런 말을 쓸 수 있을 텐데, “도화 년”이라고는 못 쓰고 애써 묶음표까지 쳐야 한다면, 싯말에 한자를 굳이 집어넣어야 한다면, 이러한 시는 어떤 빛이 될까 궁금합니다. 복숭아꽃을 복숭아꽃이라 말하지 못하고, 복사나무를 복사나무라 말하지 못한다면, 한국말과 시와 노래와 문학은 어떤 빛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 보기글 새로 쓰기

옅은 바람이 불 때마다 / 복사꽃 년은 하르르


한국말사전에 실린 한자말 ‘도화(桃花)’ 말풀이는 “= 복숭아꽃”이라 나옵니다. ‘도화’는 한국말이 아닙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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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41) 중량의 1 : 무거운 중량의 시집


이덕규의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는 다양한 내용물이 담긴 무거운 중량의 시집이었다

《이덕규-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2009) 113쪽


 무거운 중량의 시집이었다

→ 무거운 시집이었다

→ 무게가 무거운 시집이었다

→ 무게가 나가는 시집이었다

→ 무게가 묵직한 시집이었다

 …



  보기글을 생각해 봅니다. “무거운 무게의 시집”이라고 적은 셈입니다. 우리는 “무게가 가볍다”나 “무게가 무겁다”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다만, 보기글은 글차례가 뒤틀렸습니다. “무거운 무게의 시집”이 아닌 “무게가 무거운 시집”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게가 가벼운 아이”라 적어야 올바릅니다. “가벼운 무게의 아이”처럼 적으면 틀려요. ‘무겁다·가볍다’라는 낱말은 무게를 가리키는 만큼, ‘무게’라는 낱말은 덜어도 됩니다. “가벼운 아이”나 “무거운 시집”이라고 적으면 넉넉합니다.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 ‘무게’를 써야 올바를 텐데, 한국말 ‘무게’를 쓰더라도 토씨 ‘-의’가 끼어드는 번역 말투가 되지 않도록 차근차근 추스르기를 바랍니다. 4347.6.7.흙.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이덕규가 낸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는 여러 이야기가 담겨 무거웠다


“이덕규의 첫 시집”은 “이덕규가 낸 첫 시집”이나 “이덕규가 쓴 첫 시집”으로 다듬습니다. “다양(多樣)한 내용물(內容物)이 담긴”은 “여러 이야기가 담긴”이나 “온갖 이야기가 담긴”으로 손보고, ‘중량(重量)’은 ‘무게’로 손봅니다. 그런데 한자말 ‘중량’은 두 가지가 있다 합니다. ‘中量’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의 무게”라 하고, ‘重量’은 “(1) = 무게 (2) 아주 큰 무게”라고 해요. 보기글에서는 둘째 낱말일 테고 ‘무게’를 가리키겠지요.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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