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새책을 들고 (2021.4.24.)

― 구미 〈삼일문고〉



  새로 선보인 책 《쉬운 말은 평화》를 들고서 공주·대전에서 마을책집 한 곳씩 들렀고, 포항 마을책집을 넉 곳 찾았으며, 구미 마을책집 두 곳을 돌아보고서 〈삼일문고〉에 닿습니다. 사흘에 걸쳐 책집 여덟 곳을 만나니 슬슬 기운이 떨어집니다. 등짐도 꽤 무겁습니다. 반짝거리는 〈삼일문고〉에 들어왔으나 팔심도 다릿심도 호졸곤합니다. 나무로 짠 튼튼한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숨을 들입니다. 구미뿐 아니라 경북을 책빛으로 푸르게 밝히는 이곳은 우리나라가 새롭게 피어나도록 이끄는 징검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더 살피기보다는 마음을 고요히 다스리고 싶어 붓을 쥡니다. 사흘에 걸쳐 마주한 여러 고장 여러 책집이 들려주는 바람빛을 헤아리면서 노래꽃을 적고, 토막글을 씁니다. 제가 쓰는 낱말책은 “낱말만 모은 덩어리”가 아닌 “말씨(말씨앗) 하나에 삶을 짓는 생각을 담아서 마음에 심도록 이끄는 징검다리인 꾸러미”라고 여깁니다. 낱말책이 “삶을 짓는 생각으로 가도록 이끄는 징검다리”라면, 책집은 “책만 모은 덩어리”가 아닌 “살림을 짓는 생각을 스스로 배우도록 이끄는 징검다리”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책집에 깃들었으니 책을 살피고 골라서 살 노릇이나, 더구나 〈삼일문고〉는 갈래마다 알맞고 알뜰히 가꾼 책터이지만, 다리를 토닥이고 팔을 주무르면서 글쓰기를 합니다. 때로는 책을 더 들여다보지 않고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때로는 책시렁이 아닌 글꾸러미를 바라보려고 합니다. 책집에 함께 온 이웃님한테 이런 책 저런 책을 읽으시면 어떻겠느냐고 여쭙니다.


  오늘 아침에 포항-구미 버스길에 ‘호미’ 이야기를 노래꽃으로 여미었습니다. ‘호미’가 어떤 연장일까 문득 궁금해서 생각을 기울였어요.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살림인데, ‘호다·호리다’라든지 ‘홈’이라는 말씨가 얽히고, ‘호리호리·휘다’나 ‘후들후들·호들갑’에다가 ‘회초리’나 ‘홉’에 ‘혼·홀’로 잇더니 이래저래 ‘흐르다·흙’으로까지 가더군요. 호미란 연장을 지은 옛사람은 이름도 참 재미나게 엮었구나 싶어요. 이쩜 이렇게 호호 웃음을 지을 만한 얼거리를 다 폈을까요. 힘든 밭일이 아니라, 호젓하게 호드기를 불듯 호미로 흙을 콕콕 호면서 살림을 가꾸어 내는, 차근차근 지어서 눈부시게 이루는 삶길입니다.


  이 나라 곳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피어나는 책집은 바로 호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삽질이 아닌 호미질입니다. 마구 밀어대는 삽질이 아닌, 찬찬히 보고 곰곰이 생각하며 하나하나 짚어서 오순도순 이루려는 호미질로 가는 책집살림이에요.


ㅅㄴㄹ


《아사 이야기》(우라사와 나오키/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21.2.25.)

《쉬운 말이 평화》(숲노래·최종규, 철수와영희, 2021.4.23.)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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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04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삼일문고 가 본 곳입니다. 사진보니 반갑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

숲노래 2021-12-04 12:25   좋아요 1 | URL
지난 4월 이야기인데...
생각해 보니
꽤나 힘겨이 다닌 터라
이제서야 ㅜㅡ
글을 써냈구나 싶어요.

삼일문고는 참 아름다워요.
요즘 한창 2층 3층까지
책집을 넓힌다고 들었는데
얼른 다시 찾아가고 싶습니다.
 

숲노래 책빛 2021.11.28.

헌책집 언저리 : 책집 앞길



  마을책집을 처음 빛꽃으로 담을 적에 이 말 저 말 들려주는 어르신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찍으라고도 하고, 저렇게 찍으라고도 하셨어요. “네, 그렇군요.” 하면서 이 여러 어르신이 들려주는 말씀대로는 아예 안 찍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눈길로는 그 어르신이 손수 찍으면 되거든요. 도움말(훈수)이 싫지 않아요. 그저 여러 어르신은 제가 왜 마을책집을 빛꽃으로 담으려고 책값을 아껴 가면서 필름을 장만하고, 또 종이로 빛꽃을 뽑아서 책집지기님한테 꼬박꼬박 드리는가를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사진작가’가 될 마음이 없이, ‘사진으로 돈이나 이름을 벌’ 생각이 없이, ‘멋있는 사진을 선보일’ 뜻이 없이, 마을이 이렇게 아름답게 책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찰칵찰칵 눌렀습니다. 언제나 어느 책집을 찾아가든, 먼저 아주 먼 곳부터 찰칵 담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를 테지만 저는 깨알만큼 작은 책집 알림판을 알아보고서 ‘깨알만큼 작은 글씨’를 담습니다. 이러면서 몇 발짝씩 다가가며 새로 담고, 책집 앞에서 반듯하게 마주보며 찍고, 책집을 지나쳐 옆길로 들어서서 찍습니다. 책집 둘레에서 찰칵이를 들고 움직이면 “뭐 대단한 거라도 있나?” 하고 두리번거리는 분이 많습니다. 네, 저한테는 대단하지요. 바로 여기에 책집이 있거든요. 어느 모로 본다면 “오늘은 그냥 지나치시지만, 이다음에는 이 책집을 알아보고 나들이를 해보시라는 마음”으로 책집 곁에서 앞길 모습을 느릿느릿 찍었다고도 하겠습니다.


ㅅㄴㄹ


사진 : 서울 삼우서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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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겨울이란 (2021.2.28.)

― 부산 〈주책공사〉



  달종이가 2월에서 3월로 가기에 겨울이 저물지 않습니다. 달종이가 11월에서 12월로 가더라도 겨울로 접어들지 않습니다. 철은 바람을 따라서 흐르고, 철빛은 들꽃하고 나뭇잎 사이로 퍼집니다. 사람들이 보금자리에 마당이 있다면, 손수 돌보는 나무하고 풀꽃을 마주하면서 철을 읽어요. 사람들이 마당이 없이 켜켜이 쌓은 똑같은 잿빛집에서 지낸다면, 마루에 꽃그릇을 잔뜩 놓더라도 철을 읽지 못합니다.


  철은 바람빛으로 스밉니다. 철바람은 풀잎에 깃듭니다. 풀빛은 철마다 다르게 물듭니다. 빛살은 언제나 새롭게 우리한테 찾아듭니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저마다 다르게 살림집을 짓고서 아이를 낳아 돌보던 무렵에는 달종이도 때바늘(시계)도 없이 하루를 읽고 철을 알았어요. 사람들이 시골을 버리고 서울·큰고장에서 돈을 벌기로 하면서 달종이를 보고 ‘모든 다른 날’을 ‘모두 똑같은 셈(숫자)’으로 짜맞추어서 움직이는 틀에 스스로 사로잡혔습니다.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스스로 날·하루·때·철을 읽던 지난날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뛰놀면서 날씨를 알았고, 철을 읽었으며, 때를 가누고, 하루를 누렸어요.


  문득 부산으로 건너와서 하룻밤을 보냈고, 고흥으로 돌아가기 앞서 〈주책공사〉를 들릅니다. 날마다 책으로 새롭게 살림을 지피는 이곳은 ‘부산으로 치면 옛골목’이라지만 ‘시골로 치면 복닥골목’입니다. 거리마다 줄줄이 가게가 잇닿고, 길에는 부릉부릉 끊이지 않으며, 오가는 걸음이 부산스럽습니다.


  책집 앞에서 겨울햇살을 느끼고서 조용히 들어섭니다. 책집 미닫이를 열고 들어서면 새누리로 한 발짝 옮긴다고 느낍니다. 책이 있기에 새누리로 가기도 하지만, 책을 쓰다듬는 손길이 있어서 새누리로 갑니다. 책을 잇는 손빛을 헤아리면서 새누리로 성큼 나아갑니다.


  오늘 〈주책공사〉로 찾아가자고 생각하면서 새벽에 ‘바람’이란 이름을 붙여 노래꽃을 한 자락 지었습니다. “모든 틈에 흐르는 / 모든 들에 퍼지는 / 바람 한 줄기는 / 숨을 살리네”로 첫머리를 엽니다. 들에는 들바람이 있고, 숲에는 숲바람이 있고, 책집에는 책집바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한테 흐르는 피 한 방울은 하늘바람을 먹고서 싱그럽습니다. 모든 책에 서리는 이야기 한 자락은 눈빛을 먹고서 새롭습니다. 모든 길에 마주치는 이웃살림이며 이웃마을은 노래를 먹고서 즐겁습니다.


  겨울에 겹겹으로 꿈을 그립니다. 봄을 떠올리며 거듭거듭 꿈을 품습니다. 얼어붙는 겨울이기에 눈을 꾹꾹 뭉쳐 눈놀이를 하고 눈사람을 굴려요. 겨울이기에 새하얗게 눈망울을 밝히며 눈빛을 듬뿍 머금습니다. 


ㅅㄴㄹ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박홍규·박지원, 싸이드웨이, 2019.12.5.)

《행운분식 연중무휴 24시》(이은주, 인디펍, 2020.4.2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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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2021.4.23.)

― 포항 〈민들레글방〉



  어른들은 갈 곳이 많습니다. 어른들은 돈을 벌어서 쓰니까 이곳도 가고 저곳도 갑니다. 아이는 어른한테서 돈을 받아야 어디인가 갈 만하지만, 아이 스스로 다닐 만한 데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오락실’이었다면 요새는 ‘피시방’일 텐데, 이곳은 아이한테 얼마나 즐겁거나 밝은 터전일까요? 아이한테 맞추는 곳은 없이 오직 어른한테만 맞추지 않나요?


  지난날에는 마을 곳곳에 빈터가 있고 골목이 있어 아이들이 숨을 돌리거나 놀 틈을 찾았습니다. 지난날에는 서울·큰고장에도 풀숲이며 나무에 냇가가 있어 들놀이를 스스로 누릴 만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디이든 부릉이가 뒤덮고 빈터란 아예 없으며 나무도 냇가도 아이한테 트인 자리하고 멉니다.


  포항 〈달팽이책방〉 곁에서 〈민들레글방〉은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느긋이 머물면서 책으로 쉴 만한 터전이지 싶습니다. 그림책도 꽃글책(동화책)도 넉넉하지만, 책집 앞에 빈터가 있고, 책집 곁 빈집이 돌보던 텃밭이 있어 풀내음·꽃내음을 살짝 누릴 만합니다. 여기에 나무 몇 그루 우람히 선다면 얼마나 즐거울까요.


  책만 읽어서는 슬기롭게 자라지 않습니다. 햇볕에 타서 까무잡잡한 살갗이 되고, 마음껏 뛰놀며 구슬땀을 흘리다가 문득 쉴 참에 책을 펼 수 있다면 슬기롭게 자랍니다. 나라 곳곳에 책숲(도서관)이 꽤 들어서는데, 마당을 널찍하게 두면서 아이도 어른도 맨발로 실컷 뛰놀고 나무를 타며 풀밭에 드러누워 낮잠을 누릴 만하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데는 아직 하나도 없다고 느낍니다.


  책은 책대로 살뜰히 살피고 건사하고 솎아서 아이한테 건넬 어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배움수렁이 있는 탓에 어린이한테 아름책만 베풀려는 펴냄터만 있지 않아요. 또한 나라(정부)가 꾀하는 틀대로 길들이려는 책으로 장사하는 펴냄터도 있어요. 이런 갖은 책을 어른·어버이가 눈을 밝게 뜨고서 가려내어야 아이들이 새록새록 배울 만합니다.


  마을 한켠에 아이들이 뛰놀다가 쉬면서 책을 쥘 만한 터전을 일구는 어른이 있다면, 이 마을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마을은 목돈으로 가꾸지 않아요. 마을은 아이를 사랑하는 숨결로 가꿉니다. 마을은 삽차가 부릉부릉하면서 뭘 뚝딱뚝딱 세워야 살아나지 않습니다. 마을은 슬기로이 살림짓는 어른·어버이가 오롯이 사랑이란 마음으로 아이를 품고 돌보면서 함께 배울 적에 비로소 살아납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히기 앞서 한나절 뛰놀 틈을 내요. 아이한테 글을 가르치기 앞서 풀밭하고 숲하고 바다하고 들하고 냇가를 실컷 누빌 짬을 내요.


ㅅㄴㄹ


《15살 자연주의자의 일기》(다라 매커널티/김인경 옮김, 뜨인돌, 2021.3.25.)

《살아 있는 모든 것들》(신시아 라일런트/부희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4.18.)

《내 안에 나무》(코리나 루켄/김세실 옮김, 나는별, 2021.4.7.)

《마사이족의 영혼》(로라 버클리/송호빈 옮김, 주니어북스, 2010.5.1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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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1.11.17.

헌책집 언저리 : 가회동과 배용준·대장금



  나라 곳곳이 구경터(관광지)로 바뀌기 앞서 마을책집은 마을빛을 건사하면서 아늑한 쉼터였습니다. 온나라 오래집이 구경터로 바뀌면서 오랜 마을책집은 구경꾼 발걸음에 빛을 잃다가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곤 했습니다. 서울 가회동에 중앙고등학교가 있고, 배움터 어귀에 조그맣게 오랜 헌책집 〈합서점〉이 있었습니다. 책집지기이던 아저씨가 일찍 저승길로 가면서 새 헌책을 들이기 어려워 조금씩 기운 살림이었지만, 조용조용 골목길을 비질하면서 정갈하게 돌보았어요. “우리는 이제 책집이라 하기에도 부끄러워요. 그래도 이곳이 우리 살림집이니까 예전부터 하던 대로 집 앞도 가게 앞도 쓸고, 쓸다 보면 학교 앞도 쓸고, 옆가게 앞도 쓸고 그래요.” 500살이 넘는다는 은행나무는 책집하고 바로 붙어서 자라고 그늘을 드리우고 잎을 날립니다. 둘은 떼놓을 수 없는 사이입니다. 배움터 어귀 책집도 매한가지예요. 책집하고 마주보는 글붓집(문방구)도 그렇습니다. 모두 수수하게 배움이(학생)를 마주하며 지냈습니다. 이러다가 ‘겨울연가’가 갑자기 확 뜨면서 글붓집은 ‘배용준 얼굴그림’을 큼지막하게 내놓고 일본 손님한테 팝니다. ‘대장금’하고 얽혀 ‘이영애 얼굴그림’도 나란히 내걸어 일본 손님한테 팔고요.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 이 몸으로 나아갈 즐거울 길을 찾아나서기 어려울까요? 가회동과 중앙고등학교와 마을책집은 제 빛을 잃고서 ‘배용준·이영애’판으로 범벅을 해야 할까요. 가회동 작은 마을헌책집 〈합서점〉에 들러 아주머니를 뵌 어느 날 “나는 아무리 부끄러워도 헌책을 놓고 싶은데, 젊은 예술가들이 와서 자리를 빌려 달라고 빌어. 하도 빌어서 어떻게 해. 책을 치우고 그 사람들이 가지고 온 그릇을 놓았지. 그런데 그런 그릇은 다른 가게에도 많으니, 여기까지 오는 일본 손님한테 우리나라 책을 보여주어도 좋을 텐데…….” 이제 가회동 〈합서점〉은 그곳에 없습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주워 책갈피로 삼을 책집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햇빛은 그대로이고 바람도 그대로이지만.


ㅅㄴㄹ


* 사진 : 서울 합서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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