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비오는 글꽃 (2020.7.22.)

― 광주 〈검은책방흰책방〉



  고흥에서 길을 나설 적에는 비가 안 왔습니다. 읍내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멧길을 지날 즈음 비가 허벌나게 쏟아집니다. 벼락비가 퍼부어도 시외버스는 구불길을 잘 달립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아찔한 벼랑인데 버스일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싱싱 달려요.


  광주 소태역에서 버스를 내렸고 전철로 갈아탑니다. 오늘은 〈검은책방흰책방〉으로 찾아갑니다. ‘검은 + 흰’으로 이름을 붙인 이곳은 ‘소설 + 시’를 두 빛깔로 빗대었다지요. 빼곡하게 글씨를 채우면서 이야기를 이루는 소설이라면, 널널하게 틈을 두면서 이야기를 펴는 시라 할 만하지요.


  책집이 2층에 있는 줄 모르는 채 길에서 한참 돌았습니다. 이러다 문득 생각했어요. 마을책집은 커다란 알림판을 안 붙이기 마련입니다. ‘작게 내놓은 알림판’이나 ‘담벼락에 조그맣게 붙인 알림판’을 살피자고 생각하면서 다시 마을을 한 바퀴 돌고서 이내 찾아냅니다.


  비가 오기에 비를 맞으면서 걸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요즈음 비를 맞고 걸어다니는 사람을 거의 못 봤습니다. 단돈 3000원이면 슈룹 하나 쉽게 장만한다고 할 만큼 다들 비를 가리며 살아요. 또는 자동차를 타지요.


  “등짐이 다 책이라면서 비를 맞아도 돼요?” 하고 묻는 이웃님이 많아요. “비를 맞으며 한참 걸어다니려고 좋은 등짐을 꽤 값을 치르고 장만했어요. 그동안 어깨끈이 세 판 끊어져서 새로 달았답니다. 어깨끈은 책무게 탓에 끊어져도 비가 안 새고 훌륭한 녀석이랍니다.”


  책집지기님이 두 빛깔 까망하양으로 풀어낸 두 갈래 글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골마루를 누빕니다. 말썽을 잠재울 길이 없어 창비·문학동네에서 드디어 싹 거둬들이기로 한 소설책이 한켠에 있습니다. 까망하양이란 어둠밝음, 또는 밤낮일 텐데, 어둠하고 밤도 빛이 있어요. 어둠빛이랑 밤빛도 결이 달라요. 시커먼 꿍꿍이로 글재주를 부리는 무리가 있다면, 고요한 어둠에서 새롭게 빛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알같이 노래하고 팥알같이 꿈구는 글이 있고, 속알머리 없는 글이 있어요.


  어느 분은 ‘문학’이란 한자말을 ‘글꽃’으로 풀어냈습니다. 꽃다운 숨결인 글일 적에 비로소 이 푸른별에 이바지한다는 마음을 담았겠지요. 문학 아닌 글꽃이 된다면,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철학 같은 딱딱한 이름이 아닌 ‘-꽃’을 붙이는 길이라면 저마다 아름답게 피어나면서 상냥히 어깨동무를 하리라 봅니다. 꽃다운 숨결을 잊거나 잃기에 스스로 빛을 내버리거나 등지지 싶어요. ㅅㄴㄹ


《고양이 일상 도감》(다나카 도요미/햇살과나무꾼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0)

《시와 산책》(한정원, 시간의흐름, 2020)

《가장 가까이 있는 말로·흙에 도달하는 것들》(이은경·정나란, 2019)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길상호, 걷는사람, 2019)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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