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빗길에 맨발로 서울을 (2018.9.6.)

― 서울 〈프루스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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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교과서랑 참고서에 실린 시를 읽다가, 이 시만 읽다가는 ‘이 시를 쓴 분 마음·뜻·사랑’을 얼마나 알 만한가 알 길이 없다고 느꼈어요. ‘교과서나 참고서에 시가 실린 분’ 이름을 수첩에 옮겨적어 책집으로 갔어요. 그분이 쓴 그 시 말고 다른 시를 찬찬히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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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읽다가 문득 “교과서나 참고서에 왜 그 시가 실렸을까?” 싶더군요. 알쏭달쏭했어요. 제가 읽기로는 다른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시가 수두룩한데, 교과서나 참고서에 실린 시는 언제나 엇비슷합니다. 게다가 뭇칼질로 잘라서 ‘소재·주제’ 외우기만 시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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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학교 다른 국어 교사는 어떤지 모릅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서 국어교사는 ‘시집을 읽으라’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소설을 읽으라’는 말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짤막한 한두 쪽짜리 글자락을 파헤치거나 뜯어내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같은 학교 동무도 이렇게 수업을 하고 끝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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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돌아본다면, 대학입시란 틀에서는 문학을 문학으로 못 읽습니다. 대학입시뿐 아니라 다른 시험이란 틀에서도 역사나 문화나 철학은 설 자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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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가을날, 금호도서관에서 이야기꽃을 펴기로 했습니다. 이즈막에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을 써냈어요. 2007년부터 꾸린 서재도서관 이야기를 갈무리했는데, 공공도서관이 아닌 혼자서 살림을 꾸리는 도서관을 애써 시골에서 돌보는 뜻을 공공도서관 이웃님하고 나누어 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꽃 자리에 가기 앞서 금호동 〈프루스트의 서재〉를 들릅니다. 가늘게 내리는 비는 온몸으로 반가이 맞으면서 오르내리막길을 오르다가 내리다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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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땀을 빼고 비에 폭 젖으면서 마을책집 곁에 섭니다. 한짐 가득 짊어진 몸으로 멀리서 찾아오기는 만만하지 않네요. 다락칸 같은 책집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또 책손을 물끄러미 구경하는 고양이를 마주보면서 여러 가지 책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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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깃든 책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아보거나 살필까요. 도서관에 깃든 책 가운데 쉰 해나 백 해가 넘도록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책이 있을 텐데, 이 책은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갈까요. 사람들이 자주 들추거나 많이 사들이는 책이 오래도록 건사할 책일는지, 삼백 해나 오백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알아보는 사람 하나 나올 수 있으리라 믿는 책을 두고두고 건사할 만한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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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가지 책을 고르고서 다시 빗길에 섭니다. 책집으로 오는 길뿐 아니라 도서관으로 가는 길도 새롭게 오르내리막입니다. 고무신으로 이 빗길을 걷자니 미끄럽습니다. 신을 벗습니다. 맨발로 서울 금호동 한복판을 걷습니다. 도서관까지 걷는데, 이 거님길을 지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자동차는 꾸준히 지나갑니다. 요새는 걷는 사람이 이다지도 없는가 봅니다. 아이들도 걸을 일이 없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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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도서관에서 이야기꽃을 마무리한 다음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더 잇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여러 어머님이 “요즘에 밤 열 시까지 초등학생을 학원에 안 보내는 집이 있어요? 밤 열 시로도 모자라서 더 보내고 싶은데.” 하고 말씀합니다. 우리 집 두 어린이는 학원은커녕 학교도 안 가는데, 어쩌면 서울은 별나라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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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시간》(박성민, 책읽는고양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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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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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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