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을 따라가 볼까요? - 물구나무 그림책 55 파랑새 그림책 55
제르다 뮐러 글.그림, 한소원 옮김 / 파랑새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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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하루를 즐겁게 누렸나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0] 제르다 뮐러, 《발자국을 따라가 볼까요?》(파랑새,2007)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앞서입니다. 졸린 두 아이는 눈꺼풀에 졸음이 가득하지만 좀처럼 잘 생각을 안 합니다. 아무래도 더 재미난 무언가 있으리라 여기며 눕지 않으려 하는 듯합니다. 이러다가 아버지 잡겠네, 하고 생각하는 나는, 둘째 아이를 안고 바깥으로 나옵니다. 첫째 아이가 저도 데려가라며 따라나옵니다. 둘째 아이를 섬돌에 앉혀 신을 신깁니다. 신을 신은 아이 손을 하나씩 잡습니다. 둘째를 걸리면서 첫째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립니다. 집 앞으로 펼쳐진 논배미를 빙 한 바퀴 돌기로 합니다. 잘 걷고 잘 달리는 첫째 아이하고 휘 돌면 짤막한 길이지만, 아직 스스로 걷지 않는 둘째 아이 손을 잡고 한 걸음씩 걸음마를 익히도록 하자면 꽤 먼 길입니다.


  둘째 아이는 한참 걷다가 한손을 놓으라 휘휘 젓습니다. 걸음을 멈춥니다. 쉬었다 갑니다. 이렇게 걷고, 이렇게 멈추고, 이렇게 다시 걷고, 이렇게 쉬고, 이렇게 다시 걷습니다. 땅거미가 집니다. 어둑어둑합니다. 초승달은 구름에 가렸다가 드러나고, 다시 가렸다가 다시 드러납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듣는가 싶으면 그저 조용한 저녁이기도 합니다. 물을 가득 채운 논자락 옆을 걷는데, 개구리들은 노랫소리를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곁을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첫째 아이가 묻습니다. “여기 개구리 있어요?” “응, 바로 옆에 있어. 소리 들리지?” 아직 논에 물을 가득 채우지 않던 때에는, 논 옆을 지나갈 때에는 개구리들이 노랫소리를 뚝 끊곤 했어요. 이제 제 누리를 만났다 여기는지,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온 마을 떠나가라 노래를 합니다.

 


  한 바퀴 빙 돌며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습니다. 논둑 한 곳으로 올라섭니다. 첫째 아이는 어둑어둑한 논둑을 살랑살랑 엉덩춤을 추며 달립니다. 저 앞까지 달립니다. 논둑 끝은 길이 없어 돌아와야 하는데, 첫째 아이도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처 달립니다. 내처 달리다가 다시 살랑살랑 엉덩춤을 추며 돌아옵니다. 이동안 둘째 아이는 십 미터쯤 겨우 걸었습니다.


  “힘들지? 꽤 많이 걸었어.” 자, 이제 들어가자, 하고는 논둑을 거슬러 걷습니다. 첫째 아이가 다시 앞장섭니다. 마음껏 달리고 마음껏 노래합니다. 개구리는 무논에서 노래하고, 첫째 아이는 시골길에서 노래합니다. 둘째 아이는 씩씩하게 대문을 넘고 마당을 지나 섬돌에 닿습니다. 신을 벗길 무렵 바지에 쉬를 합니다. 오줌바지는 벗기고 대청마루에 올립니다. 아랫도리 벗은 둘째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잰 손놀림으로 깁니다.


  둘째 아이는 첫째 아이처럼 지치지 않습니다. 한참 걷기를 했으니, 이제 한참 기기를 하며 놀고픕니다. 아버지는 아이 옷가지 몇 점 복복 비빕니다. 실비가 오는지 가랑비가 오는지 오락가락 하는 날씨라면, 이듬날 빨래를 하더라도 잘 마르기 힘들 수 있으니, 오줌 젖은 옷가지 몇 점 모이면 그때그때 손빨래를 합니다. 요 며칠은 빨래기계를 아예 안 쓰고 손으로만 빨래합니다. 하루치를 모은대서 빨래기계 돌릴 만큼 안 되기도 하지만, 돌을 지난 아이는 바지만 자주 버리니, 그때그때 빨아 그때그때 말려서 다시 입힙니다. 그때그때 빤 바지는 그때그때 햇살을 머금도록 하고, 그때그때 햇살을 머금은 바지는 다시 아이가 입습니다.

 

 


  날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네가 하루 빨리 낮오줌을 가리고, 씩씩하게 걷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지. 너는 네 결과 삶에 걸맞게 낮오줌을 가릴 테며, 씩씩하게 걸을 테고, 네 이도 하나둘 늘고 어금니도 돋아 네 입으로 네 밥을 냠냠 씹을 수 있겠지.’


  그나저나, 하루 내내 같이 논다 하더라도 모자라다 싶은 첫째 아이가 뛰고, 첫째 아이 못지않게 하루 내내 저를 쳐다보아 달라 하는 둘째 아이가 깁니다. 두 아이와 얼크러지면서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며 집을 건사하다가는, 바깥일 건사하고 글 한두 꼭지 쓰자니 어깨가 뻑적지근합니다. 참말, 먼먼 옛날 어머님들은 ‘글을 익혔다 하더라도, 스스로 느긋하게 글 한 줄 쓸 겨를이 날 수 없겠다’고 몸으로 느낍니다.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집식구와 집일을 돌보노라면 조용히 넋을 가다듬어 글줄 붙잡을 말미를 내기란 참으로 빠듯해요.


  가까스로 두 아이를 데리고 잠자리에 눕습니다. 이제 두 아이는 잠들 낌새입니다. 그렇지만 곱게 잠들지 않습니다. 잠자리에서 더 킥킥거리다가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히유, 오늘도 너희가 즐겁도록 노래를 불러야겠지, 생각하다가, 오늘 하루 쉬면 안 될까, 생각하다가, 문득 새롭게 달리 생각해 봅니다. 너희한테 불러 주는 자장노래는 너희가 곱게 잠들기를 비는 내 사랑이면서, 내 고단한 몸을 함께 달래는 사랑이리라 하고. 한편으로는 두 아이를 사랑하는 노래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버이인 나를 사랑하는 노래가 곧 자장노래가 되겠다고 느낍니다.

 


  목청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뽑습니다.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고운 목소리로 자장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한손으로는 큰아이 등과 이마를 어루만지고, 다른 한손으로는 작은아이 등과 머리칼을 어루만집니다. 십 분, 이십 분, …… 두 아이 새근새근 잠듭니다. 나도 꾸벅꾸벅 졸면서 노래마디 끊기다가 이어지다가 노래를 이렁저렁 삼십 분 가까이 잇는데, 어느새 스르르 함께 잠듭니다. 한참 같이 잠들다 팔이 뻐근하다 싶어 눈을 뜨니, 내 팔에 기대어 잠든 아이 머리통 무게가 꽤 무거웠는가 싶습니다. 날마다 겪지만 날마다 팔이 저릿저릿합니다.


  팔을 천천히 뺍니다. 아이 머리를 바닥에 가만히 눕힙니다. 둘째 기저귀를 둘째 머리에 받칩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옆방으로 건너갑니다. 기지개를 켭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마당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오늘도 이렇게 두 아이를 재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오늘은 두 아이하고 얼마나 잘 놀았는가 더듬습니다. 어제처럼 ‘아이들하고 더 놀아 주지 못했네’ 하는 생각인지, 어제보다는 ‘조금 더 아이들이랑 놀며 어울린 하루’라 할 만한 생각인지 되뇝니다.


.. 자, 발자국을 따라가 볼까요? ..  (3쪽)

 


  제르다 뮐러 님 그림책 《발자국을 따라가 볼까요?》(파랑새,2007)를 아이하고 여러 차례 읽습니다. 말 없는 그림책이지만, 아이하고 함께 읽으며, 또 아이들을 눕히고 나 혼자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젖고, 조잘조잘 떠듭니다. 책에 적힌 말마디는 첫 줄 한 차례로 끝나지만, 아이들과 이 그림책을 읽는 내내 조잘조잘 떠들기 마련입니다.


  자, 발자국을 따라가 볼까요? 오늘 하루 아이들하고 어떤 발자국 남기며 살았는지 헤아려 볼까요? 오늘 하루 내 삶은 어떤 발자국 콩콩 찍으며 누렸는지 곱씹어 볼까요? (4345.5.30.물.ㅎㄲㅅㄱ)

 


― 발자국을 따라가 볼까요? (제르다 뮐러 글·그림,한소원 옮김,파랑새 펴냄,2007.9.27./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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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 상 - 안달루시아의 여름 세미콜론 코믹스
구로다 이오우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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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보람
 [만화책 즐겨읽기 151] 구로다 이오우, 《가지 (상)》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면내 우체국으로 달립니다. 나한테는 자가용이 없습니다. 더운 여름이든 추운 겨울이든 따스한 봄이든 시원한 가을이든 늘 자전거를 달립니다.


  자가용이 있으면 짐이 있을 때에도 한결 느긋할까 하고 어림해 보지만, 언제나 고개를 젓습니다. 자가용으로 더 빨리 달린대서 내 삶이 더 넉넉하거나 기쁘리라 느끼지 않아요. 이렇게 두 아이를 수레에 태운 자전거를 천천히 몰 수 있을 때에 좋습니다.


  바람을 쐬고 햇살을 받습니다. 들새 노랫소리를 듣고 들벌레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누렇게 익은 보리를 바라봅니다. 논둑마다 풀을 싹 베거나 태웠는데, 이 사이를 비집고 새로 돋는 돈나물 작은 줄기와 작은 꽃을 바라봅니다. 돈나물 노랗고 작은 꽃은 자전거를 멈추고 찬찬히 들여다볼 때에 비로소 잘 보입니다. 아마 자가용을 달리면 볼 수 없겠지요. 논이나 밭마다 유채씨를 뿌려 노란 유채누리가 되도록 할 때에 사람들은 ‘노란 빛이 예쁘다’ 하고 여길는지 모르는데, 자전거를 천천히 달리거나 두 다리로 느긋하게 걸을 때에는 언제나 모든 봄빛이 알록달록 어여쁘다고 느낄 수 있어요.


- “어이, 선생, 안녕하시오?” “아, 안녕하세요?” “선생은 농사짓는 거요, 아님 책을 읽는 거요?” “응? 아! 또 별난 사람 취급당하겠군. 농사짓다 잠시 책 좀 읽으면 어때?” (3쪽)
- “뭐야라니? 너야말로 이 시간에 뭐하냐? 차 좀 주라.” “잠깐만 기다려요.” “아빠를 위해 뭐 만들어 주는 거냐?” “아녜요.” “일은 찾았냐?” “으응.” “일을 안 하는 대신 뭔가 안 하냐? 자격증이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냐?” “별로.” “너는 만날 ‘별로’냐?” “그게,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 그런 건.” (189쪽)

 

 


  한창 논을 삶거나 모를 심은 논자락 옆을 달립니다. 즐겁게 달리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가 달리는 이 들길에서 쐬는 바람은 들바람이 되겠다고. 수레에 앉은 아이한테 얘기합니다. “벼리야, 우리는 들바람을 쐬면서 달려.” “들바람?” “응, 들바람이야.”


  들이니까 들바람일 뿐 아니라, 들일이요, 들노래이고, 들놀이예요. 들마실이 되고, 들사람이 되며, 들일꾼이라 할 테며, 들숨과 들삶과 들꿈이 돼요.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들길을 달립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니까 들소리를 듣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만큼 들볕을 쐬고 들내음을 맡습니다.


  아이들한테 들을 느끼도록 할 수 있어 좋다고 느낍니다. 아이들과 함께 내가 이 들을 느낄 수 있으니 좋다고 느낍니다. 우리 식구들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도시가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도시가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도시가 보여주는 모습을 보겠지요. 우리 아이들이 자전거수레에 탄 채 찻길을 달린다면, 아이들은 무얼 느낄까요.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동차?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동차 사이에 끼거나 자동차 배기가스로 콜록콜록 재채기가 끊이지 않는 일? 아스팔트 뜨거운 기운과 온통 까마득한 건물들?


- “맥주 좀 주시겠어요?” “몇 살인지 말하면 주지.” “18.” “안 되지, 그럼.” “괜찮아요. 날라리니까.” (10쪽)
-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아.” “안심하라니까. 그냥 나만 따라와.” “어디에든 데려다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어디에라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흙이 있는 곳은 안 되는 거였네.” “흙이 없는 곳으로 가자.” (39쪽)

 

 


  바람을 느끼지 못하며 자전거를 달릴 때에도 시원할 수 있겠지요. 햇살을 누리지 못하며 걸을 때에도 홀가분할 수 있겠지요. 들풀과 들꽃을 바라보지 못하며 지낼 때에도 푸성귀를 사다 먹거나 열매를 사다 먹을 수 있겠지요.


  바람이 불어 아이들 콧등을 간질이고, 내 콧등을 간질입니다. 햇살이 내리쬐며 아이들 얼굴을 태우고, 내 얼굴을 태웁니다. 풀내음이 퍼지며 아이들 몸을 휘감고, 내 몸을 휘감습니다.


  제비는 들판을 잰 날갯짓으로 낮게 납니다. 까마귀는 커다란 날개를 확 펼치며 천천히 납니다.


  나는 나대로 자전거를 달리며 두리번두리번 바라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수레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바라봅니다. 둘째 아이는 수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고개를 누나한테 기댄 채 잠듭니다.

  조용한 시골 한낮입니다. 햇살이 뜨거운 낮입니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무그늘 밑에 모여 앉아 낮밥을 자십니다. 낮밥을 먹고는 다시 뙤약볕 견디며 들일을 하시겠지요. 당신들 먹고 당신 아이들 먹으며 도시사람 먹을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일구겠지요.


- “왜 가지를 던지는 거야? 남는 거야?” “아, 저, 죄송합니다.” … “던지지 말고 먹으면 좋을 텐데. 싫어하는구나.” “아니, 그게. 먹긴 하지만 별로 맛이 없다고나 할까요.” “요코시마 중사는 애들 입맛이구나.” (80∼82쪽)
- “할아버지가 입원하셨어. 문병이라도 다녀오렴.” “됐어요.” “그래? 그럼 착실히 공부해. 사립이라서 비싸니까. 할아버지는 오토바이 사고라니. 불량학생도 아니고 말이야. 너 학원 제대로 가고 있니? 가끔 땡땡이 치지? 수험이 없다고 해서 빈둥대다간.” “잔소리 좀 그만해요.” (89쪽)

 

 


  이른아침에 한 차례 빨래하고, 무르익은 아침에 다시 한 차례 빨래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수레에서 내리고 밥을 차린 뒤, 내 몸을 씻으며 빨래 한 차례 더 합니다. 이윽고 다시 빨래 한 차례를 더 할 테고, 떨어지는 해가 아쉬워 또 한 차례 빨래를 할 테지요.


  시골살이 빨래를 조금씩 잦습니다. 기계를 쓰면 아침 한 차례로 끝이지만, 돌쟁이 둘째가 내놓는 오줌기저귀와 오줌바지를 서너 장쯤 모아 그때그때 시원한 물기운 느끼며 손빨래를 합니다.


  빨래를 하며 더위를 식힙니다. 빨래가 마당에서 마르며 개운합니다. 빨래는 햇살을 듬뿍 머금으며 아이들을 따사롭게 품습니다. 저녁이 되어 옷가지를 개면, 낮 동안 옷마다 그득히 밴 햇살이 내 손으로 새삼스레 스밉니다.


  살아가는 보람을 생각합니다. 오늘을 누리는 즐거움을 생각합니다. 뒤꼍에 심은 감자는 꽃망울이 자그맣게 달립니다. 며칠쯤 지나면 감자꽃 예쁘게 맺히리라 생각합니다. 감자꽃 옆으로는 노란 토마토꽃이 달리고, 노란 토마토꽃 둘레로는 온갖 들꽃이 흐드러집니다. 이제 뽕나무 열매는 차츰 발갛게 될 테고, 발간 오디는 우리 네 식구 좋은 밥거리가 될 테지요. 고개를 들어 뽕나무를 올려다봅니다. 사다리를 가져와 오디를 따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돌을 실이 묶어 나뭇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싶지 않아요. 뽕나무는 마음껏 하늘바라기를 하며 자라도록 두고 싶어요. 나와 아이들이 천천히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오디를 하나둘 따서 먹고 싶어요. 못 따는 오디는 새가 먹어도 되고, 땅으로 떨어져도 돼요.


- “여어, 중사.” “여, 앗. 그, 그게 아니라, 이름이 뭐예요?” “다카하시.” “제 가지를 먹어 주세요. 다카하시 누나.” “응.” “쓸모없게 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만났으면 해서, 그러면 좋겠다 싶어서, 그날 이후로 이렇게 됐어요. 쓸모없게 되지 않고, 가지가.” “고마워.” “조금 먹긴 했지만, 맛있어요? 제 가지? 어, 어땠어요?” “응, 괜찮았어.” (100∼101쪽)
- “평일 낮에 수퍼나 편의점 아닌 데서 쇼핑하는 것 행복하구나. 이런 말도 해 보고.” (187쪽)

 

 


  구로다 이오우 님 만화책 《가지》(세미콜론,2011) 상권을 읽었습니다. 상권과 하권으로 된 만화책 가운데 첫째 권을 읽으며 여러모로 놀랍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줄거리로 만화를 그리기도 하니 놀랍고, 이만 한 만화책이 한국에 옮겨질 수 있으니 놀랍습니다. 이제 이 나라에서도 이처럼 만화책 하나 추스를 수 있을까 궁금하고, 만화책 하나 빚는 얼이란 삶을 사랑하는 얼인 줄 느낄 만화쟁이가 하나둘 늘어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참 마땅한 일이지만, 그림을 잘 그린대서 만화를 잘 그리지 않습니다. 글을 잘 짜 넣는대서 만화가 재미나지 않습니다. 문예창작학과를 다녔기에 글을 잘 쓰지 않아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어긋나지 않기에 글이 재미나지 않아요. 값비싼 장비를 다루어야 사진을 잘 찍지 않고, 나라밖에서 여러 해 배웠으니까 사진이 놀랍거나 재미나거나 뛰어나지 않아요.


  살아가는 결을 살릴 때에 만화가 싱그러이 숨쉽니다. 살아가는 꿈을 다스릴 때에 만화가 푸르게 빛납니다. 살아가는 사랑을 나눌 때에 만화가 예쁘게 피어납니다.


  그야말로 살아가는 보람이에요. 살아가는 보람으로 밥을 지어요. 살아가는 보람으로 흙을 일구어요. 살아가는 보람으로 노래를 불러요. 살아가는 보람으로 자전거를 타요. 살아가는 보람으로 뜨개질을 해요. 살아가는 보람으로 빨래를 해요. 살아가는 보람으로 걸레질을 하고, 눈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무등 태우고 들길을 걸어요.


- “나 말이야.” “응.” “연애라든지 결혼이라든지, 애 낳는 것, 그런 것들 전부 안 하고 살려고 해. 맘먹었어.” “그래. 하지만 알 것 같아.” “진짜?” “남들만큼 다 하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렇지?” (197쪽)
- “그리고 너 학교는?” “아, 그렇구나. 학교 가야지. 많이 배웠습니다.” “아니, 뭘.” (220쪽)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주면 좋겠어요. 우리 어른들 스스로 사랑을 마음껏 누리면 좋겠어요. 우리 어른들이야말로 사랑스레 살아가는 보람을 마음껏 빛내면서, 우리 아이들이 ‘환한 빛’을 늘 느끼며 아끼도록 이끌면 좋겠어요.


  더도 덜도 아니잖아요. 아이한테 100만 원짜리 옷을 사 입혀야 예쁘지 않아요. 99만 원짜리 옷을 사 입힌들, 98만 원짜리 옷을 사 입힌들 …… 39만 원짜리 옷을 사 입힌들, 38만 원짜리 옷을 사 입힌들 …… 9만 원짜리 옷을 사 입힌들, 8만 원짜리 옷을 사 입힌들 …… 1만 원짜리 옷을 사 입힌들, 이웃집에서 얻어 입힌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사랑스레 건네는 옷 한 벌을 고맙게 받아서 예쁘게 입어요.


  살아가는 보람은 오로지 하나예요. 사랑입니다. (4345.5.29.불.ㅎㄲㅅㄱ)

 


― 가지 (상) (구로다 이오우 글·그림,송치민 옮김,세미콜론 펴냄,2011.3.18./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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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탕 2020-03-02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네요. 책 많이 추천해주세요.

숲노래 2020-03-06 23:0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만화책 이야기는
꾸준히 쓰니
즐거이 읽어 주셔요 ^^
 
농민: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
김동욱 지음 / 눈빛 / 1995년 4월
평점 :
절판


 


 삶도 사랑도 사진도 빛
 [찾아 읽는 사진책 100] 김동욱, 《농민, 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눈빛,1995)

 


  전라남도 고흥 시골마을은 새벽부터 부산합니다. 이웃집 마늘밭에서 올 햇마늘이 처음으로 나온 오월부터 이곳 시골마을은 더없이 바쁜 흙일철(농번기)을 맞이합니다. 이웃집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두 새벽 네 시 즈음이면 논자락으로 나와 일을 합니다. 네 시 반이나 다섯 시쯤은 늦습니다. 네 시 즈음부터 논배미에서 물을 살피고 흙을 돌봅니다.


  시골 흙일꾼 얼굴을 사진으로 담은 《농민, 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눈빛,199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1995년에 처음 나온 이 사진책은 어느새 판이 끊어졌습니다. 사진쟁이 김동욱 님은 흙일꾼 이야기를 더 사진으로 담아 보았는지, 이 책으로 마무리짓고 다른 길로 접어들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진책 《농민》에는 비가 오는 날이나 궂은 날이나 눈이 뿌리는 날, 시골마을 흙일꾼 삶이 어떠한가 하는 모습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진책 《농민》에는 논이나 밭에 나와 일하는 흙일꾼이 ‘사진기를 바라보는 얼굴’ 모습만 드러납니다.


  사진쟁이 김동욱 님은 “운주사를 사진으로 정리하려고 주말을 이용해 일 년 남짓 내려가 보곤 했다. 그러나 찍으면 찍을수록 내 식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웠고, 흔히 볼 수 있는 문화재 사진이 나올 뿐이었다(101쪽/작가의 말).” 하고 이야기합니다. 김동욱 님 스스로 운주사라 하는 절을 ‘문화재’로 여긴다거나 ‘기록할 값어치가 있는 곳’으로 생각했으면, 운주사라 하는 절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문화재’로 보이는 사진이 태어나거나 ‘기록할 값어치가 있다’ 싶은 사진이 나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문화재 사진’이 나올 뿐이라면, 사진을 찍는 분 스스로 이 같은 생각굴레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사진쟁이 김동욱 님 스스로 “한 사람이 부르기 시작하자 노래는 이내 합창이 되어 들로 퍼진다. 빈속에 연거푸 마신 막걸리 때문에 금방 취기가 오르며 다리가 풀렸다. 나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어줍잖은 사명감, 우월감, 무력감, 초조함은 없었다. 노랫가락 따라 남도 들녘 저 멀리로 사라진 듯했다(102쪽/작가의 말).” 하고 이야기를 하며 사진을 찍는 삶이라 한다면, 이러한 말 그대로 김동욱 님 사진에는 “어줍잖은 사명감, 우월감, 무력감, 초조함”이 깃들 까닭이 없습니다.

 


 

  더없이 마땅합니다만, 사진책 《농민》을 들여다보면, 어느 사진에는 바로 이 “어줍잖은 사명감, 우월감, 무력감, 초조함”이 살며시 깃들고, 어느 사진에는 이런저런 “어줍잖은 사명감, 우월감, 무력감, 초조함”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해맑구나 싶은 사진이 있습니다. 좋구나 싶은 사진이 있습니다. 아름답구나 싶은 사진이랑 슬프구나 싶은 사진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사진이든 논자락이나 밭자락 한복판에서 찍은 사진이요, 밝은 낮나절에 찍은 사진입니다.


  왜 새벽 네 시에 찍은 사진은 없을까요. 왜 저녁 여덟 시에 찍은 사진은 없을까요. 흙일꾼을 좇아 흙일꾼을 찍는 사진이라 할 때에는, 흙일꾼 삶자락을 살피며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새벽이 없고 저녁이 없는 흙일꾼 이야기를 사진에 살포시 담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흙 묻은 발가락, 까무잡잡한 얼굴, 갈라터진 손가락, 투박한 몸뚱이, 알록달록 펑퍼짐한 옷차림, 고되다 싶은 일을 하면서도 웃고 노래하는 매무새, ……, 그리고 밭고랑처럼 깊게 팬 주름살을 사진으로 담기에 ‘흙일꾼(농민)’ 사진이 되지는 않습니다. 자리를 바꾸어, 서울 골목동네 한켠에서 이러한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도 똑같은 모습이 나와요. 사람들 뒷모습만 ‘논밭’에서 ‘골목집’으로 바뀝니다. 바닷마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바닷마을에서 이러한 틀로 사진을 찍으면, 사람들 뒷모습만 ‘고기잡이배’나 ‘바다’가 드러날 뿐입니다.

 

 

 


  한국땅에 사진이 들어온 지 백 해쯤 되었을까 어림해 봅니다. 백 해에서 더 지났다 할 수 있고, 맨 처음 들어온 날로 치면 백 해를 훌쩍 넘었다 할 테지요. 이럭저럭 나라 곳곳에서 사진일 하던 사람들이 생긴 때로 치면 이냥저냥 백 해로 칠 만합니다. 지난 백 해에 걸쳐, 이 나라 흙일꾼을 사진으로 담던 사람들은 어떤 모습 어떤 삶 어떤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으려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흙에서 흙일을 하는 흙일꾼은 어떠한 사람 어떠한 삶 어떠한 사랑이라고 여기며 사진기를 손에 쥐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예나 이제나 ‘흙일꾼 스스로’ 흙이랑 뒹굴며 사진기를 든 일은 아직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흙일꾼 삶결’에 맞추어 사진기를 쥔 사진쟁이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사진으로 담는다 한다면, 대통령 삶자락을 어떻게 좇으며 사진으로 담으면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 삶을 사진으로 담는다 할 때에, 아이들 삶자락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살피며 사진으로 담으면 좋을까 곱씹어 봅니다. 저잣거리 할머니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버스 운전기사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길거리 청소부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탄광 일꾼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사진쟁이는 이들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얼마만큼 살피고 돌아보면서 사진기를 쥘 때에 ‘삶빛’을 ‘사진빛’으로 옮길 만한가 가누어 봅니다.


  사진책 《농민》은 무척 사랑스럽습니다. 이 사진책에 담긴 시골 흙일꾼 누구나 ‘도시로 나가 회사에서 돈을 버는 아들’을 떠올리며 사진쟁이 앞에서 ‘모델로 선선히 서 주었구나’ 싶은 느낌입니다. 사진쟁이를 바라보는 흙일꾼이 아니라 ‘도시에서 대학교 마치고 커다란 회사에서 일자리 얻은 아들’을 바라보는구나 싶은 느낌입니다. 꼭 이런 느낌이라서 사랑스럽지는 않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사진쟁이 김동욱 님은 ‘시골 흙일꾼을 바라본다’기보다 ‘이녁 늙은 어버이를 바라본다’고도 할 수 있는데, 따사로이 바라보며 즐거이 어깨동무하고픈 마음을 사진으로 담았어요. 나는 이 결을 느끼면서 사진책 《농민》이 매우 사랑스럽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쉽다고 밝힐밖에 없는데, 사진과 사진책은 사랑스럽지만, 막상 ‘흙과 흙일과 흙일꾼 이야기’는 살포시 건드리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사진에 흙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사진기에 흙일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사진쟁이한테 흙일꾼이 녹아들지 않습니다.


  김동욱 님이 종달새 소리도 듣고, 뻐꾸기 소리도 들으며, 제비 소리도 듣는 즐거움 누리면서 한결 느긋하게 식구들 모두 이끌고 다니며 시골 곳곳을 예쁘게 누빌 수 있으면 “또 다른 백 해를 기다리는 흙일꾼” 사진이 아니라, “바로 오늘 사랑을 누리는 흙일꾼” 사진을 베풀 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아갈 때에는 시골 흙사람답게 흙일꾼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으며 즐겁습니다. 시골로 찾아와 흙을 만지며 살아갈 때에는 도시사람답게 새로운 손길과 눈길로 흙일꾼 삶결을 사진으로 옮기며 기뻐요. 삶은 빛이요, 사랑은 빛이며, 사진은 빛입니다. 삶은 이야기요, 사랑은 이야기이며, 사진은 이야기입니다. (4345.5.29.불.ㅎㄲㅅㄱ)

 


― 농민, 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 (김동욱 사진,눈빛 펴냄,1995.4.26./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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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놓치다 애지시선 6
손세실리아 지음 / 애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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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샘솟는 자리
[시를 노래하는 시 17] 손세실리아, 《기차를 놓치다》

 


- 책이름 : 기차를 놓치다
- 글 : 손세실리아
- 펴낸곳 : 애지 (2006.2.13.)
- 책값 : 8000원

 


  도시에 공부방이 있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쉼터 구실을 합니다. 도시 공부방은 곧잘 동네 아주머니나 할머니한테 한글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시골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을 가르치는 배움마당을 열기도 합니다. 올해에는 고흥군에 두루 ‘유기농 농사짓기’를 퍼뜨린다며, 광주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는 분이 ‘유기농 농사짓기 강의’를 하러 오기도 합니다.


  도시에서 살던 지난날을 돌이키고, 시골에서 사는 오늘날을 헤아립니다. 지난날 도시에서 동네 아줌마나 할머니한테서 무언가를 배우는 자리를 누군가 연 적 있었나 궁금합니다. 공부방이나 경로당은 있다지만, 문화회관이나 복지화관은 있다지만, 늘 ‘자격증·졸업장 많이 거머쥔’ 이들이 찾아와서 ‘자격증·졸업장 하나 없는’ 이들한테 지식과 정보를 한 가득 들려줄 뿐 아닌가 싶습니다. 시골에서도 마을 어르신한테 자꾸 무언가를 알려주거나 가르치겠다 할 뿐입니다.


.. 시인을 꿈꾸는 이여 / 그대가 방금 내게 들려준 말이 시다 / 한 줄의 첨삭도 필요 없는 온전한 시다 / 외지에 나가 칼질로 먹고 사는 장손을 위해 / 자갈밭 일구고 평생 물질하셨을 / 칠순 노모의 휘어진 허리가 시다 / 주방에 그릇그릇 담긴 어머니의 몸이 바로 시다 / 그것을 받아 적지 못하면 허당이다 / 시는 그대 안에 이미 와 있느니 / 밖에는 없느니 ..  (밥상에 올려진 시)


  나는 전남 고흥 시골마을 보금자리를 얻어 살고부터 ‘고흥과 얽힌 책’을 틈틈이 장만해서 읽습니다. 1980년대에 나온 관광책도 장만하고, 1970년대에 나온 교과서 보조교재도 장만합니다. 《한국의 발견, 전라남도 편》도 장만합니다. 이런 책도 읽고 저런 책도 살핍니다. 여러 갈래 온갖 책을 훑다가 문득 느낍니다. 고흥군청에서 내놓는 책이든, 고흥 바깥에서 펴내는 책이든, 어떠한 책이라 하더라도 고흥을 바라볼 때에는 ‘관광하러 드나들 만한’ 곳이 되느냐 하는 눈길입니다. ‘돈을 잘 버는’ 곳인가 아닌가를 따집니다.


  통계자료가 있는지 모릅니다만, 우리 식구 깃든 시골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 ‘학력’이 어떠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마을 할머니는 국민학교라도 다녀 보셨을까요. 마을 할아버지는 국민학교 다음으로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까요.


  시골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신 딸아들을 대학교까지 보낼 뿐 아니라 대학원도 보냅니다.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딸아들은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등허리 구부정하게 일하지 않습니다. 도시로 떠나 살아가는 딸아들은 돈을 쏠쏠히 벌고 커다란 자가용을 굴립니다.


.. 어미가 앞장 서 갈퀴발로 터놓은 물의 길을 여남은 마리의 새끼들이 올망졸망 뒤쫓고 있습니다. 떼로 몰려다니며 수선스러워 보이지만 묵언정진 중인 수련 꽃잎에 생채기내는 일 없고 빽빽한 수풀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는 듯 보이지만 물풀의 줄기 한 가닥 다치는 법 없이 말짱한 것이 하늘에 길을 트고 국경을 넘나드는 철새들의 비행과 별반 다를 바 없었는데요 ..  (물오리 一家)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처음부터 풀약과 비료를 쓰며 흙을 일구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마흔 해나 쉰 해 앞서도 풀약과 비료를 써서 논밭을 일구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예순 해나 일흔 해 앞서, 마을 어르신들이 당신 어버이한테서 흙일을 물려받을 무렵에도 당신 어버이는 풀약과 비료로 푸성귀와 곡식을 거두라 가르쳤을까 궁금합니다.


  할머니들은 호미질을 빼어나게 잘 합니다. 할아버지들은 낫질을 훌륭하게 잘 합니다. 할머니들은 풀을 잘 압니다. 할아버지들은 흙을 잘 압니다. 할머니들은 물을 잘 압니다. 할아버지들은 하늘을 잘 압니다.


  시골 할머니한테서 호미질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도시사람은 없습니다. 시골 할아버지한테서 낫질을 배우겠다며 문화강의를 여는 지식인이나 관청 공무원은 없습니다.


  밭이랑을 만들거나 논둑을 다지는 솜씨를 배우러 시골로 찾아오려 하는 도시 젊은내기는 얼마나 될까요. 들풀을 익히거나 멧나물을 배우러 시골로 드나들려 하는 도시 지식인이나 학자는 얼마나 되려나요.


.. 이름 석 자는커녕 / 전화 다이얼도 돌릴 줄 모르는 어머니를 / 세상은 까막눈이라 한다 ..  (까막눈)


  모든 강의는 지식 강의에서 그칩니다. 모든 학교는 정보를 새로 만들어 쌓는 데에서 끝납니다. 사람들은 자꾸자꾸 자격증을 새로 만듭니다. 사람들은 나날이 졸업장을 더 따집니다.


  볍씨 한 알을 어떻게 갈무리해서 봄날 못자리에 심어 싹을 틔우는가를 모르더라도 밥을 맛나게 먹을 수 있습니다. 볏포기가 얼마나 푸르게 빛나며 개구리와 뱀과 새와 거미 들을 품에 안기에 단단하고 알찬 열매가 맺는가를 모르더라도 쌀을 얼마든지 장만할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쌀농사 짓지 말라고 ‘직불제’라는 제도를 마련합니다. 나라에서는 쌀이야 이웃나라에서 사다 먹으면 된다며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제도를 맺습니다. 그런데, 쌀농사 짓지 말라면서, 쌀은 더 안 지어도 된다면서, 이 나라 정부는 갯벌을 메워 논을 만드는 일을 자꾸 벌입니다. 논을 만들어도 농사짓지 말고 묵히라는 정책을 세우면서, 정작 갯벌을 메워 논밭으로 바꾸겠다 외칩니다.


  곰곰이 따지면, 논밭으로 바꾸려 메우는 갯벌은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처음에 내세우기로는 논밭으로 삼겠다는 허울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아파트나 공장을 지으려고 갯벌을 메웁니다. 조개도 낙지도 굴도 김도 몽땅 이웃나라에서 사다 먹으면 되니까, 조기도 게도 갈치도 오징어도 모조리 이웃나라에서 사다 먹으면 그만이니까, 갯벌을 없애고 바다를 더럽힙니다. 깨끗한 바닷가마다 발전소를 지어 바닷물을 망가뜨립니다. 깨끗한 바닷마을마다 공장을 세워 흙과 물을 더럽힙니다.


.. 미장갑차 무쇠바퀴에 뭉개져 / 네가 떠난 오욕의 이 영토에도 / 어김없이 첫눈은 내리고 / 철없는 소름은 / 베옷 밑에서 자꾸만 키가 자란다 … 이승에서 너 하나 지키지 못하고도 / 살아 밥을 먹고 말을 섞는 / 부끄러운 날이 살같이 지난다 // 잘 가거라 아가, 내 새끼야 ..  (베옷을 입다)


  대학교에서는 새끼꼬기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학교에 ‘농업과학’을 가르치는 학과는 있다지만, 정작 똥오줌으로 거름을 내고 쓰레기를 안 빚는 오랜 흙일을 가르치는 학과는 없습니다. 볏짚으로 새끼를 꼴 뿐 아니라, 짚신을 삼거나 바구니 엮는 솜씨를 가르치는 교수는 없어요. ‘식품영양’을 가르치는 학과는 있다지만, 들풀이나 멧풀을 하나하나 캐거나 따거나 뜯거나 꺾어서 몸을 살찌우는 삶을 가르치는 학과는 없습니다. 메주를 쑤거나 두부를 빚거나 마늘을 말리거나 감알을 깎는 솜씨를 가르치는 교수는 없어요.


  그물을 꿰거나 베틀을 밟을 줄 아는 교수는 있을까요. 뽕잎을 따거나 뜨개질을 할 줄 아는 교수는 얼마나 될까요. 손으로 빨래하거나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교수는 얼마나 될까요.


  생각해 보면, 새끼꼬기를 대학교에서 가르친다면,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굳이 당신 딸아들을 대학교에 보내지 않습니다. 짚신삼기를 가르치며 대학 교수가 된다면,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애써 당신 딸아들을 대학 교수가 되도록 뒷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학교에서 새끼꼬기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으니,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일이 벌어집니다.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아이들이 들판과 멧자락에서 나물을 캐지 않으니, 온 나라 냇가에 시멘트를 발라 망가뜨리는 짓을 수십 조를 들여 저지릅니다.


  삶을 배우지 않기에 삶을 사랑하지 못해요. 삶을 가르치지 못하니 삶을 아끼지 않아요. 삶을 물려받지 않으니 삶을 좋아하지 못해요. 삶을 이야기하지 못하니 삶을 나누지 않아요.


.. 수렁 같은 허방에 큰절 올린다 / 떼 한 포기 옮겨 심는 마음으로 / 진혼시를 쓴다 ..  (고봉산 뼈무덤)


  시골을 떠난 아이들은 왜 자가용을 몰고 명절날 이녁 어버이를 찾아 뵐까요. 명절날 갖가지 선물보따리 들고 시골마을 찾아 돌아왔다가 금세 도시로 떠나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시골마을 어버이한테는 무엇이 선물이 될 만한가요. 시골로 찾아와 도시로 돌아가는 아이들마다 자가용 짐칸에 바리바리 싣는 꾸러미는 무엇일까요.


  시골마을 어르신들은 도시로 떠난 아이들을 ‘밥을 먹여’ 살립니다.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시골마을 어버이한테 ‘돈푼’ 쥐여 준다지만, 시골마을 어르신은 ‘돈푼’으로 맛나다는 먹을거리를 사다 먹지 않습니다. 늘 스스로 흙을 일구어 맛난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흙에서 얻은 돌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손질하거나 고칩니다. 이제는 가게에서 옷을 사다 입는다지만, 옷가지 또한 모두 흙에서 얻었고, 흙으로 돌려보냈어요. 환경운동이니 재활용이니 하고 떠들 까닭이 없는 시골마을이에요. 생태이니 생명이니 하고 외칠 까닭이 없는 시골살이예요.


  스웨덴이나 덴마크나 네덜란드까지 찾아가서 ‘미래 대안’을 배울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바로 우리 어버이들 나고 자란 가까운 시골에서 ‘오늘 삶’을 사랑하며 껴안을 수 있어요. 쿠바나 핀란드나 캐나다에서 ‘유기농이나 친환경’을 배울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바로 우리 어버이들 나고 자란 가까운 시골에서 ‘푸른 삶’을 아끼며 어깨동무할 수 있어요.


  사랑이 삶이에요. 삶은 푸르게 빛나요. 꿈이 삶이에요. 삶은 맑게 빛나요.


..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 다음 생엔 부디 /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기를 /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  (저문 산에 꽃등 하나 내걸다)


  손세실리아 님 시집 《기차를 놓치다》(애지,2006)를 읽습니다. 기차를 놓쳤어요. 그래요. 기차를 놓쳤으니 기다려야겠네요. 또는, 걸어가야겠네요. 또는, 길을 떠나지 않고 내 작은 마을에서 작고 조용히 살아야겠네요.


  나는 늘 기차를 놓칩니다. 나는 늘 기차를 놓치고 내 작은 마을에 우두커니 섭니다.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인가 생각합니다. 누구와 사랑하는 사람인가 돌아봅니다.


  나는 늘 기차를 먼저 보냅니다. 나는 늘 기차를 먼저 보내고 천천히 걷습니다. 어디로 가고 싶은 사람인가 헤아립니다. 누구랑 어디로 나들이를 다닐 때에 즐거운 나날일까 곱씹습니다.


  싯말은 바로 내 가슴에서 샘솟습니다. 싯말은 곧 내 삶말입니다. 싱그러이 사랑하는 내 가슴이라면 싱그러이 사랑하는 싯말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곱게 사랑하는 내 삶이라면 곱게 사랑하는 싯말로 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를 따숩게 어깨동무합니다.


  손세실리아 님은 사랑을 기다리며 삶을 한 올 두 올 엮으며 싯말 한 송이 자그맣게 피웁니다.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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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꼭 지켜야 할 벼 철수와영희 어린이 인문생태그림책 1
노정임 지음, 안경자 그림, 강병화 감수, 바람하늘지기 / 철수와영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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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먹는 밥으로 사랑을 일굽니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69] 안경자·노정임,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벼》(철수와영희,2012)

 


  내가 먹는 모든 밥은 내 몸이 됩니다. 내 몸은 내 삶이 되고, 내 삶은 내 아이들 삶으로 이어집니다.


  아이들은 나이가 들며 이제 저희대로 저희 좋은 삶길을 걷겠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걷는 삶길이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으면서 스스로 찾거나 살피거나 헤아리는 길입니다.


  아이들 몸을 이루는 숨결은 어버이가 여느 때에 꾸준히 먹은 밥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른들 스스로 어린 날부터 차근차근 먹으며 숨결을 이은 밥이 곧 아이들 목숨이에요. 아이들이 걸린다는 아토피이든 숱한 몸앓이는 모두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준 생채기이자 아픔이고 슬픔이에요. 어버이는 몸으로 이 숱한 생채기나 아픔이나 슬픔을 누리지 않습니다. 바로 가장 가까운 곁에서 아이들이 괴롭고 힘겨우며 지치는 모습을 그예 바라보면서 어찌저찌 손을 못 쓰며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어버이 스스로 착하고 맑으며 고운 밥을 꾸준하게 즐겨먹는다면, 어버이 숨결로 빚을 아이들 목숨은 더없이 착하고 맑으며 고울 수 있어요.


.. 이번 책을 준비하면서 부지런히 자료를 찾다가 가장 놀란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우리 나라의 농약 사용량이 무척 많다는 사실이었고 … 한 가지 더 안타까운 것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자료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8쪽)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은 어버이가 늘 먹는 밥과 같다고 느낍니다. 어버이로서 날마다 어떤 밥을 먹느냐만큼, 어버이로서 날마다 어떤 사랑을 나누느냐에 따라 아이들 하루하루가 달라지는구나 싶어요. 어버이로서 늘 누리는 사랑이란 아이들이 늘 누리는 사랑이고, 어버이답게 노상 빚는 꿈이란 아이들이 노상 빚는 꿈이로구나 싶어요.


  내가 꽃내음 맡으며 들길을 걸으면 아이도 나와 함께 꽃내음 맡으며 들길을 걷지만, 이에 앞서 내 몸과 마음으로 스미는 꽃내음이 내 생각을 따숩게 다스립니다. 내가 들새 노랫소리 들으며 멧길을 오르내리면 아이도 나와 함께 노랫소리 들으며 멧길을 오르내리지만, 이보다 내 넋과 얼로 녹아드는 노랫소리가 내 사랑을 곱게 보듬습니다.


  날마다 좋은 밥을 먹어야겠다고 느낍니다. 언제나 좋은 밥을 마련해야겠다고 느낍니다. 가장 좋다고 느끼는 먹을거리로 밥상을 차려요. 가장 좋다고 느낄 마음가짐으로 밥상을 차릴 때에 즐거워요. 가장 비싼 먹을거리가 아니라 가장 좋다고 느끼는 먹을거리예요. 가장 빛나는 밥솜씨가 아니라 가장 좋은 매무새로 짓는 밥이에요.


.. 쌀과 밥을 못 본 친구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벼’를 못 본 친구는 있을 수도 있어요. 쌀과 밥은 부엌에 있지만, 벼는 논에서 자라니까요. 벼는 쌀을 얻으려고 논에 심어 기르는 한해살이풀이랍니다 ..  (14쪽)

 

 


  오월 끝무렵이 되니 전남 고흥 시골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두 바쁩니다. 오월 첫머리까지는 모두들 천천히 쉬엄쉬엄 지내며 얼크러져 노시는구나 싶었으나, 이제 밭자락마다 마늘 캐느라 바쁘고, 논자락마다 써레질과 물대기로 바쁩니다. 차근차근 밑일을 마치는 유월을 맞이하면 모두들 무논에 모를 심겠지요. 예전처럼 손으로 모를 심지는 않지만, 즐겁게 모를 심겠지요. 허리 굽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손으로 모를 심으라 바라기 힘들 테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은 바로 ‘시골 늙은 할매 할배가 일군 쌀’을 사다가 밥을 지어 먹겠지요.


  곰곰이 돌아봅니다. 열 해 앞서도, 스무 해 앞서도, 또 서른 해 앞서도 시골마을에서는 ‘늙은 사람’이 흙을 일구었습니다. 앞으로 열 해 뒤에도, 또 스무 해 뒤에도, 어쩌면 서른 해나 마흔 해 뒤에도 시골마을에서는 ‘늙은 사람’만 흙을 일구고, 젊은 사람은 도시에서 돈을 벌는지 몰라요. 이 나라에서 흙과 사귀는 일이란 늙은 사람만 할 일이요, 젊은 사람은 자가용이랑 인터넷이랑 돈이랑 물질문명하고 사귀기만 하면 될 노릇일는지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장미꽃을 사다 선물한다는데, 정작 장미씨를 받아 장미싹을 틔워 장미나무를 키운 다음 이 장미나무한테서 얻은 꽃송이를 꺾어 선물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워요. 그저 돈을 벌어 돈으로 장미를 사고 돈을 치러 빼입은 옷을 차려입은 다음 서로서로 만나는 도시예요. 내 몸을 움직이지 않아요. 내 마음이 내 몸에 따라 거듭나지 않아요. 내 몸에 흙을 묻히거나 내 얼굴에 햇살이 닿도록 하지 않는 도시예요.


  한국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는다지만, 막상 밥이 될 쌀을 어떻게 빚고, 쌀은 벼에서 어떻게 갈무리하는가를 살피지 않아요. 한국사람은 빵이나 라면이나 국수를 참 많이 먹는데, 정작 빵이나 라면이나 국수, 여기에 과자가 될 밀을 어디에서 누가 어떻게 일구어 얻는가를 헤아리지 않아요.


  아이들도 모르지만, 아이들보다 어른들부터 모릅니다. 아이들도 생각하지 않지만, 아이들에 앞서 어른이 먼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 벼꽃이 피었어요. 아주 빨리 꽃가루받이를 한답니다. 2∼3시간 안에 수정을 하고 곧 지지요. 옛 어른들은 “벼꽃 필 때는 거름도 주지 말라”고 했대요. 부지런한 농부도 이때는 논에 가지 않고 벼꽃이 알아서 일하길 조용히 기다리지요 ..  (21쪽)

 


  그림책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벼》(철수와영희,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은 날마다 밥을 어버이한테서 받아먹는 아이들이 ‘벼’를 옳게 제대로 슬기롭게 알도록 이끕니다. 아이들이 밥을 모르고서는, 벼를 모르고서는, 쌀을 모르고서는, 참말 밥을 밥답게 누리지 못하고 삶을 삶답게 즐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베푸는 선물 같은 책입니다.


  그래, 이 그림책은 아이들한테 되게 좋겠구나 싶어요. 이 그림책을 읽을 아이들은 벼와 쌀과 밥을 잘 가누어 돌아볼 만하고, 알뜰살뜰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어요.


  그렇지만, 무엇보다 한 가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벼와 쌀과 밥을 알 수 있다지만, 어른들은 어떡하지요? 아이들은 벼와 쌀과 밥을 알아차리고 느끼며 익힌다지만, 어른들은 무엇을 하나요?


  아이들은 예쁘게 빚고 알차게 엮은 그림책을 읽으며 좋은 생각을 마음껏 북돋운다지만, 어른들은 어떤 생각을 얼마나 북돋울까요?


.. 논은 사람 손으로 만든 습지예요. 습지는 생물다양성이 높은 아주 중요한 생태계랍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넓은 습지는 바로 논이에요. 논은 사람이 사는 마을처럼 여러 생명이 자라고 어울려 사는 생명의 터전이랍니다 ..  (28쪽)

 


  어떤 그림책이든 어른이 장만해서 아이들한테 읽힙니다. 어떤 그림책이든 아이들이 책방마실을 하면서 장만하지 않습니다. 어떤 그림책이든 아이들 혼자 도서관으로 나들이를 가서 읽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그림책이든 아이들이 어버이나 교사랑 나란히 도서관으로 나들이를 가서 읽습니다.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합니다. 우리 어른들이 이 그림책을 먼저 즐겁게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이 그림책을 예쁘게 읽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벼와 쌀과 밥을 곱게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날마다 맛나게 밥먹고, 언제나 예쁘게 꿈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좋은 삶을 생각하고 좋은 사랑을 나누며 좋은 밥을 즐길 수 있으면 참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먹는 밥으로 사랑을 일굽니다. 내가 나누는 밥으로 꿈을 빛냅니다. (4345.5.27.해.ㅎㄲㅅㄱ)

 


―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벼 (안경자 그림,노정임 글,바람하늘지기 기획,철수와영희 펴냄,2012.6.6./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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