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겨울이란 (2021.2.28.)
― 부산 〈주책공사〉
달종이가 2월에서 3월로 가기에 겨울이 저물지 않습니다. 달종이가 11월에서 12월로 가더라도 겨울로 접어들지 않습니다. 철은 바람을 따라서 흐르고, 철빛은 들꽃하고 나뭇잎 사이로 퍼집니다. 사람들이 보금자리에 마당이 있다면, 손수 돌보는 나무하고 풀꽃을 마주하면서 철을 읽어요. 사람들이 마당이 없이 켜켜이 쌓은 똑같은 잿빛집에서 지낸다면, 마루에 꽃그릇을 잔뜩 놓더라도 철을 읽지 못합니다.
철은 바람빛으로 스밉니다. 철바람은 풀잎에 깃듭니다. 풀빛은 철마다 다르게 물듭니다. 빛살은 언제나 새롭게 우리한테 찾아듭니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저마다 다르게 살림집을 짓고서 아이를 낳아 돌보던 무렵에는 달종이도 때바늘(시계)도 없이 하루를 읽고 철을 알았어요. 사람들이 시골을 버리고 서울·큰고장에서 돈을 벌기로 하면서 달종이를 보고 ‘모든 다른 날’을 ‘모두 똑같은 셈(숫자)’으로 짜맞추어서 움직이는 틀에 스스로 사로잡혔습니다.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스스로 날·하루·때·철을 읽던 지난날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뛰놀면서 날씨를 알았고, 철을 읽었으며, 때를 가누고, 하루를 누렸어요.
문득 부산으로 건너와서 하룻밤을 보냈고, 고흥으로 돌아가기 앞서 〈주책공사〉를 들릅니다. 날마다 책으로 새롭게 살림을 지피는 이곳은 ‘부산으로 치면 옛골목’이라지만 ‘시골로 치면 복닥골목’입니다. 거리마다 줄줄이 가게가 잇닿고, 길에는 부릉부릉 끊이지 않으며, 오가는 걸음이 부산스럽습니다.
책집 앞에서 겨울햇살을 느끼고서 조용히 들어섭니다. 책집 미닫이를 열고 들어서면 새누리로 한 발짝 옮긴다고 느낍니다. 책이 있기에 새누리로 가기도 하지만, 책을 쓰다듬는 손길이 있어서 새누리로 갑니다. 책을 잇는 손빛을 헤아리면서 새누리로 성큼 나아갑니다.
오늘 〈주책공사〉로 찾아가자고 생각하면서 새벽에 ‘바람’이란 이름을 붙여 노래꽃을 한 자락 지었습니다. “모든 틈에 흐르는 / 모든 들에 퍼지는 / 바람 한 줄기는 / 숨을 살리네”로 첫머리를 엽니다. 들에는 들바람이 있고, 숲에는 숲바람이 있고, 책집에는 책집바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한테 흐르는 피 한 방울은 하늘바람을 먹고서 싱그럽습니다. 모든 책에 서리는 이야기 한 자락은 눈빛을 먹고서 새롭습니다. 모든 길에 마주치는 이웃살림이며 이웃마을은 노래를 먹고서 즐겁습니다.
겨울에 겹겹으로 꿈을 그립니다. 봄을 떠올리며 거듭거듭 꿈을 품습니다. 얼어붙는 겨울이기에 눈을 꾹꾹 뭉쳐 눈놀이를 하고 눈사람을 굴려요. 겨울이기에 새하얗게 눈망울을 밝히며 눈빛을 듬뿍 머금습니다.
ㅅㄴㄹ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박홍규·박지원, 싸이드웨이, 2019.12.5.)
《행운분식 연중무휴 24시》(이은주, 인디펍, 2020.4.2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곁책》,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