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부터 일하러 갑니다! - 15년 만의 재취업 코믹 에세이
노하라 히로코 지음, 조찬희 옮김 / 꼼지락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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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732


“어? 밥을 어떻게 하는 거지?”
― 엄마, 오늘부터 일하러 갑니다
 노하라 히로코 글·그림/조찬희 옮김
 꼼지락, 2017.4.10. 11000원


  만화책 《엄마, 오늘부터 일하러 갑니다》(꼼지락, 2017)를 읽으며 첫 대목부터 눈썹을 움찔합니다. 어쩜 일본이든 한국이든 ‘아저씨가 하는 말’은 비슷하고, 이런 아저씨 말을 듣다가 하소연을 하는 아주머니 말도 비슷하구나 싶어요.


“애들 어리광 부리는 것도 지금뿐이라구. 엄마가 가장 필요할 때가 지금이잖아.” “하지만, 나도 밖에서 일하고 싶단 말이야.” (7쪽)

“엄마는 왜 일을 안 해? 다른 엄마는 일하던데.” “엄마가 일하러 가면 너 외롭잖아.” “글쎄, 안 그럴걸. 나 가난하니까 엄마도 일하면 어때?” “무슨 소리니! 엄마가 하루 종일 뒹굴거리는 줄 알아? 빨래하지 청소하지 밥도 해야지 장도 보러 가야지, 얼마나 바쁘다구! 게다가 엄마가 밖에 일하려면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11쪽)


  만화책 《엄마, 오늘부터 일하러 갑니다》에 나오는 ‘엄마’는 두 아이를 낳아서 돌보는 열다섯 해 동안 집살림하고 집일을 도맡았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고서도 바깥일을 하고 싶었으나, 아이 아버지인 아저씨가 “애들 어리광”을 어머니가 받아 주어야 하지 않느냐며 달랬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 아버지는 열다섯 해 동안 집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만 한 채, 집살림이나 집일은 하나도 모르면서 살았대요. 더욱이 두 아이도 열다섯 해에 걸쳐 자라는 동안 집살림이나 집일은 ‘그저 어머니가 맡아서 할 뿐’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내가 살림의 여왕이라고? 아이들을 계속 포기시킨 건 아니고?’ (18쪽)

“다녀왔어.” “어서 와.” “늦게 왔네.” “아, 배고파.” “엄마, 내 신발 좀 빨아 줘.” …… ‘오늘 저는 회사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음속 어딘가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① 알아서 적당히 먹고 있다. ② 남편이 밥을 하고 있다.’ (75쪽)

“밥 좀 해놓지 그랬어! 신발 같은 건 직접 빨아 신어!” “어? 밥을 어떻게 하는 거지?” “신발은 어떻게 빠는 거지?” “나, 부엌에 들어가도 돼?” (77쪽)


  가만히 돌아봅니다. 온누리에서 가시내가 집에서 집살림하고 집일을 도맡는 동안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어머니가 집일을 하든 아버지가 집일을 하든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들은 집에서 무엇을 배우나요? 아이들은 집에서 함께 밥을 짓거나, 함께 빨래를 하거나, 함께 비질하고 걸레질을 하거나, 함께 집안을 치우는가요? 아이들은 앞으로 새로운 살림을 짓는 길을 집에서 저마다 슬기롭게 배우는가요?

  우리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시험 공부만 시킬 뿐, 정작 아이들이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는 아주 조그마하면서 마땅히 익혀 둘 일조차 못 가르치는 살림일는지 모릅니다. ‘어른인 어머니가 집일에 얽매이는 얼거리’가 평등이나 평화하고 어긋나는 줄은 알더라도, 정작 이 반평등이나 불평등 얼거리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를 아이들이 못 배울는지 몰라요.


“15년 만이란 게 어떤 건 줄 알아? 나만 빼고 다 바뀌었어! 전에는 여기에서 나오던 프린트가 저쪽에서 나오지를 않나, 젊은 애들 옷이 오렌지색인 건지 안 빨아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어린 직원한테 혼나야 하고, 못하는 나를 받아들여야 하고, 잠들어 있던 뇌를 억지로 깨워야 해. 15년 동안 집에 있던 주부가 15년 만에 밖에 나가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앗! 다른 아내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당장이 힘들단 말이야!” (80∼81쪽)


  만화책 《엄마, 오늘부터 일하러 갑니다》는 집에서만 일하고 살다가 열다섯 해 만에 집 바깥으로 나온 아주머니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줍니다. 모두 새로 배워야 할 뿐 아니라, 몸이나 마음이 잘 따라 주지 않기에 꾸지람이나 지청구를 늘 바깥에서 들으며 녹초가 되는데, 집으로 돌아와 보면 식구들이 하나도 도와주지 않는, 이 엄청난 짐을 어깨에 짊어지면서 꽝 하고 터지는 모습까지 낱낱이 보여줍니다.

  이 만화를 함께 보는 이웃님이라면, 또는 마흔이나 쉰이나 예순이라는 나이에 ‘나(집일만 해 온 여자)도 바깥일을 해 보겠다’고 나서는 이웃님이라면, 이처럼 집 바깥으로 나오는 분을 아는 이웃님이라면, 우리는 가만히 헤아려 보아야지 싶어요. 이렇게 바깥일하고 집일을 함께 짊어지기 어렵다면 바깥일은 안 하면 그만일까요? 아니면 사회도 달라지고 집식구도 달라져야 할까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집살림하고 집일을 거뜬히 맡아서 할 수 있어야지 싶어요. 아이들도 나이랑 몸에 맞게 집살림하고 집일을 차근차근 물려받고 배울 수 있어야지 싶어요. 어느 날은 아이들끼리 밥을 지어서 차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날은 아버지 혼자 집일을 도맡아서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어머니 혼자 집일을 살뜰히 할 수 있을 테고요. 다만 온 집식구가 집살림하고 집일을 ‘우리 일’이나 ‘우리 살림’으로 여기는 마음이어야 하겠지요.


“죄, 죄송합니다. 바쁜 때에 하필.” “아이가 어리니 어쩔 수 없지. 우리도 모두 어린애 키워 봤잖아. 어서 가 봐. 애기가 엄마를 얼마나 찾겠어.” ‘인생 선배이기도 하고, 육아 선배이기도 하다.’ (139쪽)


  바람이 한 줄기 붑니다. 열다섯 해 만에 바깥바람을 쐬면서 ‘집에서 일하는 보람’을 곁님하고 아이들한테도 물려주는 아주머니가, 그동안 곁님만 느끼던 ‘바깥에서 일하는 보람’을 조용히 누립니다. 마흔 줄을 넘긴 아주머니는 청소하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해 보다가 이녁한테 가장 즐거우면서 홀가분하고 후련한 바깥일은 청소였다고 해요.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마흔 줄 넘긴 아주머니는 함께 청소 노동자로 있는 분들이 하나같이 예순이나 일흔 줄을 훌쩍 넘긴 분들이라, 이분들, 그러니까 할머니 청소 노동자한테서 삶과 살림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새롭게 지켜보고 배운다고 해요.

  우리는 집에서 살림하고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보면서 아이하고 얽힌 새로운 길을 배운다고 할 수 있어요. 집 바깥으로 나가서 바깥일을 할 적에는 마을이나 사회를 이루는 숱한 이웃을 마주하면서 이웃님이 오랜 나날에 걸쳐서 몸이랑 마음으로 익힌 슬기나 삶을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 오늘부터 일하러 갑니다” 하고 외치는 아주머니는 그저 돈을 벌려고 바깥일을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돈도 어느 만큼 벌려는 뜻이 있을 테지만, 이에 못지않게 새로운 이웃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 선배’를 만나면서 오늘 이 삶을 새롭게 즐기는 길을 찾고 싶은 뜻이 있지 싶어요. 한동안 아주머니네 식구들은 “어? 밥을 어떻게 하는 거지?” 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는데, 어느새 저마다 밥도 빨래도 청소도 이럭저럭 해내는 몸짓으로 거듭났다고 해요. 이 어여쁜 평화로움이 우리 사회 곳곳에 따사롭게 퍼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10.24.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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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자전거 타며 읽은 책 2017.10.22.


해 떨어지기 앞서 자전거를 달리기로 한다. 이제 ㄱ도의회 공문서 손질은 모두 예순다섯 꼭지 남는다. 오늘하고 이튿날까지 열다섯 꼭지를 마무르고 다음주에 쉰 꼭지를 마무르자고 생각한다. 이 일에 매달리느라 이 가을에 아이들하고 마실도 제대로 못 다니지만, 면소재지 놀이터라도 다녀오려고 한다. 겨울을 앞두고 해가 짧으니 네 시를 넘을 무렵에도 멧자락에 해가 달랑달랑. 바지런히 자전거를 달렸고, 한 시간쯤 아이들을 놀린다. 나는 아이들 놀이를 지켜보다가 《할머니와 친구가 될 순 없나요?》를 읽는다. 처음에는 책이름에 끌려서 장만했고, 큰아이가 먼저 읽었다. 큰아이가 다 읽고서 내가 읽는데 번역은 여러모로 많이 아쉽다. 어린이책 번역이란 말이지! 논문이 아니고 말이지! 줄거리랑 이야기는 아름답다. 키 작은 가시내하고 키 큰 할머니 사이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마음이 곱게 흐른다. 서로 아끼는 마음은 꼭 한식구여야 샘솟지 않는다. 피가 안 섞였다는 아주 다른 남남이라 하더라도 불현듯 마음으로 이어져서 두고두고 너른 사랑이 샘솟을 수 있다. 두 사람이 새로 지으면서 울타리를 걷어내어 이웃 아이들하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까지 기쁜 웃음이 자라도록 이끄는 이야기란 얼마나 이쁜지. 그런데 이 책은 어느새 판이 끊어졌네. 언젠가 다시 살아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알차고 아름다운 이야기인데. 다만 번역은 새로 하고 글손질도 해야 한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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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밥하면서 읽는 책 2017.10.19.


우리 함께 밥을 차려 보자. 작은 일손을 거들어 보렴. 마당에 내놓아 햇볕을 머금은 파란 물병은 너희가 들여놓으렴. 물병이 비었으면 새로 물을 받아 볕이 잘 드는 곳에 놓으렴. 부엌을 한 번 쓸고 밥상을 닦으련? 달걀을 둘 꺼내고, 배추하고 양파를 건네주겠니. 감자를 씻어 주라. 이모저모 바라고 맡기면서 함께 짓는다. 우리한테 찾아오는 한끼를 기쁘게 누려 보자. 밥상맡에 앉은 아이들이 수저를 놀린다. 한창 배고플 적에는 아무 말이 없이 빠르게 그릇을 비운다. 너희들은 아직 스스로 “배고파요. 밥 주셔요.” 하고 말할 줄 모르지. 늘 어버이가 때를 맞춰서 밥을 먹자고 불러야 하지. 큰아이한테 설거지를 맡기고, 밥찌꺼기 그릇은 작은아이가 비우도록 맡긴 뒤, 나는 자리에 누워서 허리를 편다. 아이들이 제법 크니 참으로 수월하네. 이렇게 한두 가지씩 거들어 주니. 만화책 《하얀 구름》을 천천히 넘긴다. 이와오카 히사에 님이 오래도록 조금씩 빚은 짤막한 만화를 모았다. 사람이 나고 죽는 숨결,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마음, 이 땅하고 저 먼 별이 얽히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포근하게 흐른다. 이런 살뜰한 만화책을 읽다 보면 예전에는 ‘왜 한국에는 이처럼 생각을 깊고 넓게 건드리는 만화를 그리는 분이 안 보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생각은 안 한다. 한국 교육 얼거리를 보라. 한국에서 만화를 그리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춤을 추든 노래를 부르든 …… 사회 눈치를 안 보고서 오롯이 꿈을 사랑으로 그리는 마음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터전이 있을까? 이 나라 아이들 가운데 몇 아이쯤 어릴 적부터 마음껏 뛰놀면서 꿈씨앗을 심는 하루를 누리려나? 아름다이 어린 날을 누린 이야기를 가슴에 품은 사람이어야 만화길을 걸을 적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씨앗을 고이 담을 수 있다고 느낀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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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빨래터에서 읽은 책 2017.10.20.


한가위를 고흥에서 조용히 지내고서 일산에 마실을 다녀오다 보니, 마을 빨래터에 물이끼가 잔뜩 끼어도 치우지 못했다. 마을에서 우리가 아니면 치울 손이 없으니까. 여러 날 바깥마실을 다녀오느라 고단한 몸을 쉬는 틈틈이 ㄱ도의회 공문서를 손질하는 일을 한다. 딱딱하고 어려우며 일본 말씨나 번역 말씨가 가득한 공문서를 손질하자니 눈알이 돌고 등허리가 결린다. 오히려 몸이 더 힘들달까. 즐거운 이야기가 아닌 딱딱한 이야기를 읽으니까. 머리를 쉬고 마음을 풀어 보려고 빨래터에 간다. 이제 바람이 쌀쌀하다며 아이들은 물에 안 들어간다. 물가에서 소꿉놀이만 한다. 혼자 씩씩하게 빨래터 물이끼를 치우고서 쉬려는데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한 말씀. “빨래터 치우셨소? 빨래터를 치우시는 분한테는 이 물에 사는 님이 복을 내려 주시지. 그만큼 복을 많이 받으시지.” 빨래터 담에 걸터앉아서 《내일 새로운 세상이 온다》를 읽는다. 앞으로 다가올 나날을 아이들이 아름답게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엮은 책이다. 한국에서는 우리 앞날을 바라보면서 어떤 일을 하는가? 썩은 정치였기에 대통령을 촛불로 끌어내렸는데, 새로 대통령이 된 이는 평화와 앞날을 어떻게 그리는가? 사드도 핵무기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가? 일본은 후쿠시마가 터진 뒤로 끔찍한 재난을 아직 겪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오래도록 겪어야 하는데, 한국은 얼마나 걱정이 없다면서 핵발전소를 새로 짓는 공사를 그대로 밀어붙일까? 나라님이 할 일은 ‘일자리 만들기’가 아니다. 일자리는 사람들 스스로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나라를 이끄는 이는 앞으로 이룰 아름다운 평화라는 그림을 그려서 펼칠 줄 알아야지 싶다. 정치하는 이들, 대통령뿐 아니라 작은 지자체 공무원도 《내일 새로운 세상이 온다》를 읽어 보면 좋겠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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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중심 - 미완의 시학
김정란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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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26


아직도 문학평론은 속없이 딱딱하기만 한데
― 비어 있는 중심
 김정란 글
 최측의농간, 2017.9.7. 17000원


내가 문학비평을 시작한 이유는 한국 문학비평가들이 시를 너무나 읽을 줄 모른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나는 단지 시를 잘 읽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6쪽)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고, 1990년대 첫무렵에 고등학교를 다니기까지, 시나 소설이라고 하는 문학은 대학교수나 전문 평론가만 다룰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대학교수나 전문 평론가 아닌 사람 가운데 시를 말하거나 소설을 따지는 목소리는 들을 일이 없었어요. 국민학교라는 곳은 이곳대로 교과서 틀로 동시하고 동화를 재거나 따집니다. 중·고등학교라는 곳은 이곳대로 교과서나 참고서 언저리에서 시하고 소설을 가르거나 자릅니다.

  더욱이 매우 어려운 낱말, 거의 다 한자말이나 영어나 프랑스말을 섞은 비평이나 평론만 있어요.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쓰는 쉬운 한국말로 시나 소설이라는 문학을 다룬 글은 지난날에 거의 찾아볼 길이 없었어요. 이는 오늘날에도 엇비슷하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을 수수한 삶말이나 살림말로 길어올리는 분은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다고 할 만하다고 느껴요.


언어란 얼마나 저절로 그 지시성 이상의 의미를 뛰어넘어 그것의 수천 년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18쪽)

여성성의 진정한 의미는 성적 에로티시즘이 아니다. (52쪽)

‘잘 먹고 잘 살기’의 신화는 절대적인 물질적 부족은 해결했지만, 그 대신 끝도 없는 상대적 결핍감과, 망가져 치유불가능한 환경을 인간에게 안겨 주었다. (58쪽)


  우리는 시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우리는 동시나 동화를, 소설이나 수필을, 숱한 문학을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시집 앞뒤에 붙은 추천글은 숱한 일본 한자말하고 영어를 뒤섞은 전문 비평이나 평론입니다. 비평이나 평론은 도무지 이 땅에 발을 붙이려 하지 않아요. 집에서 마을에서 가게에서 논밭에서 바다에서 골짜기에서 주고받는 말로는 문학도 평론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여기는 한국 사회 흐름이지 싶어요.

  어쩌면 이런 모습은 속 없는 모습일 만합니다.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시끌벅적하다고 할 만합니다. 속살을 가꾸지 않고 쭉정이만 한들거리는 모습일 수 있어요.


고려 속요의 민중적 명랑성은 조선시대 유교 이데올로기 밑에서 질식해 버린다. 그러나 여성이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이 사회에서도 재능 있는 여성들은 숨어서 조용히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가꾸어 왔다. (122쪽)

80년대에 우리는 지독히 불행했다. 그 불행한 시대에 우리는 다행히도 뛰어난 시인들을 얻었다. 그러면 80년대는 위대한 시대이다. 아니다, 이 말은 거짓이다. 80년대에조차 뛰어난 시를 쓴 시인들은 위대하다, 라고 고쳐 말해야 한다. (144쪽)


  김정란 님은 시를 시답게 읽고 싶어서 스스로 시를 비평하는 글을 써 보았다고 합니다. 숱한 교수하고 전문가는 도무지 시를 제대로 안 읽는구나 싶어서 ‘남 탓’을 멈추고서 스스로 시를 말해 보려고 했대요.

  시나 소설을 다룬 비평하고 평론이 어렵다거나 뜬구름을 잡는다거나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느낄 분은 꽤 많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아예 비평이나 평론하고는 담을 쌓는 분이 많을 수 있어요. 비평이나 평론은 마치 ‘그들끼리 놀며 텃힘을 부리는 앞마당’일는지 모르지요.

  《비어 있는 중심》(최측의농간, 2017)은 문학은 있되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은 좀처럼 없는 듯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부터는 속·알맹이·속살을 밝히고 싶은 작은 몸짓을 드러내는 비평책 또는 평론책입니다.


양선희는 거침없이 세계를 벗겨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세계를 벗기면서 자기도 벗는다. 세계는 신비롭지 않다. 시인도 신비롭지 않다. (249쪽)

신화는 인간이 자연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을 때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알고 있었던 지식의 구조이다. (451쪽)


  비평이나 평론을 읽자면 먼저 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문학을 읽지 않고는 누가 들려주는 비평이나 평론을 함께 느끼거나 헤아리기는 어렵거든요. 그런데 잘 쓴 비평이나 평론이라면, 이 비평이나 평론을 읽고서 ‘이 비평이나 평론을 받은 그 문학이 궁금한걸?’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아니, 비평이나 평론이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면, 아직 어느 문학을 만나거나 읽지 못한 이웃들한테 ‘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멋지거나 사랑스러운 문학을 함께 읽어 보면 어떨까요?’ 하고 손을 내미는 글이어야지 싶어요.

  사람들이 다 읽거나 널리 읽은 작품을 놓고서 쓰는 비평이나 평론을 넘어서, 아직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가까이하지 못한 문학을 비평가나 평론가 스스로 캐내어서 가장 쉬운 말과 아주 부드러운 말씨로 조곤조곤 속삭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비평도 글이에요. 평론도 글이지요. 시나 동화나 소설만 글이 아닙니다. 비평이나 평론도 글이면서 문학이에요. 낯선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는 좀 접어놓고서, 어렵거나 딱딱한 일제강점기 냄새를 풍기는 일본 말씨하고 번역 말씨는 부디 내려놓고서, 싱그러이 살아서 펄떡이는 수수한 삶말이나 살림말을 찾아서 쓰는 글이 비평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따사로운 손길로 보듬는 사랑말로 들려주는 글이 평론이 되어야지 싶어요.


일은 일어난다. 그대가 사물에게 영혼을 부여하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리를 조종하는 모든 끈들을 끊어버린다. 우리는 세계 앞에서 작은 초인들로서 일어선다. 배경은 여전히 좌절이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그것을 존재의 상승을 위한 도약대로 사용할 줄 아는 것이다. (467쪽)


  오랜만에 새옷을 입고 《비어 있는 중심》이 다시 태어납니다. 묵은 평론책이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라면 새로운 평론책이 그다지 눈에 안 뜨인다는 소리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직 한국 문학에서 평론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소리일 수 있어요.

  복판이라고 하지만 텅 비어 복판 구실을 못하는 문학이나 평론이 아닌, 복판에서는 복판대로 알맹이 구실을 하고, 바깥이나 언저리에서는 바깥이나 언저리대로 살가운 이야기꽃이 흐드러지는 문학이나 평론이 자랄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아이들 입이랑 몸에서 터져나오는 웃음노래 같은 어린이문학이 깨어나고, 어른들 손이랑 발에서 길어올리는 사랑노래 같은 어른문학이 피어나면 좋겠어요. 비평은 웃음노래를 먹으면서 자라고, 평론은 사랑노래를 마시면서 크겠지요. 2017.10.22.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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