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강아랫마을 포근한 쉼터 (2020.3.11.)

― 서울 내방역 〈메종 인디아〉


02.6257.1045

서울 서초구 방배로23길 31-43

http://www.maisonindia.co.kr



  2월에는 겨울이 저물면서 봄이 깨어나는 소리가 퍼집니다. 5월에는 봄이 스러지면서 여름이 피어나는 소리가 번져요. 8월에는 여름이 떠나면서 가을이 노래하는 소리가 흐르고, 11월에는 가을이 잠들면서 겨울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가득합니다.


  서울이란 고장에서 나고 자란다면 철마다 다르고, 달마다 새로우며 날마다 새삼스러운 소리를 가누기 어려울는지 몰라요. 그러나 서울처럼 큰고장에서 나고 자라더라도 스스로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맛보고 빗물을 혀로 받으며 손으로 푸나무를 쓰다듬는 하루를 연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철을 헤아릴 만하지 싶습니다.


  어릴 적에는 학교 가는 길에 우산을 안 챙기고 싶어서 하늘하고 바람을 읽으려 했어요. 스무 살 무렵에는 자전거를 달려 신문을 돌리면서 밤하고 새벽에 ‘바람에 묻은 비내음’이나 ‘바람에 감도는 뜨거운 볕살’을 읽으려 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어디에서든 모두 헤아릴 만하다고 느꼈고, 무엇보다 나무가 우거졌느냐 있느냐 없느냐로 크게 갈리는 바람맛을 알았어요.


  전남 고흥에서 시외버스를 달려 서울로 가자면, 지리산, 전북, 충남, 경기를 거쳐 서울에 이르도록 다 다른 하늘·들·숲·멧골·길을 느낍니다. 전남을 벗어나면 멧자락이 사라지고, 전북을 벗어나면 숲을 보기 어렵고, 충남에 이르며 전봇대에 공장이 늘더니, 경기에 접어들면 하늘을 꽉 막은 높은 집에 숨이 막혀요. ‘센트럴시티’라고 하는, 뭔 소리인지 모르겠을 이름인 곳에 내리면 사람물결이 대단하지요. 이 사람물결에 섞여 조용히 흐르다가 내방역에서 전철을 내려 몇 걸음 내디뎌 골목으로 접어들면, 안골에 깃든 작은 쉼터에서 춤추는 나무를 보면, 서울 강아랫마을 한복판에 이런 아늑한 데가 다 있구나 싶어서 숨을 새롭게 쉬곤 합니다.


  2019년에 이어 2020년에 동시집을 새로 냈습니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란 이름입니다. 새 동시집을 서울 은평에 있는 헌책집 지기님한테 손수 가져다주고 싶어서 서울마실을 했고, 하룻밤을 묵은 이튿날 고흥으로 돌아가기 앞서 〈메종 인디아〉에 들러 다리를 쉬기로 합니다. 3월 첫머리에도 따스하면서 부드러운 햇볕이 아름답습니다. 책집 미닫이를 활짝 열고서 바람이며 해가 그득그득 들어오도록 하니, 이 마을책집에 퍼지는 기운이 한결 새롭습니다. 새벽나절에 동시 ‘돌나물’하고 ‘질경이’를 썼어요. 


어떻게 그리 메마르고 단단한

아무 풀포기 안 자라는

참 거친 땅바닥에

뿌리를 다 내리느냐고?


어쩜 그렇게 밟히고 또 밟혀

게다가 자동차까지 부릉부릉

밟고 다니는 길에서

잎을 다 틔우느냐고?


메마를수록 어루만지고 싶어

단단할수록 녹이고 싶어

거칠수록 쓰다듬고 싶어

아플수록 웃고 싶어


이 땅을 사랑하려 해

이 길이 푸르길 바라

이 숨빛을 나누려 해

이 마음을 꽃피우면서 (질경이/숲노래 씀)


  책집지기님한테, 또 동시집을 펴내 준 출판사 대표님한테, 새로 쓴 동시를 하나씩 드립니다. 함께 낮밥을 먹고서 이야기를 하다가 책을 둘 고릅니다. 고흥으로 달릴 시외버스에서 읽으려 합니다. 하나는 《세상에, 엄마와 인도 여행이라니!》(윤선영, 북로그컴퍼니, 2017)이고, 다른 하나는 《엄마가 좋아》(정경희, FOR BOOK, 2012)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예전에는 서울 강아랫마을 서초에 헌책집이 거의 없었어요. 그럴 만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곳곳에 알맞춤한 크기로 마을책집이 기지개를 켜면서 알뜰히 우물가 노릇을 하고 샘터 구실을 하며 나무그늘 몫을 하는구나 싶어요. 아무리 커다란 집이 겹겹이 빼곡하고, 아무리 으리으리 자동차가 끝없이 씽씽 달리더라도, 이 서울을 비롯한 큰고장에서 누구나 푸르면서 포근하게 숨을 쉬도록 이바지하는 마을책집이 있다면, 서울도 살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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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호젓하게 깃들어 베풀다 (2018.3.31.)


― 도쿄 진보초 〈アカシャ書店〉



  도쿄 진보초 책집골목은 큰길을 둘러싸고 헌책집이 잇달아 있기도 하지만, 띄엄띄엄 마을 한켠에 동그마니 깃들기도 합니다. 큰길은 오가는 사람이 많아 언제나 북적인다면, 마을 한켠에 고요히 깃든 곳은 호젓해요. 더 많이 눈길을 받고 손길을 타는 책이 있다면, 눈길이며 손길을 적게 받더라도 맞춤한 발걸음을 기다리는 책이 있어요.


  큰길가에 있는 책집을 벗어나 봅니다. 책집이 잔뜩 얼크러진 마을에서 살림하는 사람은 어떤 보금자리를 누리려나 하고 생각하며 천천히 거닙니다. 마을 한켠 자전거집을 들여다보고, 찻집을 쳐다봅니다. 대학교 어귀를 지나가고, 골목꽃밭을 들여다보다가, 바람처럼 지나가는 자전거를 바라봅니다. 마을가게에 들어가 보니 갖가지 튀김이 있습니다.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저녁거리로 장만합니다. 나무그늘이 있는 조그마한 쉼터를 만납니다. 고무신을 벗습니다. 아침부터 쉬잖고 걸어 준 발한테 바람이랑 햇볕을 쏘여 줍니다.


  너덧 살쯤 된 아이가 어머니 손을 잡고 지나가다가 제 모습을 가만히 쳐다봅니다. 저도 똑같이 가만히 쳐다봅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쳐다보는 저 아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요. 발가락을 하나하나 주물러 주고서 일어납니다. 어느 골목으로 가 볼까 하고 생각하다가 골목꽃을 보고서 걸음을 멈추는데, 이 골목꽃 건너켠에 책집이 한 곳 보입니다.


  큰길가 책집에서는 자동차 소리를 끊임없이 들었다면, 마을 한켠 책집에서는 사람들 발걸음 소리마저 드문드문합니다. 봄꽃내음을 맡으며 책집 곁에 섭니다. 바깥쪽에 놓은 ‘100엔 책’을 살피다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응? 이곳에 한글책이 왜 이렇게 많지?’


  책집 이름을 다시 보고, 안쪽도 흘깃하다가 다시 100엔 책을 보노라니, 《李東安 ‘太平舞’의 연구》(김명수, 나래, 1983)를 비롯해서 《인형극 교실, 만들기에서 상연까지》(오자와 아끼라/김선익 옮김, 예니, 1988)에 《꼭두각시 놀음》(한국 민속극 연구소 엮음, 우리마당, 1986)까지 봅니다. 한국에서도 보기가 쉽잖은 책을 일본 도쿄에서 보네요. 어쩐 일인가 하고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펼치니, 안쪽에 ‘글쓴이 드림’ 글씨가 또렷합니다. 심우성 님이 일본으로 인형극 일로 나들이를 온 길에 ‘오카자키 마치오(岡崎柾男)’라는 분한테 드린 책이로군요. 심우성 님은 1934년에, 오카자치 마치오 님은 1932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두 나라에서 저마다 옛살림·옛노래·옛이야기에 깊이 마음을 썼지 싶고, 이러면서 가까운 사이였을 수 있겠구나 싶어요.


  100엔 책 틈에 이런 책이 다 있네 싶어 더 돌아봅니다. 《國民の日本史 第八編 安士桃山 時代》(西村眞次, 早稻田大學出版部, 1931) 같은 책이 함께 있고, 《ペスタロツチ》(福島政雄, 福村書店, 1947) 같은 책이 나란히 있군요. 페스탈로치를 놓고는 일본이 내로라할 만큼 찬찬히 살폈습니다. 페스탈로치를 깊이 알려면 일본책을 읽어야 해요. 《鳥の歲時記》(內田淸之助, 創元社, 1957) 같은 책이 나란히 있어, 이 책집은 어떤 곳인데 이런 책을 이렇게 다루나 싶어 새삼스럽습니다. 이 책 곁에는 《奈良の石佛》(西村貞, 全國書房, 1942)까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이 한 집에서 나왔을는지 몰라요. 《多賀城》(岡田茂弘, 中央公論美術出版, 1977)을 보다가 《日本の獨占 第二次世界戰爭中 上卷》(ルキヤノウア/新田禮二 옮김, 大月書店, 1954?)을 펼치며 재미있네 싶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책을 어렵잖이 만나듯 일본에서 한국책을 어렵잖이 만날 만해요. 두 나라는 먼 듯하면서 가깝고, 가까이 오가는 숱한 사람들 사이에서 갖가지 책이 넘실넘실 흘러요.


  이제 안쪽이 궁금합니다. 바깥에서 고른 책꾸러미를 가슴에 가득 안고서 들어갑니다. 책집지기님한테 “이 예쁜 책집에서 책을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한국에서 왔고, 아름다운 책집을 사진으로 찍는 일을 합니다.” 하고 여쭙니다. 서글서글하게 “아, 그렇다면 얼마든지 찍으세요. 백 장도 천 장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합니다.


  헌책집 〈アカシャ書店〉 안쪽으로 들어와서 골마루를 돌아보니, 이곳은 ‘바둑’책을 복판에 놓고서 ‘장기·체스·놀이’하고 얽힌 책만 다루는 곳입니다. 바둑하고 장기를 다루는 책만으로도 책집을 꾸리는군요. 책집지기는 텔레비전을 켜 놓는데, 텔레비전에는 바둑이나 장기 이야기만 흐릅니다. 얼핏설핏 바둑책하고 장기책을 들여다보니 책값에 붙는 0이 제법 많습니다. 줄줄이 붙는 0을 보고는 손을 댈 엄두를 못 내지만, 꽤 예전부터 바둑책이며 장기책을 펴낸 일본이네 싶어요.


  어느 갈래이든 오래오래 파헤치면서 누린다면, 처음에는 풋내기였다 하더라도 시나브로 솜씨님으로 거듭나겠지요. 깊은 눈길도, 너른 손길도, 고운 마음길도, 갓 태어날 적부터 품을 수 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차근차근 가다듬거나 갈고닦을 수 있습니다.


  책값을 셈하고서 나오다가 생각합니다. 이곳 책집지기는 바둑책이나 장기책을 그러모으면서 꾸릴 텐데, ‘바둑을 다룬 책이 아니어도 한꺼번에 사들인’ 다음에, 바둑 쪽이 아닌 책은 길가에 값싸게 내놓지 싶어요. 제가 일본 도쿄에서 산다면, 이 헌책집에 며칠마다 찾아와서 ‘오늘은 또 어떤 책을 100엔짜리로 내놓아 주었으려나’ 하고 들여다보겠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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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몽땅 살 수 없어도 (2018.4.1.)


― 도쿄 진보초 〈がらんどう〉



  한 사람이 모든 책을 쓰지 않고, 한 사람이 모든 책을 사지 않습니다. 다 다른 숱한 사람이 저마다 일군 삶을 저마다 다른 책으로 여미고, 다 다른 숱한 사람이 저마다 달리 바라보고 살아온 길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손길로 책을 삽니다. 이리저리 물결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책을 보다가 저 책을 살핍니다. 책집이 늘어선 거리에서 내놓은 모든 책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더라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겉그림이랑 이름은 훑고 싶습니다. 이러다 문득 ‘사자에 상’이 혀를 낼름하면서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하얗게 드러낸 어여쁜 만화책이 눈에 꽂힙니다. 한국에서 ‘사자에 상’ 만화책을 사려면 제법 비싸게 치러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エプロン おぼさん 1》(長谷川町子, 姉妹社, 1972)를 봅니다. ‘사자에 상’은 더러 보았으나 이 만화책은 아직 못 봤습니다. 1972년에 나온 만화책이어도 250엔이라고 합니다. 거저로 팔아 주는 셈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집습니다. 눈길을 끄는 동화책하고 그림책도 많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뒤에서 밀치면서 책을 구경하거나 사려는 사람도 워낙 많습니다. 만화책 하나 겨우 장만하고서, 또 손으로 쓰는 영수증을 받고서 척척척 밀려납니다.


  사람물결에 밀려 책집이랑 책수레 앞에서 밀려나야 하는 일은 오랜만입니다. 1988∼90년 무렵, 인천에서 살며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찾아가서 교과서하고 참고서를 장만하던 1월에 엄청난 사람물결을 치른 적 있습니다. 그때에는 학교 이름하고 학년하고 과목 이름을 헌책집지기한테 외치면 비닐자루에 담아서 휙 던져 주고, 저도 돈을 잘 뭉쳐서 휙 던져 주었습니다. 와글와글하는 물결이라 서로 손이 안 닿을 만큼 떨어진 채 외침질로 시켜서 샀거든요.


  이날은 딱히 크게 펴는 ‘진보초 책잔치’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벚꽃이랑 책’이 어우러지는 조그마한 책마당이라는데 사람물결이 놀랍습니다. 일본사람도 책을 적게 읽는 흐름으로 바뀐다지만, 줄어든 물결이 이만큼이라면 예전에는 얼마나 밀물결이었을까요. 손에 쥐고 책꽂이에 건사하기만 하는 책이 아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헤아리는 책이 된다면, 마을부터 나라까지 확 달라지겠지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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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남기는 그림책집 (2020.2.8.)


― 전남 순천 〈도그책방〉

전남 순천시 도서관길 15

061.754.1687

http://dogbookshop.blog.me



  지난걸음에는 작은아이하고 다녀온 〈도그책방〉에 오늘은 큰아이하고 다녀오기로 합니다. 나날이 쑥쑥 자라나는 두 아이들 옷가지를 장만할 생각으로 순천마실을 더러 하는 터라, 이렇게 저자마실을 하고서 다리를 쉬려고 마을책집에 들릅니다. 그런데 이날이 큰보름이라는군요. 설도 한가위도 태어난날도 안 챙기니 큰보름을 챙길 일이 없는 터라, 꽤 오랜만에 부럼을 깹니다.


  우리 집은 텔레비전을 안 키웁니다. 자가용도 농약도 비료도 농기계도 안 키웁니다. 이모저모 안 키우는 세간이 많다 보니 둘레에서 으레 “아니, 텔레비전을 안 본다구요? 아니, 텔레비전이 집에 없다고요? 어떻게 텔레비전을 안 보고 살아요?” 하고 묻습니다. 텔레비전 안 키운 지는 까마득해서 “아니, 아직도 텔레비전을 키우신다구요? 아니, 나무를 키우실 노릇이지, 뭣하러 텔레비전을 키우세요?” 하고 되묻습니다.


  마을길을 걸어서 찾아가는 〈도그책방〉에서 다리를 쉬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책살림을 사랑하는 분이 가꾸는 아름다운 책집에 텔레비전을 들여놓은 분은 아예 없다시피 하다고 말이지요. 설마 있을까요? 가끔은 텔레비전도 봐줘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분이 많습니다만, 정 뭘 보고 싶으면 셈틀을 켜서 누리바다에서 살피면 돼요. 끝없는 광고에 연속극에 연예인 말잔치에 사건·사고·정치 얘기랑 스포츠만 넘치는 텔레비전을 키우다가는 그만 우리 넋이 헝클어지지 싶어요.


  텔레비전 풀그림이 알찬 책을 알려주기도 한다지만, 우리 손에 쥘 책은 스스로 책집마실을 하면서 차근차근 헤아리면 넉넉하다고 느껴요. 전문가 눈길 아닌 책사랑이 손길을 타는 책 몇 자락을 틈틈이 마을책집에서 품으면 즐겁습니다.


  큰아이가 고른 그림책은 《편지 받는 딱새》(권오준 글·김소라 그림, 봄봄, 2019)입니다. 저는 《화분을 키워 주세요》(진 자이언 글·마거릿 블로이 그레이엄 그림/공경희 옮김, 웅진주니어, 2001)를 고릅니다. 하나를 더 고르려고 살피다가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김서령, 푸른역사, 2019)를 집습니다. 너무 멋부린 말씨가 거북하지만, ‘배추구이’라 하면 ‘배추지짐’이 떠올라요. 이제 가게를 접은 헌책집으로 서울 연신내 〈문화당서점〉이 있는데, 〈문화당서점〉 아저씨는 곧잘 배추지짐을 해서 새참으로 삼았고, 책손한테 한 젓가락씩 나누어 주시곤 했어요. 헌책집 아재가 들려준 “배추지짐을 모르시나? 우리 경상도에서는 자주 해먹는데. 아무 양념을 안 하고 그냥 배추를 지지기만 해도 얼마나 맛나는지 몰라. 책만 보지 마시고 한 점 드셔 보시오. 드셔 봐야 알지. 아, 그런데 배추지짐을 드시려면 막걸리가 있어야 하나? 내가 술을 안 먹어서 말이지, 막걸리하고 같이 드시고 싶으면, 내, 막걸리도 사다 드리지.” 같은 말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이 그림책 저 그림책 꼼꼼히 보던 큰아이는 어느새 빛연필을 꺼내어 척척 그림을 그립니다. 책집 아주머니가 건네는 떡을 먹고서, 또 여러모로 이 아름드리 책터를 누리고서, 큰아이 나름대로 한 가지를 책집 아주머니한테 드리려고 생각했구나 싶습니다. 파란 빛깔로 새랑 꽃이랑 바람이랑 깃털을 그리는데 더없이 눈부십니다. 큰아이가 오늘 이곳에서 그린 이 그림은 이 마을책집이 이곳을 찾아오는 책손하고 나눈 마음빛깔이겠지요. 그림책을 실컷 누리고서 그림을 남깁니다. 저는 새로 쓴 노래꽃 한 자락을 나란히 남깁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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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받이로 드리운 별내음 (2020.4.2.)


― 전남 목포 〈동네산책〉

전남 목포시 용해로86번길 1-2

061.276.4565.

https://www.instagram.com/dongnesanbooks/



  온누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길그림을 펼쳐서 보기를 즐겼습니다. 남북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그림도 펼쳐서 보기를 즐겼어요. 어린 날에는 길그림만 들여다보아도 하루가 어느새 지나갈 만큼 푹 빠졌어요. 어버이를 따라 몇 군데 가 본 데에는 동그라미를 그리고는, 아직 발을 못 디딘 여러 고장에 언제쯤 가 보려나 하고 꿈꾸었어요. 이웃나라에는 언제 찾아가 보려나 하고도 꿈꾸었고요.


  그런데 제가 나고 자란 인천에서만 해도 늘 노는 마을에서 늘 만나는 동무랑 이웃만 만날 뿐, 이웃한 구·동으로 갈 일이 드물다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웃나라로 가기 앞서, 이옷 여러 고장이나 고을로 가기 앞서, 먼저 인천이란 데부터 골골샅샅 누비면서 ‘가까운 이웃이며 동무’부터 만날 일 아닌가 하고 생각을 새로 해보았습니다.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날마다 너덧 시간쯤 두 다리나 자전거로 인천을 샅샅이 다녔어요. 아무리 나고 자란 고장이라 해도 날마다 몇 시간씩 몇 해쯤 다니지 않고서는 ‘안다’라든지 ‘본다’라든지 ‘느낀다’라든지 어느 말도 할 수 없다고 배웠어요.


  전남 고흥으로 삶터를 옮기고 보니 이 시골에서 저 시골로 가는 길은 자가용 아니면 없고, 이 시골에서 저 큰고장으로 가는 길도 드뭅니다. 고흥에서 목포 사이에는 시외버스가 하루에 한 걸음 있었지만 조용히 사라졌어요. 아직 목포에 가 본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든 봄날, 시외버스로 시골길을 돌아서 찾아가고 싶었어요. 마침 목포시립도서관 곁에 움튼 〈동네산책〉이란 마을책집이 있군요. “아버지는 목포마실을 해보려 하는데 같이 갈래? 다만, 가는 데에만 버스에서 네 시간 남짓 있어야 하지.” “에? 네 시간도 더? 서울보다 멀잖아? 음, 우린 집에서 놀게요. 잘 다녀 오세요.”


  새벽바람으로 길을 나서서 목포에 닿으니 낮 한 시가 넘어갑니다. 시외버스나루부터 걷습니다. 처음 찾는 고장이니 느긋이 걷기로 합니다. 목포 큰길은 전라도 다른 고장에 대면 매우 시끄럽습니다. 목포는 큰길을 걷는 사람을 거의 못 봅니다. 이 시끄러운 큰길을 누가 걷고 싶을까요. 길이 반듯할수록 마을사람은 마을하고 멀어질 뿐입니다.


  마을길로 접어드니 그 시끄럽던 자동차 소리가 수그러듭니다. 귀도 몸도 살 만합니다. 흐드러지는 개나리꽃을 보고서 멈춥니다. 거리나무로 자라는 후박나무를 쓰다듬습니다. 갈퀴나물하고 속닥속닥하다가 냉이꽃하고 눈을 맞추다가 ‘동네산책’이라 적힌 걸개천을 알아차립니다. 오르막 디딤돌을 딛고 가면 되는군요.


  언덕받이에 자리한 〈동네산책〉은 더없이 아늑한 터에 깃들었구나 싶습니다. 책을 누리러 이곳에 오는 손님은 바람이며 햇볕이며 하늘을 옴팡 누리겠어요. 그저 하늘바라기를 하면서 하늘이라고 하는 책을 읽을 만하겠습니다.


  살뜰히 갈무리한 문학책 사이에서 《아우내의 새》(문정희, 난다, 2019)하고 《빈 배처럼 텅 비어》(최승자, 문학과지성사, 2016)라는 시집을 고르고, 《고독한 직업》(니시카와 미와/이지수 옮김, 마음산책, 2019)이라는 수필책을 고릅니다. 책값을 셈할 즈음 〈동네산책〉을 돌보는 지기님이 동화를 쓰신다는 말씀을 듣고는, 책집지기님이 쓴 《붉은 보자기》(윤소희 글·홍선주 그림, 파랑새, 2019)를 더 고릅니다.


  마을길에서, 골목 한켠에서, 언덕받이에서, 하늘바라기 마당에서, 별빛이 쏟아질 밤에, 이 책집을 드나든 숱한 걸음걸이를 떠올리다 보면 글이 저절로 피어날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마을이 온갖 이야기를 들려줄 테지요. 골목에서 갖은 노래를 불러 주겠지요. 언덕받이로 드리우는 별내음하고 햇살이 숱한 살림빛을 베풀 테고요.


  그나저나 목포에 있는 다른 마을책집은 돌림앓이 탓에 쉬거나 일찍 닫는다고 해서 찾아가기 어렵습니다. 목포를 보고 나왔는데 광주로 건너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시외버스나루로 돌아와서 갈팡질팡하다가 순천 가는 시외버스를 탔고, 딱 고흥 돌아갈 시외버스하고 맞물리기에, 고흥-목포 사이를 하루치기로 다녀왔어요. 한밤에 택시로 집에 닿으니 두 다리가 매우 무겁습니다. 발을 씻고 폭 곯아떨어집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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