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나무가 자랄 틈 (2024.5.11.)

― 부산 〈책방 감〉



  나무가 없으면 새가 없습니다. 매캐하고 시끄러운 큰고장이어도 잿빛(시멘트)하고 까망(아스팔트)으로만 덮으면 모든 사람이 숨막힙니다. 아무리 들숲과 논밭을 밀어내어 잿더미(아파트)를 죽죽 올리더라도 시늉으로 나무를 심습니다. 새마을(신도시)이 열 해나 스무 해를 지나면, ‘시늉박이 나무’도 어느 만큼 줄기가 굵어요. 서른 해나 마흔 해를 넘기면, 바야흐로 ‘마을나무’로 거듭납니다.


  책집을 들르려고 ‘부산교대나루’로 곧잘 오갔으나, 이 둘레에 열린배움터가 있다고는 느끼지 않았어요. 오직 책집만 바라보았거든요. 〈책방 감〉을 찾아가면서 둘러보니 부산교대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책집 바로 건너가 부산교대로군요.


  배움터를 드나드는 사람은 책집이 곁에 있는 줄 알까요, 모를까요? 모든 책은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오고, 우리가 마시는 물도 멧숲에서 샘솟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집도, 우리가 입는 옷도, 멧숲이 있기에 비로소 누립니다.


  종이꾸러미만 펼 적에는 배움길하고 멉니다. 종이를 마련하기까지 어떤 길을 거치는지 헤아리고 살피고 가눌 적에 배움길이지 싶습니다. 종이에 적힌 글씨만 읽거나 외운들 배움길하고 멀지요. 붓 한 자루를 묶기까지 어떤 살림을 짓는지 돌아보고 짚고 가꿀 적에 배움길이라고 느낍니다.


  수박 이야기를 그리고 싶으면, 가게 시렁에 놓인 수박만 쳐다보지 말고, 수박이 자라나면서 맞이하는 해바람비를 들판에서 함께 품을 노릇입니다. 어린이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어린배움터 둘레에서 그치지 말고, 어린이가 신나게 누리면서 일굴 아름누리와 들숲바다를 같이 품을 노릇입니다.


  늦봄 한낮을 〈책방 감〉에서 보냅니다. 다 다른 목소리가 다다를 곳이 가만가만 고즈넉이 숲빛이기를 바라면서 여러 책을 읽습니다. 이렁저렁 한 꾸러미를 살피고서 다시 부산교대로 들어갑니다. 커다란 나무 곁에 걸상이 있습니다. 걸상에 앉아서 눈을 감습니다. 돈(경제적 이익)보다는 마음(문화적 이익)을 헤아리고 싶기에, 품과 길삯(차비)을 들여서 마을책집으로 사뿐히 찾아가서 깃듭니다. 누구나 돈보다 살림을 그리면서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뜻이라면 살림책을 손에 쥐겠지요.


  배우는 사람은 나이가 안 듭니다. 배우기에 철이 듭니다. 안 배우기에 나이가 듭니다. 안 배우니 철이 안 듭니다. 나이듦이란 늙음이요, 늙음이란 죽음길이요, 죽음길이란 스스로 판 수렁입니다. 철듦이란 어짊이요, 어짊이란 어른길이요, 어른길이란 얼이 차오르면서 스스로 빛나는 사랑입니다.


  나무가 자랄 틈이 있어야 숲입니다. 아이가 자랄 틈을 열어야 마을입니다.


ㅅㄴㄹ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16.1.18.)

《자연에 이름 붙이기》(캐럴 계속 윤/정지인 옮김, 윌북, 2023.10.11.첫/2023.11.20.3벌)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김도환, 책세상, 2012.3.25.첫/2013.6.30.))

《사랑을 찾기 위하여》(박주관, 학민사, 1989.8.30.)

《김종란의 시와 산문》(김종란, 드림, 2009.12.15.)

《익살꾼 성자 나스룻딘》(이드리스 샤아 엮음/이아무개 옮김, 드림, 2010.10.1.)

《북아뜨리에 20 알베르 까뮈》(쟝 그르니에/이재형 옮김, 고려원, 1987.12.15.)

《형자와 그 옆사람》(김채원, 창, 1993.12.17.)

《오늘도 핸드메이드! 2》(소영, 비아북, 2017.11.1.)

《天皇과 免罪符》(김문숙, 지평, 1994.11.20.)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이상업, 소명출판, 2016.11.20.)

《왕자와 거지》(마크 트웨인/이희재 옮김, 시공주니어, 2002.4.15.첫/2014.4.5.40벌)

《그 책은》(요시타케 신스케·마타요시 나오키/양지연 옮김, 김영사, 2023.6.2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바다빗질 (2024.3.29.)

― 서울 〈씨도씨〉



  14:40 시외버스로 고흥으로 돌아가기 앞서 어느 마을책집을 들를까 하고 어림하다가 ‘바다빗질’ 보임꽃(전시회)을 펴는 〈갤러리 사진적〉과 〈문화온도 씨도씨〉가 나란히 있는 서울 광진으로 갑니다. ‘바다빗질’은 2020∼21년 무렵에 여러모로 헤아리면서 지은 낱말입니다. 영어 ‘비치코밍’이나 한자말 ‘해변청소(해변정화)’보다는,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만한 우리말이 있어야겠다고 여겼어요.


  우리말은 여러모로 즐겁고 재미나면서 새롭게 쓸 수 있습니다. 바다를 빗으로 살살 쓸기에 ‘바다빗질’이요, ‘바다쓸기’입니다. 바다에 밀려드는 쓰레기를 치울 적에는 ‘바다치움’입니다. ‘바닷가빗질·바닷가쓸기·바닷가치움’처럼 쓸 수 있고, ‘바다빛질’처럼 살짝 달리 써도 어울립니다. 바다를 빗질을 하면 어느새 반짝반짝 빛날 테니, “빛이 나도록 손길을 보낸다”는 뜻으로 ‘바다빛질·바다빛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어린이쉼터가 곁에 있는 ‘능동’ 안골목에 〈갤러리 사진적 + 식당 사사로운〉이 함께 있고, 디딤돌을 따라 윗칸으로 가면 〈문화온도 씨도씨〉가 있습니다. 서울이기에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일구는구나 싶습니다. 고흥처럼 작은 시골에서도 이렇게 여러 살림터가 오순도순 이웃하는 터전이 자라난다면 아름답겠지요.


  시골이 시골인 까닭은, 싱그럽게 흐르는 냇물이 있는 곁으로, 멧골이 숲을 품으면서 아늑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이 서울인 뜻은, 서로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하면서, 너른 벌판에 새길을 벌이면서 즐겁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모이거나 모으는 자리는 이제 걷어낼 때라고 느낍니다. 더 작게 조용히 모이고 만나는 자리로 바꿀 때라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뽑기(선거)를 앞두고서 목소리를 내려는 이들은 ‘쉰 사람 넘게 모이는 자리’를 열지 않도록 틀을 잡을 노릇입니다. ‘구름떼(대중 동원)’는 사라져야 합니다. 우두머리 혼자 떠드는 구름떼가 아니라, ‘사람들 목소리를 하나하나 듣고 나누는’ 자리로 바꿔야지요.


  지킴이(경호원)는 한 사람만 두면 됩니다. 일할 사람이 일터에서 비질과 걸레질도 하고, 밥도 차리고 설거지도 하고, 몸소 걸어다니며 마을이웃을 마주하는 나라로 바꾸어야, 어느 쪽(정당)이 일꾼으로 서도 제자리를 잡으리라 봅니다.


  〈씨도씨〉 지기님이 읽고 나누는 그림책을 돌아보다가, 〈씨도씨〉 지기님이 여민 그림책을 살피다가, 시외버스를 타야 할 때에 맞추어 일어납니다. 쓰거나 그리거나 짓거나 엮거나 나누는 사람은 언제나 온힘을 다합니다. 다 꺼내어 빈털터리가 되도록 땀흘립니다. 모두 쏟아내면 새롭게 채울 이야기가 신나게 샘솟습니다.


ㅅㄴㄹ


《할머니 체조대회》(이제경, 문화온도 씨도씨, 2023.8.12.첫/2023.12.22.2벌)

《장거리전화》(셰리 도밍고/추영롱 옮김, 문화온도 씨도씨, 2023.11.22.)

#Ferngesprach #ShereeDomingo

《함마드와 올리브 할아버지》(한지혜·정이채, 문화온도 씨도씨, 2022.12.25.)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99년 1월 2일에 쓴 글을

문득 돌아본다.

새벽에 신문배달을 마치고서 쓴 글일 테지.

아스라한 지난날이로구나.


..


숲노래 책빛 / 숲노래 책읽기

1999.1.2. 길그림에 없는 책집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2년에 헌책집을 찾으러 서울로도 가 볼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인천에서 늘 드나들던 배다리 헌책집에서 여러 어른한테 여쭈니, 서울에는 인사동이나 청계천이나 서울역 둘레에 헌책집이 참 많다고 알려준다. 큰책집에 가서 두툼한 길그림책을 들추었다. 그런데 아무리 커다란 길그림책이어도 인사동이건 청계천이건 서울역 언저리에 있다는 책집을 찾을 길이 없다. 〈종로서적〉이나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처럼 커다랗다는 책집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고 보면, 인천 길그림에는 〈대한서림〉조차 없다. 백화점이나 큰가게나 병원이나 은행은 길그림에 잘 나온다만, 책집을 길그림에 담은 적은 없지 싶다. (1992년과 1999년뿐 아니라 2024년에도 매한가지이다. 따로 ‘책집 길그림’을 낼 적에는 담되, 여느 길그림에는 책집을 안 적어 놓는 우리나라이다)


  서울이나 부산은 땅밑을 다니는 전철길이 거미줄 같다. 전철을 타고내리는 곳에는 으레 커다랗게 길그림을 걸어 놓는데, 전철나루 길그림에 책집을 그려 놓은 모습을 본 적도 없다.


  굳이 책집을 길그림에 넣느냐 안 넣느냐 하고 따질 마음은 아니다. “책집을 길그림에 넣을 줄 아는 나라와 고장과 마을”이라면, 이 나라와 고장과 마을은 아름답고 알차다고 느낀다. 먹고 마시고 노는 밥집과 술집과 옷집만 길그림에 빼곡하게 담는 나라와 고장과 마을은, 안 아름답고 앞날이 새카맣다고 느낀다.


  나라에서는 으레 ‘문화사업’이나 ‘예술사업’을 한다고 떠들썩하다. ‘문화·예술’이란 무엇인가? 돈을 더 많이 들여야 ‘문화·예술’인가? 사람들이 더 많이 구경해야 ‘문화·예술’인가? 마을에서 마을사람이 스스로 조촐히 삶을 새기고 살림을 가꾸고 사랑을 나누도록 이바지하는 마을책집 이야기를 돌아볼 줄 아는 마음에서 ‘문화·예술’이라는 새싹이 돋을 수 있지 않을까?


  이리하여 나는 스스로 ‘책집그림(책집지도)’을 그린다. 나라에서 안 그린다고 나라를 탓하지 말자. 인천이나 부산이나 서울 같은 큰고장이 책집그림에 아무 뜻이 없다고 나무라지 말자. 벼슬꾼(국회의원·공무원)이 책집그림에 팔짱을 끼든 말든 그들을 쳐다보지 말자. 내가 오늘 다니는 책집을 스스로 눈여겨보면서, 두 다리로 뚜벅뚜벅 길이를 재서 흰종이에 차근차근 길을 담아 보자. 책집을 둘러싼 마을은 골목이 어떠한지 모두 두 다리로 누벼 보고서 천천히 길그림을 여미자.


  내가 하면 된다. 내가 읽으면 되고, 내가 새기면 되고, 내가 느끼면 되고, 내가 하면 된다. 내가 그리면 된다. 책마을 언저리를 스스로 그리고, 책숲마실을 그리고, 책집마실을 함께할 동무하고 이웃을 그리면 된다.


  전화번호부에조차 책집이름이 안 오르기 일쑤이니, 책집을 찾아다닐 적마다 책집 전화번호하고 주소도 챙기자. 책집 둘레로 지나가는 버스를 살피고, 어디에서 어떤 버스나 전철을 내려서 몇 걸음(미터)을 가면 책집을 만날 수 있는지 하나하나 짚으면서 책집그림을 선보이자. 내가 꾸리는 책집그림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누리집(피시통신)에 모두 올려놓자.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년 9월에 아기를 돌보면서 쪽틈을 내어

겨우 남겨 놓은 글을

2024년 6월에 새삼스레 돌아본다.

이렇게 재미난 글을 써놓은 적이 있네.

혼자 웃으면서 되읽었다.


..


숲노래 책빛 / 숲노래 책읽기

2008.9.11. 신변잡기



  틈틈이 써 놓은 글을 띄우는 누리새뜸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일하는 아무개 씨가 무어라 무어라 한다. 내가 쓴 글에 ‘기저귀 빨래’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데, 기저귀를 빨래하는 이야기를 담는 글은 ‘독자를 배려하는 글쓰기가 아니라’고 톡톡 자른다. 그래서 앞으로는 ‘아버지 육아일기’를 안 받겠다고 확확 자른다.


  가만히 이 말을 듣는다. 대꾸할 값어치를 못 느껴서 대꾸를 안 하기로 했다. 야구 경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늘 야구 이야기를 쓰겠지. 정치꾼을 취재하는 사람이라면 늘 똑같은 정치꾼 말과 몸짓을 쓰겠지.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늘 손빨래에 밥살림에 집살림 이야기를 쓰겠지. 책숲(도서관) 일꾼이라면 책숲살림을 꾸리는 하루를 늘 똑같이 쓰겠지.


  글감은 누구나 똑같게 마련이다. 똑같은 글감을 풀어내는 하루가 다르고, 똑같은 글감마다 다 다르게 흐르고 서리고 감도는 삶과 하루가 다 다르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는 “최종규 씨가 쓰는 글은 ‘신변잡기’입니다.” 하고 덧붙인다. 그래서 “네, 저는 늘 ‘신변잡기’만 쓸 텐데, 이제는 글을 띄우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하고 여쭌다. 〈오마이뉴스〉 편집부는 “아니요, 글을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고 도리도리한다.


  한자말 ‘신변잡기’란 무엇이겠는가? 온누리 어느 글이든 신변잡기이다. 왜냐하면, 스포츠이든 정치이든 경제이든 문화이든, 모두 ‘우리 둘레(신변)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잡기)’이다. 더 커다란 일이 없고, 더 작은 일이 없다. 그저 우리 둘레에서 겪고 스치고 마주하는 일을 적을 뿐이다.


  그러면 나는 왜 굳이 ‘기저귀 빨래’를 글로 옮기는지 돌아볼 노릇이다. ‘기저귀 빨래’를 글로 옮기더라도 몇 해 못 쓴다. 아기가 똥오줌을 가리는 나이부터는 ‘기저귀 빨래’ 이야기를 더 쓰고 싶어도 못 쓴다. ‘기저귀 빨래’ 이야기는 아기를 돌보면서 날마다 끝없이 ‘기저귀 빨래’를 하는 사람이 바로 아주 짧은 한때에만 쓸 수 있다.


  나는 빨래틀(세탁기)을 안 쓴다. 1995년에 우리 어버이가 살던 집을 박차고 나온 날부터 2008년 여름까지 늘 손으로 빨래를 한다. 앞으로도 손빨래를 할 생각이고, 빨래틀을 들일 마음조차 없다. 나처럼 빨래틀을 안 들이고서 손으로만 조물조물 주무르거나 삶아서 햇볕에 말리는 이웃이 더러 있다. 다만 요새는 아주 드물다. 나는 쇳덩이(자가용)를 몰지 않는다. 종이(운전면허증)조차 안 땄다. 걸어다니거나 두바퀴(자전거)를 달린다.


  그러니 나는 손빨래를 하는 이야기를 쓰고, 걸어다니는 이야기를 쓰고, 두바퀴로 짐을 실어나르는 이야기를 쓴다. 손빨래를 하는 동안, 그리 멀잖은 지난날까지 온누리 모든 어머니가 모든 집안일을 도맡으면서 살림하던 일을 떠올린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기저귀 빨래’ 이야기에는 숱한 어머니가 겪고 마주해야 하던 ‘살림살이’ 이야기가 저절로 깃든다. 기저귀 한 자락을 삶고 헹구고 말리고 다림질까지 하면서 여러 집안일을 도맡는 하루에서 무엇을 배우고 아이한테 무엇을 물려주는 살림을 짓는가 하는 줄거리를 늘 다르게 풀어낸다. 기저귀가 마르는 마당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을 살피면서, 저절로 하늘 이야기하고 바람 이야기를 쓴다. 비가 오는 날이면 기저귀가 잘 안 마르니, 비내음 이야기를 쓴다. 얼핏 보면 늘 똑같이 ‘기저귀 빨래’라는 글감이되, 모든 줄거리와 이야기는 늘 다르다.


  나는 예전에 신문배달을 하면서 살 적에는 늘 신문배달 이야기를 썼다. 군대에서 썩는 동안에는 몰래몰래 군대 이야기를 써서 모았다. 출판사에서 일할 적에는 책마을 뒷모습 이야기를 썼다. 두바퀴로 온나라를 굽이굽이 나들이를 할 적에는 자전거 이야기를 썼다. 책숲마실을 다닐 적에는 책숲마실 이야기를 꼬박꼬박 남긴다. 낱말책을 여미는 일을 하면서, 말과 삶과 넋이 얽힌 실타래와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이야기를 적는다.


  기저귀 빨래는 날마다 하면서 즐겁다. 날마다 새롭게 하는 빨래요, 하루에도 끝없이 새삼스러이 맡는 빨래이다. 기저귀 빨래는 하늘이 내려준 빛이요, 보람이라고 느낀다. 온누리 모든 빨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면서 옹근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기저귀 빨래이지 싶다.


  조금 앞서, 아기가 내 허벅지에 앉아서 놀다가 오줌을 누었다. 왕창 누었다. 바지가 옴팡 젖었다. 그런데 내 옷부터 갈아입지는 못 한다. 아기 옷부터 갈아입히고, 이불을 걷어내어 새로 깔고, 바닥을 훔치고, 이러는 동안 아기 옆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시원하게 쉬를 눈 아기한테 “잘 했구나, 잘 했어. 오줌 누니 시원하지? 시원하니까 또 웃고 놀면서 자라렴!” 하고 이야기한다. 오줌이 흥건한 기저귀와 이불을 빨래하는 곁에 아기를 누이고서 활짝 웃는 낯으로 손빨래를 새로 한다. 이러면서 노래를 끝없이 이어서 부른다.


  나는 우리 아이가 언젠가 기저귀를 뗄 날까지 기저귀 빨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몇 해 동안 바지런히 남길 이 이야기는 먼먼 뒷날,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스무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될 무렵, 아이한테 물려줄 즐거운 살림글로 피어나리라 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책빛 / 숲노래 책읽기

2008.8.29. 내 글쓰기



  마음에서 살아숨쉬는 이야기로 서지 않는다면 붓을 들거나 셈틀 글판을 두들길 수 없다. 머리에 환하게 그린 듯이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로 먼저 곰삭여 내지 않았다면 어떤 이야기도 써낼 수 없다. 찰칵찰칵 찍어 놓아야 쓰는 글이 아니다. 밑글로든 찰칵 담은 그림으로든, 아무것이 없더라도 가만히 헤아릴 수 있어야 비로소 쓰는 글이다. 종이보다는 마음에 담아야 쓰는 글이다. 두툼한 책뭉치를 잔뜩 쟁이지 않더라도, 온몸으로 살아낸 살림살이를 사랑으로 녹여내었으면 얼마든지 쓰는 글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