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抱天) 1막
유승진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즐겁게 누릴 삶을 생각한다
 [만화책 즐겨읽기 160] 유승진, 《포천 (1막)》

 


  둘째 아이가 깔개에 쉬를 눕니다. 아니 깔개에 올라서며 쉬를 눕니다.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에 쉬를 누면 걸레로 훔치면 그만인데, 깔래나 이불에 올라서며 쉬를 누면 걸레질로 그치지 않습니다. 빨래거리 큼직하게 나옵니다.


  깔개를 밟고서는 쉬를 누었으니 깔개가 옴팡 오줌으로 축축합니다. 깔개잇을 이레에 한 차례쯤 빨래했으나 이제 솜까지 빨아야 할 판입니다. 솜이불도 한 해에 한 차례쯤 솜까지 물에 폭삭 담가 빨고는 좋은 볕에 보송보송 말리기도 하니까, 솜깔개 속도 가끔은 물에 폭삭 담가 빨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아이가 여기에 쉬를 누면서 ‘자, 이제 솜도 빨래할 때가 되었다구요.’ 하고 말을 건넨 셈이라 여기기로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깔개에 쉬를 한 때는 저녁 일곱 시 즈음. 빨래를 시키려면 일찌감치 시켜서 모처럼 해가 난 낮나절에 빨래해서 잘 마르도록 하면 좋았을 텐데, 해 기울고 빗방울 조금씩 듣는 이 저녁에 쉬를 해야 하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빨래를 미룰 수 없고, 언제 비가 들고 언제 비가 그칠지 모르는 만큼, 어쨌든 빨고 보자고 생각합니다.


- “엿점이 엿 된 거지, 뭘 더 가르쳐 주랴?” (46쪽)
- “내 보기엔 자네, 장국 생각한 것 같은데?” “관상으로 그런 것도 점치시오?” “배고픔은 얼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눈빛에서 비춰지는 거지. 즉, 안상이라고 하네만.” (68쪽)

 

 


  깔개솜을 빨래하니 노란 물이 짙게 나옵니다. 나무숯물을 뿌려 담근 다음 빨래하는데, 이 빛깔은 어떻게 나오는가 궁금합니다. 솜빛이 이러한 빛일는지, 그동안 솜에 밴 오줌이 찬찬히 배어나오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쨌든 신나게 꾹꾹 누르고 비비며 빨래를 마칩니다. 웬만큼 물기를 뺀다 싶도록 짜고는 바깥에 넙니다. 식구들 잠들 무렵 빗방울이 굵어지나 싶어 처마 밑으로 옮깁니다. 새벽나절 첫째 아이 오줌을 누이러 함께 마당으로 내려서며 밤하늘을 살피니 비구름은 걷히고 흰구름만 있기에 깔개솜을 다시 마당으로 내놓습니다. 설마 싶어 깔개솜 모서리를 비틀어 짜니 물이 후두둑 떨어집니다. 하기는, 이불을 빨아서 널 때에도 얼마쯤 지나면 물이 아래쪽으로 쏠려 꽉 비틀면 물이 후두둑 떨어져요. 깔개솜도 이불 빨래하고 비슷하겠지요.


  아이는 잠자리에 들고 나는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다. 나는 새 하루가 빗방울 안 들으면서 해도 살짝 고개를 내밀어 주기를 바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내 몸과 마음과 꿈이 서로 어떻게 얽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옆지기와 아이한테 보여주는 낯빛과 들려주는 말결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스리는 내 몸은 얼마나 나를 잘 따르는가 헤아리고, 내 참된 마음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싶어하는가를 헤아립니다. 내 몸이 바보스레 나아가려 하는 모습은 어느 때 드러나고, 내 몸이 내 가장 좋은 마음을 따라 슬기롭게 움직이려 하는 모습은 어느 때 나타나는가를 헤아립니다.


  내 몸이 아프다 할 적에도 내 마음이 나란히 아픈지 곰곰이 돌이킵니다. 내 몸에서 아픔이 가시고 이제 튼튼해졌다 할 적에 내 마음 또한 아픔이 없이 말끔하거나 씩씩하다 할 만한지 돌아봅니다.


- “언짢게 듣지 말게나. 자네에겐 호랑이 사냥이지만 여기 사람들에겐 호랑이로부터의 생존이라네.” (67쪽)
- “내 언제 잘잘못 따지자 했소?” (70쪽)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을 시험성적으로 잽니다. 또는 학생을 낳은 어버이가 품은 돈크기로 살핍니다. 또는 학생들 얼굴 모양이나 몸 맵시로 헤아립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마음으로 읽으면서 생각으로 돌아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교사가 학생을 사랑으로 보듬으며 꿈으로 어깨동무하는 일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사도 학생도 모두 노예가 되는 길을 가고야 맙니다. 그러면, 나는 내 보금자리를 얼마나 좋은 삶터로 일구면서 노예 아닌 사람 되는 길을 걷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나한테 깃든 사람다움은 무엇이고, 내가 나눌 사람빛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제도권을 비판하거나 입시지옥을 따지는 일이란 부질없어요. 일제고사를 나무라거나 교과서 치우친 지식을 꾸짖는 일이란 덧없어요. 이것을 따지거나 저것을 나무라기 앞서, 내가 사랑하는 길을 살필 노릇입니다. 내가 꾸는 꿈을 찾을 노릇입니다. 마음을 쓰는 대로 삶을 이루고, 생각을 빛내는 대로 사랑이 태어나는 줄 안다면, 내 보금자리부터 내 가장 좋은 마음과 내 가장 슬기로운 생각이 얼크러지도록 살아갈 노릇이에요. 삶은 스스로 짓지, 운명은 따로 없거든요. 삶은 스스로 이루지, 이렇게 되거나 저렇게 되란 법은 없거든요.


  손금을 들여다보면 이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가 하는 그림이 훤히 나와요. 참말 다 나와요. 이를테면, 학교에서 아이들 시험성적을 놓고 어느 대학교에 들어갈 만한지 따지잖아요. 이런 숫자와 통계는 거의 들어맞아요. 이 모습 이대로 간다면 꼭 이렇게 될밖에 없어요.


  다만, 손금은 언제나 바뀌어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바뀌곤 해요. 왜냐하면, 삶은 스스로 짓기 때문에, 늘 스스로 짓는 삶이라 할 때에는 ‘앞날이 새 모습이 되도’록 스스로 새 길을 걸어가요. 그러니까,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삶이라 한다면, 손금을 보는 일이란 아무것 아니에요. 어차피 내 앞날은 나 스스로 오늘 살아가는 결에 따라 바뀌거든요. 내가 사랑을 품으며 살아가면 내 앞날은 온통 사랑누리예요. 내가 돈벌 생각이나 이름 날릴 생각을 품으며 살아가면 내 앞날은 오직 돈이나 이름값하고 얼크러지겠지요. 내가 좋은 보금자리에서 좋은 빛을 나누려는 넋이라 할 때에는 살림새나 살림살이를 모두 좋은 길이 되게끔 추스르면서 환하게 빛나겠지요.


- “아둔패기들 같으니라고. ‘만에 하나 살아 있다면’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여기 있는 사람들 그때까지 살아 있지 않다는 말일세. 앞날 점쳐 달라 아등바등 하더니, 살 날이 스무 해도 안 된다고 일러 주자 굳어지는 그 표정들 재미있네그려.” (98쪽)
- “그렇지만 절터에 불을 지르고 스님을 쫓아내다니…….” “이보오, 순진한 양반! 그 자리에서 임금이 나온다고 하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244쪽)

 

 


  유승진 님 만화책 《포천》(애니북스,2010) 1막(첫째 권)을 읽습니다. 한겨레 옛 역사에서 어느 한 사람 이야기를 다루는구나 싶기도 한 만화책입니다. 역사만화라 할 수 있을 테고, 사주나 길흉화복이나 이런저런 점풀이를 다루는 만화라 할 수 있을 테지요. 어떻든 《포천》은 만화책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아기자기하게 얼크러지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입니다.


  이 만화책이 역사에서 어느 한 대목을 땄든 빌었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역사책에 기대어 참과 거짓을 밝혔든 꾸몄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살피면서 앞날을 꿈꾸는 이야기를 담았느냐 안 담았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곧, 사람들 스스로 ‘삶짓기’로 나아가는 사랑과 슬기를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 “스승님, 안 보입니다.” “뭐가 안 보이느냐?” “앞이 안 보입니다.” “앞만 안 보인다니 다행이구나. 얘야, 눈 좀 붙이거라.”  (178쪽)


  집식구와 함께 즐길 밥 한 그릇 차리는 한때가 좋습니다. 나는 그만 한 끼니 차리는 한때가 좋은 나머지, 서너 시간 들여 한 끼니를 차리고는 삼십 분 즈음 밥을 먹고 삼십 분 즈음 설거지를 하며 치우고 나서는 한숨을 돌린다고 기지개를 켜다가 그만 꾸벅꾸벅 졸다가 곯아떨어지곤 합니다. 아이들이 웃을 때에 좋고, 옆지기가 웃을 때에 좋습니다. 그러니까, 나부터 스스로 활짝 웃으며 식구들한테 말을 걸고 이야기꽃을 피울 때에 우리 집이 가장 사랑스러운 빛을 띠겠지요. 아이들이 노래할 때에 좋고, 옆지기가 노래할 때에 좋습니다. 곧, 나부터 스스로 가장 맑은 목소리로 가다듬고는 노래를 예쁘게 부를 때에 참말 우리 집에 가장 좋은 빛이 자라겠지요.


  밭에서 풀을 뽑아도 즐겁습니다. 우리가 심은 씨앗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아도 즐겁습니다. 온 마을 멧새와 들새가 우리 집 마당가 후박나무 열매를 따먹으러 날마다 찾아와도 즐겁습니다.


  참말, 즐겁게 누릴 삶을 생각합니다. 즐겁게 나눌 삶을 생각합니다. 이것을 벌거나 저것을 얻어서 누리려는 삶이 아니라, 오늘 즐겁게 누리면서 나누는 삶을 생각합니다. 연뿌리를 먹어도 즐겁고, 오이를 먹어도 즐겁습니다. 콩나물국도 아욱국도 감자국도 즐겁습니다. 그래요, 오늘 아침에는 미역국을 끓여 볼까.


  그저 좋습니다. 즐겁게 누릴 삶을 생각하면, 오늘 내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나 하고 하나하나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좋습니다. (4345.7.3.불.ㅎㄲㅅㄱ)

 


― 포천 1막 (유승진 글·그림,애니북스 펴냄,2010.10.8./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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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바이 준초이
준 초이 사진과 글 / 디자인하우스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돈’사진이든 ‘사람’사진이든
 [찾아 읽는 사진책 105] 준초이, 《메이드 바이 준초이》(디자인하우스,2004)

 


  1952년에 태어난 최명준(준초이) 님은 쉰을 조금 넘은 나이에 《메이드 바이 준초이》(디자인하우스,2004)라 하는 자서전을 내놓습니다. 200쪽 안팎이 되는 자그마한 《메이드 바이 준초이》 겉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사진의 비밀’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비싼 사진’이 무엇이고, 이 같은 사진을 찍은 비밀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는 한 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준초이 님이 광고사진을 찍어 얼마나 받았기에 ‘가장 비싼’ 사진이라 하는지, 또는 ‘비싼’ 사진이라 하는지 또한 알 길이 없습니다. 다른 광고사진가는 광고업자한테서 얼마를 받고, 준초이 님은 얼마를 받느냐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거든요. 곧, 《메이드 바이 준초이》는 사진책이지만 사진책 가운데에서도 ‘자서전’이나 ‘회고록’이요, 자서전이나 회고록이지만, 모든 이야기를 낱낱이 담지는 않습니다. 임응식 님이 낸 《내가 걸어온 한국 사단》(눈빛,1999)은 퍽 시시콜콜하다 싶은 대목까지 찬찬히 적습니다. 임응식 님은 당신이 살아낸 나날로도 ‘한국 사진 역사’가 되는데, 당신이 겪은 ‘사진삶’을 시시콜콜히 밝히는 이러한 이야기에서도 ‘사진으로 살아가’거나 ‘사진을 읽’거나 ‘사진을 생각하’는 여러 가지 길을 느끼도록 해 줍니다. 이와 달리 준초이 님이 내놓은 《메이드 바이 준초이》는 ‘준초이 성공 이야기’를 자서전이나 회고록 틀로 보여주기는 하지만, 정작 시시콜콜하거나 자질구레하다 싶은 여러 이야기를 낱낱이 밝히지 못하는 만큼, ‘한국 사진 역사’도 ‘사진으로 살아가는 길’도 ‘사진을 읽는 눈’도 ‘사진을 생각하는 마음’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준초이 님 자기 위안’이나 ‘준초이 님 자기 자랑’이라는 틀에서 맴돕니다.


  “일본 유학을 끝내자 때마침 한국의 중앙대학교에서 사진과 교수 제의가 들어왔다. 무척 고맙기는 했지만, 나는 내친 김에 미국에 가서 사진가로서 실무경험을 쌓고 싶었다. 아니, 사진의 일인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49쪽).” 하고 말합니다. 준초이 님이 ‘일본 사진 유학’이 어렵다 하던 때에 일본으로 사진을 배우러 갔다고 적지만, 어렵게 비자를 받아 일본에 가서 알바를 하다가 좋은 분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했다는 대목만 살짝 실립니다. 한국에서 김동리 님하고 가까이 지냈다고 적기도 하지만, ‘왜 어떻게 얼마나’ 가까이 지냈는가 하는 대목은 없습니다. 중앙대학교에서 어떤 일로 어떤 사진과 교수가 되기를 바라며 연락했는지, 준초이 님이 스스로 생각하는 ‘사진가로서 실무경험’은 무엇인지 하는 대목 또한 없습니다.


  다만, “(미국) 사진가들은 내가 가장 자랑하고 싶었던 ‘우수한 장학생’의 성적표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 포트폴리오만 훑어보던 그들은 그것마저도 흥미를 갖지 않는 듯했다(58∼59쪽).” 하는 대목은 밝힙니다. 그렇지만, 미국 사진가들이 ‘일본에서 대학교를 마친 준초이 님 사진 어느 모습이 마음에 안 끌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밝히지 않습니다. 성적표에 찍힌 ‘훌륭한 점수’도 밝혀 주지 않습니다.


  예나 이제나 아주 마땅하지만, 사진길을 걷고 싶은 사람이 보여줄 모습은 오직 하나입니다. ‘사진’입니다. 사진길을 걷고 싶으니 사진을 찍고 사진을 읽으며 사진을 나눕니다. 온몸이 사진이 됩니다. 온마음이 사진이 됩니다.


  사진길을 걷는 사람한테 갈래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다큐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사람사진이든 미술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광고사진이든 생활사진이든 대수롭지 않아요. 노동자와 어깨동무하며 찍는 사진이든 대기업과 어깨동무하며 찍는 사진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큰 장비를 걸머지고 찍는 사진이든 작은 사진기 하나로 찍는 사진이든 대수로울 수 없어요. 큰 장비와 값진 사진기로 찍는 사진이라면 빈틈이 거의 없는 틀을 마무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사진’은 ‘작품 만들기’가 아닙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찍기’입니다.


  “매혹적인 빛의 변화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산뜻하고 건조한 분위기가 태양이 기울면서 점차 다양한 무드로 변해 가는 과정을 해가 지도록 즐기곤 했다(108쪽).” 하는 말을 읽습니다. 준초이 님은 ‘빛을 좋아한다’고 밝히고, ‘빛을 잘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메이드 바이 준초이》에 나오는 빛 이야기는 모두 ‘조명’입니다. 108쪽에 딱 한 차례 ‘햇살이 이루는 빛’을 말해요. 준초이 님이 사람을 찍든 가구를 찍든 호텔을 찍든 언제나 ‘전등 불빛’과 ‘조명’을 쓸 뿐, ‘햇빛’으로 사진을 찍는 일은 없습니다.


  전기로 밝히는 불빛도 빛입니다. 해가 비추는 빛도 빛입니다. 어느 쪽이든 빛을 좋아하고 빛을 다루는 일이니 ‘빛’이라 말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준초이 님이 광고사진 일을 하면서 조명을 많이 자주 다뤄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조명을 어디에 어떻게 놓으면서 어떻게 터뜨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이 사진책에 밝히면 돼요. 한 마디로 간추려 ‘준초이는 빛을 잘 다룬다구!’ 하고 말할 노릇이 아니라, ‘빛을 잘 다룬다구!’ 하는 말은 안 해도 되고, 쪽수가 두 쪽이나 열 쪽으로 넘쳐도 좋으니, 광고사진을 찍으며 400킬로그램이나 되는 조명이나 장비를 날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덜면 돼요. 몇 사람이 조명기구를 어떻게 다루며, 이렇게 다루고 놓느라 품과 겨를을 어떻게 쓰다가 사진은 어떻게 찍는가 하는 이야기를 넣으면 돼요. 스튜디오에서 준초이 님이 ‘새로 만든 빛’으로 사진을 찍을 때에 어떠한 느낌과 생각과 사랑이 피어나는가 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쓰면 돼요.


  “좋은 호텔일수록 사진가에 대한 대우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반대로 수준이 낮은 곳일수록 사진가를 업자 취급 하며 명령하듯 일을 한다. 사진가로서의 프라이드는 전적으로 작품의 질에 비례한다. 자존심을 죽이고 하는 일의 결과가 좋을 리 없다(113∼114쪽).” 하는 말을 읽습니다. 바보스레 일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으면 바보스레 보이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름답게 일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으면 아름답게 보이는 모습이 나옵니다. 일류 호텔이기에 더 멋스레 보이지 않습니다. 일류이건 이류이건 스스로 아름답게 일하는 사람들은 아름답게 흘리는 땀방울을 보여주기에, 이 아름다움이 사진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일삯을 한 푼도 쳐 주지 못하는 데에서 자원봉사로 일하더라도, 이곳에서 땀흘리는 이들이 아름다운 웃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자원봉사 사진가인 나는 언제나 아름다운 웃음을 사랑스레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요. ‘사진을 찍는 나’는 늘 ‘아름다운 사랑’을 사진으로 담고 싶습니다. ‘사진을 읽는 나’는 노상 ‘아름다운 꿈’을 사진에서 읽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사진에 담습니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사진에서 느낍니다.


  그런데 준초이 님은 “예술사진과 광고사진, 굳이 경계를 나누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광고사진을 하더라도 예술을 하는 자세로 임했고, 그 결과 또한 대등한 것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광고사진이 많은 인재들의 공동 작업이 낳은 것이라는 점에서 더 가치 있는 예술품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삼성의 해외 광고 작업은 단순한 상업광고를 넘어서 내게 작가적 열정을 일깨워 준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124∼125쪽).” 하고 말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사진에는 갈래(경계)가 없습니다. 갈래가 없는데 애써 갈래를 짓는다면 스스로 갈래라는 이름으로 틀에 박히거나 울타리에 갇힙니다. “광고사진을 하더라도 예술을 하는” 매무새로 사진을 찍었다는 준초이 님이라 밝히지만, 이 말은 “광고 일로 돈을 벌더라도 예술을 했다”는 뜻입니다. 곧, 준초이 님은 ‘사진’을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술’을 한 사람이요, ‘예술을 하며 돈을 번’ 사람이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러면, 이쯤 해서 준초이 님 스스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사진의 비밀’을 밝힐 때입니다. 대기업 삼성 광고를 맡은 준초이 님이 ‘얼마’를 받아서 ‘훌륭한 예술품’을 빚었는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할 때입니다. 또는 “작가적 열정”이라고 밝힌 말처럼, 준초이 님이 나아가고 싶은 꿈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겠지요.


  준초이 님은 광고사진을 찍으면서도 사람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리하여, “내가 인물사진을 한다고 하니, 혹자는 상업사진가로도 충분히 명예를 얻었는데 너무 욕심이 과한 것 아니냐는 얘기들을 한다. 그러나 그걸 ‘과욕’이라고 부른다면 먼저 그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내가 인물사진을 하겠다는 것은 또 하나의 명예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젊은 시절, 경제적 이유 때문에 미뤄 놓은 못다 한 숙제를 마무리하기 위함이다(181쪽).” 하고 말합니다. 욕심이 없이 아쉬움을 털려고 사람사진을 찍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책 《메이드 바이 준초이》를 읽는 내내, 나로서는 준초이 님이 품은 ‘욕심’ 하나만 읽힙니다. 왜냐하면, 준초이 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진가로서 일등이 되기’를 바랐다고 밝히거든요. ‘일등 사진가’가 되고 싶어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일본에서 다시 미국으로 갔으며,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도 늘 ‘일등 되기’를 가슴속에 품으며 하늘한테 빌었다고 거듭 밝힙니다. 그래서 나는 준초이 님이 광고사진 말고 사람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는 한낱 ‘욕심’일 뿐이라고 느낍니다.


  준초이 님은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광고사진을 찍는대서 ‘사람을 사진으로 못 찍을 일’이 없습니다. 광고사진을 찍으면서 얼마든지 사람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담고 싶은 사람’을 어느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헌팅) 그곳에 착 세워 차려 하고 서도록 한 다음 찍어야 사람사진이 되지 않아요.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하는 심부름꾼을 찍어도 사람사진이에요. 아이들 사진을 찍어도 사람사진이에요. 서울 포이동에 있다는 건물 옥상에서 길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어도 사람사진이에요. 사진기 하나 들고 길거리로 나와 아무나 붙잡고 사진을 찍어도 사람사진이에요. 그냥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 돼요. 광고사진판이나 사진이웃한테 ‘나 이제 사람사진 찍겠어!’ 하고 외칠 까닭이 없어요. 그냥 찍으면 돼요. 사진은 입으로 하지 않고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서 하잖아요. 빙그레 웃으며 말없이 사진기 단추를 즐겁게 누르면 돼요. 사진기 단추를 누르기보다, 이렇게 자서전이자 회고록인 책에 ‘핑계’와 같은 말마디로 ‘욕심’을 새삼스레 드러낸대서 사람사진을 ‘일등 사진가’가 되어 찍을 수 있지 않아요.


  한 마디를 덧붙여 봅니다. 준초이 님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미뤄 놓은 못다 한 숙제”가 ‘사람사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준초이 님을 뺀 숱한 사진쟁이들은 ‘돈이 없’어도 오래도록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 한길을 걸었어요. 돈이 있대서 찍는 사람사진은 아니에요. 돈이 없대서 못 찍는 사람사진도 아니에요. 그저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내 사랑과 꿈에 알맞게 누리는 사람사진이에요.


  ‘돈’사진이라서 나쁘지 않아요. 돈을 벌면 버는 대로 좋아요. ‘사람’사진이라서 좋지 않아요. 사람을 찍으면 찍는 대로 좋아요. 그저 좋아해 주셔요. 광고사진도 사진이고 다큐사진도 사진이에요. 예술사진도 사진일 뿐이에요. 그러나, 지구별에서 적잖은 사람들은 광고사진이나 패션사진이나 다큐사진이나 예술사진을 ‘사진’으로 하기보다는 ‘광고·패션·다큐·예술’로 하곤 합니다. 손에는 사진기를 쥐었으나 ‘사진’이 아닌 ‘광고’나 ‘예술’만 하는 사람이 많아요. 준초이 님은 어떤 길인가요. 준초이 님은 사진길인가요, 광고길인가요, 예술길인가요.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빛을 보여주셔요. (4345.7.2.달.ㅎㄲㅅㄱ)

 


― 메이드 바이 준초이 (준초이 글·사진,디자인하우스 펴냄,2004.7.16./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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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와 칠성이 방방곡곡 구석구석 옛이야기 10
박영만 원작, 안미란 엮음, 김종도 그림, 권혁래 감수 / 사파리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껏 살고 싶은 아이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9] 김종도·박영만, 《연이와 칠성이》(사파리,2009)

 


  아이들은 스스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학교에 갈 뿐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나 과학자나 소설가나 이런저런 직업을 꿈꾸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이런 길이 좋다거나 저런 길이 낫다거나 그런 길이 쓸모있다고 으레 이야기하니, 아이들이 저희 삶길을 헤아리지 않으며 이런저런그런 직업전선에 뛰어들 뿐입니다.


  아이들은 그저 마음껏 살고 싶습니다. 나부터 생각한다면, 두 아이 아버지로 살아가는 어른이기 앞서, 나 또한 그저 마음껏 살아가고픈 아이였고, 아직 아이이며, 앞으로도 아이로 지내지 않으랴 싶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 가장 보드라우면서 따사로운 결을 건사하는 자리를 생각합니다. 스스로 슬프게 찌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바보스레 윽박지르듯 말하지 않기를 꿈꿉니다. 가장 환한 얼굴로 가장 맑은 말을 빛낼 수 있기를 빕니다.


  어느 하루도 나한테는 가장 좋은 하루입니다. 나한테도 아이들한테도 살붙이한테도 하루하루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다만, 이 선물을 참 좋게 누리기도 할 테지만, 참 얄궂게 못 누리기도 합니다. 스스로 가장 좋은 마음이 된다면 선물을 실컷 누리고, 스스로 안 좋은 마음이 된다면 선물을 조금도 못 누립니다.


  온 들판을 울리는 개구리 노랫소리도 내 마음이 따사로울 때에 따사롭게 누립니다. 처마 밑 제비집에서 제비들 지저귀는 노랫소리 또한 내 마음이 너그러울 때에 너그럽게 누려요. 스스로 어떤 틀이나 굴레에 갇히면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못 보며 아무것도 못 누립니다.

 

 


.. 자식이 없어서 클클히 지내는 부부가 멀지 않은 곳에 또 있었어. 두 사람도 산신령께 백일 동안 정성껏 기도를 올렸어. 그러자 부인의 배가 불러 오더니 꽃같이 예쁜 딸아이를 낳았어. 아기 이름은 연이라고 지었지 ..  (7쪽)


  김종도 님이 박영만 님 글에 그림을 엮어 빚은 그림책 《연이와 칠성이》(사파리,2009)를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석 달 남짓 책상맡에 두고는 자꾸 들여다보며 생각합니다. 슬프면서 아름다운 한겨레 옛이야기라 하는데, 막상 이 그림책 줄거리가 ‘왜 슬프’고 ‘왜 아름다운’지를 그림책 끝자락 풀이말에서 옳게 들려주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더욱이, 왜 연이네 어버이나 칠성이네 어버이는 ‘조선 무렵 양반 옷차림’을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겨레 옛이야기 가운데에는 조선 무렵 옛이야기도 있을 테지만, 참말 말 그대로 ‘한겨레’ 옛이야기예요. 게다가, ‘양반이나 사대부나 임금님 둘레’ 옛이야기가 아니에요. 고운 아이를 바라는 어버이가 으레 ‘양반 계급 같은 사람’이어야 하지 않아요.


  그러나, 《연이와 칠성이》 이야기를 이루는 밑흐름을 살핀다면, 두 집안 어버이는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바랐을 뿐, ‘아이가 태어난 뒤 아이 스스로 어떤 꿈과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헤아리지는 않았어요. 두 집안 어버이는 두 아이를 ‘더 좋은 교육을 받도록’ 금강산으로 보내기는 했으되, 정작 두 아이 스스로 맑은 꿈과 사랑을 꽃피우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 연이와 칠성이는 금강산에서 친형제처럼 지냈어. 한방에서 같이 지내며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자고 같이 공부했지 ..  (13쪽)


  아이들은 ‘더 돈있는 집안’ 짝꿍을 만나 시집장가를 가야 즐거울까요. 아이들은 ‘더 이름있는 대학교’를 마쳐서 ‘더 돈 많이 주는 회사’에 들어가야 기쁠까요.


  아이들은 어느 때에 환하게 웃을까요. 아이들은 어느 때에 맑게 이야기꽃 피울까요.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은 어느 때에 환하게 웃나요. 아이들이 시험을 잘 치러 100점을 맞아야 환하게 웃나요. 아이들이 싱그러이 뛰놀며 까르르 웃음보따리 터뜨릴 때에 환하게 웃나요.


  그림책 《연이와 칠성이》는 참말 슬픈 이야기입니다. 두 집안 어버이가 바보스러운 굴레에 스스로 갇혀 아이들을 사랑스레 아끼지 못하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니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림책 《연이와 칠성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두 집안 아이들이 스스로 저희한테 가장 빛나는 사랑길을 찾아 모든 굴레와 껍데기를 벗어던지면서 어깨동무를 하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 이튿날 아침, 편지를 본 칠성이는 크게 놀랐어. 연이가 없으니 외로워서 잘 수도 없고, 공부도 할 수 없었지. 칠성이는 연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서 연이를 찾아가기로 결심했어 ..  (20쪽)


  금강산에는 아이들만 배우러 갈 노릇이 아닙니다. 아이와 어버이가 함께 금강산에 갈 노릇입니다. 두 집안 어버이는 굳이 아이들을 금강산으로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이녁 집안에서 아이들을 곱고 맑게 사랑하는 길을 살펴 즐겁게 가르칠 노릇입니다.


  집에서 가르칠 수 있을 때에 금강산에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집에서 배울 수 있을 때에 금강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여느 살림집, 곧 보금자리는, 가장 좋은 삶터이자 가장 좋은 배움터입니다. 여느 어버이, 곧 여느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장 좋은 교사이자 가장 좋은 동무입니다.


  좋은 슬기는 어버이 가슴속에 있습니다. 좋은 슬기는 아이들 가슴속에도 있습니다. 어버이와 아이가 서로 예쁘게 얼크러지면서 저마다 가장 좋은 슬기를 가장 좋은 넋으로 북돋우면서 가장 좋은 꿈으로 빛내면 넉넉합니다.


.. 마침내 연이가 시집가는 날이 되었어. 연이는 칠성이 생각에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프기만 했지. 가마가 칠성이 무덤 옆을 지날 때였어. 연이는 사람들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가마에서 내려 칠성이 무덤을 쓸어안고 안타까이 울었어 ..  (25쪽)

 


  마음껏 살아갈 때에 아름다운 아이들입니다. 어른들도 어버이들도 이녁 마음을 가장 살찌우면서 북돋울 때에 가장 아름다운 넋이 됩니다. 누구나 아름답게 살아갈 노릇이지, 무언가를 거머쥐며 살아갈 노릇이 아닙니다. 이것이 되거나 저것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이런 숫자를 이루거나 저런 실적을 쌓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을 받거나 저런 이름값을 남겨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자나 전문가나 교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거름이 되려고 꽃을 피우는 들풀은 없습니다. 사람한테 잡아먹히려고 크는 소나 돼지는 없습니다. 저마다 마음껏 삶을 사랑하면서 피어나는 풀이고 꽃이며 나무입니다. 저마다 마음껏 삶을 누리면서 태어나는 귀뚜라미이며 개구리이고 왜가리입니다. 사람이 낳은 사람은 ‘학교를 다니’거나 ‘영어를 배우’거나 ‘돈을 벌라’는 뜻으로 자랄 넋이 아닙니다. 사람이 낳은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으’며 ‘서로 어깨동무하’는 맑은 꿈을 빛낼 어여쁜 넋입니다. (4345.7.1.해.ㅎㄲㅅㄱ)

 


― 연이와 칠성이 (김종도 그림,박영만 글,사파리 펴냄,2009.6.26./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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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의 소리 - 이와아키 히토시 단편집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애니북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으로 빛내는 소리를 살린다
 [만화책 즐겨읽기 145] 이와아키 히토시, 《뼈의 소리》

 


  나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못 느끼는 사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보다, 이냥저냥 휩쓸리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생각을 알뜰히 다스리지 못하면 남들이 쌓은 울타리에 갇힌 채 울타리에 갇힌 줄 못 느끼면서 휩쓸리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할 일을 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사랑을 심어 돌보지 않으면, 그만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일에 이끌리거나 휘말리곤 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할 일을 내 온 사랑으로 예쁘게 꾸릴 때에 비로소 내 몸과 마음을 튼튼히 지키면서 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책 한 권 찾아 읽을 때에도 늘 그래요. 나는 내가 꼭 읽고픈 책을 읽어야 합니다. 남들이 입에 침이 닳도록 부추기는 책을 굳이 읽어야 하지 않아요. 잘 팔리는 책이나 꾸준히 사랑받는다는 책을 읽어야 하지 않아요. 내 마음을 따사롭게 보듬으면서 내 생각을 맑게 보살피는구나 싶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글쓴이가 누구이건 펴낸곳이 어디이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낯선 이가 쓴 책이건 낯익은 이가 쓴 책이건 대단하지 않아요. 참말 내 삶을 북돋울 만한 책인가 아닌가를 내 눈길로 헤아릴 노릇입니다.

 

 

 


- ‘여기서 자살하는 사람은 한 해에 두세 명 정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도시에서 온 여행자가 많다. 도시, 회색 하늘, 소음, 혼잡, 혹은 생존경쟁에서의 도피. (11쪽)
- “도쿄에서 왔나요?” “어, 응.” “여기 참 멋있죠? 난 여기가 정말 좋아요.” “…….” “쓰레기 같은 거, 버리시면 안 돼요.” (13쪽)
- “있죠, 여기서 보이는 도시는, 왠지 바다 같아 보이지 않아요?” “바다?” “네, 지저분한 바다요.” (25쪽)


  들새와 멧새가 노래하는 소리는 ‘새소리’를 ‘노랫소리’로 여기는 사람한테만 들립니다. 새소리를 노랫소리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숲속을 걷더라도 새가 노래하는 소리뿐 아니라, 새가 지저귀거나 울부짖는 소리조차 느끼지 못해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일하거나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소리’를 얼마나 잘 듣거나 느낄까요. 내 곁 착한 이웃이 아프다 하거나 고단하다 할 적에, 이렇게 외치거나 울부짖는 소리를 얼마나 잘 듣거나 느낄까요.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렇지만 꼭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내가 살아야 할 곳은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지, 사람들이 있는 데가 아니에요. 내가 살아야 할 곳은 내 사랑을 따스히 북돋우면서 나부터 사랑스럽게 활짝 웃는 보금자리여야 해요.


  사랑이 없으면 시골 숲속이나 바닷가에서 살더라도 마음이 메마릅니다. 사랑이 있으면 커다란 도시 높다란 아파트에서 살더라도 마음이 넉넉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이 있을 때에 사람이요, 사랑이 없을 때에 사람이 아닙니다.

 

 

 


- “몸의 균형은 괜찮군. 하지만 아무리 봐도 생기가 없어. 특별히 아픈 덴 없는 것 같은데.” (42쪽)
- “그 사진, 마치 다른 사람 몸에 자네의 머리만 올려놓은 것 같더군. 대체 자신의 몸을 뭐라고 생각하나?” “그야 당연히 고깃덩어리죠.” “뭐?” “고기요! 난 인간이 아니에요. 고깃덩어리죠. 거기 있는 찰흙처럼요. 섹스? 너무 좋죠. 사실 피임도 필요없어요. 내 몸은, 낙태수술 했던 의사가 돌팔이여서.” (53쪽)


  아이들과 바닷가에서 신나게 놀던 등짝이 햇볕에 벌겋게 탔습니다. 등짝이 소리를 지릅니다. 등짝이 이 모양 되도록 마구 놀면 어쩌느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등짝이 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끙끙 앓습니다. 등짝이 울부짖는 소리가 잦아들어야 비로소 끙끙 앓는 일도 그치겠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빨래를 합니다. 다음날에도 비가 내릴는지 모르니 늦은저녁에 몸을 씻으며 빨래를 몽땅 합니다. 어차피 다 마르려면 오래 걸릴 테니 일찌감치 해서 집안 곳곳에 널자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옷가지는 아주 더디더디 마르면서 노래를 합니다. ‘나 이만큼 말랐어요’ ‘나 꽤 많이 말랐어요’ 하고 노래를 합니다. 옷걸이에 꿴 빨래를 뒤집습니다. 더 잘 마르라고 뒤집습니다. 하나하나 손으로 만지고 볼에 댑니다. 식구들 입는 옷가지마다 내 손길이 곱다시 뱁니다. 내가 가장 좋은 넋으로 빨래를 해야 식구들은 가장 좋은 따순 손길이 밴 옷을 입습니다. 내가 가장 좋은 꿈으로 밥을 해야 식구들은 가장 좋은 너른 손길이 담긴 밥을 먹습니다.


  글월 한 장 띄울 적에도 내 온 사랑을 담습니다. 짧은 글월이든 긴 글월이든 내 마음을 담는 글월입니다. 나는 보고서를 쓰지 않아요. 나는 서류를 만들거나 논문을 쓰지 않아요. 나는 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루를 누린 이야기를 글 한 자락에 살포시 얹어요.

 


- ‘돌이나 찰흙은 고기와는 다르다. 하물며 생명이라면 더욱더.’ (70쪽)
- ‘어라? 여긴 어디지? 아름답다.’ ‘하라다, 하라다.’ ‘어?’ ‘알아듣겠어? 나야.’ ‘마유미. 마유미니?’ ‘네 수신능력은 정말 대단하구나. 안녕, 잘 지내야 해.’ ‘자, 잠깐만!’ (99쪽)


  이와아키 히토시 님이 그린 만화책 《뼈의 소리》(애니북스,2006)를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뼈가 부르는 소리, 뼈가 지르는 소리, 뼈가 내는 소리, 뼈가 들려주는 소리, 뼈가 부서지는 소리, 뼈가 허물어지는 소리, 뼈가 녹는 소리, 뼈에 담긴 소리 …… 들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내 뼈는 나한테 어떤 소리를 들려주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옆지기 등판을 주무르거나 아이들 팔다리를 주무르며 생각합니다. 내 살붙이들 몸은 어떤 소리를 들려주는가. 이 작은 아이들은 하루하루 얼마나 자라면서 이 작은 몸을 이루는 뼈가 어떤 소리를 들려주는가.

 

 


- “구멍 뚫린 두개골 같은 거 그리면 재미있어?” “…….” “어, 아니, 그거 말고도 좀더 예쁜 꽃이나 사과 같은 것도 있잖아.” “형태가 변해 가는 건 싫어. 특히 생물 따윈.” (172쪽)
- “나카무라는 가족이 죽거나 하면, 당연히 울겠지?” “어, 응, 그야 그렇겠지. 넌 안 울어?” “응.” (179쪽)


  마을 들새와 멧자락 멧새가 우리 집 마당으로 뻔질나게 찾아듭니다. 들새와 멧새는 우리 집 마당 한켠 후박나무에 앉아서 바삐 배를 채웁니다. 새들은 후박열매를 맛나게 따먹습니다. 새들은 후박열매가 좋은 줄 아니까 따먹겠지요. 우리 집 뒤꼍 뽕나무에도 앉아, 높은 가지에 달린 오디를 바지런히 따먹기도 합니다. 나는 들새와 멧새를 말끄러미 바라봅니다. 새들이 맛나게 먹으니 사람도 맛나게 먹을 만하겠지요. 내가 후박알이랑 오디를 홀랑 땄으면 새들은 우리 집에서 먹이를 못 찾고는 다른 데를 누비겠지요.


  후박나무는 열매를 맺어 향긋한 내음으로 새들을 부릅니다. 나는 후박나무를 늘 즐겁게 올려다보면서 어떤 새들이 이 나무한테 찾아들까 하고 마음으로 부릅니다. 새들이 후박나무 가지에 앉아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날개가 나뭇잎 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열매를 똑똑 끊는 소리를 듣습니다. 배불리 먹은 새들이 다시 날갯짓 신나게 하면서 멀리멀리 날아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날마다 재미있습니다. 나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할 적에 내 하루는 날마다 재미있습니다.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해야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푸근하고 생각이 환할 적에 언제나 재미있구나 싶어요. 어떤 놀이나 일을 해야 보람찬 하루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생각으로 짓는 하루요, 하루하루 누리며 새삼스레 짓는 생각입니다. 생각이 밝히는 하루요, 하루하루 즐기며 새롭게 밝히는 생각입니다.


  이와아키 히토시 님은 당신 나름대로 지은 생각이 있어 만화를 그릴 수 있었고, 당신 깜냥껏 밝히던 생각이 있어 이렇게 《뼈의 소리》를 내놓을 수 있었겠지요.


  마음으로 듣는 소리를 만화로 담습니다. 마음으로 부르는 소리를 만화로 그립니다. 마음으로 나누는 소리를 만화로 옮깁니다. 마음으로 빛내는 소리를 만화로 살립니다. (4345.6.30.흙.ㅎㄲㅅㄱ)

 


― 뼈의 소리 (이와아키 히토시 글·그림,김완 옮김,애니북스 펴냄,2006.8.16./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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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서재이든 일기장이든, 글을 쓰는 분들이 '글이 무엇'이고 '말이 어떠한'가를 찬찬히 헤아리는 길에 살짝 도움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을 알맞게 '바로잡'거나 '고쳐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생각하며 말하고 글쓸' 때에 비로소 내 넋과 얼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011년 1월 1일에 쓴 글인데, 여러 곳을 크게 손질해서 비로소 이곳에 걸칩니다. '새로운 우리 말글 이야기책'에 실을 원고를 추리면서 나 스스로 새삼스럽다고 느낍니다.

 

..


 ‘합니다’와 ‘하고 있습니다’

 


  다시금 새해를 맞이합니다. 새롭게 맞이한 해인 만큼 나이는 한 살 더 먹습니다. 내 나이는 서른이 되었다가 서른다섯이 되고 마흔을 지나 쉰과 예순을 거칠 테지요. 일흔이나 여든 아흔이나 백까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앞으로 몇 살까지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모르지만, 오늘 내 나이는 대단한 숫자가 아니요, 그리 많은 숫자 또한 아닙니다. 언제나 내 나이답게 살아가면서 내 나이에 걸맞게 생각하고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올바르리라 생각합니다.


  새해 첫날, 내 글투는 어떠한가 하고 새삼스레 곱씹어 봅니다. 지난날 내 글투가 어떠했는가 가만히 헤아립니다. 1998년에 한글학회에서 주는 ‘한글공로상’을 참 어린 나이에 받기는 했으나, 이때에는 신나게 팔뚝질을 하듯이 운동을 했을 뿐, 참다이 말사랑이나 글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사회가 사회이다 보니 팔뚝질 아니고서는 사람들이 귀나 눈을 열지 않기도 했다지만, 차분하게 말사랑 글사랑을 펼치지 못했어요. 이무렵 쓴 글을 돌아보면 ‘것’을 얼마나 자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것도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 것인지” 같은 글을 곧잘 썼어요. 이제는 이렇게 글을 쓰지 않고 말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 또한 그저 지나간 일이 되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고 말을 합니다. 아니면 “이마저 한낱 지나간 일로 삼고 마는지”처럼 글을 쓰거나 말을 해요.


  1998년에 쓴 글을 되짚으니 “먼저 풀어야 한다. 더불어, ……” 같은 글투도 보입니다. 이 대목도 엉터리입니다. ‘더불어’를 글 맨앞에 외따로 쓸 수 없어요. “이와 더불어”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2007년부터 2009년 첫머리 사이에는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놓고 오래도록 머리앓이를 했습니다. 이러한 낱말은 한자말 아닌 우리 말로 삼아서 그대로 써야 하지 않겠느냐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낱말을 쓰고 다시 쓰다 보니 어쩐지 나 스스로 초라하지 않느냐 싶더군요. 고작 이런 낱말조차 예부터 곱게 쓰던 말투를 살피어 새로운 오늘날에 알맞게 담아내지 못한다면 말사랑 글사랑이란 덧없지 않느냐 싶어요. 예전에 쓴 내 글을 가만히 되읽습니다. ‘자신’이나 ‘자기’라는 낱말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깃드는가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자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나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나로서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당신은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그때에는 착한 일인 줄 알고 했어도
 …

 

  적잖은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뿐 아니라 다른 낱말을 옳게 다듬거나 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과 말은 1:1로 맞추어 고치거나 다듬을 수 없는데, 이 낱말이 이런 자리에 쓰이든 저런 자리에 쓰이든 1:1로만 생각해 버릇하거든요. ‘자신’ 한 가지를 다듬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맨 처음으로는 ‘나’로 다듬습니다. 글흐름을 살피다 보면 ‘나로서는’처럼 ‘-로서’를 사이에 넣을 때에 한결 부드럽기도 하고, ‘당신’이나 ‘이녁’이나 ‘그 사람’을 넣어야 알맞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때에는’이나 ‘그무렵에는’을 넣어 봅니다. 그야말로 때와 곳에 따라 다듬을 말투가 다릅니다.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 이름을 소담스레 여기고
→ 이름을 대수로이 여기고
→ 이름을 알뜰히 여기고
→ 이름을 아름다이 여기고
→ 이름을 고맙게 여기고
→ 이름을 보배로이 여기고
 …

 

  ‘소중(所重)’이라는 한자말을 놓고도 퍽 오래도록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만 한 한자말 또한 구태여 한자말로 갈라야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 말 운동이라더니 아주 막 나가는군’ 하고 여길까 싶었습니다.


  나는 퍽 여러 해 앞서부터 ‘소중’이라는 낱말은 되도록 안 쓰지만, 너덧 해쯤 앞서까지는 이 한자말을 그대로 쓰곤 했습니다. 다만, 이제는 이 낱말을 아예 안 써요. 굳이 이 낱말까지 쓰면서 내 마음을 나타내야 하지 않아요. 나는 내 마음을 나타낼 좋은 낱말을 알아요. 나는 내 마음을 한결 사랑스레 빛낼 낱말을 스스로 찾고 살펴요.


  처음에는 ‘소담스럽다’라는 낱말을 써 봅니다. 국어사전에 실린 ‘소담스럽다’는 두 가지 뜻풀이가 달립니다. 첫째는 “생김새가 탐스러운 데가 있다”이고 둘째는 “음식이 풍족하여 먹음직한 데가 있다”입니다. 왜 이 낱말 ‘소담스럽다’를 ‘소중하다’와 맞추었느냐 하면, 어느 날 ‘탐(貪)스럽다’라는 외마디 한자말 뜻풀이를 헤아리니,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보기에 소담스러운 데가 있다”로 나오더군요. 이 말풀이에 나오는 ‘소담스러운’이라는 낱말이 눈에 확 들어왔고, “소담스럽게 쌓인 눈”이라는 보기글을 곰곰이 생각하니까, “소담스럽다 : 마음이 몹시 끌리도록 좋다”라는 느낌으로 쓸 만한 낱말이로구나 싶었어요.


  “소중하다 = 매우 귀중하다”입니다. “귀중하다 = 귀하고 중요하다”입니다. “귀하다 = 아주 보배롭고 소중하다”입니다. “중요하다 = 귀중하고 요긴함”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소중하다’가 무슨 뜻이요 어떤 쓰임인지 제대로 모릅니다. 그냥저냥 쓰는 낱말입니다. ‘보배롭다’가 토박이말인 줄 모르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아니, 생각조차 않겠지요. 그래, ‘보배로이’는 ‘소중하게’하고 거의 똑같은 낱말이에요. 이 낱말을 쓰면 ‘소중하게’는 퍽 말끔히 털어낼 만합니다.


  다만, 모든 자리에 ‘보배로이’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때에는 ‘보배로이’를 쓰고, 어느 자리에는 ‘소담스레’를 씁니다. 국어사전은 예나 이제나 ‘소담스럽다’ 말풀이를 두 가지로 못박지만, 얼마든지 세 가지 네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가 늘어날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다섯 가지 여섯 가지 말풀이와 쓰임새를 북돋우면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소담스럽다’ 같은 낱말을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느껴요. 덧붙여, ‘알뜰히’나 ‘살뜰히’나 ‘알뜰살뜰히’를 쓰면서 ‘소중히’를 털 수 있고, ‘아름다이’나 ‘고이’를 쓰면서 말삶을 북돋울 수 있어요. 여기에 ‘대수로이’를 쓰면 거의 모든 자리에서 깔끔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펼쳐 보이고 있으니까요 (x)
 펼쳐 보이니까요 (o)

 

  지난 2010년 여름께부터는 ‘있다’라는 말투를 되짚습니다. “하고 있다” 꼴로 쓰는 ‘있다’를 톺아봅니다.


  “보이고 있으니까요”처럼 적는다 해서 이 말투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거의 모두라 할 만한 이 나라 사람들 누구나 이렇게 말을 하거나 글을 씁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 말투가 영 낯설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학교교육이라든지 책이나 방송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오던 사람들 ‘말을 담은 글’을 읽으면서 이런 말투를 하나도 찾아보지 못했어요.

 

 바깥말 자리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x)
 바깥말 자리에만 머뭅니다 (o)

 

  제가 쓴 예전 글을 다시금 읽으며 “하고 있다”나 “-고 있다” 꼴 말투를 살펴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우리 말법을 영어 말법에 끼워맞추면서 이런 말투가 자꾸 퍼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람들이 영어를 널리 배우거나 가르치면서 이런 말투를 스스럼없이 쓰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말글을 조금 배운 사람은 알 텐데, 우리 말에는 ‘지난날 때매김’이 없습니다. ‘현재진행형’ 또한 없습니다. 영어이든 다른 서양말이든 때매김이 똑부러지게 나뉘고, 현재진행형 말투가 참 잦아요. 서양책을 한국말로 옮기며 현재진행형 말투인 “하고 있다”와 “-고 있다”가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을 일본사람이 ‘中’이라는 한자를 써서 풀어내는 모양새를 한국사람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하고 있다”와 “-고 있다”가 자꾸 퍼지는구나 싶습니다. “무엇무엇 하는 中이다”를 “무엇무엇 하는 중이다”라 옮긴다 해서 번역이 되지 않아요. 이를 “무엇무엇 하고 있다”로 손질해도 번역이 될 수 없어요. “무엇무엇을 한다”로 가다듬을 때에 비로소 번역이라 할 만합니다.

 

 토박이말로 짓는 중이라면 (x)
 토박이말로 짓고 있다면 (x)
 토박이말로 짓는다면 (o)

 

  어찌 보면, 이제는 우리 말글에도 ‘지난날 때매김’을 넣거나 ‘현재진행형’을 달아도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예스러운 말투로 말해야 할 까닭이 없다 여길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하고 우리 말글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 넋과 얼을 보듬으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넉넉합니다. 괜시리 서양 말법처럼 우리 말법을 다루어야 하지 않아요.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글로 글을 쓰면 되고, 일본사람은 일본땅에서 가나로 글을 적으면 돼요. 서양사람은 로마자라 하는 알파벳을 쓰면 되겠지요.


  셈틀을 쓰며 인터넷으로 국어사전을 살필 때에는 국립국어원에 들어갑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창을 보면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답변은 드리지 않습니다.” 하고 적힙니다. 말글을 다루는 공공기관이자 정부부터 글을 이렇게 써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란 무엇이려나요.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말투이고, 이런 글은 어느 나라 글이라 할 만한가요.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지 여러분 생각을 들려주셔요. 따로 답변하지는 않습니다.”처럼 적어야 할 글이 아닌지요. 그나저나 답변도 안 해 주면서 표준국어대사전이 어떠한가 하고 알려 달라고 적은 모양새가 쓸쓸해 보입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으면 대꾸를 해야 할 텐데, 귀는 있되 입이 없으면 어떡하나요. (4344.1.1.흙./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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