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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중심 - 미완의 시학
김정란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9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326
아직도 문학평론은 속없이 딱딱하기만 한데
― 비어 있는 중심
김정란 글
최측의농간, 2017.9.7. 17000원
내가 문학비평을 시작한 이유는 한국 문학비평가들이 시를 너무나 읽을 줄 모른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나는 단지 시를 잘 읽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6쪽)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고, 1990년대 첫무렵에 고등학교를 다니기까지, 시나 소설이라고 하는 문학은 대학교수나 전문 평론가만 다룰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대학교수나 전문 평론가 아닌 사람 가운데 시를 말하거나 소설을 따지는 목소리는 들을 일이 없었어요. 국민학교라는 곳은 이곳대로 교과서 틀로 동시하고 동화를 재거나 따집니다. 중·고등학교라는 곳은 이곳대로 교과서나 참고서 언저리에서 시하고 소설을 가르거나 자릅니다.
더욱이 매우 어려운 낱말, 거의 다 한자말이나 영어나 프랑스말을 섞은 비평이나 평론만 있어요.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쓰는 쉬운 한국말로 시나 소설이라는 문학을 다룬 글은 지난날에 거의 찾아볼 길이 없었어요. 이는 오늘날에도 엇비슷하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을 수수한 삶말이나 살림말로 길어올리는 분은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다고 할 만하다고 느껴요.
언어란 얼마나 저절로 그 지시성 이상의 의미를 뛰어넘어 그것의 수천 년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18쪽)
여성성의 진정한 의미는 성적 에로티시즘이 아니다. (52쪽)
‘잘 먹고 잘 살기’의 신화는 절대적인 물질적 부족은 해결했지만, 그 대신 끝도 없는 상대적 결핍감과, 망가져 치유불가능한 환경을 인간에게 안겨 주었다. (58쪽)
우리는 시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우리는 동시나 동화를, 소설이나 수필을, 숱한 문학을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시집 앞뒤에 붙은 추천글은 숱한 일본 한자말하고 영어를 뒤섞은 전문 비평이나 평론입니다. 비평이나 평론은 도무지 이 땅에 발을 붙이려 하지 않아요. 집에서 마을에서 가게에서 논밭에서 바다에서 골짜기에서 주고받는 말로는 문학도 평론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여기는 한국 사회 흐름이지 싶어요.
어쩌면 이런 모습은 속 없는 모습일 만합니다.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시끌벅적하다고 할 만합니다. 속살을 가꾸지 않고 쭉정이만 한들거리는 모습일 수 있어요.
고려 속요의 민중적 명랑성은 조선시대 유교 이데올로기 밑에서 질식해 버린다. 그러나 여성이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이 사회에서도 재능 있는 여성들은 숨어서 조용히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가꾸어 왔다. (122쪽)
80년대에 우리는 지독히 불행했다. 그 불행한 시대에 우리는 다행히도 뛰어난 시인들을 얻었다. 그러면 80년대는 위대한 시대이다. 아니다, 이 말은 거짓이다. 80년대에조차 뛰어난 시를 쓴 시인들은 위대하다, 라고 고쳐 말해야 한다. (144쪽)
김정란 님은 시를 시답게 읽고 싶어서 스스로 시를 비평하는 글을 써 보았다고 합니다. 숱한 교수하고 전문가는 도무지 시를 제대로 안 읽는구나 싶어서 ‘남 탓’을 멈추고서 스스로 시를 말해 보려고 했대요.
시나 소설을 다룬 비평하고 평론이 어렵다거나 뜬구름을 잡는다거나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느낄 분은 꽤 많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아예 비평이나 평론하고는 담을 쌓는 분이 많을 수 있어요. 비평이나 평론은 마치 ‘그들끼리 놀며 텃힘을 부리는 앞마당’일는지 모르지요.
《비어 있는 중심》(최측의농간, 2017)은 문학은 있되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은 좀처럼 없는 듯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부터는 속·알맹이·속살을 밝히고 싶은 작은 몸짓을 드러내는 비평책 또는 평론책입니다.
양선희는 거침없이 세계를 벗겨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세계를 벗기면서 자기도 벗는다. 세계는 신비롭지 않다. 시인도 신비롭지 않다. (249쪽)
신화는 인간이 자연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을 때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알고 있었던 지식의 구조이다. (451쪽)
비평이나 평론을 읽자면 먼저 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문학을 읽지 않고는 누가 들려주는 비평이나 평론을 함께 느끼거나 헤아리기는 어렵거든요. 그런데 잘 쓴 비평이나 평론이라면, 이 비평이나 평론을 읽고서 ‘이 비평이나 평론을 받은 그 문학이 궁금한걸?’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아니, 비평이나 평론이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면, 아직 어느 문학을 만나거나 읽지 못한 이웃들한테 ‘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멋지거나 사랑스러운 문학을 함께 읽어 보면 어떨까요?’ 하고 손을 내미는 글이어야지 싶어요.
사람들이 다 읽거나 널리 읽은 작품을 놓고서 쓰는 비평이나 평론을 넘어서, 아직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가까이하지 못한 문학을 비평가나 평론가 스스로 캐내어서 가장 쉬운 말과 아주 부드러운 말씨로 조곤조곤 속삭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비평도 글이에요. 평론도 글이지요. 시나 동화나 소설만 글이 아닙니다. 비평이나 평론도 글이면서 문학이에요. 낯선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는 좀 접어놓고서, 어렵거나 딱딱한 일제강점기 냄새를 풍기는 일본 말씨하고 번역 말씨는 부디 내려놓고서, 싱그러이 살아서 펄떡이는 수수한 삶말이나 살림말을 찾아서 쓰는 글이 비평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따사로운 손길로 보듬는 사랑말로 들려주는 글이 평론이 되어야지 싶어요.
일은 일어난다. 그대가 사물에게 영혼을 부여하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리를 조종하는 모든 끈들을 끊어버린다. 우리는 세계 앞에서 작은 초인들로서 일어선다. 배경은 여전히 좌절이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그것을 존재의 상승을 위한 도약대로 사용할 줄 아는 것이다. (467쪽)
오랜만에 새옷을 입고 《비어 있는 중심》이 다시 태어납니다. 묵은 평론책이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라면 새로운 평론책이 그다지 눈에 안 뜨인다는 소리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직 한국 문학에서 평론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소리일 수 있어요.
복판이라고 하지만 텅 비어 복판 구실을 못하는 문학이나 평론이 아닌, 복판에서는 복판대로 알맹이 구실을 하고, 바깥이나 언저리에서는 바깥이나 언저리대로 살가운 이야기꽃이 흐드러지는 문학이나 평론이 자랄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아이들 입이랑 몸에서 터져나오는 웃음노래 같은 어린이문학이 깨어나고, 어른들 손이랑 발에서 길어올리는 사랑노래 같은 어른문학이 피어나면 좋겠어요. 비평은 웃음노래를 먹으면서 자라고, 평론은 사랑노래를 마시면서 크겠지요. 2017.10.22.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