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에 아기를 돌보면서 쪽틈을 내어

겨우 남겨 놓은 글을

2024년 6월에 새삼스레 돌아본다.

이렇게 재미난 글을 써놓은 적이 있네.

혼자 웃으면서 되읽었다.


..


숲노래 책빛 / 숲노래 책읽기

2008.9.11. 신변잡기



  틈틈이 써 놓은 글을 띄우는 누리새뜸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 일하는 아무개 씨가 무어라 무어라 한다. 내가 쓴 글에 ‘기저귀 빨래’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데, 기저귀를 빨래하는 이야기를 담는 글은 ‘독자를 배려하는 글쓰기가 아니라’고 톡톡 자른다. 그래서 앞으로는 ‘아버지 육아일기’를 안 받겠다고 확확 자른다.


  가만히 이 말을 듣는다. 대꾸할 값어치를 못 느껴서 대꾸를 안 하기로 했다. 야구 경기를 쓰는 사람이라면 늘 야구 이야기를 쓰겠지. 정치꾼을 취재하는 사람이라면 늘 똑같은 정치꾼 말과 몸짓을 쓰겠지. 아기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면 늘 손빨래에 밥살림에 집살림 이야기를 쓰겠지. 책숲(도서관) 일꾼이라면 책숲살림을 꾸리는 하루를 늘 똑같이 쓰겠지.


  글감은 누구나 똑같게 마련이다. 똑같은 글감을 풀어내는 하루가 다르고, 똑같은 글감마다 다 다르게 흐르고 서리고 감도는 삶과 하루가 다 다르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는 “최종규 씨가 쓰는 글은 ‘신변잡기’입니다.” 하고 덧붙인다. 그래서 “네, 저는 늘 ‘신변잡기’만 쓸 텐데, 이제는 글을 띄우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하고 여쭌다. 〈오마이뉴스〉 편집부는 “아니요, 글을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고 도리도리한다.


  한자말 ‘신변잡기’란 무엇이겠는가? 온누리 어느 글이든 신변잡기이다. 왜냐하면, 스포츠이든 정치이든 경제이든 문화이든, 모두 ‘우리 둘레(신변)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잡기)’이다. 더 커다란 일이 없고, 더 작은 일이 없다. 그저 우리 둘레에서 겪고 스치고 마주하는 일을 적을 뿐이다.


  그러면 나는 왜 굳이 ‘기저귀 빨래’를 글로 옮기는지 돌아볼 노릇이다. ‘기저귀 빨래’를 글로 옮기더라도 몇 해 못 쓴다. 아기가 똥오줌을 가리는 나이부터는 ‘기저귀 빨래’ 이야기를 더 쓰고 싶어도 못 쓴다. ‘기저귀 빨래’ 이야기는 아기를 돌보면서 날마다 끝없이 ‘기저귀 빨래’를 하는 사람이 바로 아주 짧은 한때에만 쓸 수 있다.


  나는 빨래틀(세탁기)을 안 쓴다. 1995년에 우리 어버이가 살던 집을 박차고 나온 날부터 2008년 여름까지 늘 손으로 빨래를 한다. 앞으로도 손빨래를 할 생각이고, 빨래틀을 들일 마음조차 없다. 나처럼 빨래틀을 안 들이고서 손으로만 조물조물 주무르거나 삶아서 햇볕에 말리는 이웃이 더러 있다. 다만 요새는 아주 드물다. 나는 쇳덩이(자가용)를 몰지 않는다. 종이(운전면허증)조차 안 땄다. 걸어다니거나 두바퀴(자전거)를 달린다.


  그러니 나는 손빨래를 하는 이야기를 쓰고, 걸어다니는 이야기를 쓰고, 두바퀴로 짐을 실어나르는 이야기를 쓴다. 손빨래를 하는 동안, 그리 멀잖은 지난날까지 온누리 모든 어머니가 모든 집안일을 도맡으면서 살림하던 일을 떠올린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기저귀 빨래’ 이야기에는 숱한 어머니가 겪고 마주해야 하던 ‘살림살이’ 이야기가 저절로 깃든다. 기저귀 한 자락을 삶고 헹구고 말리고 다림질까지 하면서 여러 집안일을 도맡는 하루에서 무엇을 배우고 아이한테 무엇을 물려주는 살림을 짓는가 하는 줄거리를 늘 다르게 풀어낸다. 기저귀가 마르는 마당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을 살피면서, 저절로 하늘 이야기하고 바람 이야기를 쓴다. 비가 오는 날이면 기저귀가 잘 안 마르니, 비내음 이야기를 쓴다. 얼핏 보면 늘 똑같이 ‘기저귀 빨래’라는 글감이되, 모든 줄거리와 이야기는 늘 다르다.


  나는 예전에 신문배달을 하면서 살 적에는 늘 신문배달 이야기를 썼다. 군대에서 썩는 동안에는 몰래몰래 군대 이야기를 써서 모았다. 출판사에서 일할 적에는 책마을 뒷모습 이야기를 썼다. 두바퀴로 온나라를 굽이굽이 나들이를 할 적에는 자전거 이야기를 썼다. 책숲마실을 다닐 적에는 책숲마실 이야기를 꼬박꼬박 남긴다. 낱말책을 여미는 일을 하면서, 말과 삶과 넋이 얽힌 실타래와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이야기를 적는다.


  기저귀 빨래는 날마다 하면서 즐겁다. 날마다 새롭게 하는 빨래요, 하루에도 끝없이 새삼스러이 맡는 빨래이다. 기저귀 빨래는 하늘이 내려준 빛이요, 보람이라고 느낀다. 온누리 모든 빨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우면서 옹근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기저귀 빨래이지 싶다.


  조금 앞서, 아기가 내 허벅지에 앉아서 놀다가 오줌을 누었다. 왕창 누었다. 바지가 옴팡 젖었다. 그런데 내 옷부터 갈아입지는 못 한다. 아기 옷부터 갈아입히고, 이불을 걷어내어 새로 깔고, 바닥을 훔치고, 이러는 동안 아기 옆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시원하게 쉬를 눈 아기한테 “잘 했구나, 잘 했어. 오줌 누니 시원하지? 시원하니까 또 웃고 놀면서 자라렴!” 하고 이야기한다. 오줌이 흥건한 기저귀와 이불을 빨래하는 곁에 아기를 누이고서 활짝 웃는 낯으로 손빨래를 새로 한다. 이러면서 노래를 끝없이 이어서 부른다.


  나는 우리 아이가 언젠가 기저귀를 뗄 날까지 기저귀 빨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몇 해 동안 바지런히 남길 이 이야기는 먼먼 뒷날,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스무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될 무렵, 아이한테 물려줄 즐거운 살림글로 피어나리라 본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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