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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짐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리니, 자주 갈아입히려고 여러 벌 챙긴다. 겨울에는 옷이 두툼하니, 날마다 빨아 말려서 입힌다 생각하며 두어 벌만 챙긴다. 그런데 여름에나 겨울에나 가방 부피는 어슷비슷하다. 아이들 여름옷은 갯수가 많고, 아이들 겨울옷은 두께가 두껍다. 아이들 스스로 저희 옷가지를 저희 가방에 챙겨 들고 다닐 때까지 아버지 가방은 옷짐으로 가득가득 찰밖에 없다. 4345.1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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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에 작은아이 다독이며

 


  작은아이가 꼭 깊은 밤에 응애 울면서 칭얼거린다. 잘 놀고 곯아떨어지면 밤오줌 누이기 수월하지 않은데, 스스로 쉬를 가리지 못하고 바지에 흠뻑 싸고 나면 이렇게 울곤 한다. 그렇다고 깊은 밤에 달게 잘 자는 아이를 부러 깨우거나 안고는 오줌그릇에 앉힐 수 없다. 작은아이 스스로 쉬 마렵다는 티를 내며 아버지를 깨워야 비로소 바지를 안 적시며 오줌을 가리면서 작은아이 스스로 개운하게 다시 잠들 수 있다.


  나는 워낙 따로 밤잠을 깊이 들지 않는다. 잠이 들면 내 나름대로 깊이 자지만, 옆에서 무언가 부르는 소리를 내면, 이 소리를 듣고 살며시 눈을 뜨곤 한다. 언제부터 이런 버릇이 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만, 신문배달 일을 하던 때, 작은 소리 하나에도 잠에서 깨어 ‘신문사 지국에 찾아드는 도둑’을 잡아야 하던 날을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곤 하다. 참말 신문사 지국에 뭘 훔칠 게 있는지 모른다만, 고작 300원짜리(내가 신문배달을 하던 때 신문 한 장 값) 신문 한 장 훔치려고 신문사 지국에 슬그머니 찾아드는 이웃 아저씨들이 있었다. 이들이 처음에는 신문만 훔친다지만, 나중에는 금고를 훔치거나 우리 가방을 훔치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어쩌면 이무렵 이런 밤잠이 버릇이 되어 오늘 두 아이와 살아가며 아이들 밤칭얼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건사할 수 있는지 모른다. 나는 일찍부터 ‘아이 돌보는 아버지’가 되도록 내 매무새를 다스린 셈인지 모른다.


  옆지기 몸이 아주 튼튼하다거나 옆지기 마음이 무척 씩씩했다면 어떠했을까 헤아려 보곤 한다. 이때에는 옆지기가 아이 돌보는 나날을 그리 힘들게 여기지 않았을 테며, 아이 똥오줌 가리기라든지 빨래라든지 밥하기라든지 청소라든지 이것저것 기운차게 함께 했으리라 본다. 때로는 나한테 이래저래 잔소리도 늘어놓고 꾸지람을 하기도 했을 테지. 옆지기가 아픈 사람이기에, 나는 이제껏 제대로 모르거나 널리 돌아보지 않고 살던 ‘아이와 지내는 하루’라든지 ‘집일을 모두 맡아 건사하는 하루’를 실컷 누린다. 2008년 8월 16일부터 2012년 12월 3일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섯 해째 아이들 똥오줌을 날마다 주물럭거린다. 날마다 아이들 똥옷을 서너 차례 빨래하고, 아이들 밑을 서너 차례 씻긴다.


  오늘 저녁에는 작은아이 똥바지를 벗기며 밑을 씻기다가 그만 내 웃옷에 작은아이 똥이 푸지게 묻는다. 어쩌겠나. 묻었는데. 먼저 작은아이 밑과 다리를 싹싹 씻고 닦아 새 바지 입힌 다음 내 웃옷을 물로 헹군다. 이런다고 똥내가 가시지 않으니 복복 비벼서 빨아야 할 텐데, 고흥 시골집 아닌 일산 옆지기 어버이 댁에 머물기에 그냥저냥 똥옷을 입고 산다. 뭐 그래도 즐거우니, 작은아이가 어제 적게 눈 똥을 오늘 몰아서 왕창 누어 잘했구나 잘했어 노래하며 등짝을 톡톡 쓰다듬는다.


  칭얼거리던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달빛을 바라본다. 자장노래 한 가락 뽑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작은아이가 어머니 품으로 파고든다. 조용조용 색색 다시 곱게 잠든다. 예쁜 밤이 고즈넉히 흐른다. 4345.1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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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자장노래

 


  작은아이 말이 늦는 까닭은 여러 가지라 할 텐데, 아버지가 작은아이 ‘응응’ 옹알 소리를 참 잘 알아듣기 때문일까 하고 생각하곤 한다. 작은아이가 ‘응응’ 하기만 해도 배가 고픈지 쉬가 마려운지 응가가 마려운지 양말을 벗고 싶은지 안아 달라 하는지 척척 알아챈다. 졸음을 참으며 놀다가 이제 더 못 참으니까 재워 달라고 할 적에도 이내 알아채고는 품에 살포시 안아 자장노래를 부른다. 이불을 덮고 무릎에 누이면 어느새 눈을 사르르 감고는 코코 잠든다.


  옆지기 어버이 살아가는 일산으로 마실을 온 지 여러 날 된다.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다시 마실을 나온다. 서울에서 지내는 오랜 벗님을 만난다. 아이들과 같이 잘 놀고 일산집으로 돌아간다. 택시를 불러 타고 돌아가는데 작은아이가 퍽 졸린 낌새이다. 무릎에 앉힌 채 살살 자장노래를 부른다. 작은아이는 자장노래 소리를 듣고는 살살 눈을 감을락 말락 하다가는 고개를 폭 숙인다. 깊이깊이 잠들라고 자장노래를 더 부른다.


  우리가 탄 택시 옆으로 수많은 자동차가 수없이 지나간다. 자동차 굴러가는 소리 시끄럽지만 작은아이 귀에는 아버지 자장노래 소리가 스며든다고 느낀다. 곁에 앉은 큰아이 귀에도 아버지 자장노래 소리가 솔솔 스며들겠지. 4345.12.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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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5] 나이읽기
― 사람을 보는 눈길, 허울을 보는 눈매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를 다니면 둘레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귀엽다고 말하다가도 으레 나이를 묻습니다. “너 몇 살이니?” 아이 앞에서 적어도 ‘-요’나마 붙여 “몇 살이에요?” 하고 묻는 어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른들 스스로 당신이 아이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처음부터 말을 놓고 들어옵니다.


  아이와 함께 다니는 다른 어른도, 아이 없이 혼자 다니는 다른 어른도, 으레 우리 아이더러 “몇 살”인가를 물을 뿐, 정작 이름을 묻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어느 모임자리에서 조금 오래 얼굴을 마주할 때에는 이름을 묻기는 하되, 나이부터 먼저 묻고 나서 이름을 묻습니다.


  아이들 나이 알아맞히는 놀이를 하는 어른일까요. 나이를 알아서 무엇을 할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아이들 나이 하나만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렇다고 아이들 나이를 묻고 나서 잘 되새기지 않아요. 쉽게 묻고 쉽게 잊어요. 다시 쉽게 묻고 또 쉽게 잊어요.

  알고 싶어서 묻지는 않겠지요. 잘 되새기려고 묻지는 않겠지요. 버릇처럼 묻습니다. 서로 ‘높고 낮음(위계)’을 나누려고 묻습니다. 게다가, 아이와 함께 다니는 어른들은 나이를 묻고 나서 저희 아이랑 ‘숫자 대기’를 합니다. 한쪽이 나이가 더 많으면 누나이니 오빠이니 형이니 동생이니 언니이니 하고 부름말을 틀짓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나 회사나 공공기관을 들여다보면, 이들 조직은 밥그릇이라 하는 나이를 따집니다. 이른바 ‘호봉’이라고 해서, 얼마나 오래 조직에 몸을 담갔느냐를 놓고 ‘나이 매기기’를 합니다. 먼저 들어와서 조금 더 조직살이를 했으면 ‘어른(또는 선배) 노릇’을 하려고 듭니다.


  학교에서는 ‘학년’이라 하는 나이를 따집니다. 초등학교 몇 학년, 중학교 몇 학년, 고등학교 몇 학년, 이렇게 학년 나이에 따라 줄을 세웁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지만 다 같은 나이에 맞추어 똑같은 틀에 가두고는 줄을 세웁니다. 예전에는 일고여덟 살쯤 될 무렵에야 비로소 ‘같은 나이 줄세우기’를 했으나, 요즈음에는 갓난쟁이마저 보육원에 집어넣는 흐름이기에, 이 나라 아이들은 한두 살일 적부터 ‘같은 나이 줄세우기’에 들볶입니다. 키도 마음도 생각도 앎도 다른 아이들이요, 몸도 팔다리도 눈썰미도 다 다른 아이들이지만, 같은 나이에 맞추어 똑같이 생긴 교실에 들어가서 줄을 맞추어 앉아야 할 적에는 ‘번호로 부르는 숫자’를 받고는 똑같은 틀로 다스려집니다.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관리 대상’이 돼요.


  아이들은 키가 자랍니다. 아이들은 몸집이 커집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 키와 몸무게와 가슴둘레와 이것저것 숫자로 꼬치꼬치 따지고 잽니다. 체력을 재고 시험을 치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무섭게 저희 이름을 잊고, ‘아이한테 주어진 번호에 따라 끝없이 따지고 재고 매기고 붙이는 숫자’에 따라 다스려집니다. 이를테면 몇 살에 몇 센티미터 몇 킬로그램, 몇 살에 달리기 몇 초 팔굽혀펴기 몇 차례, 몇 살에 산수 몇 점 국어 몇 점, 몇 살에 던지기 몇 미터 행동발달사항 몇 점, 몇 살에 봉사활동 몇 점 영어능력이나 한자능력 몇 급 …….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며 저희 이름을 잊고 숫자를 외웁니다. 저 먼 데 있는 푸른숲 잣나무에 앉은 꾀꼬리를 알아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고 시력점수 2.0이라느니 1.0이라느니 0.1이라느니 또 얼마라느니 하는 숫자를 외웁니다. 책을 읽었으면 어떠한 책을 읽으며 가슴속에 어떤 꿈과 사랑이 샘솟는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할 때에 아름답겠지만, 몇 권을 읽었는지를 따지고 주인공과 줄거리 외우기에만 휩쓸립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푸름이한테 “너 몇 학년이니?” 하고 묻기보다는 “너 몇 살이니?” 하고 물을 때에 한결 사람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푸름이는 ‘중3’이나 ‘고2’가 아니라 ‘열여섯 살 푸름이’나 ‘열여덟 살 푸름이’라 할 때에 걸맞을 테니까요. 버스를 타거나 어느 시설을 쓸 적에 ‘학생 삯’ 아닌 ‘청소년 삯’을 따져야 알맞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대목도 차근차근 더 헤아린다면, ‘어린이 삯’과 ‘푸름이 삯’과 ‘어른 삯’과 ‘어르신 삯’ 이렇게 나눌 수 있겠지요. 다시금 더 헤아리면, 이런저런 나이나 모습으로 가르지 말고 누구나 똑같은 삯으로 나눈다든지 아예 삯을 없애면 훨씬 나아요.


  이제 대학생이 퍽 많이 늘어났기 때문인지, 어른들 사이에서는 “몇 학번이셔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어 보려면 차라리 ‘나이’를 물을 노릇이건만, 나이 아닌 ‘학력 신분’을 물어요. 스스로 학력 신분을 누리는 계급이기에 이처럼 물을 텐데, 삶을 즐거이 누리지 못하는 모습은 더없이 슬프구나 싶어요.


  한겨레 옛말에 ‘개밥에 도토리’가 있고, ‘따돌리다’나 ‘돌림뱅이’가 있습니다. 우리 겨레도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들볶던 발자국이 있구나 싶은데, 양반과 양반 아닌 사람, 임금과 임금 아닌 사람, 권력자와 권력자 아닌 사람, 땅임자와 땅임자 아닌 사람, 이렇게 틀이 갈린 나머지 ‘개밥에 도토리’ 같은 말마디가 생겼구나 싶어요. 임금과 임금 아닌 사람이 갈리지 않고 서로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아끼거나 사랑했다면 ‘따돌리다’나 ‘괴롭히다’라는 낱말조차 안 태어났겠지요. 그러니까, 한겨레가 서로를 믿고 아끼는 삶을 누렸으면 ‘싸움’이나 ‘미움’ 같은 낱말은 안 태어나요. 자꾸자꾸 슬픈 수렁으로 빠지니까 ‘전쟁’이나 ‘(전쟁)무기’ 같은 한자말을 끌어들입니다.


  해마다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철이 드는 일은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저마다 한 살 나이가 들며 생각을 깊이 다스리고 꿈을 넓게 펼치는 일은 아리땁다고 느낍니다. 나이란, 밥그릇 숫자에 따라 금을 죽 긋고는 높고낮은 지위나 신분이나 계급을 나누라는 데에 쓰라고 생기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삶을 누리면서 사랑을 빛내는 한 살 두 살이 모여 ‘철’이 되고 ‘슬기’가 되기에, 먼먼 옛날부터 나이값을 말하면서 나잇살을 헤아렸으리라 느낍니다. 4345.1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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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놀이와 마실

 


  며칠째 밥을 안 하고 이불을 안 개며 청소할 일이 없다. 그러나 책을 편다든지 글을 쓸 틈은 도무지 안 난다. 아이들 쳐다보느라 바쁘다. 집에서는 이 일 저 일 끝없이 붙잡으면서 아이들 쳐다보느라 바쁘더라도 외려 틈틈이 책을 펴거나 글을 쓰는데, 바깥마실을 나오면 집안일에서는 홀가분해진다만, 홀가분해지는 몸과 마음으로 온통 아이들을 쳐다보아야 하기에, 차분히 스스로를 돌아보며 책과 글을 만지작거리기는 수월하지 않다.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면, 이런 바깥마실이 못마땅한가? 아니다. 바깥마실은 바깥마실대로 뜻과 보람이 있다. 아이들을 더 쳐다보도록 이끄는 이 바깥마실은 ‘몸으로 읽는 책’으로 이끈다. 여느 날 여느 일에서는 누리지 못할 온갖 이야기를 온몸과 온마음으로 맞아들이도록 돕는다. 이를테면, 아이들과 바깥마실을 하기 때문에, 택시도 얻어서 타면서 택시 일꾼이 누리는 고단한 삶을 들을 수 있다. 시골버스가 어떤 마을 사이를 돌고 돌아 읍내로 가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서울과 같이 커다란 물질문명 울타리에 자동차가 얼마나 많은가를 새삼스레 느끼고, 이 시멘트·아스팔트 쳇바퀴에서 겉차림에 마음을 기울이느라 속차림에는 마음을 못 기울이는 사람들이 더없이 많다고 다시금 느낀다.


  시골에서 숲을 바라보고 숲을 느낄 때가 가장 즐겁다. 도시로 마실을 나와서 지낼 적에는 ‘우리 식구가 얼마나 즐겁고 환한 데에서 기쁨과 웃음을 받아먹고 살아가는가’를 뚜렷하게 깨닫는다. 우리 식구는 우리 식구대로 시골마을에서 예쁘게 살되, 도시에서 살림을 꾸리는 이웃과 동무는 이들대로 예쁜 마음이 되어 예쁜 살림 꾸리도록 기운을 차리라고 가만히 빌어 본다. 저마다 씩씩하게 튼튼하게 사랑을 빛낼 수 있기를 빌어 본다. 겨울을 맞이해 찾아드는 차디찬 바람은 서로서로 더 어깨동무하고 더 따스히 손을 맞잡으며 더 아름다이 사랑을 빛내라는 뜻이라고 느낀다. 4345.12.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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