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이 책을 몽땅 살 수 없어도 (2018.4.1.)


― 도쿄 진보초 〈がらんどう〉



  한 사람이 모든 책을 쓰지 않고, 한 사람이 모든 책을 사지 않습니다. 다 다른 숱한 사람이 저마다 일군 삶을 저마다 다른 책으로 여미고, 다 다른 숱한 사람이 저마다 달리 바라보고 살아온 길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손길로 책을 삽니다. 이리저리 물결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책을 보다가 저 책을 살핍니다. 책집이 늘어선 거리에서 내놓은 모든 책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더라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 겉그림이랑 이름은 훑고 싶습니다. 이러다 문득 ‘사자에 상’이 혀를 낼름하면서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하얗게 드러낸 어여쁜 만화책이 눈에 꽂힙니다. 한국에서 ‘사자에 상’ 만화책을 사려면 제법 비싸게 치러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エプロン おぼさん 1》(長谷川町子, 姉妹社, 1972)를 봅니다. ‘사자에 상’은 더러 보았으나 이 만화책은 아직 못 봤습니다. 1972년에 나온 만화책이어도 250엔이라고 합니다. 거저로 팔아 주는 셈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집습니다. 눈길을 끄는 동화책하고 그림책도 많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뒤에서 밀치면서 책을 구경하거나 사려는 사람도 워낙 많습니다. 만화책 하나 겨우 장만하고서, 또 손으로 쓰는 영수증을 받고서 척척척 밀려납니다.


  사람물결에 밀려 책집이랑 책수레 앞에서 밀려나야 하는 일은 오랜만입니다. 1988∼90년 무렵, 인천에서 살며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찾아가서 교과서하고 참고서를 장만하던 1월에 엄청난 사람물결을 치른 적 있습니다. 그때에는 학교 이름하고 학년하고 과목 이름을 헌책집지기한테 외치면 비닐자루에 담아서 휙 던져 주고, 저도 돈을 잘 뭉쳐서 휙 던져 주었습니다. 와글와글하는 물결이라 서로 손이 안 닿을 만큼 떨어진 채 외침질로 시켜서 샀거든요.


  이날은 딱히 크게 펴는 ‘진보초 책잔치’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벚꽃이랑 책’이 어우러지는 조그마한 책마당이라는데 사람물결이 놀랍습니다. 일본사람도 책을 적게 읽는 흐름으로 바뀐다지만, 줄어든 물결이 이만큼이라면 예전에는 얼마나 밀물결이었을까요. 손에 쥐고 책꽂이에 건사하기만 하는 책이 아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헤아리는 책이 된다면, 마을부터 나라까지 확 달라지겠지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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