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비오는 글꽃 (2020.7.22.)

― 광주 〈검은책방흰책방〉



  고흥에서 길을 나설 적에는 비가 안 왔습니다. 읍내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멧길을 지날 즈음 비가 허벌나게 쏟아집니다. 벼락비가 퍼부어도 시외버스는 구불길을 잘 달립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아찔한 벼랑인데 버스일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싱 달려요.


  광주 소태역에서 버스를 내렸고 전철로 갈아탑니다. 오늘은 〈검은책방흰책방〉으로 찾아갑니다. ‘검은 + 흰’으로 이름을 붙인 이곳은 ‘소설 + 시’를 두 빛깔로 빗대었다지요. 빼곡하게 글씨를 채우면서 이야기를 이루는 소설이라면, 널널하게 틈을 두면서 이야기를 펴는 시라 할 만하지요.


  책집이 2층에 있는 줄 모르는 채 길에서 한참 돌았습니다. 이러다 문득 생각했어요. 마을책집은 커다란 알림판을 안 붙이기 마련입니다. ‘작게 내놓은 알림판’이나 ‘담벼락에 조그맣게 붙인 알림판’을 살피자고 생각하면서 다시 마을을 한 바퀴 돌고서 이내 찾아냅니다.


  비가 오기에 비를 맞으면서 걸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요즈음 비를 맞고 걸어다니는 사람을 거의 못 봤습니다. 단돈 3000원이면 슈룹 하나 쉽게 장만한다고 할 만큼 다들 비를 가리며 살아요. 또는 자동차를 타지요.


  “등짐이 다 책이라면서 비를 맞아도 돼요?” 하고 묻는 이웃님이 많아요. “비를 맞으며 한참 걸어다니려고 좋은 등짐을 꽤 값을 치르고 장만했어요. 그동안 어깨끈이 세 판 끊어져서 새로 달았답니다. 어깨끈은 책무게 탓에 끊어져도 비가 안 새고 훌륭한 녀석이랍니다.”


  책집지기님이 두 빛깔 까망하양으로 풀어낸 두 갈래 글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골마루를 누빕니다. 말썽을 잠재울 길이 없어 창비·문학동네에서 드디어 싹 거둬들이기로 한 소설책이 한켠에 있습니다. 까망하양이란 어둠밝음, 또는 밤낮일 텐데, 어둠하고 밤도 빛이 있어요. 어둠빛이랑 밤빛도 결이 달라요. 시커먼 꿍꿍이로 글재주를 부리는 무리가 있다면, 고요한 어둠에서 새롭게 빛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알같이 노래하고 팥알같이 꿈구는 글이 있고, 속알머리 없는 글이 있어요.


  어느 분은 ‘문학’이란 한자말을 ‘글꽃’으로 풀어냈습니다. 꽃다운 숨결인 글일 적에 비로소 이 푸른별에 이바지한다는 마음을 담았겠지요. 문학 아닌 글꽃이 된다면,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철학 같은 딱딱한 이름이 아닌 ‘-꽃’을 붙이는 길이라면 저마다 아름답게 피어나면서 상냥히 어깨동무를 하리라 봅니다. 꽃다운 숨결을 잊거나 잃기에 스스로 빛을 내버리거나 등지지 싶어요. ㅅㄴㄹ


《고양이 일상 도감》(다나카 도요미/햇살과나무꾼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0)

《시와 산책》(한정원, 시간의흐름, 2020)

《가장 가까이 있는 말로·흙에 도달하는 것들》(이은경·정나란, 2019)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길상호, 걷는사람, 2019)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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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쓸 곳하고 (2020.8.16.)

― 전남 순천 〈도그책방〉


  어릴 적에는 ‘집’이라는 곳을 썩 반기지 않았습니다. 손찌검이나 매질이나 주먹다짐이 어디에서나 쉽게 불거지거나 터지는 판이니, 되도록 조용조용 혼자 있는다든지 마음이 맞는 동무하고 집이랑 학교를 다 잊고서 놀고 싶었어요. 두 아이를 낳아 돌보는 길에 서면서 ‘집’을 비로소 다시 바라봅니다. 어버이가 돈을 잔뜩 벌어서 물려줄 아파트 같은 부동산이 아닌, 두고두고 가꾸면서 언제까지나 푸르게 빛날 터전이 바로 ‘집’이로구나 하고 깨달아요.


  차 한 모금을 아늑히 누리는 찻집처럼, 꽃 한 송이를 고이 나누는 꽃집처럼, 밥 한 그릇을 넉넉히 즐기는 밥집처럼, 책 한 자락을 푸르게 주고받는 책집이 되면 즐겁겠다고 생각합니다. 가만 보면 ‘-방(房)’은 중국을 섬기던 몇몇 글쟁이가 즐기던 이름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이름을 쓸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집’이 어울리지 싶어요. 살림집이며 사랑집 같은 숲집으로, 숲을 품으면서 책을 누리는 책숲집으로, 그리고 여러 손길이 닿거나 흐르거나 스치면서 새삼스레 이야기가 피어나는 ‘손길책집’으로 나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즐거이 찾아가고, 넉넉히 머물면서, 차분히 생각을 짓는 곳이 책집이기를 바라요. 이 마을에서는 이 마을을 노래하는 마을책집이면 좋겠어요. 큰책집도 작은책집도 좋은데, 무엇보다 ‘푸른책집’으로, ‘그림책집(그림책 + 꿈을 그리는 집)’으로 걸어가면 좋겠어요.


  〈도그책방〉에 가는 길에 ‘책집’을 놓고 노래꽃 열여섯 줄을 적어 봅니다. 책을 바라보는 눈을 다시 가다듬고, 집을 헤아리는 마음을 새로 추스르고, 마을을 돌아보는 길을 거듭 갈무리하고 싶어요. 경기 광명에서 〈책방 공책〉을 꾸리는 지기님이 쓴 《애쓰며 서 있습니다》를 집어듭니다. 애쓰며 살아가는 하루가 고스란히 깃들어 그 책집을 찾아가는 이웃님 마음으로 퍼지겠지요.


  힘쓰고 애쓰고 마음씁니다. 이 씀씀이를 떠올리면서 글쓰기를 합니다. 서로 기쁘게 만나고 싶기에 알뜰살뜰 손을 씁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쓸까요? 우리는 무엇을 쓰면서 환하게 웃음짓는 어른아이로 오늘을 맞이할까요? 해가 좋습니다. 후끈후끈 해가 사랑스럽습니다. 바람이 좋습니다. 구름을 부르는 바람이, 나무를 스치면서 시원하게 퍼지는 바람이 산뜻합니다. 한 자락 두 자락 장만해서 품는 책이 좋습니다. 이 책은 제가 먼저 읽을 테고, 아이들이 물려받을 테고, 먼먼 앞날까지 우리 책숲에서 또다시 새 손길을 만날 테지요. ㅅㄴㄹ


《애쓰며 서 있습니다》(전기숙, 밤편지, 2020)

《나의 작은 화판》(권윤덕, 돌베개, 2020)

《별이 내리는 밤에》(센주 히로시, 열매하나,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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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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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별에 푸른책집 (2017.5.24.)

― 대전 〈우분투북스〉


  우리가 스스로 눈을 밝히고, 고요하면서 정갈한, 이러면서 따스하고 넉넉한, 이러면서 슬기롭고 참다운 사랑이란 마음이 된다면, 비바람을 기꺼이 맞아들이면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푸른 숲이 되겠지요. 온누리에 흐르는 싱그러운 빛줄기를 기꺼이 맞아들일 줄 안다면, 우리가 손에 쥐는 책은 언제나 새롭게 반짝이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들려주겠지요.


  아직 큰고장에 살 적에는 언제나 책한테만 말을 걸었습니다. 큰고장에서는 마음을 터놓을 벗님이 오직 책뿐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찾아가는 곳은 책집이요, 이 책집이 불을 끄고 닫을 때까지 눌러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한 달 살림을 어림해서 날마다 쓸 수 있는 책값을 나누어, 날마다 이 돈으로 책을 다 장만하고는 찻삯이 없이 등이며 손에 묵직한 책짐을 이고 들고서 돌아왔습니다.


  서울에서 살며 밤 열 시나 열한 시가 되어 등이며 두 손에 책을 가득가득 짊어지고서 한겨울에도 땀을 쪼옥 빼며 걷는 사내가 있었어요. 전철삯마저 없으니 한두 시간쯤 영차영차 걸었습니다. 책집에서 나오면 어디나 시끌벅적하고 눈이 아팠어요. 책집에 머물면 언제나 조용하면서 눈이 트였어요.


  대전에 피어난 〈우분투북스〉는 큰고장하고 시골을 잇는 다리가 되려는 뜻을 이웃하고 나누려 한답니다. 책 한 자락으로 푸른 숨결을 나누고, 책뿐 아니라 ‘시골에서 지은 살림’을 큰고장 이웃한테 알려주는 길목이 되려 한다지요. 책집지기이자 마을지기가 되고픈 꿈을 펼치는구나 싶습니다. 책집이 책숲으로 나아가는 실타래를 한 올씩 엮는 걸음걸이로구나 싶어요.


  어느 때부터인가 ‘지구’라는 낱말을 썩 안 쓰고 싶습니다. ‘지구’가 한자말이라서 안 쓸 생각이 아니에요. 이 낱말로는 어린이한테 우리가 사는 이 별을 제대로 이야기하기 안 좋겠구나 싶더군요. ‘푸른별’이란 낱말을 씁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곳은 ‘푸른별’이라는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도 별에 산다고, 우리가 사는 별이 더 커다란 별누리에서 초롱초롱 맑게 흐르면 좋겠다는 뜻을 나누고 싶어요. 누구보다 어린이가 이 마음을 함께하면 좋겠어요. 어린이를 아끼고 돌보는 모든 어른도 이 넋이 된다면 더욱 좋겠고요.


  큼지막한 그림책 《꿀벌》을 넘깁니다. 옮김말은 어린이가 읽기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하나하나 풀어내어 읽어 주어야겠네요. 애써 알찬 책을 펴낼 적에는 말씨를 더욱 가다듬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끼리 쓰는 인문학스러운 말씨가 아닌, 이런이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푸르게 꿈을 그리고 해맑게 사랑을 노래하는 말씨로 추스르면 아름다우리라 여겨요. 푸른별에서 푸르게 물드는 책집, 그러고 보면 이러한 책집은 ‘푸른책집’이 되겠네요. 푸른마을에 푸른지기가 일하는 푸른책집에서 푸른책을 만나고 푸른살림을 헤아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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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의 특별한 요리책》(크리스티나 비외르크 글·레나 안데르손/오숙은 옮김, 미래사, 2003)

《꿀벌》(보이치에흐 그라이코브스키 글·피오트르 소하 그림/이지원 옮김, 풀빛, 2017)

《어디에서 왔을까? 과일의 비밀》(모리구치 미쓰루/이진원 옮김, 봄나무, 2016)

《둥지로부터 배우다》(스즈키 마모루/황선종 옮김, 더숲,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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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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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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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길에 맨발로 서울을 (2018.9.6.)

― 서울 〈프루스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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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교과서랑 참고서에 실린 시를 읽다가, 이 시만 읽다가는 ‘이 시를 쓴 분 마음·뜻·사랑’을 얼마나 알 만한가 알 길이 없다고 느꼈어요. ‘교과서나 참고서에 시가 실린 분’ 이름을 수첩에 옮겨적어 책집으로 갔어요. 그분이 쓴 그 시 말고 다른 시를 찬찬히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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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읽다가 문득 “교과서나 참고서에 왜 그 시가 실렸을까?” 싶더군요. 알쏭달쏭했어요. 제가 읽기로는 다른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시가 수두룩한데, 교과서나 참고서에 실린 시는 언제나 엇비슷합니다. 게다가 뭇칼질로 잘라서 ‘소재·주제’ 외우기만 시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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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학교 다른 국어 교사는 어떤지 모릅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서 국어교사는 ‘시집을 읽으라’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소설을 읽으라’는 말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짤막한 한두 쪽짜리 글자락을 파헤치거나 뜯어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같은 학교 동무도 이렇게 수업을 하고 끝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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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돌아본다면, 대학입시란 틀에서는 문학을 문학으로 못 읽습니다. 대학입시뿐 아니라 다른 시험이란 틀에서도 역사나 문화나 철학은 설 자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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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가을날, 금호도서관에서 이야기꽃을 펴기로 했습니다. 이즈막에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을 써냈어요. 2007년부터 꾸린 서재도서관 이야기를 갈무리했는데, 공공도서관이 아닌 혼자서 살림을 꾸리는 도서관을 애써 시골에서 돌보는 뜻을 공공도서관 이웃님하고 나누어 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꽃 자리에 가기 앞서 금호동 〈프루스트의 서재〉를 들릅니다. 가늘게 내리는 비는 온몸으로 반가이 맞으면서 오르내리막길을 오르다가 내리다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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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땀을 빼고 비에 폭 젖으면서 마을책집 곁에 섭니다. 한짐 가득 짊어진 몸으로 멀리서 찾아오기는 만만하지 않네요. 다락칸 같은 책집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또 책손을 물끄러미 구경하는 고양이를 마주보면서 여러 가지 책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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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깃든 책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아보거나 살필까요. 도서관에 깃든 책 가운데 쉰 해나 백 해가 넘도록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책이 있을 텐데, 이 책은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까요. 사람들이 자주 들추거나 많이 사들이는 책이 오래도록 건사할 책일는지, 삼백 해나 오백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알아보는 사람 하나 나올 수 있으리라 믿는 책을 두고두고 건사할 만한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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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가지 책을 고르고서 다시 빗길에 섭니다. 책집으로 오는 길뿐 아니라 도서관으로 가는 길도 새롭게 오르내리막입니다. 고무신으로 이 빗길을 걷자니 미끄럽습니다. 신을 벗습니다. 맨발로 서울 금호동 한복판을 걷습니다. 도서관까지 걷는데, 이 거님길을 지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자동차는 꾸준히 지나갑니다. 요새는 걷는 사람이 이다지도 없는가 봅니다. 아이들도 걸을 일이 없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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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도서관에서 이야기꽃을 마무리한 다음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더 잇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여러 어머님이 “요즘에 밤 열 시까지 초등학생을 학원에 안 보내는 집이 있어요? 밤 열 시로도 모자라서 더 보내고 싶은데.” 하고 말씀합니다. 우리 집 두 어린이는 학원은커녕 학교도 안 가는데, 어쩌면 서울은 별나라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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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시간》(박성민, 책읽는고양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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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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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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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집은 도서관 (2013.2.7.)

― 순천 〈형설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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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빚어 엮은 책이 책집 가득 꽂히거나 도서관에 빼곡히 들어차는 일이란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처럼 몇몇만 차지하며 읽던 책이 아닙니다. 누구나 글을 깨치고 쓸 수 있습니다. 이제 누구라도 책읽기를 쉽게 할 만합니다. 비록 글을 어렵거나 딱딱하게 쓰는 인문책이나 문학책이 많더라도, 우리 곁에 갖은 책이 바다처럼 물결치는 살림이란 온누리를 새로 가꾸는 밑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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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더미 사이를 누빕니다. 책더미를 옆으로 옮기며 밑이랑 뒤에 묻힌 책을 돌아봅니다. 책에 쌓인 먼지나 더께를 털며 하나씩 헤아립니다. 이 책은 예전에 어떤 나무였을까요? 저 책은 예전에 어디에서 자라던 나무였을까요? 우리 손에서는 책이라는 모습이지만, 어떤 비구름을 만났고 어떤 햇살을 보았으며 어떤 별빛이랑 수다를 떨던 나무였을까요? 책이 되어 준 나무는 푸른마음일 테지요. 책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가 있던 숲이란 푸른사랑이겠지요. 책이라는 옷을 입은 나무가 우거지던 숲에서 사는 숱한 숨결 곁에 우리가 있으니 푸른별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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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형설서점〉에서 졸업사진책을 수북히 만납니다. 반공 외침말이 적힌 들머리 사진, ‘새마을관’이라는 곳, ‘유신관’이라는 곳, 6·25 기념 웅변대회, 남녀를 가른 배움칸, 일제강점기에 지은 듯한 배움터 사진, 수학여행을 간다며 순천나루에서 기차를 타는 사진이 새삼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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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치 졸업사진책에는 돛을 단 나룻배를 탄 할배가 손을 흔들고, 짧은머리 치마저고리 가시내가 냇물에서 손을 마주 흔드는 사진이 있습니다. 모심기를 거드는 아이들도 나와요. 1980년 졸업사진책에는 시골 들길을 ‘행군’ 하다가 냇가에서 쉬며 ‘외발씨름’을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 졸업사진책이란 어마어마한 기록관 아닌가요? 이 졸업사진책을 품는 헌책집이란 놀라운 박물관이자 도서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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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일광서점’ 살피종이가 붙은 책을 보고, ‘서울 고속터미널역 지하’에 있었다는 〈한가람문고〉 책싸개가 남은 책을 보다가, ‘전남 순천 대중문화사’에서 팔려 어느 중학생이 읽던 《new princ readers 1》도 봅니다. 1936년에 찍은 책에 남은 순천 책집 자취라면, 그무렵에 있던 책집이란 뜻이었을까요. 모든 책은 발자국입니다. 모든 책은 삶자취입니다. 모든 책은 살림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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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여자고등학교 8회》 졸업사진책(1983)

《구례 농업고등학교 28회》 졸업사진책(1980)

《광양 서국민학교 61회》 졸업사진책(1974)

《순천 남국민학교 46회》 졸업사진책(1959)

《순천 남국민학교 62회》 졸업사진책(1975)

《순천 중앙국민학교 17회》 졸업사진책(1965)

《순천 삼산국민학교 3회》 졸업사진책(1987)

《순천 이수중학교 7회》 졸업사진책(1980)

《별량 동국민학교 1회》 졸업사진책(1975)

《순천 여자고등학교 45회》 졸업사진책(1985)

《코리언 스케치》(제임스 게일/장문평 옮김, 현암사, 1970)

《솔아! 푸르른 솔아》(예울림 엮음, 학민사, 1990)

《끝내 물러서지 않고》(박몽구, 전예원, 1988)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조수미, 제일미디어, 1994)

《聖·고은 엣세이》(고은, 인문서점, 1960)

《꼬마신관 타론》(피터 디킨슨/기애란 옮김, 중원문화, 1990)

《나무의 세계》(임경빈, 일지사, 1993)

《new princ readers 1》(三省堂, 1923 1벌/1936 8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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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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